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오래된 사진은 아득한 기억의 저장고다.

반세기가 지난 삶의 기록들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볼수록 정겨움이 더하는 우리의 역사다.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아 쪽방 침대 밑에 쌓인 책을 정리했다. 7년 가까이 집어넣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았으니, 빈틈 없이 꽉 차 버린 것이다. 버릴 책과 옮길 책을 분류하다 2017년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에서 가져 온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보는 청계천도록을 찾은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하러 왔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찍은 청계천의 오래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노무라 모토유키 선교사가 찍은 청계천 등 두 분의 사진만 청계천의 중요한 사료로 남았다. 국내 사진가들은 집 구경 하듯 지나치며 찍은 사진들은 간혹 있으나, 청계천 빈민들의 삶에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두 분의 사진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분들이 대신했는데,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진가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살롱사진에 빠져 기록의 중요성을 방기한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것은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역사의 순간은 다시 찍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앞두고 열린 마지막 특별전 ’가까운 옛날의 자화상‘에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청계천 사진이 걸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 온 지 숱한 세월이 흘렀으나 여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진전이 열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의 역사보다 더 소중한 작품은 없다는 말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1964년 일본의 화보 잡지인 太陽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고 한다. 선생이 한국 현실에 가장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관여한 시점이 1965년이었는데, 한국을 찍은 사진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도 이 무렵에 집중적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라는 신념을 평생 구현한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일본의 중금속 공해 사건을 다룬 미나마타 병을 앓는 사람들을 찍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나, 그에게 사진가로서 결실을 맺은 것은 한국에 대한 기록이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계천 사진 외에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에서부터 우리가 방치한 한국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했는데, 사십여 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빈민들의 리얼한 삶이 담긴 현장이라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해지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이 찍힌 65년이라면 진학을 앞두고 서울에서 방황하던 시절이 아니던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청계천 밤길을 걷다 좁은 골목에서 혼이 난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낙에게 떠밀려 들어간 곳이 사창가였는데, 뺏긴 가방을 찾기 위해 시달린 순간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수구의 악취가 진동하는 청계천의 첫 대면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그 당시의 청계천 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록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청계천도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에 다름 아니었다. 사진에 담긴 장면에는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거나, 빨래를 너는 모습, 때로는 연탄재나 오물을 버리는 평범한 일상이 담겼다. 보면 볼수록 정겨운 장면인데, 마치 무대 세트장 같다.

 

당시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투숙한 곳이 남대문로 그랜드호텔이었다고 한다.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하는 곳에 있던 그 호텔은 청계천까지 걸어서 약 600미터 정도의 거리다. 명동이나 수하동을 거쳐 청계 2가 방향으로 걸었다는데, 낮에는 사람이 없어 이른 아침에 집중적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지저분한 청계천도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 였는데, 사진에는 복개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주는 물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세기 전 청계천 변 사람들의 꾸밈없는 일상이 담긴 이 사진들은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의 삶의 현장이자, 급변해 온 서울의 한 도시공간이다. 다시 한번 청계천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보석 같은 사진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눈 쌓인 언덕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그 아래 낮고 허술한 집들이 보인다(서울, 1980).

두 사진 모두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대표사진 선집 골목안 풍경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유족들이 보관해온 사진 중에서 새로 발굴한 것이다.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다(서울, 1973).

김기찬(1938-2005)은 ‘골목 사진가’로 불렸다. 1968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30여년에 걸쳐 중림동, 문래동, 행촌동, 행당동, 도화동 등 서울의 달동네를 다니며 골목 풍경을 찍었다. 서울역 뒤 산동네인 중림동을 특히 사랑했다.

그는 2003년 출간한 마지막 사진집 ‘골목안 풍경 30년’에서 골목을 테마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1960년대 말.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메고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를 오가며 삶에 지친 사람들을 찍다 흘러든 곳이 중림동 골목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의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내 평생의 테마다’라고 결정해 버렸다.”

김기찬은 생전에 ‘골목안 풍경’이란 제목의 연작 사진집을 6권까지 출간했다. 사후에는 그의 전작을 모아 만든 ‘골목안 풍경 전집’(2011년)이 제작돼 8쇄까지 찍었다. ‘격동기의 현장’ ‘윤미네 집’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사진집이 되었다.

김기찬의 사진은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서울의 골목 풍경과 도시 서민들의 생활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재개발로 살던 집과 동네를 잃어버린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옛 앨범이 되었고, 지금의 아파트 시대가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으로서도 가치를 갖는다.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 사진집 / 눈빛 / 312쪽 / 6만원

이번에 출간된 ‘골목안 풍경’은 김기찬 사후 18년 만에 발간되는 대표사진 선집이다. ‘골목안 풍경’ 1∼6권에서 사진을 고르고, 유족이 보관해온 필름 중에서 새로 골목 사진을 발굴해 100여장을 추가해 총 277장의 사진을 실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는 “김기찬의 사진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골목일기’라고 할 수 있다”면서 “사진집이 모두 절판된 이후 대중판으로 만든 ‘골목안 풍경 전집’ 외에 변변한 대표사진집 한 권이 없어 늘 아쉽고 송구스러웠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새로 공개되는 사진들은 작가의 부재로 정확한 촬영일자와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필름 파일에 적힌 생산일자를 따라 ‘서울, 1967-1970’ 식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록된 사진은 모두 흑백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풍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너무나 환하다. 아이들에게 골목은 놀이터였다. 어른들에게도 골목은 공유공간이자 사랑방이었다.

마지막 5부는 골목의 마지막 풍경을 스산하게 보여준다. 집들은 부서졌고 골목은 사라졌다. 건물 잔해 위에 집 한두 채, 사람 한두 명이 위태롭게 서있다. 그렇게 김기찬의 골목 사진 작업도 끝났다.

“1980년 중반부터 시작한 재개발 사업은 공덕동으로 번지고 공덕동에서 인왕산 밑 행촌동으로 건너뛰었다. 1997년, 결국은 중림동도 그 운명을 다했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곳에 살던 골목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

사진집 출간과 함께 서울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김기찬 사진전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4월 3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엄선한 골목 사진 30점을 선보인다.

국민일보 /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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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속 이미지] 기억나니?… 277장 추억이 방울방울


미공개 사진 100여장 포함
1968년~1990년대 풍경 담아

▲ 김기찬 작가가 카메라에 담은 골목의 풍경들. 1989년 8월 서울 아현동. 눈빛 제공

골목 한구석에 모이거나 길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천진난만함이 느껴진다. 아파트 빌딩 숲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옛 골목은 점점 준다. 구석진 골목은 위험해 보이고 배달 오토바이들이 쌩쌩 달려 골목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이 책에는 ‘골목 작가’로 불렸던 김기찬(1938~2005)의 미공개 사진 100여장을 포함해 1968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찍은 골목 풍경 사진 277장이 실려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라며 기억을 소환하게 하는 사진들이지만 카메라 프레임 속에 잡힌 어른들의 눈에서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내몰린 도시 주변부 서민의 슬픔이 읽힌다.

 

그래도 책장을 계속 넘길 수 있는 것은 힘겨운 일상을 살아 내는 서민들 모습 너머로 보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덕분이다.


책 출간과 함께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덱스’에서 다음달 3일까지 사진전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가 열린다고 하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신문 / 유용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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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컷] 선행학습이 없던 시절 아이들은

골목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

 

▲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의 풍경 / .서울 1970-1974.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꼬마들이 작은 칠판에 간단한 산수 문제를 적어놓고 퀴즈 풀이를 하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한다는 ‘선행 학습’이란 단어조차 없던 1974년 서울의 어느 골목안 풍경은 작고한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이다. 답을 안다고 손을 번쩍 든 아이들보다 몰라서 쑥쓰러워하는 아이들이 더 많지만 문제를 낸 아이의 표정은 즐겁다.

 

추억이 돋는 1970년대와 80년대 서울의 골목길 풍경들은 1968년부터 30여년 동안 서울의 골목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김기찬의 사진들이다. 사진가의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인덱스갤러리에서 열린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92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부서진 TV 상자 안에서 노는 아이들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온 것처럼 좋아하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어른 앞에서 아이는 시끄럽다며 귀를 막는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 서울 중림동 1982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등에 업은 동생이 힘들지도 않은지 누나는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고, 발목까지 눈이 쌓인 한 겨울날에도 집배원 아저씨는 기다리는 누군가의 편지를 배달하러 어느 곳이라도 찾아갔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중림동1976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정겹고 친근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표정들을 사진가는 어떻게 찍을 수 있었을까?

김기찬은 어느날 회사 선배로부터 ‘사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작은 카메라를 들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중구 중림동의 골목을 들어섰을 때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종로구 사직동 골목과 비슷해서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후 사진가는 틈나는 대로 골목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70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그도 처음엔 부끄러워서 주민들 앞에 카메라조차 꺼낼 수 없었지만, 매일 카메라를 메고 오는 사진가를 알던 골목에 살던 아이들과 주민들은 사진가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고, 김기찬은 그런 어린이들과 주민들의 평범한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김기찬은 언젠가 이 골목들도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73-1974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기자는 지난 2015년 겨울 국내 1세대 원로사진가였던 고 김한용 선생을 인터뷰 한적이 있다. 6.25 전쟁때는 종군사진기자였으며, 역대 대통령들과 기업인들을 촬영하고 한국 영화계의 스틸사진과 광고사진계를 개척했던 그는 기자에게 “하루 4시간씩 자면서 남보다 3배는 더 일했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사진가 김한용도 “나도 수십년 사진을 열심히 찍었지만 김기찬의 사진을 보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한 것들이 사진에서 보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81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조선일보 / 조인원기자

Return 歸

SPECIAL PORTFOLIO  01

神堂

SPECIAL PORTFOLIO  02

지난 13일은 정동지와 아산으로 봄나들이 갔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꼼짝하기 싫지만, 오래 전부터 한 약속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장터나 유적지로 떠나는 촬영 길이 아니라, 모처럼 김선우를 만나러간 것이다.

 

양햇살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갈도 있었지만, 겨우 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선우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집터가 있는 곳이 아니라 한우로 유명한 염치면 식당이란다.

 

도착하니 김선우, 양햇살, 김창복씨가 먼저 와 있었다.

햇살은 폐차시킬 정도의 큰 사고였으나, 천만다행으로 턱만 조금 찍혔지 다른 곳은 멀쩡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였다. 아이쿠! 그 날 햇살이가 이름 바꾸었다고 알려주었으나 깜빡 잊어 버렸네.

육회비빔밥을 시켜 아침 겸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2년 전 아산 현충사 둘레 길 한적한 곳에, 어느 목수가 살던 오래된 헌집을 샀다기에 구경 간 적이 있는데,

그 집을 개보수하여 미술관으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변신했는지 보고 싶어 김창복씨 따라 현장으로 달려갔다.

 

입구에는 백암길185 미술관이란 조그만 현판이 붙어 있었고,

오래전 수박 먹던 마당에는 여러 명이 쉴 수 있는 휴식공간도 만들어 놓았더라.

폐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시골집이 아담한 갤러리로 변신한 것이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갤러리가 되어 있었는데,

벽에는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전시했던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사진 26점이 걸려 있었다.

 

하잘 것 없는 자재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 알뜰함이야 말 할 것도 없고,

바닥에는 황토와 콩기름 먹인 장판지가 깔려 있었는데, 어릴 때 살던 고향집 방바닥을 떠올리게 했다.

선우의 추진력과 섬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만 있다면 건축업체에 맡겨 그보다 더한 것도 만들 수 있으나, 돈 들이지 않고 힘 모아 만들어 더 애착이 갔다.

요즘은 건축자재비보다 인건비가 더 비싸 업자에게 맡겼으면 당연히 허물고 새로 지었을 것이다.

 

청년 공감문화 플랫폼을 끌어가는 김선우는 작은 여장부다.

공동체의 김창복씨가 다방면에 경험 있는 전문가이긴 하나,

남의 일손은 전혀 끌어들이지 않고, 연약한 햇살이 까지 달라붙어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아산 온천동 상가의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 째 만든 백암길185 미술관은 현충사 산책길이라,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아산의 명소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뒤늦게 김온도 나타났는데, 전시된 사진을 바라보며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정담 나누던 아련한 추억까지 떠올랐다.

 

그런데, ‘백암길185 미술관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달부터 본거지에 내가 머물 집을 짓겠다는 말에 겁이 덜컹 났다.

정선 작업실이 불난 후 여러 지인이 후원금을 보내주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어 초대하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다 버려야 할 때 집은 지어 무엇 하겠는가?

 

화재 보험에서 나온 이천만원을 보태어 조그만 거처를 만든다지만,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물질과는 거리 둔지 오래지만, 사진과 좋아하던 사람까지 싫어지는 판에...

 

요즘은 전시장 나들이는 물론 웬만한 모임에도 가지 않고 동자동에서 지내는데,

정동지 사는 녹번동보다 아무도 없는 쪽방이 더 편하다.

 

'버려진 사람의 초상' 사진 찍으며, 쉼 없이 죽어가는 사람처럼 눈 감고 싶다.

 

사진, / 조문호

 

 

 

김창길의 사진공책

픽셀 Pixel, 하트 Heart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로 시작되는 인간에 대한 작명은 다양하다.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 놀이하는 ‘호모 루덴스’ 등의 고전적 이름들은 지금도 인간에 대한 본질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후죽순 생겨난 신조어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일면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반영하는 듯하다. 정보화 시대의 인간을 뜻하는 ‘호모 인포매티쿠스’, 디지털 시대의 ‘호모 디지쿠스’,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머스’, 플라스틱 없이 살 수 없는 ‘호모 플라스티쿠스’, 스마트폰을 손에 든 ‘호모 모빌리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

 

한국을 대표하는 호모 포토쿠스 네 명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있다. 1996년 강운구 작가가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 있던 세 명의 호모 포토쿠스를 찍은 흑백 사진이다. 한정식, 김기찬, 그리고 황규태. 사진을 찍은 이는 찻집 유리에 반사된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앞에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강운구 작가는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며 그의 사진집 <사람의 그때>에 아쉬움을 적었다. 황규태 작가는 2년 전 강 작가의 사진전이 열렸던 부산 고은미술관에서 회고전 <사진에 반-하다>를 열고 있다. 1960년대의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시작해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근 작품들을 펼쳐 놓았다. 전시는 아쉽게도 내일(12일)이 마지막이다. 기사를 남겨서 황규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황규태라는 호모 포토쿠스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사진의 화두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반-하다>는 앞서 말했듯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하다’의 ‘반’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사진에 홀딱 반했다는 뜻도 품고 있다. ‘열화당’ 사진 문고에 적어놓은 황규태 작가의 표현은 이렇다. “사진의 모든 것이 사진이고 모든 것이 사진이 아니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이다.” 첫 문장은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가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과 다른 사진을 추구한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사진에 대한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사진의 기원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1939년에 발명했다고 선언한 사진술에서 찾는다. 요오드 용액을 이용한 은도금 동판에 상을 맺히게 하는 은판사진술로 ‘다게레오타이프’로 불린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술은 다게레오타이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입이 존재했다. 그와 같은 나라에 살았던 이폴리트 바야르와 영국의 폭스 탤벗은 종이를 이용한 ‘칼로타이프’를 발명했다. 다게르의 사진술도 독자적인 발명은 아니었다. 그는 역청을 바른 백랍판을 이용해 1826년 경 창밖 풍경을 찍은 발명가 니에프스의 사진술을 참고했다. 이들 이외에도 감광성 표면 위에 이미지를 정착시키려는 사진술을 고민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1790년부터 1839년까지 24명에 달했는데, <사진의 고고학>을 쓴 미술사가 제프리 베첸은 이들을 ‘원시 사진가’로 부른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사진술의 기원은 특정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사진을 향한 욕망이 여기저기서 출현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의 기원은 물론 단일한 사진의 정체성도 없다. 빅터 버긴, 존 탁 등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되므로 사진 자체라고 할 만한 정체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은 미술관에 걸리면 예술이 되고, 과학자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범죄의 증거가 되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보도사진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들’을 거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황규태 작가의 사진은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다. 황 작가는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말했다. 묵직한 독일 카메라로 찍어야만 작품 사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빛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움켜잡으려는 모든 장치들을 활용한다. 세기말에는 디지털 사진이 과연 사진인가라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 역시 사진의 맥락에 자리 잡을 수 있다. 필름 대신 센서에 닿은 빛에 대한 반응을 디지털 정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화된 사진조차도 디지털로 스캔하고 복원해 스마트 기기를 통해 바라보는 호모 디지쿠스가 아니던가.

 

흑백 Black and Whit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63년 황규태는 경향신문사 사진기자가 된다. 이형록, 전몽각 등 걸출한 사진가들이 활동했던 현대사진연구회에도 몸담았다. 이 시절 남겨놓은 흑백 사진 중에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인을 찍은 사진이다. 그녀의 허벅지와 오른손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갔다. 구도가 역동적이다. 초점은 흐리다. 앵글은 다소 높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무릎을 구부리며 수줍게 인사하는 장면이라고 상상해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한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는 꿈속의 찰나 같은 느낌이랄까. 짝사랑에 빠진 사내의 개운치 않은 백일몽의 한 장면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1965년 황규태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정체성은 타국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컬러사진 현상소에서 돈을 벌었다. 기술자로 안주하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강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테라(tera)급 바이오칩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규태는 사진과의 놀이를 시작했다. 필름을 태우고, 오리고, 붙이고, 겹치고, 합성하고, 확대하고…. 정통 사진을 고수하는 사람들 눈에는 불경스러운 짓이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전위적이라며 ‘아방가르드’라는 예술 용어를 헌사했다.

 

버노그라피 Burnography, 녹아 내리는 태양, Melting the Sun (왼쪽) / 포토몽타주 Photo Montage,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lsquo;s World - 앤드류 와이어스 이후 After Andrew Wyeth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버노그라피(burnography). 필름을 태워(burn) 만든 사진(photography)이라고 작명한 황규태의 사진술이다. 그가 원조는 아니었다.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 라울 위박이 처음으로 흑백 필름을 태웠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황규태의 필름은 컬러였다. 컬러에서는 그가 원조라지만, 이제 기원이나 원조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앞서 말했듯이 사진의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녹아내리는 태양(Melting the Sun)’은 태양을 찍은 필름에 열을 가해 뒤틀린 이미지를 인화한 사진이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빛의 근원인 태양을 불태운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실험 정신,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감이다. 이즈음 그는 맥락이 다른 사진들을 합성한 몽타주 작품들도 내놓았다. 핵무기의 위험성과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가 담긴 포토몽타주였다.

블로우업 Blow up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블로우 업(Blow Up). 이것은 사진술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크로핑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흑백 사진들의 세부를 2000년대에 확대(blow up)한 작품들이다. 부인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사진가는 자기가 찍는 장면을 완벽하게 파악하며 셔터를 누르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장님이라고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야기했다. 그려야 할 대상을 바라보던 화가는 캔버스 위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실재의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에도 해당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던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셔터막이 닫히기에 피사체를 볼 수 없게 된다. 아주 짧은 찰나이기에 사진가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황규태 작가는 자기가 찍어놓고 몰랐던 사진의 부분들을 극단적으로 확대한다. 결과물은 그의 초기 흑백 사진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이다. 상체가 잘려 나간 한 여인의 걷는 모습은 오싹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악몽이다.

 

사진의 세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려는 욕망은 오래됐다. 발터 벤야민과 함께 ‘원시 사진비평가’라 부를 수 있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1927년 독일 신문에 실린 영화 스타의 사진을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그녀, 곡선, 호텔이 수백만 개의 작은 망점과 그리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망점들의 모자이크가 아닌 리도의 살아 있는 스타다.” 황규태 작가가 들여다본 것은 신문 사진이 아니라 TV 화면이었다. 루페(돋보기)를 통해 확대된 모니터의 세부는 반복되는 사각 무늬였다. 그는 모니터를 접사해 찍고, 그 결과물을 또 접사해 찍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렇게 확대를 반복한 끝에 목격한 픽셀의 어떤 이미지는 자기 머릿속에 심어진 바이오칩과 닮은꼴이었다.

픽셀 Pixel, 반복과 차이 Repetition and Difference -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반복과 차이(Repetition and Difference)’.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차용한 픽셀 사진의 제목이다. 차이는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이라는 것인데, 기존의 사전적 단어 풀이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철학의 논리이다. 반복되는데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하지만 황규태의 픽셀 시리즈 사진을 본다면 들뢰즈의 사유를 짐작하게 한다. 힐끗 쳐다본다면 황 작가의 픽셀 사진은 반도체 형태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패턴에서 서로 다른 세부 형태들을 발견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반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 하나의 이미지로서는 비교될 대상이 없기에 동일성이나 차이점도 따져볼 수 없다. 그래서 차이는 반복되어야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세부와 전체의 관계는 어떨까? 크라카우어는 ‘작은 망점들의 전체는 모자이크의 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여배우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에게 세부는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규태가 발견한 사진의 세계는 다르다.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이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복되는 픽셀의 집합은 우연히 ‘하트(Heart)’ 모양이 되고, ‘육각형 생삭코드 그라데이션(Hex Color code gradation)’이 되며, 셜록홈즈 머리 모양이 된다. 황 작가는 셜록홈즈의 실루엣으로 나타난 픽셀 사진을 ‘게슈탈트(Gestalt)’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부분과 전체의 형태에 대한 감각을 뜻하는 독일어다.

픽셀 Pixel, 게슈탈트 Gestalt - 형태심리학 Configurationism (왼쪽) / 픽셀 Pixel, 육각형 색상코드 그라데이션 Hex Color code gradation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황규태 작가의 근황을 물었다. 허리가 고장이 나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본 결과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컴퓨터는 있지만, 카메라는 없단다. 그래서 20여 년 전, 그가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밤하늘의 별도 찍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도 중요하지만, 도처에 넘쳐나는 사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누군가 무심히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규태라는 이름의 호모 포토쿠스는 그렇게 사진의 우주를 탐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 김창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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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터의 배우(actors in the empty lot)

전종대展 / JEONJONGDAE / 全鍾大 / photography 

2023_0309 ▶ 2023_0321 / 일요일 휴관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초대일시 / 2023_0309_목요일_06:00pm

기획 / 와이아트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요일_1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와이아트 갤러리

YART GALLERY

서울 중구 퇴계로27길 28 한영빌딩 B1 3호

Tel. +82.(0)2.579.6881

www.yartgallery.krblog.naver.com/gu5658@yart_gallery

 

낯선 이의 낯익은 초상 ● 사진의 침묵 속에서 타인의 초상은 메아리로 시선에 응답한다. 낯선 이의 얼굴과 손짓과 몸짓의 의미는 나에게서 출발해 초상 속 타인에게 부딪혀 돌아온다. 초상 속 타인의 진실보다 초상 밖 나의 진실이 드러나고, 내 안의 진실이 삶 바깥으로 출현한다. 그 손짓과 몸짓이 눈에 익을수록, 또 발가벗은 얼굴을 마주할수록 타인과 나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무너진 혹은 무뎌진 경계에서 발가벗다 못해 무방비한 눈으로 서로를 응시할 때, 타인의 초상은 나의 초상이 된다. 삶에서 타인과의 대면이 나를 바라보게 하듯, 타인의 초상은 결국 나의 초상이다. ● 전종대의 『빈터의 배우』에서 '빈터'는 비어 있지 않고, 배우는 완벽한 연기를 다하지 못한다. 작가는 빈터의 '비어 있음'이 아닌 '있음'을 보여주고, 배우가 하는 연기의 '완전함'이 아닌 연기하는 삶의 '불완전함'을 비춘다. 마치 통제할 수 없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유한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불완전한 삶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특별한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세계의 시공간은 충만한 채로 변화하고, 모든 존재는 제 뜻대로 생을 영위하지 못한다. 사진만이 시공간을 제멋대로 조각내고, 찰나에 조각난 그 틈으로 그때 그곳의 모든 '있음'을 환영처럼 포착한다. ● 작가는 도로변에 맞닿은 어느 곳,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쉽게 지나쳐 알아채지도 못할 곳에 4×5" 대형 필름 카메라를 세워 무대로 삼았다. '빈터'라 불렸지만 흙이 있고, 수풀이 자라고, 새들이 오가는, 세계의 온갖 '있음'으로 충만한 '터'다. 인간만이 그곳을 '빈터'로 바라보는데, 인간이나 인공의 특별한 무엇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인간의 시선을 넘어 세계를 주의 깊게 살피면 세계의 '있음'과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를 목도할 수 있다. 이에 『빈터의 배우』는 빈터를 본래 '있음'의 녹음의 터로 주시하고, 그 터에 잠시 머무른 배우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푸른빛의 '빈터'는 충만한 생의 '터'를, 또 그곳에서 한때 하나의 포즈를 취한 인간은 아득한 시간 속에 섬광처럼 빛나다 사그라지는 우리의 짧은 생을 떠올리게 한다. ● 작가가 '빈터'라는 생의 '터'에, 곧 사진의 무대에 등장시킨 인물은 연극과 영화, 광고와 드라마에서 짧은 시간 상상을 연기하는 조연 또는 단역 배우와 초보 패션모델이다. 시나리오 없이, 인물들은 "웃는 얼굴을 찍지 않아요."라는 작가의 말에 나름의 몸짓과 손짓과 표정을 자기 삶에서 찾아 표현했다.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기 전 인물은 작가와 '웃을 수 없었던 삶'의 여러 장면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작가는 그 이야기의 어느 순간, 상하좌우가 뒤바뀌어 보이는 카메라의 초점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 하던 얼굴과 모습을 찾아낸다. 환영 같은 장면에서 시선이 멈춘 곳에 초점을 맞춘 후 1/8~1/60초의 느린 셔터속도로 인물을 사진에 담는다. ● 거리를 두어 전신으로 담은 인물의 모습은 불안하고 무엇을 외면하거나 벗어나 구원 받고자 하는 손짓과 몸짓이며, 다가가 바라본 인물의 얼굴은 우울과 비애를 포함한 처연한 감정이 읽히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사진이 포착하는 인간의 얼굴은 사물의 표면과 달라서, 얼굴의 표면에는 생의 이력이 새겨져 있고 촬영된 순간의 감정이 달라붙는다. 그리하여 『빈터의 배우』 속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들은 자기 삶과 감정의 지평에서 웃지 않는 '나'를 연기해 사진에 담겼다. 연약한 그래서 부서지기 쉬운 모습으로, 마치 삶에서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얼굴로 남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롯이 작가가 '빈터'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선택한 얼굴이다. ● 작가는 초상 속 인물로 배우와 모델을 섭외하되, 상상의 얼굴을 능숙하게 표현하는 오랜 연기 경력의 배우를 배제했다. 이전 전시 『빈터의 배우들』(2020)에서 숙련된 배우에게 웃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에 대한 자유연기를 요청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웃음 없는 초상을, 배우들의 노련한 상상의 연기를 통해 표현하기보다 연기하는 '배우' 각각의 실제 얼굴과 모습을 통해 재현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연기하는 상상과 자기 욕망의 경계가 흐릿한, 연기하기와 드러내기의 얇은 선상에서 오르내리는 배우들을 작가는 선정했다. 또 촬영 현장에서 배우와의 실제 삶에 관한 대화를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무디게 만들었다. 이로써 『빈터의 배우』(2023)는 '배우'라는 특정 군상의 초상을 넘어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삶의 초상으로 확장됐다. 그리하여 우리는 『빈터의 배우』 속 배우처럼 '빈터'라는 '생의 터' 안 욕망과 상상의 경계에서 자기를 연기하다 타인에게 '터'를 내어주는 우리를 만나게 된다. ● 생애에서 웃음보다 눈물이, 기쁨보다 슬픔이 깊게 새겨지는 것은 불시에 맞닥트리는 이별, 슬픔, 고통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 죽음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상처 입고 고통 받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의 '빈터'에서 배우의 초상을 컬러가 아닌 흑백 사진으로 재현했다. 세계의 소멸과 죽음의 색을 지우고 사진의 빛을 인물에 비췄다. 상처 입은 존재의 빛남으로써, 녹음을 상실한 '빈터'의 풍경을 '생'의 풍경으로 전환했다. ●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사진과 함께 단편 영화 『빈터의 배우』(9분 9초)를 선보인다. 사진에서 배우 본연의 삶의 결이 드러나도록 노력한 것처럼, 영화에서는 작가로서 자기 삶의 결을 각본, 연기, 연출로 보여주고자 했다. 작가는 사진가로 분해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서 『빈터의 배우』의 촬영을 연기하며, 사진으로 전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영화에서 이야기한다. 사진이 현실을 '박제'하는 것이라는 대사에서 엿볼 수 있는 '사진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전종대 작가의 모든 작품에 걸쳐 왔다. 죽음은 현실에서의 부재로 죽음을 증명하고, 사진은 '존재했었음'을 증명함으로써 그것의 부재를 확인시킨다. 그리고 죽음과 사진에서 그 부재를 부활시키는 것은 기억을 환기하는 사랑임을 작가는 이제까지 작품으로 전했다. ● 삶에서 우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들, 자의가 아니라 누구의 의도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바수어져 상실하는 것들을 작가는 사진으로 선보였다. 소중한 가족과 일상을 주제로 한 『가족 이야기』(2006)부터 쇠락해 철거되기 전 낙원상가를 촬영한 『낙원』(2012),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잎을 기념한 『낙엽』(2012), 어머니의 현재를 과거 사진첩의 사진으로 추억한 『엄마, 가족 그리고 사진』(2013), 1969년에 세워진 서울 최초의 시민 아파트인 금화아파트를 1990년대 재개발 전후에 촬영하고 그곳 사람들을 기록한 『금화아파트』(2015), 이 모두가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사진으로 보내는 사랑이었다. ● 이후 작가는 자기 삶 안으로 카메라를 들여와 근로 현장에서 외국인노동자의 초상과 꿈을 사진과 영화로 『공장 일기』(2016)에 담았다. 그리고 이어진 『빈터의 배우들』(2020)과 『빈터의 배우』(2023)에서는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 앞 무력한 삶의 상황과 감정을 배우들을 통해 살피며 대면했다. '빈터'에서 배우를 촬영한 4년여 동안 그들의 초상은 배우 각자의 삶이 배어 있는 상흔의 초상이자, 카메라 렌즈 뒤 스크린에 서린 작가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우리가 그들을 마주함으로써 상처받기 쉬운 생의 존재를 담은 삶의 초상이 된다. ● 나와 타인, 삶과 죽음을 파악하고자 하는 생의 무단한 노력이 실패로 끝날 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와 해석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 무작정 받아들여졌기에 우리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 또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우리 역시 타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향하지 않고 세계와 타인을 향해 있는 인간의 얼굴은,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들이 서로를 향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의 비밀이 곧 삶의 비밀이다. ■ 정은정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빈터의 배우 ● "초기 사진에서 분위기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난 표정에서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중에서) ● 지인이 SNS에 올린 사진을 우연히 본 것이 이 작업의 계기가 되었다. 그 사진에는 중년의 한 여인이 어느 숲속 벤치에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은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 후 도시 외곽을 돌아다니며 풍경을 찍던 중에 우연히 지인의 그 사진과 비슷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문득 그 사진이 떠올랐고 이후에 그 장소에서 배우를 대상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며 나는 풀밭에 나무 벤치가 세 개 있는 그곳을 '빈터'라 이름 붙였다. 물리적으로 빈 공간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비유 또는 연극적인 공간으로서 '빈터'라 이름 붙였다. 빈터에서 촬영은 주로 골든타임이라 불리는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에 이뤄지는데 그 시간에 해가 산 너머로 기우며 인물의 배경이 어두운 톤으로 떨어지고 그 배경 앞에서 인물이 오롯이 드러난다. 나무에 잎이 무성한 오월부터 가을로 들어서는 시월까지가 촬영하기에 적합하다. 11월부터 다음 해 봄 사월까지는 색온도가 낮아져 주로 흑백으로 촬영을 진행한다. 빈터는 무대이다. 인공적인 장치나 소품 혹은 조명이 있는 무대 미술로 이뤄진 무대가 아니라 사계절의 변화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이다. 그 무대 위에서 나는 배우들을 만난다. 대구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던 2000년대 초반에는 계간 사진비평지가 나오고 일군의 젊은 사진가들이 일상을 다룬 연출사진이 유행하던 때이다. 그뿐 아니라 영미권의 제프 월(Jeff Wall) 이나 필립 로카 디코르시아 (Philip-Lorca dicorcia)와 같이 일상을 연출한 사진들이 소개되었고 나 또한 그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사진 실험에 매료되었다. 빈터의 배우 작업에도 그 영향이 드러난다. 나의 작업이 위에서 열거한 사진들과 변별점이 있다면 빈터의 배우는 숲이라는 미장센(Mise en scene) 위에 배우들을 위치시켜 그 속에서 일종의 무언극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빈터라는 무대 위에서 배우의 순간적인 표정이나 몸짓에 깃든 분위기나 느낌을 사진으로 담아 관객에게 전달하는데 그 주안점을 둔다. 촬영은 주로 풀 샷(Full shot)으로 연극적인 제스처를 보여준다면 그다음에는 버스트 샷(Bust shot)이나 웨이스트 샷(Waist shot)으로 인물의 표정에 포커스를 맞춰 심리묘사에 중점을 둔다. ● 이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배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늦게나마 자신이 원했던 배우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 또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촬영을 진행할 때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 모습과 셔터가 눌러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차이가 큰 배우들이 있다. 그들은 모방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진은 사실 같기도 혹은 연출 된 것 같기도 한 그사이를 오간다. 처음 촬영장에서 나는 배우들에게 나무 벤치를 객석으로 풀밭을 무대 삼아 배우들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연기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경청하며 그 배우가 지닌 지나온 삶의 결이 어떠했을까 상상한다. 그래서 내게 좋은 사진은 그 배우의 삶의 결이 드러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다음은 배우들과 나눈 대화 중 기억에 남는 말들을 모아본 것이다.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배우님! 촬영할 때 어떤 생각 하셨어요? 엄마 생각이 났어요. 엄마 생각하면 슬프잖아요. (이경희) ● 아내 생각이 나네요. 여기 오니. 먼저 간 아내를 생각하는 연기를 해볼게요. (김지한) ● 학교 다닐 때 전 조용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교단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서 아이들을 까무러지게 웃긴 일이 있었어요. 그때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희극배우. (김범중) ● 결혼하고 싶어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대에 섰지만, 요즘 사람들은 무대 연기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매체 연기를 하려 해요. (김민성) ● 요즘은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이에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치매에 걸리는 일도 언젠가 닥칠 일이지만, 먼저 연기로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정혜자) ● 어렸을 때부터 TV에 나오고 싶었어요. 이순이 넘은 나이에 그 꿈에 다가가고 있어요. (김세미) ● 직장 생활을 23년 정도 했어요. 내 인생의 행복을 찾아 직장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문득 대학 다닐 때 연극반을 했던 기억이 났어요. 그때부터 연기 일을 시작했어요. (임동민) ● 집에 혼자 있을 때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나를 봐요. 그런데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 서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항상 다음 연기를 기대해요. (장순녀) ● 필름은 순수한 것이에요. 그것에 사람의 얼굴을 담는 것도. (윤혜란) ● 평생 착한 딸로, 내조 잘하는 아내로, 어진 엄마로 살았어요. 연기 할 땐 내연녀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김지혜)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보아도 보이지 않는 사람 ● 배우 박 혜숙 씨와 차를 타고 가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배우님! 최근에 출연한 작품이 뭔가요?" "영화 기생충이에요" "아! 저 그 영화 봤는데… 어디에?" "마지막에 아들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귀부인으로 나와요." "아…." 나는 그 영화를 봤지만, 그녀를 보지 못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내가 만난 배우들은 대부분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가끔 버스를 타거나 아파트 엘리베이터 광고판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보지 못했을 내가 만난 배우들이다. 사진은 그들을 보게 한다.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배우의 사진을 찍는 이유 촬영은 4/5인치 대형 필름 카메라로 진행된다. 대형 카메라로 촬영하기에 순간을 발 빠르게 포착하기보다 30초에서 1분 정도 배우는 가만히 멈춰있어야 한다. 그때 그 모습은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를 전달한다. 나는 배우가 자기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 후 필름에 맺힌 상은 인화지에 투사되어 정착된다. 사진을 보는 순간에는 일상의 의식이 멈추고 인화된 상을 바라보게 된다. 어떤 사람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배우이기에 영상으로 자기 모습이 보이길 원한다. 그것이 내가 배우들 사진을 찍는 이유이고 그들이 내 카메라 앞에 서는 이유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 같지만.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사진에는 소리가 녹음되지 않기에 자신의 표정과 몸짓으로 무언가를 전달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것을 인증하는 행위 혹은 그 혹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이다. ● 마지막으로 몇 해 전에 써 놓은 짧은 이야기 한 편을 첨부한다. 이 이야기는 빈터의 배우 사진에 대한 짧은 우화이다.

전종대_빈터의 배우_2023 ⓒ전종대

 ● 한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주문대로 가 커피를 주문한다. 점원이 그녀에게 "오늘 또 오셨네요?"라고 말한다. 그녀가 "네."라고 짧게 묵례하며 대답하고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편지지를 놓고 글을 쓴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인다. 편지를 다 쓴 후 종이를 들어 천천히 읽어 나간다.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한동안 멍하니 거리를 바라본다. 그런 후 그녀가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가 편지 봉투를 점원에게 건넨다. 점원이 봉투를 받고 그녀에게 "오시면 전해드릴게요"라고 말한다. 그녀가 짧게 묵례하고 카페를 나온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둘은 주말이면 이 길을 걸었고, 공연을 보거나, 미술관 전시를 관람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남자는 소설을 쓰는 일을 했고,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둘은 서로의 상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젠가 그는 그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말했고, 얼마 후 그는 메일이 아닌 우편으로 원고지 20장 분량의 소설을 그녀의 집으로 보내왔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그녀는 그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사라진 연인을 찾기 위해 한 여자가 주말 오후 한 카페에서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사라진 연인이 그곳을 찾을 때 그 편지들을 받아본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들을 그 연인이 다시 보게 되는지에 대한 결말은 소설 속에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 한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주문대로 가 커피를 주문한다. 점원이 그녀에게 "오늘 또 오셨네요?"라고 말한다. 그녀가 "네."라고 짧게 묵례하며 대답하고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편지지를 놓고 글을 쓴다. ■ 전종대

 

Vol.20230309a | 전종대展 / JEONJONGDAE / 全鍾大 / photography

삭막한 세상을 꽃피우는 고) 김기찬 선생의 대표사진선집 골목안 풍경이 출판되며,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사진전이 개막되었다.

 

지난 34일부터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는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

보면 볼수록 정겹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련한 추억을 불러 들이는 이토록 정겨운 사진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골목 안 풍경은 사진인 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역사다.

 

더구나 권력 중심이나 가진 자들의 역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서민의 역사라 더 애착이 가고,

압축 성장에 의해 읽어버린 것들을 보여주는 터라 그 의미는 더 커다.

 

만약 김기찬 선생께서 서울의 골목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해보니, 한 순간 아찔해 진다.

그 많은 사진가들은 어디서 뭘 찍었을까?

 

35년 동안 오로지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해 온 김기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 듯 십 팔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처럼 김기찬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전시라 개막하기가 무섭게 찾아가 보았는데, 처음 보는 사진이 더 많았다.

그동안 골목 안 풍경 사진집을 여러 권 펴 내 대부분의 작품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진들은 어디 갔다 이제 왔을까?

 

아마 선생께서 사진을 고르며 비 컷으로 분류되어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내가 보기로는 여태 선정된 사진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좋은 사진이었다.

 

바둑판을 지켜보는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이나, 강아지를 안고 뛰어가는 소녀의 모습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강아지가 가족처럼 친근한 존재임을 말해주며, 정겨움과 따뜻함까지 더해준다.

 

회초리를 들고 있는 아낙과 그 앞에서 우는 어린이의 모습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사랑의 매라는 체벌이 일상화된 당시의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생각치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리어카에 달라붙어 짐을 옮기는 장면은 골목이라면 어쩔 수 없는 흔한 일이었지만,

정겨운 풍정에 가려 걱정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파르고 계단이 많은 골목을 통해 이삿짐도 나르고, 서민의 필수품인 연탄이나 생필품을 옮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기면 소방차는 물론 구급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한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인정만은 넓은 아파트나 대궐 같은 저택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들이 뛰 노는 정겨운 추억의 공간이기 이전에 서민들의 서러움이 담긴 공간이라는 것을 이 사진들이 잘 말해준다.

 

주옥같은 골목 사진들은 당시의 상황이나 애잔함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하게 다가오며,

선생의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지나치며 찍은 사진이 아니라 골목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세월에 의해 숙성된 사진이라 보면 볼수록 정겨워, 몇 차례나 돌아보았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골목을 사랑한 김기찬 선생이 더욱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리움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봄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골목 안 풍경 43일까지 열린다.

추억의 보물 창고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 조문호

 

 

사진소설 fotofiction

휘휘(현선)展 / HWIHWI / 翬輝 / photography 

2023_0217 ▶ 2023_0302 / 월요일 휴관

휘휘_대수산봉_피그먼트 프린트_60&times;100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_갤러리175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3 2층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한동안 꿈에서 나는 암살자가 되어 내가 미워하는 무언가를 향해 총을 쏘았다. 꿈속에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아주 멋지고 날렵하게 총을 쏘는 나 자신의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일어나면 무력한 상태의 나만 남아있었다. 이 무력감은 수년간 쌓여 온 것이다. 일어나면 나를 누르고 분노하게 하는 현실 속 무력한 상태의 나만 침대에 남아있다. 나의 무력감은 수년간 쌓여 온 것이다. 80년대생 청년이 가진 무력감, 패배감, 실패감은 기본, 미래에 대한 막막함 아래, 노년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자본가들에게 우리의 땅을 뺏기고 반복되는 역사처럼 쫓겨날 것이라는 두려움, 4.3으로 가족이 고생한 역사가 있으니 튀는 짓은 하지 말라는 억압, 그리고 그 무엇을 열심히 해도 이 두 가지는 내가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것.

 

휘휘_목격자_피그먼트 프린트_80&times;80cm_2021
휘휘_제주하늘#2_피그먼트 프린트_100&times;60cm_2020
휘휘_시한부 마을_피그먼트 프린트_100&times;60cm_2023
휘휘_활주로의 북쪽_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20
휘휘_토성의 고리_슬라이드필름, 40개의 사진과 40개의 글

무엇을 창작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이 답답함을 스스로 뚫어내 보고자, 답답함을 표현하고자 작업을 했다. 이 가정에서 내려오는 이데올로기와 주변 환경들로 인해 나는 어느 순간 당사자는 아니지만 방관자는 될 수 없는 위치에서 객관적일 수 없는 관점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만난 암살자 캐릭터를 주인공을 삼고 내 주변 인물들을 가상 인물로 등장시켜 소설의 구조를 만들고, 현시대 겪고 있는 청년의 재정, 주거 등의 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고향인 제주의 현 이슈인 제주 제2공항, 4.3 유가족들의 현 상황 등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사실 같은 글을 쓰고, 거짓말 같은 연출 사진들로 소설 사진, 사진 소설이라고 불리는 무엇을 만들었다. 어떤 것이 허구이고 어떤 것이 진짜인지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유추할 수 없지만 사실 모든 게 그냥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다. ■ 휘휘(현선)

 

Vol.20230217a | 휘휘(현선)展 / HWIHWI / 翬輝 /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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