A Sound of Hammer

이수현/ Sooh Lee / 李秀賢 / photography

2023_0914 2023_0927 / ,공휴일 휴관

이수현_A Sound Of Hammer #02_70×46cm_2023

이수현 인스타그램_@soohleestudio

 

초대일시 / 2023_091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

(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www.kpgallery.co.krl

@kpgalleryseoul

 

KP Gallery에서 이수현 작가의 A Sound of Hammer전시가 2023914일부터 927일까지 개최됩니다. ● 『A Sound of Hammer전시는 개인의 무의식에 상재하는 '불안'과 이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그녀는 본인이 경험했던 '불안'을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의 감각으로 수용하고 이를 다른 관점의 ''의 의미로 연결하려 시도합니다. 이는 오늘날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일반적인 사회적 태도와 다른 접근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점점 더 불안의 내면으로 침식됨을 인지하지만 동시에 '불안'이 스스로에게 자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환경과 범위 안에서 삶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날 '불안'을 사회구성원들이 지닌 '나약함'으로 생각하는 모습들을 흔히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해져', '참아', '이겨내'와 같이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들이 점점 익숙해집니다. KP 갤러리는 A Sound of Hammer전시를 통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이해에 대해 질문하고 이수현 작가가 지닌 삶의 태도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KP 갤러리

 

이수현_A Sound Of Hammer #09_90×67cm_2023

'이따금 나의 머릿속을 두드리는 '망치'가 있는데, 나는 이것을 손에 쥐는 순간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는 나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잠재하는 '불안'을 의미하며 역설적으로 나의 시각적 선택에 있어 박동을 만드는 장치가 되어준다.' 나는 미디어 사회 속에서의 개인이 내면 상태의 불안정을 인지할 때, 스스로의 생각과,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미세한 불안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충돌의 심상을 보다 밝은 채도와 다양한 발색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들로 전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이수현_A Sound Of Hammer #14_120×93cm_2023

이번에 선정된 작품들 중 아날로그 재현 방식으로 묘사한 21세기 보디빌더, 놀이동산에서 인공빛으로 촬영한 추상 이미지들, 그리고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정물 사진들이 큰 주축을 이루고 있다. 나는 각각의 주제를 갖는 이러한 작업 내용들을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A sound of hammer'라는 청각적 은유를 바탕으로 개별이미지가 가진 조형적 특성에 더욱 시선을 맞추어 채택하였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나는 기존의 '불안'의 정서를 대하는 사회의 단편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역동성과 생의 감각으로 연결 짓는 시도를 하고자 하여, ' 나약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되려 그 자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의 행위들을 재탄생할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수현_A Sound Of Hammer #06_90×67cm_2023

작업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빛의 번짐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추상 이미지들은 오랫동안 내가 불면을 겪었던 시기에 촬영한 것이다. 밤을 지새우고,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아 오는 순간에 나의 감정과 모순적 의미를 내포하는 외부 환경을 찾아 그 안에서 다양한 순간을 채집하듯 이미지로 기록하였다. 나는 종교적 공간인 루앙대성당을 반복해서 따라가빛의 인상을 담은 모네의 행위와 그에 따라 파생된 '시뮬 라르크/ 시뮬라시옹' 의 개념을 차용하여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개인의 왜곡상태를 인공빛을 사용하여 연속 선상에서 재생산하고자 하였다.

 

이수현_A Sound Of Hammer #04_111×14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 #17_120×90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_20_120×111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 #12_90×67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 #01_50×37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 #13_90×67cm_2023
이수현_A Sound Of Hammer #11_37×50cm_2023

보디빌더의 작업은 영국에서 만난 보디빌딩 선수들을 각각 VHS와 필름으로 촬영해 현재 시제의 인물이 마치 과거의 지점에서 자신의 '''승리'를 기호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써 표현하고자 하였다. 과거 자본주의 시대의 노스텔지아를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지금 현재 인간의 힘이 가지는 상징성의 가치를 되묻는다. 이수현

 
 

박종호의 나목’ 그 황량함에 대하여...사진전이 

 96일부터 23일까지 충무로2가에 위치한 아주특별한사진교실에 초대 전시되고 있다.

 

 먼저 나목이란 제목 자체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나목으로 등단하기도 했지만, 신경림 시인의 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각예술로는 박수근화백의 나목에 이어 사진가 임응식선생의 대표작이 줄줄이 떠오른다.

벌거벗은 나무로 벌거벗은 인간을 말한 그 상징성이...

 

1983년 발행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 게재된 임응식선생의 '나목', 글은 고 이명동선생께서 쓰셨다 .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대 부산에서 촬영한 임응식선생의 나목은 포화에 불타버린 앙상한 가지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려는 당시 시대상황을 대변했지만, 박종호의 나목은 사진으로 쓴 시에 가깝다.

 

박종호는 작가노트에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며, 조용히 준비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그 봄을 말이다.

그 때가 오면 앙상했던 나목에는 푸르름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나목은 우리에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모진 겨울 한가운데 서서 그 시간을 인내하라고 한다.

그 속에 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채, 그 속에 생명을 간직한 채 말이다.

그렇게 나목은 찬란하게 빛날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다.

 

 박종호의 작업노트를 읽다보니,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이 나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두가 나목처럼 벌거벗은 존재로 오지 않던가?

 

 박종호의 사진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앙상한 나목을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이미지의 형상성이나 심미감에 앞서 작가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깔려있는 것이다.

 

아래 적힌 신경림시인의 나목시구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목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소외된 자들의 상징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은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인간의 간구일 수도 있겠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시는 9월 23일까지 열린다.

 

/ 조문호

 

박종호 나목그 황량함에 대하여...’

전시기간 202396-23(12:00-19:00, ,월 휴관)

서울 삼일대로(충무로2)414 신원빌딩 401

아주특별한사진교실’ 02-771-5302

 

 

 

Auspicious Snow

엄효용/ UMHYOYONG / 嚴孝鎔 / photography

2023_0907 2023_0924 / ,화요일 휴관

 

엄효용_20160301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초대일시 / 2023_090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화요일 휴관

 

고공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로 82 3

Tel. +0507.1358.3076

 

상서로운 눈과 그 눈에 덮인 세상 엄효용은 수직에 가까운 방향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려오는 눈을 찍었다. 사진 속에서 눈이 내려오고 있다. 아니, 작품을 벽에 세워 걸었으니 눈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까마득한 어둠으로부터 솟아 나온 빛의 입자들처럼 명멸하며 다가오는 눈송이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눈송이들은 캄캄한 삶에도 간혹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내어 보는 반짝이는 용기 같기도 하다. 때로 화면을 가득 메운 함박눈의 형상은 모든 애틋한 것들을 향한 그리움의 함성이다. 많은 이야기를 걸어오다가도 문득 고요하게 잦아드는 눈 이미지들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아름다움으로 조용하게 소란스럽다.

 

엄효용_20171124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엄효용_20171218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엄효용_20210107#1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엄효용_20210107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엄효용_20210302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160cm_2023

엄효용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기록한 눈송이들의 궤적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연상시킨다. 불규칙적이고 무계획적이며 우연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하얀 궤적들은 바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조리개가 열려 있는 동안 스트로브strobe를 여러 번 터트려 눈송이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엄효용은 현대 기술을 활용해 사진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 채 여러 장의 사진을 중첩시키던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여, 사진기가 지닌 기본 기능만으로 피사체를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회귀했다. 작가의 이런 행보는 본디 사진이 갖고 있던 고전적인 장점들을 작품 속에 되살려냈다. 대상을 선택하고 연속하는 시간에서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면 위에 붙들어 매는 사진은, 역설적이게도 사진 안에 포착되지 못한 사진 밖의 수많은 대상들과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진 안에 고정된 한 순간 앞뒤로 늘어서 있는 고정되지 않는 마음들, 사람들, 사건들에 대한 그리움과 낭만을 배가시킨다. 찰나에 머물러 있는 이미지는 내용상으로 제약 받을 수록 의미적으로는 더욱 확장된다. 관람자들은 상상 속에서 사진의 물리적 테두리를 벗어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내리는 밤의 시공간 안에 자신만의 기억과 이야기를 무한히 대입할 수 있다. 작가가 전통적인 사진술로 회귀하며 사진 속에 되살려 낸 것은 의미의 역설적 확장만이 아니다. 작가가 통제권을 사진에 양도함으로써 작품 안에 증대된 우연성은 그의 사진을 전보다 자연스럽고 창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사진기는 태생적으로 받아들이고 기록한다. 사진기가 피사체를 수용하기에 앞서, 대상을 선별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결정하는 작가의 선택이 있지만, 그것은 허락된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 선택이다. 사진은 작가가 수세적일 수록, 사진에 대한 작가의 권력이 약해질 수록 그 힘이 강해진다.

 

엄효용_삼방로 느티나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60×105cm_2018
엄효용_소양로버즘나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45×60cm_2018
엄효용_원미산 독일가문비나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20

엄효용의 개인전 Auspicious Snow는 한밤에 눈 내리는 소리와 겨울 숲의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번 전시는 눈을 주제로 한 신작들과 기존 작업 중에서 겨울나무 이미지들만 모아서 엮었다. 밤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눈밭 위에 서 있거나 눈으로 덮인 겨울나무들을 한 자리에서 보고 있으면, 밤 사이 내린 눈이 그렇게 나무들과 만난 듯하다. 작가의 겨울나무들은 기존 작업 중에서도 그 숨결이 유독 부드럽고 정적이다. 스스로 부차적인 것들을 다 털어 버리고 본질만을 남긴 나무의 메마른 형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너진 마음을 바로 세우게 하는 힘이 있다. 혹한 속에 홀로 서서 의연히 살아가는 겨울나무의 이미지는 뜻밖에도 관람자들의 마음에 추위가 아니라 따듯함을 건내준다. 겨울나무 이미지의 이러한 맥락은 신작 눈 연작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힘과 맞닿아 있다. 거대한 어둠을 이기는 눈송이들의 여린 목소리와 겨울나무의 낮고 평화로운 숨소리는 작품 앞에 선 이들의 와해된 마음을 넉넉히 일으켜 줄 수 있을 것이다. 훈기를 지닌 엄효용의 겨울 사진들은 외로움과 결핍이 아니라 삶의 소박한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황현승

 

엄효용_장성천길 소나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90×120cm_2023
엄효용_종합 휴양지로 메타세쿼이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8
엄효용_휴양지로 메타세쿼이어 겨울_종이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20
겨울이 오면눈이 내리길 기다린다.겨울 하늘에 어둠이 내리고눈, 바람, 빛이 만나면한 편의 교향곡에 맞추어눈의 춤사위가 펼쳐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중력을 가지는 모든 것은신비함을 품고 있으며그것을 숭배하는 마음으로오늘 하루를 채워간다. 엄효용

 

 

도케이 TOKEI

나카자토 카츠히토/ Katsuhito Nakazato / 中里和人 / photography

2023_0901 2023_0915 / 일요일 휴관

ⒸNakazato Katsuhito_TOKEI#0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초대일시 / 2023_09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요일 휴관

 

 

빈스서울 갤러리

Beansseoul gallery

서울 마포구 대흥로 108

Tel. +82.(0)2.706.7022

www.beansseoul.com

 

東亰 TOKEI 촬영 지역인 무코지마는 아사쿠사에 인접한 도쿄의 북동 지역으로, 현재는 도쿄 스카이 트리 마을로 유명해졌습니다. 지금도 무코지마에는 제2차 대전의 전재나 버블 경제의 시기를 스쳐 지나간 낡은 목조 주택, 연립 주택, 마을 공장 등 뒤엉킨 미로 같은 골목 경관이 기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복잡한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방향감각을 잃고 길 잃은 듯 거리를 헤매게 됩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도시에 서식하면서 만들어 온 경치의 고층이 퇴적되어 있고, 도쿄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혼돈스러운 도시의 원풍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도쿄에 있어 무코지마에는 휴먼 스케일로 만질 수 있는 부드러운 풍경이나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 넘쳐났습니다. 대도시에서 휴먼 스케일의 원풍경을 짙게 간직한 무코지마는 도시의 미를 예견하는 Soft City였습니다. 에도시대가 끝나고 147년 전 메이지를 맞이한 에도는 도쿄로 개명되었는데, 그 시기에 도쿄를 도케이(TOKEI)라고 불렀던 환상의 도쿄가 존재했습니다. 저는 메이지 시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던 도시 도쿄에 오래된 도시의 풍경을 느끼고 무코지마에서 그 환영을 보게 되었습니다.

 

ⒸNakazato Katsuhito_TOKEI#0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09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3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5×41.5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38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스미다강(隅田川), 아라카와(荒川), 구 나카가와(旧中川), 기타쥬마강(北十間川)에 낀 삼각지대. 도쿄 무코지마(東京向島). 이곳은 도쿄 공습을 면한 낡은 목조주택과 연립주택, 작은 마을 공장이 지금도 기적적으로 남아 아사쿠사(浅草)에도 가깝고 변두리의 향기도 짙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옛날 그대로의 변두리 정서를 넘어 낡은 도쿄의 윤곽, 환상의 도시 東亰를 무코지마(向島)에서 본 작품집. ● 『東亰』…에도에서 메이지로 바뀌어, 정부가 붙인 기호적인 호명 東京에 반발한 에도 토박이가 자에 가로 막대 하나를 더해 로 바꾸어 東亰라고 불렀지만, 메이지 초기에는 환상처럼 소멸해 버렸다. 나카자토 카츠히토

 

ⒸNakazato Katsuhito_TOKEI#4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4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撮影エリアである向島浅草隣接した東京北東エリアで現在では東京スカイツリーのとして有名になっています向島には第二次大戦戦災やバブル経済時期をすり"けた木造住宅長屋町工場などんだ迷路のような路地景観奇跡的っていますその複雑路地っていくとぐに方向感覚くし迷子のように彷徨ってしまいますここには都市棲息しながらしてきた景色古層堆積していて東京からえてしまった混沌とした都市原風景たわっていました機能的合理的東京にあって向島にはヒューマンスケールでれることのできるソフトな風景管理されない自由空間があふれていました大都市でヒューマンスケールの原風景色濃くとどめた向島都市-予見するSoft Cityだったのです江戸時代わり147年前明治えた江戸東京改名されたがその時期東京東亰(TOKEIんだ東京存在していました明治中途姿ませた,東亰都市風景向島にその幻影てしまいました。 ● 隅田川荒川旧中川北十間川まれた三角地帯東京向島ここは東京空襲戦災をまぬがれた木造住宅長屋さな町工場奇跡的浅草にも下町りも色濃くとどめているしかしそこにあるながらの下町情緒えて東京輪郭都市東亰向島作品集。 『東亰』…江戸から明治政府けた記号的呼名東京反発した江戸横棒一本足して、『東亰んだが明治初期にはのように消滅してしまった。 ■ 中里和人

 

ⒸNakazato Katsuhito_TOKEI#4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Nakazato Katsuhito_TOKEI#50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0×40cm_2000~6

The filming site, Mukozima, is located in the northeastern part of Tokyo near Asakusa. It is now famous for Tokyo Skytree Village. After escaping from the World War II disaster and bubble economy, Mukozima has a miraculous view of the maze of old wooden houses, row houses and village factories. ● And when you go into that complex alley, you lose your sense of direction right away, and you wander around the village like a lost child. This is an old layer of landscape that has been built by people living in cities. Here lies the scenery of the chaotic city that disappeared from the village of Tokyo. ● For Tokyo, which is functional and reasonable, Mukozima was awash with the gentle scenery and uncontrolled free space available at Human Scales. Muchojima, which left the human scale's original landscape in a big city, was Soft City, which foretells the future. ● 147 years ago, Edo was renamed Tokyo after the Edo era. At that time, there was a fantastic Tokyo called 東亰(TOKEI). I felt myself in the middle of Meiji, in the landscape of a brilliant city, Tokyo, and I saw that fantasy in Mukozima. ■ Katsuhito Nakazato

 

다큐멘터리 사진가 안해룡씨의 '도쿄, 조선인 대학살의 거리' 展이

지난 22일부터 오는 9월 3일까지 종로 청운동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아 그 기억을 소환하는 자리에는

조선인 학살 지도와 학살 관련 사진들이 여기저기 흙 속에 묻혀 있거나 전시장에 걸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쪽 벽에는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 학살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 속 붉게 물든 학살 공간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넓게 퍼져 있었다.

 

안해룡씨는 그 지도 위의 지점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니며

100년 전에 파묻힌 사건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어 낸 것이다.

 

우에노 공원, 고마쓰미야 동상 앞 파출소나 아사쿠사공원 부근의 파출소 등

증언과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명기된 지도의 장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기록했는데, ​

잿빛 사진들 속엔 위령비도 여럿 보였다.

 

도쿄 중심부를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을 중심으로 위치한 고층빌딩과 고가도로는

대지진의 상흔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없이 그날의 참상을 증언했다.

 

"빨갛게 된 영역은 이재민들이 거주하던 광장 같은 일종의 피난 지역이에요.

당시 도쿄의 44% 정도가 다 불탔다고 해요.

요코하마는 80% 이상이 다 이재민이 된 거고요.

강이나 모래에 돌아가신 분들의 넋이 있을 거잖아요.

자료 사진들을 가지고 그런 이미지를 구성해 본 거죠.

그래서 여기 향도 피우고 있고요."라며 안해룡씨가 말했다.

 

이번 작업은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일본 군대와 경찰이 적게는 재일조선인 6천 명에서 많게는 2만3천여 명을 학살한

제노사이드 간토대학살의 참상을 기억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는 첫 시작이다.

 

이 전시를 마련한 ​안해룡 감독은 긴 세월 일본을 드나들며 일제 만행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재일 위안부 재판을 조명한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만드는 등,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아픔과 삶을 지속적으로 조명했다.

​특히 지난 2019년과 2022년 두 번에 걸쳐 일본인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와 함께

남과 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기록한 전시로 주목받기도 했다.

 

안해룡씨는 ‘다이빙벨’로 널리 알려져 대개 다큐 영화감독으로 알지만, 사실은 사진가였다.

80년대 중반 무렵, 최민식선생을 내세워 창립한 일명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 창립 회원이었다.

그 당시 나의 '전농동588' 도록 디자인도 해 주었는데, 만지산 화재에 씨를 말려버렸다.

 

이번에 열리는 안해룡씨 전시는 진즉 알았으나,

정영신의 ‘혼자 가 본 장항선 장터길’ 전시와 겹쳐 개막식에 가 보지 못했다.

차일피일하다 지난 30일 정영신씨와 함께 전시장에 들렸는데,

마침 안해룡씨가 작업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애써 온 공력도 대단하지만, 설치한 작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장의 흙을 가져와 흙 속에 찍은 사진을 묻어 놓았는데,

마치 산화된 넋이 사진에 모인 듯,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처럼 비참하게 살육하여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그치지 않고,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여 전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환경 범죄에 앞서 큰 재앙을 저지른 일본의 눈치를 보며,

선두에서 합리화 시켜주고 지지하는 자가 우리나라 대통령 맞는가?

 

더 웃기는 것은 일본의 근본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우리나라 언론이 입을 닫았다.

국민이 알아야 할 사회적 이슈인 일본 간토대학살 전시에 꿀 먹은 벙어리다.

오로지 ‘오마이뉴스’의 하성태 시민기자가 쓴 기사만 나와 있었다.

새 방통위원장 등극에 지레 겁먹은 걸까?

그 지긋지긋한 군부정권의 언론탄압이 연상되어 소름 끼친다.

 

오는 9월2일 오후 3시부터 전시장에서 열리는

안해룡 작가와의 대담에 많은 분의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정영신씨의 작가와의 대담도 같은 시간대에 예정되었으나,

한 곳으로 힘을 모으기 위해 취소하였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김강(미술가)씨의 사회로 열리는 안해룡 작가와의 대담에는 이나바 마이(광운대부교수)도 참석한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 참석하지 못하거나, 이 전시에 공감하여 함께 하실 분들은 아래 계좌로 후원하면 된다.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관심과 정성을 모아 희생자를 위한 작은 진혼의 공간을 만든다고 한다.

[국민은행 001-01-1312-884 안해룡]

 

그리고 오는 10월 29일까지 용산구 청파동 소재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리는 '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기획전도 추천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 간토대학살 100주년 기획전은 '도쿄, 조선인 대학살의 거리' 展보다 더 많은 사료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100년 전 조선인 대학살의 비극을 의미 있고 생생하게 복원해 놓았다.

 

"위령비로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려 했지만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추모의 기록, 추모의 공간이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러다 만난 조선인 학살 지도. 생생한 증언과 기록이 관련 자료를 명기하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머리 속 상상 이상으로 가해의 묘사는 절절하고 처참했다.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이 자행한 잔혹한 조선인 학살의 역사는 도쿄의 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안해룡-

 

 

사진, 글 / 조문호

 

20회 사진비평상 수상작가

김현진_박동균 2

2023_0818 2023_0830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23_0818_금요일_05:00pm

후원 / 와이아트 갤러리_머그출판사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요일_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와이아트 갤러리

YART GALLERY

서울 중구 퇴계로27길 28 한영빌딩 B1 3호

Tel. +82.(0)2.579.6881

www.yartgallery.krblog.naver.com/gu5658@yart_gallery

 

 

보이지 않는 행위와 보이는 흔적 사이에서 ● 김현진은 사진을 중심에 두고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작업하고 있다. 따라서 사진이 그의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에, 이를 최근 전시를 통해 보여준 작품과 그 구성을 살펴보면서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Derailed being」연작은 얼굴이 가려진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 무표정한 얼굴로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자기 신체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불편하고 기이한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작가의 몸짓으로 만들어 낸 여러 자세를 모아놓은 이미지 위로는 단이 놓여 있다. 그 단 뒤로는 꺼져버린 횃불의 흔적이 설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글로리아 카터의 글과 날카로운 칼처럼 보이는 사물을 담은 사진도 전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치는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공간과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각각의 이미지와 오브제들은 서로에게 연결되는 다층적인 관계망을 만들어 내는데, 논리적이고 유기적이기보다는 모호하고 파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명확한 형상이 드러나는 이미지와 텍스트로 제시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공간에서 관객은 능동적인 태도로 이들 사이를 움직이며 그 내부를 파고들어 자기 경험과 감각을 통해 새로운 연결을 스스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전시 구성의 연극적인 요소는 하나의 의례적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례는 사회적, 개인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여 규격화된 의식을 위한 행동이다. 이렇게 이미 주어진 명확한 규칙에 따라 행동이 규제되는 의례는 우리 주변에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런 시공간은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참여자의 행위와 함께 의례를 치르기 위한 물질적 수단이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작가는 의례를 억압된 시공간이 아닌 공동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관계 맺음을 위한 소통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는 작업에서 이미 주어진 의미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기 위한 이미지를 찾아내어 새롭게 만들고자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자신이 감각을 경험하는 가장 근원적 도구인 자기 신체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김현진_죽음의 장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_16×16cm_2022
김현진_배신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_16×16cm_2022
김현진_젊음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아크릴_16×16cm_2022

좀 더 그의 작업을 살펴보자. 이후의 작업인 13권의 책연작은 이전 전시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와 언어적 표현과 이들의 관계 맺기에 대해 더욱 관심을 보인다. 여전히 등장하는 신체는 돋보기를 통해 보아야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이미지로 출력되어 벽과 바닥에 기호같이 배치된다. 벽에는 무제의 평면작업들이 배치되는데, 이는 작가의 의미 없는 자유로운 행위로 감각적으로 표현된 추상적인 표면으로 나타나며, 체인으로 장식되거나 묶여 있기도 하다. 이들은 구상과 추상, 크고 작음과 같이 서로 대비되는 관계로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모호한 관계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드러나는 작가의 관심은 신체의 움직임과 이를 통해 나타난 흔적과 관계 맺음이다. 이들은 명확한 물성을 가진 형태와 경계로 나타나지만,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느슨하고 흐릿하게 만드는 관계성을 통해 자유로움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설명 불가능한 것'을 이미지로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작업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언어적이고 비가시적인 것들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인식하고 이를 타인과 소통하여 공감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의 틀이 가진 편리함 이면에서 감추어진 오류와 소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어와 같은 명확한 규칙을 가진 일반론의 틀은 다수의 힘을 바탕으로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구분을 짓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범주에서 벗어난 것들은 이상한 것으로 간주하여 배척당하고 이에 따라 깊은 곳에 가라앉거나 그늘 뒤에 숨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의도하는 자신이 감각하고 느끼는 설명 불가능한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이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완결된 결말 같은 고정된 형태로 멈추지 않게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김현진_첫번째 세계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20×220cm_2023
김현진_0"0"0"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42×29.7cm×3_2021

이는 가장 최근 작업인 non-world, no-word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이 작품은 13권의 책연작에서 보여준 무제의 이미지를 데이터화해서 픽셀 조각들을 추출해 그 위에 덮음으로 어떤 형태의 흔적만 흐릿하게 남은 이미지로 만든다. 이러한 작업은 서로의 우위를 가르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누구든 서로를 덮어씌울 수 있는 수평적 관계에 기인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이미지를 또 다른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완결성을 상실한 것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작업은 하나의 개념적 도구로서 어떤 관점을 끌어낼 때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과 감각을 어떻게 계속해서 확장해 나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작업과 전시는 무한히 가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의 한계를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신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다층적으로 파생되는 이미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귀결된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의 것이 전환과 전이의 과정을 거쳐 완결되어 보이는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사이의 빈 곳을 통해 잠재된 감각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치 않게 발생시키는 의미조차도 무엇인가를 억압하는 고정된 경계로 나타날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 카메라가 가진 온전히 자신의 조작으로 통제하고 그 형상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기능은 이미지에 특정한 의미를 담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게 만드는 중립화된 도구가 된다. 이렇게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사진은 어떤 기준이나 표준이 작동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며,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이미지는 아무리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경험에 기반한 상황들이 보여주는 추상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 일시적 잔상과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현진의 작업은 자신이 경험하는 인식의 과정과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감각하는 것을 바탕으로 어떤 환경 안에서 이를 은신과 표출을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 태도는 온전한 하나에서 분리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전이되며, 이러한 과정이 다른 무엇으로 통합하고 이내 다시 분리되는 비선형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통해 항상 동일한 결과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환과 전환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삭제, 덧붙임과 같은 다양한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지우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관통하여 경계를 통과하여 다른 무엇과 연결하는 행위로 발생한다. 이와 같은 작업 방식은 사진을 어떤 감각적인 것을 표현하여 가시적인 의미를 생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으로 생산된 이미지의 명확한 형태를 통해 오히려 다층적으로 확장된 비가시적인 것들의 흔적을 쫓기 위한 감각적 단서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이미지가 구체적 언어로 인식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조차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초래하여 명확한 언어는 불명확해지고 다시 사진이라는 명백한 층위에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관계를 재설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완벽하게 지워지고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사진과 다른 매체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기존의 형상에 무엇인가를 덮어씌우거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새롭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작품의 이면 혹은 주변에 잠재된 것을 동시에 불러일으켜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침투하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한다. 결국 지금 그에게는 결과로써의 사진보다는 자신이 만드는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도구로서의 사진이 중요하다. 이것이 앞으로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가 마주하는 어떤 조건과 경험에 대한 응답으로 사진을 사용하면서 이를 무엇으로도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자신만의 시공간으로 어떻게 변모시켜 나가게 될지 기대되는 이유이다. 신승오

 

박동균_Helianthus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60cm_2022
박동균_Facial Recognition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5cm_2022

박동균의 제네릭 이미지, 예증과 오류 사이에서 이 글은 박동균 사진의 조형적 특징이나 그 기술적 완성도에 관해 논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박동균 "작업의 기저"를 구성하고 그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목적을 함축한" (작가 노트, 1. "내 작업의 기저에 자리 잡은 제네릭 이미지라는 개념은 제네릭 드러그의 정의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을 참조해 만들어진 일종의 기술적 용어로, 내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목적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제네릭 이미지(Generic Images)'라는 개념의 실현 가능성과 유효성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제네릭 이미지는 이미지의 한 형태 유형이 아닌, 이미지를 제작하고 이를 유통하는 작업 안팎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제네릭'이란 수식어는 박동균이 촬영을 위한 대상을 선택하고 제작, 유통하는 이미지 순환 체계 전반을 지탱하는 작용원리를 설명한다. 2017년 처음 구동을 시작해 이미지 실례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 메커니즘은 그의 말처럼 아직 완전하지 않다.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개념과 실험을 통한 예증의 과정이 혼재해 있다. 박동균과 필자는 글을 집필하기 전 그가 제네릭 이미지를 두고 탐색하는 지점과 필자가 감상자의 입장에서 발견한 작동 상의 오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결코 단숨에 완전해질 수 없는, 크고 작은 오차의 실례를 통해 보완이 필요한 개념임을 다시금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계속해서 예증과 오류의 사이를 오갈 이 개념이 작업의 동인이자 과정의 견인체로서 얼마나 견고하고 효과적인 제반 장치가 될 수 있는지 검토하는 작업은 꾸준히 필요하다.

 

박동균_Basic surgical instrument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5cm_2022

'제네릭'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동시대 사진환경 사진의 디지털화와 통신 기술의 발달은 사진 이미지를 정적인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사진의 움직임에 대한 인식은 매체를 다루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Duncan Woodbridge에 따르면, 동시대 사진에서 "이미지의 송출과 유통은 기본조건이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어떤 이미지든 그것을 가지고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건 '공유' 버튼을 누르는 일이다. 이 버튼은 이미지가 생성되는 즉시 세계로 전송되어야 함을 직간접적으로 피력한다."(Woodbridge D. (2021) From Magical to Experimental Thinking, OVER Journal (2), pp. 16-23.) 이처럼 동시대에 사진은 촬영 즉시 유통을 염두에 두는 환경에 처했다. 이미지는 더 이상 특정 실체를 지시하는 '고정된' 재현체가 아니라 촬영과 무관한 맥락까지 '뻗어나갈' 채비에 주력하는 잠재적인 트랜스포머다. 사진을 다루는 현대 작가들 또한 이와 같은 사진의 이동성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작업의 전략을 세우곤 한다. 온라인상에 속도감 있게 표류하는 이미지의 궤도에 편승하여 다분히 폭발적인 의미의 증식을 기대한다. Post-Photography를 저술한 Robert Shore는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며 사진의 이동성이 예술사진의 전략과 형태를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으로 변형시켜 왔는지를 예증한다.(Shore R. (2014) Post-Photography, The Artist with a Camera, London: Laurence King Publishing.) Shore에 따르면, "공유(Sharing)"는 디지털 시대에 키워드이고, "도용(appropriation)"은 사진 이미지 생산의 주된 전략이다. 이 시대에 사진 제작은 "창의적이고 변화무쌍한 차용행위".(위의 책, p7.) Shore의 동시대 사진에 대한 진단은 박동균이 제네릭 이미지를 통해 실천하고자 하는 예술사진의 범용, 호환과 맞닿아 있다. 박동균의 제네릭 이미지는 제작 단계부터 유통과 공유, 연결을 필연적인 단계로 염두에 둔 이미지다. 이미지가 가능한 한 많은 이들과 접합해 의미작용을 하고, 그렇게 생겨난 개인들의 사유 회로가 모여 포괄적인 정보와 관점을 담지한 이미지로 가공되는 것을 지향한다. 개별 사진은 특정 실체의 형상을 재현한 이미지임에도 아직 의미를 얻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음절인 동시에, 무엇이든 발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단위로 기능한다. 즉 박동균을 비롯한 익명의 누군가가 일련의 관찰, 유추, 탐색을 통해 직조한 내러티브의 재료로 쓰이길 기다리는 로우 데이터에 가깝다. 사진들은 해당 연작 안에서 한 가지 주제에 묶인 고정된 의미체가 아니라 연작을 넘나들며 다른 의미를 발현할 수 있는 가변적인 의미체다. 그것은 인터넷 하이퍼링크 활성화를 통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차용, 변용, 재맥락화하며 온라인상을 유영하는 현시대 사진 이미지의 용례와 똑 닮았다. 처음에는 특정한 촬영맥락 안에서 제작되었지만, 적극적으로 유통 보급되는 동안 작가의 말대로 '특수한 상태나 의미'가 희석되어 마치 '텅 빈 유닛'처럼 누구에게나 소구 가능한 범용의 이미지가 된다. 이처럼 제네릭 드러그에서 따온 '제네릭'한 이미지의 작동 메커니즘은 현시대 사진에 부가된 정의나 용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박동균의 제네릭 이미지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사진의 현 상황을 가장 직관적으로 적용한 예술사진의 사례로서 설득력을 갖는다.

 

박동균_Axis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60cm_2021

예술사진의 범용화, 이를 위해 고민해야 할 부분 한편 이 '텅 빈 유닛'을 재고해 보면, 박동균의 사진은 불특정다수와 상응, 호환을 지향하지만 결코 무엇이든 수렴할 수 있고 어느 쪽으로든 전이할 수 있는, 투명하게 비어있는 유닛은 아니다. 그가 의도하는 제네릭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를 함축한 일반 지표가 아닌, 주관적인 상호작용을 지향하는 이미지다. 특정 상황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담긴 이미지가 그 골자를 원자의 핵처럼 품고 그와 접점을 이룰 수 있는 누군가의 핵을 탐색하는 과정이 박동균 이미지의 유통과정이다. 그 이미지는 표면상으론 이미 기원과는 멀어진 평평하고 매끈한 형태를 띠지만 결코 제작의 맥락과 촬영자의 심상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고 이면의 두께를 담지한다. 오히려 그 두께는 유통과 상응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텅 빈'은 실제로 비어있기보다는, 서로 상이하되 호환 가능한 파편들이 한 유닛으로 모여 서로의 특질이 상쇄된, 그래서 투명해 보이는 비움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특수한 유닛의 모음이 박동균의 제네릭 이미지다. "제네릭 이미지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이미지의 객관성을 상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특수한 상태의 사물 또는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이미지의 '보급을 넓히고' 많은 감상자에게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작가 노트, 1. ''는 필자 강조.) 이와 같은 작가의 언급에서 '특수한' 상태를 재현한 이미지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감상자에게 '동일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이미지 범용의 특수한 상관관계를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하고 전략적으로 구조화할 필요가 있다. 주관적이고 특수한 상태가 범용의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통상적이지 않다. 또한, 제네릭 이미지의 재료가 되는 이미지 유닛의 창작 주체에 대한 물음도 제기할 수 있다. 박동균이 제작하여 자신의 사유와 감정이 삽입된 이미지가 범용화되는 것은 결국 일대다의 이미지 순환구조인데, 이미지의 기원이 '작가(혹은 박동균의 표현대로라면 이미지 프로듀서)'라는 1인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느냐는 점이다. 전문성을 지닌 특정인의 보급을 통해 다수에게 동일한 효과를 내는 제네릭 드러그 시스템이 보편적인 시각언어로서 현시대 사진 이미지의 순환 체계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현재 온라인상에 표류하며 다양한 경로로 의미를 덧입는 사진들은 그 제작자 또한 익명의 다수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박동균이 목표한 '제네릭 이미지의 구현'은 개인의 경험과 배경지식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사유 회로의 복잡한 증축의 과정이다. 상이한 배경의 개인과 개인이 만나 개별 이미지에 반응하는 다각적인 경험을 포괄할수록 그 구조는 더욱 몸을 부풀리고 유연해진다. 그렇다면 이 구현은 박동균 표 제네릭 이미지의 유닛이 그것과 상호 호환할 수 있는 무수한 대상을 찾아 헤매기보다 창작 단계부터 다른 이들의 개입이 이뤄지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더불어 작가의 사유와 감각을 익명의 대상에게 최대한 효과적으로 피력하고 호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작품 이미지의 시각적 형태뿐만 아니라 작품의 유통 방식, 즉 전시나 책이라는 서로 다른 경로로 소통하는 방법론적인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박동균_Sekonic Flash Master L-358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0×40cm_2016

제네릭 이미지의 구현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일 제네릭 이미지란 개념은 박동균의 사진 작업을 구체화하는 메커니즘이자 작업 자체다. 어떤 주제를 화두로 삼든 사진의 개별 사례들이 이 작동구조를 예증하는 실례들이다. 위에 언급한 여러 난제를 앞에 두고 박동균이 지금 해야 할 과제를 떠올린다면 그건 결코 '제너릭 이미지'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응시하고 앉아 답을 찾는 일은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시점에 그간 제작한 사진을 하나로 엮어 '제네릭 이미지'라는 하나의 거대한 상위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또한, 개별 사진과 연작이 작업의 작동구조이자 상위개념인 대상을 직접적인 주제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박동균에게 지금 필요한 작업은 이 개념을 잠시 한편에 두고, 그간 해왔던 것처럼 자신이 관심이 있는 사물을 이미지로 번역하며 개별 사례들을 증식해 나가는 일이다. 실례의 축척 가운데 예증과 오류가 지속되며 제네릭 이미지의 품과 구조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김선영

 

 

 

 

사할린 동포 2세인 이예식 새고려신문사진기자의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진전이 인사동의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78주년을 맞은 지난 15,

대통령 경축사 연설에 몸이 아파도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광복절에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감싸 도는 대통령 연설에 분을 삭일 수 없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은 순국 지사들이 지하에서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사할린섬으로 간 동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이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인덱스 를 찾아갔다.

 

일본은 1938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만 명의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 시켰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두고 온 자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저 언덕에 올라

바다를 향해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온 동네에 퍼져 이불 안에서 다들 울었다우.”

증언한 코르사코프 바자르 할머니의 증언이 떠 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이젠 대부분의 사할린 동포 1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사실이 묻혀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뒤늦게 알려진 사할린 학살사건 역시 그 실체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점차 역사를 증언해 줄 동포들도 사라지고 있다.

더구나 역사 왜곡도 모자라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이 판치는 세상이다.

 

전시를 보기 위해 힘겹게 전시장을 올라가니, 이미 작가와의 만남은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놈들 무서워 따라왔지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 왔던가

 

임규익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장이 부르는 사할린 아리랑이 전시장을 숙연케 만들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소련 시절부터 한민족 풍습을 지켜 온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예식 기자를 비롯하여 전시를 준비한 ‘Kin지구촌동포연대최상구 대표와 사진가 김지연씨,

 

권경석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김연갑 아리랑기념사업회,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기미양 국악신문 대표,

 

이규상 눈빛출판사대표,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정영신, 곽명우씨 등

70여 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작가 이예식씨는 1949년 사할린 마카롭시에서 출생하여,

1998년부터 지금까지 새고려신문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할린1세였던 부친의 애환을 바라보며 성장한 2세로서

꾸준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예식씨는 인사말에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먼 길로 우회하여 왔다는 말로

한국과 러시아 교류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진가 김지연씨는 시대를 증언하는 이미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 걸고 있다며,

광복절을 맞아 진정 해방이 되었는지 묻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예식 사진집 ' 귀환 ' / 25,000원 / 눈빛출판사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시장에는 이예식 사진집 귀환

김지연 사진집 사할린의 한인들도 판매되고 있었다.

 

김지연 사진집 ' 사할린의 한인들 ' / 25,000 원 / 눈빛출판사

201610, 눈빛출판사에서 동시에 출간한 사진집인데,

얼마 남지 않은 이 사진집 또한 매진되고 나면 사라질 자료집이 아니겠는가?

 

사할린의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함께하는 기억은 역사가 된다.

역사 만드는 길에 다 같이 동참해 주길 바란다.

 

전시장에서 내려와 모처럼 사진가 김문호, 정영신, 안해룡씨와 유목민에 들렸다.

몸이 아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리얼포토맴버들의 만남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 자리에서 며칠 남지 않은 안해룡씨 전시 소식도 들었다.

 

안해룡씨의 도쿄, 조선인 대 학살의 거리822일부터 93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린단다.

간토 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을 기억하고 지도 만드는 프로젝트에 많은 참여 바란다.

 

그리고 인사동 나무화랑에서는 양상용의 그림책 원화전

사할린 아리랑816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다들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는 전시다.

 

사진, / 조문호

 

굴뚝에 관한 보고서 2-산업유산 풍경

김인재/ KIMINJAE / 金仁在 / photography

2023_0801 2023_0815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

(충무로252-6번지) 고려빌딩 B1

Tel. +82.(0)2.2269.2613

gallerybresson.com

cafe.daum.net/gallerybresson

 

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 어떤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는 사회과학의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학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남기는 의미도 있지만,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고, 그 시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 작업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하였을까? 기록을 남긴 당시의 사회적 위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성장 과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글이 아닌 사진 이미지로 남겨졌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 의문은 사진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사진 이미지를 만들 때 사진가는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사진은 과학의 산물인데도 동영상과는 달리 그 맥락이 단절 혹은 소거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이 사이를 독자의 해석으로 메꿔야 한다. 결국, 사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진을 찍고, 독해하고, 감상하고, 전시하는 등의 여러 관련 행위의 중심에 인문학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닌, 기록 자체가 뭘 말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라는 하나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가? 그의 언어는 다변인가, 눌변인가, 웅변인가? 그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여지를 차단했는가? 사진은 모사에서 출발하지만, 재현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의성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림이나 글과 같이 창작의 가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느끼거나 읽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미술의 미학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재의 위치다. 그래서 사진은 여전히 미술에 대한 강박증을 앓는다. 그래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기준에 따라 한 장의 '' 찍은 사진 담론에 혹하는 것이고, 천편일률적으로 '빛이 좋은 시각''좋은 포인트'에 매달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사진은 소재가 다를 뿐이지, 그 재현된 것은 다분히 천편일률적이고, 독창성이라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는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그 작업 중에서 김인재는 시각의 연속과 단절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사건을 염두에 둔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김인재 작업의 소재인 '근대산업문화유산'은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란 이분법의 소산이다. 어떤 것이 문명이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 문명의 이면에는 야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게 보는 이의 시각이다. 김인재는 부지불식간에 이분법 혹은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과학적 혹은 진보적 시각에 관심을 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그 진보 담론에 비판적인지 우호적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문명과 문화유산의 변주에 관심이 많음을 알 뿐이다. 그 이분법에 따른 존재론적인 의미가 사진술과 닮았다. 정해진 프레임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지로 생성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존재 여부는 철저히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려 있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결국 배제되어 버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 결국 문명과 사진이란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이분법의 시각마저 벗어 던져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학문으로는 불가하다. 오로지 감성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감성이니 사진가들이 각자 보는 문명의 존재들을 한 곳에 묶어 놓고 보면 문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우와 열도 없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다.

 

김인재_예산 충남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인재, 춘천 육림연탄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그 시기의 공간이 재현된다.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지만 '굴뚝'이라는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의 표상으로서 '굴뚝'은 탁월하다. 그런데, '굴뚝'으로 단순화한 지표는 당시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여러 행위 속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는 못하게 한다. '굴뚝'이라는 지표가 너무 문화유산이라는 문명적 이미지가 강하고 그 굴뚝 주변의 여러 표상된 지표도 거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인재, 조치원 한림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이 담지 못하는 그 잡다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광주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목포 조선내화 벽돌공장, 문경 쌍용양회 공장, 서천 장항 제련소의 사택,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전곡공장, 예산 충남방직 공장, 오산 계성제지 공장, 의성 성광 성냥공장, 전주 쏘렉스 스폐공장, 조치원 한림제지 폐공장, 춘천 육림연탄 공장 ... 이미지에 달린 텍스트, 그 여러 고유명사가 이미지들 사이에서 단절된 역사의 기억을 메꿔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에는 텍스트가 들어가야 한다. 이 공장들이 지내온 영욕의 시간의 숫자도 기재해야 한다. 짧고 굵게. 그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그 '문명화'를 둘러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숫자로 된 캡션은 단지 역사적 기록성을 담보하는 것이라서 아니고, 그것이 얽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인재, 의성 성광성냥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기억이란,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여러 공장 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진 피사체들은 무슨 의미로 기억되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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