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영신

여기, 우리가 만나는 Here, We Meet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2023_0206 ▶ 2023_0303 / 일,공휴일 휴관

한문순_해우-소_피그먼트 프린트_66.6×100cm_202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일,공휴일 휴관토요일_예약제

 

스페이스 mm

SPACE MM

서울 중구 을지로 12(을지로1가 50-1번지)시청지하상가 시티스타몰 새특 4-1호

Tel. +82.(0)10.7107.2244

facebook.com/spacemm1@space_mmwww.spacemm.net

 

#장면1  "존, 이번 제 전시 작품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말해줄 수 있나요?" / "자네, 내가 이전에 이라크 시인 압둘카림 카시드의 시에 대한 감상을 말해주면서 프랑스 단어인 S.D.F(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떠돌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 준 것을 기억하나? 자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S.D.F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네. 매일 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 홀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자네 작품에서 동물들이 그런 상태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네."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中에서 재구성)

 

한문순_브레이크 타임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23

#장면2  "존, 그럼 제 작품의 의도를 S.D.F상태인 동물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계신가요?" / "자네, 내가 어려서부터 존경해 마지않아 폴란드를 사랑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무리 다수라고 하더라도 특정 계층을 위한 자유는 전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 정의라는 관념에 대한 열광 때문이 아니다. 자유가 특권이 될 때 그 효용성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였다네. 그런 맥락에서 자네는 동물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아르카디아의 삶을 포착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네." (존 버거, 풍경들 中에서 재구성)

 

한문순_오체투지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23

#장면3  "존, 당신은 제 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동물의 자유'에 기반한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 "자네, 내가 말했던 사진의 의미에 대한 내용을 떠올려보게. 사진은 주어진 상황에서 실행되는 인간의 선택에 대한 증거라고 했지. 사진은 이 특정한 사건, 혹은 보이는 이 특정한 대상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진가의 선택의 결과라네. 사진은 사건 자체도 시각 능력 자체도 찬양하지 않는다네. 사진은 작가가 '나는 이것을 보는 행위가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네. 결국 자네는 '이 작품이 유심히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는 작가의 믿음은,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가 보여 주지 않기로 한 모든 것들에 비례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이런 점에서 내 의견보다는 자네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나?" (존 버거, 사진의 이해 中에서 재구성)

 

한문순_파파라치_피그먼트 프린트_61×91cm_2023

이번 전시 제목 『여기, 우리가 만나는』은 존 버거(John Berger)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작품명을 오마주하여 지었습니다. 존 버거는 이 작품에서 각 장소마다 떠오르는,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과거의 인물들을 현재로 소환해 함께 장소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저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경험과 기억을 특정된 장소에 투영하여 진행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해당 장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존 버거와 함께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죽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들으면서 저는 리스본 광장에서 맛보았던 군밤과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맛보았던 해물밥의 황홀한 식감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존 버거가 느낀 우울한 크라쿠프가 아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으로 한껏 들뜬 활기찬 크라쿠프의 인상을, 마드리드에서는 타파스 바에서 맥주와 무료 안주를 유쾌한 현지인과 함께 즐겼던 제 행복한 경험을 존 버거에게 들려주고 싶어졌습니다.

 

한문순_사생활침해_피그먼트 프린트_50×70cm_2023

어찌 보면, 우리는 자신만의 경험을 은밀히 간직하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함께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 안에서 은밀히 잠들어 있던 경험이 남들과 공유될 때, 사회적으로 변화되고 다른 이들의 경험과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지닐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문순_한입만_피그먼트 프린트_50×70cm_2023

그의 작품 제목을 오마주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저와 공유함으로써 저의 개인적 경험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존 버거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원래 제목에서 굳이 '곳'을 뺀 이유는 제 작품의 관심사가 '장소'가 아님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생명'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번 전시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환경과 동물 보호'라는 흔하다 못해 질려버린 식상한 레토릭이 아닌, 저만의 '생명'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제 작품에 등장하는 '생명'은 제가 이제껏 대면했던 '생명'입니다. 제 작품 속 생명들을 마주하시는 시간 동안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만났던 '생명들'을 떠올려 저의 경험과 여러분들의 에를레프니스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한문순_점핑 캣_피그먼트 프린트_50×70cm_2023

마지막으로 존 버거의 작품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칩니다. ● "네가 찾아낸 것만 쓰렴. / 제가 뭘 찾아낸 건지 끝끝내 모를 거예요. / 그래, 끝내 모를 거야. 다만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더 이상은 그걸 혼동하는 실수를 용납할 여지가 없으니까."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中에서)  한문순

 

Vol.20230206a |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사진가 이재갑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온 정통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강제징용 ‘잔혹사’를 기록한 ‘일본 속 한국풍경’,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의 진실을 기록한 ‘잃어버린 기억’, 베트남전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현장을 찾아다닌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등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골 깊은 역사를 파헤쳐 왔다.

 

이번에 선보인 '어느 특별한 동행'전은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배타적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 온 혼혈인들과 함께한 전시다.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우리 이웃의 또 다른 초상이다.

주명덕 선생께서 기록한 혼혈아, ‘섞여진 이름’이 발표된 지가 1965년이었니, 어느듯 반세기가 지났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되돌아보지 않았던 삶을 이재갑씨가 조명한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5시 무렵, 모처럼 전시장을 찾아 나섰다.

여태 전시 보는 것 자체를 피해 온 것은 전시리뷰나 이런 저런 글을 쓰기 싫어서다. 글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는데, '씹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개인적인 감상문에 불과한 글을 느낀 대로 쓸 수 없다면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분이 쓴 전시리뷰나 서문으로 소개를 대신 하기는 했으나, 평론가의 고충을 알만했다.

작품만 보고 전시리뷰는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싫은 소리는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속에 넣어두고 배겨나지 못하는 성질머리를 어쩌겠는가?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속 편했다. 그런 일로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미운 오리 새끼’신세가 되었는데, 심지어 가까웠던 친구나 가족까지 등 돌렸다. 잘 못 쓴 글이 아니라면 절대 내리거나 수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재갑씨의 ‘동행’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전시였다. 전시가 열리는 ‘KP갤러리’가 동자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기도 하지만, 기대했던 전시라 통풍이 도져 아픈 다리를 끌고 찾아간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의 허접한 사진들이 판치는 세상에, 이재갑씨 만한 사진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사진도 기록한다고 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니다. 아무런 작가의식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넝마주이 사진이라 한다. 작년에는 원로 사진가 두 분이 찍은 60년대 중반 무렵의 사회기록사진들이 서랍 속에 잠들다 반세기만에 빛을 본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학창시절에 찍은 사진이었고, 그 이후부터 상업사진이나 문화재사진으로 전향한 형태도 비슷했다.

 

그 당시는 임응식선생이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거리의 스냅사진이 성행할 무렵이었는데, 세월의 무게에 실려 작가의식과 상관없이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된 것이다. 요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처럼 아름다운 풍경만 쫓아다니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작가라면 뚜렷한 주관을 갖고 찍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주명덕선생의 ‘혼혈아’나 최민식선생의 ‘인간’, 그리고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처럼 사람 속으로 파고 든 작업과는 차원이 다른 기록이다.

 

또 한 가지 사진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한 분은 표준렌즈로 찍었고, 한 분은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많다는 점이다. 망원렌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나, 동작을 포착하는 스포츠사진에나 활용되는 렌즈라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적절치 않은 렌즈다.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람 속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몰래 찍는 도둑 사진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초상권 침해에 걸려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어 그런지, 거리스냅 하는 사진인도 사라져버렸다.

 

가끔 사진가들의 프로필 사진에 대포 같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목에 건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난 사진가가 아니라 사냥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요즘 렌즈들은 광각에서 망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줌렌즈가 장착되어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카메라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재갑의 "어느 특별한 동행"이 열리는 전시장을 찾아 갔더니, 전시 작가 이재갑씨와 전시기획자 이일우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시된 작품은 작가가 혼혈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내걸린 초상사진과 단체기념사진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사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작가와 당사자와의 끈끈한 교감이 느껴졌다.

 

‘동행’이란 전시제목처럼, 그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지난 시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흔적이 역역했다. 전시장에 찍힌 당사자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재갑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사진에 앞서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을 찍는 다는 것은 그 사람과 얼마나 소통하며,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으니, 그냥 찍은 사진과는 격이 달랐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인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게, 함께 걷기 -

 

‘한 배를 타다(be in the same boat)’라는 표현은 한국어와 영어에서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같은 운명이나 처지에 놓이다. 모든 이의 운명이 완전히 똑같이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의지하며 위안을 얻는다. 사진가 이재갑은 혼혈인들의 일상 속에 시선을 멈추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한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생일을 축하하며, 함께 야유회를 떠난다. 사진 속에 담긴 일상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주 약간의, 외모적인 차이가 언뜻 엿보일 뿐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다.

 

미군정기(美軍政期)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외국인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혼혈인이 생기고 그 수가 늘어났지만, 한국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주도로 단일민족(Monoethnicity)이라는 신화를 기조로 삼아 민족의 우수성을 공교육에서 강조하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통합하는 동안, 외모가 다르거나 혈통이 다른 이들은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국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돌아야 했다.

 

한국사회가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규정하는 동안, 혼혈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교류하고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혈인들은 다른 혼혈인 가족과 기꺼이 시간을 나누고 가족끼리 교류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카메라는 이들의 일상과 행사에 드러난 얼굴을 기록한다. 타자로 규정된 얼굴들이 따로 또 같이 기념사진을 위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동질감을 강조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일지 모른다. 나와 같은 존재만 수용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일에는 많은 생각의 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같고, 어느 정도는 다르다. 제각기 다른 뿌리와 직업, 사고방식, 환경을 가지고 있는 혼혈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느슨한 연대를 만듦과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한국사회에 기꺼이 ‘동일자(the same)’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와 선을 스스로의 존재로 지우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타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말한다. 내 테두리 밖의 ‘타자’는 익숙하지 않기에 낯선 자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고 내 옆에 있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이웃’이기 때문이다. 환대. 이웃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 이런 측면에서 이미 혼혈인들은 각자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거대하고 불친절한 이웃을 환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세계로 또 다른 타자를 초대한다. 낯선 카메라에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들의 일상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얼굴들’은 바로 우리 이웃의 초상이다.

 

이재갑의 사진전 “어느 특별한 동행”은 한국이라는 배타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혼혈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에 담긴 이들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함께 걸어갈 것(동행)’을 제안한다. ‘아주 약간의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탄 배에 동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같고, 조금씩은 모두 다르다.

 

글 / 레 나(LENA)

 

KP 갤러리가 2023년 새해 첫 전시로 선정한 “어느 특별한 동행(同行)” 이재갑 사진전은 3월 4일까지 열린다. 

 

 

사진파일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몇 장을 찾았다.

그 중 한 장면은 윤락녀가 발로 적음을 가로막는 사진인데, 잠시 놀다 가라는 장난스러운 호객행위였다.

적음은 특유의 사람살려~”를 연발하며 오히려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돈 한 푼 없는 땡초스님이란 것이 뒤늦게 알려지며 적음을 향한 일체의 호객행위는 사라졌지만,

은근히 즐기던 적음은 한편으로 서운한 것 같았다.

 

적음 최영해시인

서울의 대표적 홍등가를 기록하기 위해 청량리588에 방을 얻어 살던

 85년도 사진을 보니 당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항상 빵모자를 쓰고 다녔으니, 동내 사람들이 스님인줄 알 리가 없었다.

아가씨가 "당신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월간 빠주간으로 청량리 특집 취재로 잠입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적음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전농동으로 짐을 옮긴지 며칠되지 않아서다.

함께 머물며 글을 쓰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동반자가 생겨 힘이 생겼는데, 그것도 잠깐일 뿐 허구한 날 글은 안 쓰고 민폐만 끼쳤다.

단골식당의 밥값이야 당연히 감당하지만, 내가 준다며 외상 진 술값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화대는 외상이 되지 않는 점이다.

 

전농동588을 방문한 김용복, 유성준 사우와 한담을 나누고 있다.

적음 외에도 나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동료들이 가끔 방문하면, 술집으로도 활용하는 찻집에 안내했다.

그곳은 윤락업소에 바로 가기 민망한 남정내들이 잠시 들려 차 한 잔 마시며

탐색하는 장소로 활용되는데, 유일하게 적음만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돈이 없는 걸 알기도 하지만, 장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월간사진편집장으로 근무할 무렵이라 낮에는 없을 때가 많았다,

그 역시 인사동이나 다른 곳에서 술 마시며 떠돌다 밤 늦게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술이 취해 새벽녘에 들어오기도 했다.

약 한 달 가까이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봉화 청량사로 훌쩍 떠나버렸다.

 

방에 모셔둔 원고지 뭉치는 그대로 두고 떠났는데, 글 한자 쓰지 않은 백지였다.

 좋은 글을 기대했으나, 연이 닫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을 떠난 지금 생각하니, 그런 기행마저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신촌이나 인사동에서 벌인 기행의 연장선인 셈이다.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작품 / 조문호의 '홍등가'

내가 청량리를 찾게 된 것은 1983년 어느 날 동아일보에 실린 동아미술제공모 요강을 보면서다.

당시 '동아미술제'의 사진부문 공모는 2년 전에 주제를 공고해 합당한 작업의 시리즈로 출품하는 형식인데,

그 때 내걸었던 주제가 바로 직업인이었다.

당시는 직장 때문에 자유로이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퇴근 뒤 찍을 수 있는 대상을 찾다보니,

밤일하는 직업여성 청량리 윤락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찍은 사진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으나, 난감했다.

실상도 제대로 모른 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찍었기 때문이다.

마침 상금에다 대상 작품까지 팔아, 빈 집에 소 들어 온 격이었다.

그 돈으로 588에 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88로 들어가 작업한 몇 년 동안 가족은 물론, 경제적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과 친해지고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밖에 없었다.

성병으로 '청량리 보건소'를 드나들었고, 때로는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기도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전농동588'; 전시 팜프렛 표지

그렇게 작업한 사진을 모아 90년도에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열었으나 실망했다.

당사자들이 전시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벌떼처럼 달려든 언론의 폐해였다.

사회 멸시에서 벗어나 사람대접 받으려 작업에 동참했으나, 그들의 삶보다 선정적인 기사로 도배했다.

청량리 윤락가가 사라질 때까지 기록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요즘 동자동에 살며 철저하게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서랍에 잠들던 필름을 꺼내 사진집으로 엮은 것이 눈빛에서 발행한 청량리588’이다.

적음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588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으나 사진만 남은 것이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절 여인들의 안녕을 빈다.

 

사진, / 조문호

 

눈빛사진가선 시리즈 11호 '청량리588'사진집 표지 / 가격12,000

 

재미 사진가 김인태, 갤러리인사1010서 개인전
대자연 협곡과 사막, 식물을 촬영한 사진 공개
깊고 숭고한 사진으로 명성, LACMA가 작품 소장

미국 서부를 무대로 활동해온 재미 사진작가 김인태(76)가 15년 만에 한국에서 사진전을 갖는다. 김인태는 오는 2월 2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인사1010(관장 김수진)에서 '선율'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초대전에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대자연과 그 변화 가운데 발생하는 찰나의 경이로운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을 고국 팬들에게 선보인다.

 

김인태, '12 Coyote Buttes(코요테 버츠)'. 마치 추상화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미국 아리조나 Paria캐년의 붉은 사막 언덕을 찍은 작품이다.

김인태는 지난 2006년과 2008년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며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팬을 확보했다. 이번에 오랜만에 갤러리인사1010 초대로 작품전을 갖는 작가는 미국 대자연의 풍광을 촬영한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비롯해 고요하게 빛나는 식물사진 등을 출품한다.

 

김인태 작가는 경기도 문산에서 태어나 1967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월간지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그리곤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현지에서 사진작가로 활약해왔다. 광활한 미국의 협곡과 사막 등 대자연을 담은 사진으로 이름을 떨쳐온 작가는 목련, 튤립 등을 담은 꽃 사진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2000년대 중반에는 금강산을 직접 찾아 금강산의 비경을 그만의 시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작가는 한 사람의 구도자처럼 끝없이 기다리고, 갈망하며 대자연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신비롭게 융합하는 순간을 포착해 이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절대적인 기다림과 섬세한 교감의 합작품으로 평가받곤 한다.

 

김인태, 'Lotus'. 활짝 핀 연꽃을 클로즈업해 찍은 작품. 김인태의 흑백사진은 '동양적 관조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김인태의 작품은 미국의 사진 전문잡지 'B&W'의 2004년 6월호 표지를 장식한바 있다.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에 그의 사진 작품이 소장돼 있고, 영국 왕립사진가협회와 스위스의 그라피스연감에서도 인정하는 작가다.

 

김인태는 이번 작품전을 준비하면서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자연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대자연의 위용이 빛을 만나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과 그 안의 선율을 담아내기 위해 끝없이 인내하며 무수한 날을 지새워야 했다. 사막같은 곳의 장관을 표현하기에는 새벽녁이 최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도 많은 곳이 폐쇄됐고, 특히 LA에서는 동양인을 향한 증오 범죄들이 발생하는 상황에도 김인태는 무거운 카메라장비를 품에 안고 끈질기게 작업에 매달렸다.

 

작가는 "내가 찾고자 하는 선율은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있고, 광대한 산맥 속에도 있다. 찰나에 발생하기도 하고 몇 년에 걸쳐서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인태는 모든 선율 가운데 존재하는 조화와 경이로움, 그리고 섬세함을 주목하고, 끊임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말한다. 대자연의 웅혼함을 접할 수록, 또 작고 연약한 꽃들 속에 깃든 빛나는 아름다움을 접하면 접할 수록 창조주의 작품임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미국 서부 모하비 사막을 찍은 김인태의 흑백의 사진작품. [[사진= C김인태, 갤러리인사1010].

이번 전시는 한국 이민자로서 미국 사진예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김인태 작가를 초청해 그의 작품 속에 내재돼 있는 작가로서의 경험, 정신, 그리고 소명을 조명하는 자리다. 반세기 넘게 이어온 이민자로서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소명이 김인태의 작품마다 켜켜이 녹아들어 있다. 그의 사진을 접한 미국인들은 분명 미국의 대자연을, 미국의 꽃과 식물을 찍은 사진들이나 대단히 명상적이고 철학적이라 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이번 '선율' 전시에 나오는 작품들은 모두 고요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어느새 작가로 활동한지 반세기를 맞는 김인태의 기나긴 사진가로서의 삶이 투영된 작품들은 초스피드로 급박하게 달려가는 지금의 세태 속에서 날로 희귀해지고 있는 구도와 기다림이라는 가치를 성찰하게 한다.

 

김승곤 국립순천대학교 석좌교수는 이번 전시와 관련해 "극적인 광선과 색채에 의해서 드러나는 대자연의 형상을 대형 카메라로 정치하게 빚어낸 사진 서사시다. 오랜 기간 풍경 사진의 원점을 추구해온 김인태 작가의 작업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전시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작가 김인태는 이번 개인전에 앞서 "대자연의 웅혼함과 섬세함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을 들여 관찰하고 렌즈에 담으면서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절감했다.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으로서 자연의 선율 속 위대한 찰나를 담을 수 있음에 늘 가슴 벅찼고, 감사한 마음이다"며 "이번 전시는 삼라만상 모든 걸 창조한 조물주에게 바치는 나의 신앙고백이자 찬양"이라고 밝혔다.

 

김인태의 사진전시 '선율'은 3월 14일까지 인사동 갤러리인사1010의 1관과 B관에서 열린다. 화요일 휴관.


[서울 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 art29@newspim.com

 

사진가 김인태

대자연 속에 오롯이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는 작가 김인태. 묵직한 촬영장비를 들고 미국의 협곡과 사막을 밤낮없이 누벼왔다.

김인태 작가는 경기도 문산에서 태어나 1967년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사진학을 공부 한 후 1980년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그는 미국 엘에이 카운티 뮤지엄(LACMA)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몇 안되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영국 왕립사진사협회와 스위스의 그라피스 연감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과 그 변화 가운데 발생되는 찰나의 경이로움, 연속되는 선율을 담고있다. 그는 지금까지도 미국 전국을 다니며 자연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 찰나의 순간 또는 선율을 담기위해 밤을 지새운다. “그 선율은 꽃 한 송이에도 있고 광대한 산맥속에도 있습니다. 찰나에 발생하기도 하고 몇 년에 걸쳐서 발생하기도 하지요.”

 

김인태 작가는 그 모든 선율 가운데 존재하는 조화와 경의로운 세심함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몇 년 간 모두에게 두렵고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다. 많은 곳들이 폐쇄되어 접근을 불허했고, 특히 엘에이에서는 동양인을 향한 증오범죄들이 발생했다.

 

사람으로서는생명의 위협, 이민자로서는 거주지에서 발생하는 차별, 작가로서는 제한되는 활동,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려워하기보다.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되돌아보며 주어진 상황 가운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였다.

 

“이번 전시회가 그러한 상황과 시간 가운데 재점검 된 작품들과 새롭게 만들게 된 작품들을 전시함으로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되길 원합니다.” 코로나 이후 다시 가게된 현장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경외롭고 감사하다고 김인태 작가는 말한다.

 

변하는 사람과 환경, 그 끊임없는 흐름 속에 존재하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선율, 이 전시를 통해 인간은 불완전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지만 그 위대함을 표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전달하길 원한다.

 

 

 

뮤지엄한미 삼청, 개관 기념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
1929년 첫 개인 사진전~예술매체 인정받은 1982년 미술관 전시까지 다뤄
사진·자료 총 300여점 대거 나와···1880년대 ‘역사적 사진’들도 선뵈
“한국사진사 정립위해 ‘한미사진미술관’의 지난 20년 역량 총동원”

한국사진사 정립을 위한 뮤지엄한미 삼청(옛 한미사진미술관)의 개관 기념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개인 사진전을 연 최초의 사진가 정해창의 작품들(1920~1930년대,Gelatinsilverprint). 뮤지엄한미 소장, ⓒ정형식. 뮤지엄한미 제공

사진은 등장 200년이 된 현재 독자적 예술매체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기계조작의 결과물”로 치부하던 예술계의 무시, 비아냥을 극복한 것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1820~30년대 니엡스, 다게르 등 선구자들이 사진 역사를 열어젖힌 이후 세계 사진가들이 치열하게 작업하고 사진 미학을 구축한 덕분이다.

조선인이 사진을 접한 것은 기록상 1860년대다. 1880년대에는 서화가이던 김용원·지운영·황철 등이 사진관을 세웠다. 1900년대 초반에는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 등이 신문광고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최초의 개인 사진전이 1929년 3월 이 땅에서 개최됐다. 정해창(1907~1968)이 서울 광화문빌딩 2층에서 연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다. 사진가·평론가인 최봉림(뮤지엄한미 부관장)은 “정해창은 사진을 예술매체로, 자신의 미학적 역량을 개인전이라는 근현대미술의 사회적 형식으로 선보인 한국 최초의 사진가”라며 “한국 사진사에서 본격적인 예술은 이 전시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전시 등은 있었지만 정해창과 달리 작품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고 작가 이력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진은 50여년 후인 1982년 변곡점을 맞는다. 당시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대전으로 사진가 임응식(1912~2001)의 ‘임응식 회고전’이 열린 것이다. 최 부관장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매체로,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전시와 함께 사진이 미술관의 전시·소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 사진은 1982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회고전이 열리면서 마침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미술관 전시와 소장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당시 전시 팸플릿. 뮤지엄한미 제공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사진가들은 국내외의 주목 속에 여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사진계가 이룩한 갖가지 성취의 뿌리, 역사적 토대와 흐름을 살피고 짚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사진사 정립을 위한 치열한 연구·노력은 곧은 성장을 담보하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국 사진의 튼실한 발전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뮤지엄한미 삼청’(서울 삼청동)에서 열리는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는 주목할 만하다. 1929년 정해창 개인전부터 1982년 임응식 회고전까지 50여년 동안 한국 사진이 어떤 조건·환경 속에서 발전했는지 새롭게 고찰해 의미가 크다. 사진 200여점, 자료 100여점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획전으로, 쉽게 마련하기 힘든 보기 드문 사진전이다.

사실 한국사진사를 다루는 대규모 기획전은 여러 이유로 쉽지 않다. 사진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데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소장·관리·자료의 부실, 빈티지 프린트의 한계는 물론 아직도 소유권·저작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여전해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 소장품에 개인·기관 소장품들까지 모은 전시는 그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시는 한미약품을 모기업으로 한 가현문화재단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동에 미술관을 신축하고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재탄생한 개관 기념전이다. 국내 최초이자 한국 대표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관장 송영숙·사진가)의 내공, 자부심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정해창의 작품으로 시작해 먼저 1920~1930년대 사진들을 살펴본다. 회화주의 사진(살롱사진)이 중심이었지만 ‘신흥사진’으로 불린 모더니즘 사진에 대한 사진가들의 관심도 엿볼 수있다. 1930~194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사진가들에게 공모전 입상은 사회적 인정, 예술적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형록·임응식·김정래·최계복·정도선·구왕삼·정인성 등 당시 각종 공모전 수상작들을 만난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응식의 포토그램 습작1 부양(1933,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이형록의 전원(1934, ⓒ이명민), 임석제의 반출(1948,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소장

해방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은 여느 분야처럼 사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극단적 이념 대결과 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사진계는 기존 회화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의 객관적 기록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룬다. 르포르타주(르포)도 부상했다. 사회의 부조리, 전쟁, 노동현장, 농업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조짐 등 있는 그대로의 현실·현장을 담아내는 것이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을 다룬 이경모, 전쟁터나 전쟁에 따른 고단한 삶을 기록한 임응식·이명동·구왕삼·임석제·임인식 등의 작품은 당시 사진계를 잘 보여준다.

구왕삼의 작품(1950년대, 동강사진박물관 소장, ⓒ구경훈, 위 사진)과 임인식의 6.25전쟁-군번없는 학도병(1950, 청암아카이브 소장,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제공
이해선의 명암 (1950년대, 개인소장, ⓒ이길주, 위 사진)과 이해문의 제일보(1957, 개인소장, ⓒ이성주). 뮤지엄한미 제공

1950~1960년대 해외 공모전들도 사진사에 영향을 준 제도적 조건의 하나다. 사진가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프랑스·영국 등의 해외 공모전에 적극 참여했다. 국내 공모전 심사의 불신, 문화 선진국에 대한 선망 등에 따른 것이다. 전시장에는 국내 사진가의 최초 해외 공모전 입상(19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으로 알려진 임응식의 ‘병아리’를 비롯해 김한용·박영달·이해문·한영수·배상하·최민식 등의 작품과 관련 출판물 자료가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이어 ‘인간가족’전(1957년)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등의 영향을 살핀다. 신한국·김종헌·김테레사·한정식·홍순태·정진필·배동준·육명심·차용부 등의 작품을 만날 수있다. 여기에 리얼리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고민·시도한 ‘싸롱아루스’와 ‘현대사진연구회’의 이상규·김형오·황규태 등의 작품들도 선보인다. ‘인간가족’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세계 순회전의 하나로 한국을 찾아 42만명의 관람객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규태의 빅 브라더(1968, 몽타주, 작가소장, ⓒ황규태, 왼쪽 사진)와 김종헌의 격정(1965, 개인소장, ⓒ김선미). 뮤지엄한미 제공
강운구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수분리(1973, 뮤지엄한미소장, ⓒ강운구, 왼쪽 사진)와 홍순태의 갈치 (1971, 개인소장, ⓒ홍성희). 뮤지엄한미 제공
육명심의 사별(1974, 작가소장 ⓒ육명심, 왼쪽 사진)과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연작)(1978, 작가소장, ⓒ차용부). 뮤지엄한미 제공


1960~1970년대가 되면 사진가들은 공모전을 넘어 개인전, 출판 작업에 활발하게 나선다.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 등을 비롯해 서순삼·이해선·전몽각·강운구 등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통문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고건축물·유적·명소를 촬영한 작품들이 쏟아진 것도 이 시기다.

전시장 한쪽에는 기획전과 별개로 역사적 사진들이 나와 있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수장고와 접해 마련된 전시공간에서는 황철의 1880년대 사진, 고종·흥선대원군 초상사진, 최초의 여성사진가로 알려진 이홍경의 작품 등이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은 이번 기획전을 통해 한국 사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1920년대 이후 근현대의 다양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있다. 사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송영숙 관장은 “한국 사진사 정립을 위한 소중한 기회라는 책임감으로 이번 전시에 지난 20년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며 “전시 성과를 사진계, 문화계가 공유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와 연계한 세미나도 마련돼 2월 11일에는 ‘미술관·박물관의 사진 컬렉션과 사진의 진본성’을 주제로 제2차 세미나가 열린다.

뮤지엄한미 삼청은 소장품(2만여점) 보존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저온·냉장 수장고도 갖췄다. 또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진은 물론 설치와 영상·사운드 전시도 수용가능하며, 관람객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비움의 구축’이란 건축철학으로 유명한 원로건축가 민현식 대표(기오헌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미술관은 개관과 더불어 건축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시는 4월16일까지.

한국 최초이자 대표 사진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거듭났다. 사진 왼쪽은 신축 개관한 뮤지엄한미 삼청전경(ⓒ김재경)이다. 오른쪽은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뮤지엄한미 삼청의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경향신문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원로사진가, 왼쪽 네째 이경모선생, 다섯째 임인식선생, 일곱번째 이해선선생, 열번째 성두경선생 / 임인식사진

인사동에 ‘눈빛사진산책’ 갤러리인덱스‘가 개관했다는 사실은

인사동에 불어오는 한 가닥 봄바람이 아니라 사진바람이다.

 예술 일번지에서 사진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사진가들이 인사동거리에 나섰다.

사진가들이 인사동을 드나들 때는 시인이 몰려들던 천상병선생의 ‘귀천’시절보다 훨씬 이전이다.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1959년, 종군기자로 활동한 임인식선생께서 관훈동에 사진전문 갤러리인 '신한화랑'을 개관하며 비롯되었다.

임인식선생을 비롯한 성두경, 이해선, 이경모씨 등 작고한 원로사진가들이 자주 회합한 장소였다.

 

임인식선생게서 찍은 1953년의 인사동 거리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진 문화 발전을 도모하며 사진 아카이브 개념을 선도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사동에 최초의 사진 화랑을 만든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옛 인사동 예총회관 앞 포장마차에서... 좌로부터 고영준, 조문호, 윤재성, 유성준

내가 부산에서 올라와 인사동과 인연을 맺은지는 1980년도 였다,

그 이전에 있었던 사진가들의 인사동 왕래는 알 수 없으나 남인사마당 맞은편 ‘예총회관’에

사진협회가 있어 사진인의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예총회관’에서 가까운 건물에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가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서... 고영준씨와 정영신씨

신작가로 불린 신희순씨가 운영한 ‘꽃나라’는 많은 사진인들이 몰렸다.

그곳을 왕래하는 사진인들이 ‘진우회(초대회장:양은환)’란 사진동아리를 만들었으니,

진로회 아닌 ‘진우회’가 인사동을 거점으로 활동한 최초의 사진 모임이었다.

 

'85동아미술제' 시상식에서, 좌로부터 고영준, 신희순, 양은환, 홍순태, 조문호, 정동석, 유성준

‘꽃나라’를 운영한 신희순씨는 참 성실하고 착한 분이었다.

촬영자의 뜻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프린트해 신작가란 별명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암실에서 인화하는 걸 보면 귀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래된 시커먼 약물에서 건져내는 인화지에 상이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옛 진우회 회원들이 인사동에서 만났다., 좌로부터 유성준,이혜순,정용선,김종신,목길순,김흥묵,하상일,최성규,배창완,조문호

모든 게 정해진 데이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감으로 결정하는데,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몽타쥬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한번은 하이포 약물통을 비워 보니, 약물에 쥐가 빠져 죽어있었다고 한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린 박옥수씨 개인전에서 장사익씨가 축가를 부르고 있다

‘꽃나라’ 신희순씨의 인화는 콘트라스트가 강해 사진 계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인화 가격이 재료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싸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주변에서 찍은 기념사진들은 맡겼으나, 필름 현상만은 맡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프린트된 사진들이 공모전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 줄줄이 당선되는 것을 어쩌랴!

명암이 강하면 일단 눈에 먼저 들어오니까...

 

인사동에 촬영 나온 안00, 이용정씨와 이기윤씨

‘꽃나라’ 암실에서 탄생한 대상 작가는 한 둘이 아니었다.

양은환씨와 이기윤씨가 국전에서 바뀐 '한사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윤 옥, 이혜순씨는 ‘동아살롱’ 금, 은상을 수상하는 등 주요 공모전을 ‘꽃나라’에서 휩쓸었다.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권철개인전에서,,,이규상, 김지연, 김남진, 정영신, 권철, 곽명우, 엄상빈 등

그러나 ‘꽃나라’를 운영한 신희순씨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토록 건강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은 바람이 통하지 않는 암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약물중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진이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인사동 거리에서... 좌로부터 김보섭, 정영신, 한정식선생

아무튼, 만 명이 넘는 공룡집단이 된 지금의 사진협회 회원 모두가

작가의 주관이 결여된 공모전이란 과정을 거쳐 모였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 수상전에서,,,좌우로 김남진씨와 이규상씨가 있다.

이웃한 낙원동에는 민태영씨가 운영한 ‘한국사진학원’이 있어

지도교수로 있던 성낙인, 유동호씨도 종종 나타나셨다.

 

인사동 '양반집'의 원로 사진가 오찬모임, 좌로부터 한정식, 이완교, 이명동, 차용부, 황규태, 이기명

‘꽃나라’에 자주 방문한 사진인으로는 원로사진가 김대현, 정철용씨를 비롯하여

고영준, 양은환, 유성준, 김계산, 정동석, 정영신, 하상일, 이수영, 정용선, 윤 옥, 김종신, 박만재, 정철균

이혜순, 안영상, 변홍섭, 이기윤, 윤재성, 김정혜, 김순자, 민정진, 윤 옥, 고 헌, 최수영, 최성규

진대원, 배창완, 한상근씨 등 오래되어 이름도 가물가물한 많은 사진인들이 드나들었다.

 

인사동 벽치기골목의 '유목민' 에 모인 이광수, 한금선, 성남훈씨, 김문호씨 전시뒤풀이에서...

저녁 무렵이 되면 인사동의 삼겹살집이나 시골집에 모여 앉아

사진협회 비리를 안주 삼아 회포를 풀던 추억들도 아련하다.

 

'부산식당' 전시뒤풀이에서 고헌씨가 춤을 추고 있다. 옆엔 전상삼씨가 앉았다.

85년도 무렵 ‘귀천’이 생겨나며 사진인보다 문인이나 화가를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분으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선생이 계셨고,

뒤를 이어 김동수, 이계익, 심우성, 강 민, 채현국, 황명걸, 이호철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적음스님에서 부터 강용대, 김종구에 이르기까지

전설처럼 인사동을 떠돌던 많은 분들이 이승을 하직했다.

 

옛 ;실비집'에서 찍은 기념사진.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김종구, 김민경씨

김종구씨는 수시로 '실비집'이나 '시인통신'에 들려

오가는 거지 예술가들 술값을 도맡았으니,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육명심, 이명동, 한정식선생, 뒤에 이완교씨와 전민조씨도 보인다

87년도 '민주항쟁' 시절엔 김종구씨에게 필름도 많이 얻어 썼다.

필름이 떨어 져 인사동 ‘귀천’에 죽치고 있으면 체류탄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와

진토닉 한 잔으로 분노를 삭혔다.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김영수 유작전에서.. 좌우로 곽명우씨와 정범태선생

박한웅씨도 한 때 인사동을 풍미했다.

사진가는 아니지만 당시 '사협' 회보 편집장으로 일하며

 사진판과 인사동 패거리를 오가며 여러가지 일화를 만들었다.

 

'실비집' 골목에서.. 좌측이 박한응씨고 그 옆은 조해인시인

사진인 모임은 술값을 똑같이 나누어 내지만, ‘실비집’ 술자리는 돈 있는 사람이 냈다.

돈 낼 사람이 없으면 외상도 통하는 인간적인 면이 참 좋았다.

 

인사동 '초당' 앞에 선 주명덕 선생

주명덕, 육명심선생도 인사동을 자주 찾으셨다.

주명덕 선생은 ‘초당’이 단골인데, 차보다 초당 보살이 더 좋았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갤러리 나우' 옆에 사진가들이 모여있다.

육명심선생은 ‘갤러리나우’를 기점으로 '전각갤러리' 등 들리는 곳이 많았는데,

한번은 ‘백상사우나’까지 따라붙은 적이 있다.

목욕사진을 찍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경찰관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사동 '백상사우나'에서 찍은 육명심선생

인사동은 예술단체가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생겼고, 88년에는 ‘민예총’이 건국빌딩에 둥지 틀었다.

 

인사동거리에서...한정식선생과 이완교선생

94년에는 고 홍순태선생이 총대 맨 ‘민사협’이 북인사마당 크라운베이커리 2층에 자리 잡으며,

예술 판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졌다.

 

인사동 '쌈지'를 배경으로 포즈 취한 김영수씨

김영수씨가 주도적으로 이끈 ‘민족사진가회’는 정범태, 주명덕, 홍순태, 이창남, 박옥수,

이갑철, 김광수, 양성철, 김영태, 정인숙씨 등 많은 사진가를 규합하여 활동했는데,

정기적인 기획전 외에도 한국사진사를 대표하는 굵직한 기획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인사동 '관훈미술관' 앞에 선 정인숙씨

인사동에서 거주한 사진가로는 김영수, 정인숙씨가 유일하다.

‘민사협’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콧구멍만한 방 하나와 암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영수씨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민사협’은 1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물 같은 그 잡동사니와 집기들은 잘 있을까?

 

인사동 '이즈갤러리' 앞에서 만난 곽명우씨

그 당시 곽명우씨는 ‘민사협’의 행사 기록을 맡아 사진전이 열릴 때마다

전시장을 들락거렸으니, 누구보다 인사동과의 인연이 많은 편이다.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권태균사잔전에서... 좌로부터 박옥수, 정범태, 권태균

사진 모임에 끼이지 않는 사진가로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씨와

곤충사진가 이수영, 자유기고가로 활동한 이만주, 하형우, 김문호씨가 전부인데,

김문호씨는 이구영선생의 ‘이문학회’ 회원이라 주기적으로 인사동을 들락거렸다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에서..

2000년대의 인사동은 사진의 전성기였다.

2003년 김영섭화랑이 생겨나며 일본의 호소에 에이코사진전이 개관전으로 열렸고,

2006년은 ‘갤러리 나우‘의 개관에 이어 2007년은 ’갤러리룩스‘도 개관했다.

 

'갤러리나우'에서 열린 박진호씨의 '내가 저달을 훔쳤다'전에서 박진호씨가 양재문씨를 소개한다.

인사동에 사진전문화랑만 세 곳이나 생긴데다, 돌아가신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밝은방’과

사진평론가 진동선씨가 기획한 ‘하우포토’도 인사동에 있었다.

'밝은 방'에서는 한정식선생 제자인 김정일씨의 사진강좌도 있었다.

 

한정식선생의 작업실 '밝은 방'에서.. 옆에 안미숙씨도 있다.

그리고 한정식선생께서 정기적인 사진인 모임을 만든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 외에도 가까운 분들과 신년 모임을 갖는 등

틈틈이 사진가들을 인사동으로 불러 모아 친목을 도모했다.

 

'양반집' 오찬회, 좌로부터 유병용, 한사람 건너 이명동, 한정식, 이기명, 김녕만,이완교, 황규태선생

초청하는 인사로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황규태, 이완교, 차용부, 구자호,

최재영, 유병용, 김녕만, 김영수, 윤세영, 이기명, 최경자, 이규상, 전민조, 김보섭, 이재준,

김생수, 엄상빈, 정영신씨 등의 사진가들이 인사동 ‘양반집’이나 ‘수연’에서 주기적으로 만났다.

 

'양반집' 오찬모임, 좌로부터 이완교, 최재영, 이명동, 구자호. 한정식. 유병용, 이기명, 김녕만씨

2011년부터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상한 거리로 서서히 변해가며 인사동의 사진 문화도 퇴행 길에 접어들게 된다.

 

김영섭씨가 '김영섭화랑에서 포즈를 취했다. (장성용사진)

인사동에 살가도와 브랏사이, 브레송, 빌 브란트, 로베르 두아노, 로버트 프랭크, 게리 위노그란드 등 세계 사진사에 남을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유치하여 사진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김영섭화랑’이 먼저 문을 닫았고, 2015년에는 심해인씨가 개관한 ‘갤러리 룩스’도 옥인동으로 옮겨갔다.

 

'갤러리인덱스' 최건수관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옮겨간 ‘룩스’를 최건수씨가 인수하여 ‘인덱스’로 바꾸었으나, 대관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순심씨가 개관한 ‘갤러리 나우’도 사진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원룸 원포토' 캠페인을 벌이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2020년 2월, 14년간의 인사동 시대를 접고 강남으로 옮겨 사진에서 미술로 전향해 버렸다.

 

'갤러리나우' 이순심관장

인사동을 오가며 기록하는 사진인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이기윤씨와 김순자씨는 주말마다 ‘인사아트센터’ 앞에서 지나치는 이들의 표정을 망원렌즈로 포착했다.

때로는 정운봉, 이용정, 정철용씨 등 원로사진가들도 함께 있었다.

 

'인사아트센터' 앞이 촬영 대기실인가? 이용정씨와 이기윤씨가 보인다.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던 이기윤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는데,

그 많은 사진 자료들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인사동에 있었던 '김영섭화랑 '

한때 ‘한사전’ 대상 수상 작가라는 영광도 아무 소용없었다.

반평생을 사진과 살았으나 개인전은 물론 사진집 한 권 내지 않았다.

하기야! 팔리지 않는 전시나 사진집 만드는 것 또한 자뻑에 불과하니까...

 

인사동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방문한 인사동 사람들,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씨

89년에는 ‘툇마루’ 옆 건물 5층에 ‘카메라워크’란 취재대행 업소를 차려 ‘한국환경사진가회’ 사무실도 겸했다.

공덕동에서 충무로로 떠돌다, 2010년부터  정영신씨와 함께 '아트온'이라는 사진출력소를 다시 차렸다.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 사진수강생들을 데리고 온 최건수씨

그 외에 인사동에서 업소를 운영한 사진가로는 고미술점 '하가'의 윤옥씨와

출판사를 운영한 안영상씨, 그리고  ‘구름에 달 가듯이’란 카페를 운영한 김수길씨가 있다.

 

'갤러리인덱스'가 있는 인덕빌딩

그리고 건물주와의 오랫동안 분쟁에 휘말렸던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KOTE’에서

성남훈씨를 비롯한 젊은 사진인들의 활약도 이어지고 있다.

 

'나무화랑에서 열린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전시에서... 좌로부터 이규상,양시영

지금은 양한모씨가 운영하는 마루아트 ‘아지트’와

‘눈빛‘ 안미숙관장이 운영하는 ‘갤러리인덱스’가 사진갤러리로 남았다.

 

지난 11일, '갤러리인덱스'가 재 개관하며  ‘그해 겨울은 따뜻 했네’로 막을 올렸다.

1948년 겨울, 이름도 모르는 어느 미군이 촬영한 소중한 기록이다.

 

그리고 '눈빛'에서 출판한 800여종의 사진책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진귀한 사진집을 골고루 만날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잡는 일이 아닌가. 

인사동 가는 길에 32계단의 '눈빛사진산책' 하자.

 

‘그해 겨울은 따뜻 했네’는 2월 13일까지 열리지만, 인사동 사진바람은 계속분다.

 

G A L L E R Y I N D E X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45. 인덕빌딩 3층 02-722-6635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수연' 에서 열린 신년오찬회에서...
찻집에 들린 사진가들, 좌로부터 김생수, 이재준, 김보섭, 전민조, 이규상, 엄상빈, 한정식선생

 

전시작가 최치권 / 사진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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