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23.10.31

사진집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발간한 정영신 작가

지난해 충남 천안 온양온천역 인근에 열린 풍물오일장. 역 앞으로 나오면 광장이 보이고, 광장 너머 장항선 고가철도 하단부에 장이 열린다.

스스로를 '장돌뱅이(보부상) 사진가'라 칭하는 이가 있다. 바로 37년째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오일장을 모두 기록한 정영신(65) 작가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장터가 없지만, 그는 아직도 장터를 갈 때면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립고 설렌다고 한다. 배낭에 카메라와 시집 한 권, 수첩과 필기도구, 생수 한 병 챙겨 놓고 훌쩍 떠나는 정 작가의 이번 여행지는 '장항선' 일대의 장터들이다.

 

장항선은 충남 천안시 천안역과 전북 익산시 익산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과거 일제의 군사적 목적과 물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노선이다.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수탈을 상징하던 노선이지만, 이 길을 따라 생명력 넘치는 민중의 삶은 꽃피었다. 물건을 내다 파는 장꾼들과 가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시골의 지역경제를 이루는 근간인 '장터'를 형성했다.

 

천안역에서 충남 서천군 장항역까지 사이 스물한 곳에서 오일장이 열린다. 천안역에는 거봉 포도로 유명한 '입장장' '성환장' 그리고 독립운동의 텃밭인 '아우내장'이 있고, 삽교역에는 곱창으로 유명한 '예산 삽교장'이 열린다. 홍성역에는 '홍성장' '갈산장', 대천역에는 '보령 대천장' 장항역에는 '서천 장항장' 등이 있다. 가까운 거리에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과, 세계의 온갖 공산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대형마트가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충남 서천 특화시장에서 만난 장꾼 할매가 만 원을 받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최근 사진집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눈빛 발행)'을 출간한 정 작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정"으로 장항선 장터 여행을 택했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 챗GPT니, 메타버스니 하는 최신 기술로 모두가 디지털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에 불편함을 느꼈다. 후덕한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 길로 장터가 열리는 충남 내포 지역으로 향했다.

 

"장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물건을 사고팔 때 묘한 신경전을 목격해요. 100원, 500원에 얼굴 표정이 달라지죠. 그런 찰나를 보는 게 재밌어서 사진을 찍어요."

 

그가 처음 장터를 찾은 건 1980년대 후반이다. 신춘문예에 낙선한 뒤 사람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장터가 떠올랐다. 아무나 가도 되고, 사람 이야기가 흘러넘치며,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현대의 급속한 변화 속에 이제는 장터에도 사람이 없고 쓸쓸함마저 감돌지만, 그가 장꾼들을 만나며 채록한 이야기와 카메라로 담은 사진들로 인해 비로소 장터는 다시 생기를 얻는다.

 

책에는 장터 할매들이 펼친 난전의 농산물 사진을 비롯하여 장터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농촌의 한적한 들판 풍경 등 느려서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득하다. 호박, 쪽파, 열무, 고추, 가지, 여주, 마늘, 배추, 도라지 등 오랫동안 사람들의 밥상을 책임졌던 작물들은 마트의 매끈하고 평균적인 맵씨와 대조적으로 울퉁불퉁 개성 있게 생겼다. 봄이면 산나물 하나를 사는 데도 할매들의 '봄나물 강의'가 덤이다. 예산역전장의 한 할매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낸 사과 두 알을 내놓았다. 장터에서는 모든 물건이 소중하고 낭비가 없다.

 

"시장의 물건들은 모양새도 다르고, 물과 흙에 따라 물건들도 제각기죠. 할머니들이 봄부터 씨 뿌려 물 주고 애써 기른 물건은 나물 하나, 호박 하나만 봐도 달라요. 느리게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거죠."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풍경들.

책은 점점 사라지는 장터와 이 공간을 메운 장꾼들을 향한 연서다. 옛날에 보았던 풍각쟁이, 원숭이와 함께 나온 약장수의 익살스러운 농담에 환하게 웃는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장터를 찾을 때마다 "우리 죽으면 이 장도 없어지고 주차장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정 작가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번화했던 과거는 옛말이고, 장꾼 서너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켜야 하는데 내가 죽으면 이 장은 누가 지키나' 하는 마음으로 늙은 몸을 이끌고 꿋꿋하게 장꾼들은 가져온 물건을 내어놓는다.

 

"어르신들이 장에 나오는 건 세상을 만나러 오는 거래요. 장사는 '일'이 아니라 '삶'이고, 나를 살리는 일이라고요. 지금 장항선은 느린 열차가 달리지만, 5년 후에는 KTX처럼 고속 열차가 달릴 거래요. 장항선이 없어지기 전에 이 장터들에 가서 이야기도 나눠보면서 시골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는 건 어떨까요."

 

1987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영신 작가는 한국의 시골 장터를 기록해오고 있다.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 정영신 지음 / 눈빛 발행 / 224쪽 / 2만5,000원

 이혜미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이리저리 살다 보니 잊어버린 지가 한 참된 고향에 들리게 되었다.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최민식 선생 10주기 심포지엄 가야 하는데,

열차표가 매진되어 부득이 고물차를 끌고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차도 불안하지만, 나 역시 걸어 다니는 송장이지만 어쩌겠는가!

 꼭 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호텔 방까지 잡아 두었다는데...

평생을 천운에 맡기고 살아온 내가 새삼 걱정할 게 무언가?

걷는다면 오백 미터도 못 가지만, 차만 있다면 다음날 죽더라도 어디엔 들 못 가겠는가?

정동지 더러 ‘지루하지만 멋진 드라이브가 시작 된다는 안내맨트를 날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알처럼 차고 다니던 카메라 주머니를 두고 와 버렸다.

이미 시가지를 벗어났으나, 그냥 갈수는 없었다.

 

되돌아가 다시 네비를 보니, 도착시간이 심포지엄 시작 시간보다 15분 늦었다.

연료 넣으러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뿐, 도착시간 줄어들기만 바라며 냅다 밟았다.

단속 카메라 피해 다니느라 졸음 올 겨를도 없었다.

통행료 계산할 시간마저 아끼려고 하이패스로 빠져버렸는데, 정확하게 15분 늦었다.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타이틀로 열린 심포지엄은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발제로 열리고 있었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와 있었다.

오기 전에 발제문을 보아 내용은 알고 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정동지 메모 글을 넘겨보며 짐작할 뿐 자리만 지킨 것이다.

끝날 무렵에는 나 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데, 귀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입도 벙어리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관중공포증이 있어 사람의 눈만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벙어리 가슴 앓는 소리 몇 마디 지껄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아구찜 집에서 술 마시는 시간은 좋았다.

이차로 하숙집이란 술집까지 갔는데, 술 맛나는 이교수 구라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에 들어가니, 그때 사 누적된 피로가 덮쳐 정신없이 뻗어버렸다.

다음 날은 이 교수 안내로 해운대 달맞이 명물 대구탕 집에 가서 해장하는 호강도 누렸다.

 

행사를 주관한 김정근 감독과의 인터뷰 약속이 있어 김 감독 스튜디오도 갔다.

걱정되는지 이교수까지 옆에 지켜 섰는데, 김감독이 다른 방으로 가시란다.

아마 김감독이 나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동지는 있어도 괜찮다는 걸 보니, 보호자로 여기는 모양이다.

말은 잘 못 하지만, 김감독 묻는 대로 답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놓친 말이 있어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래도 할말이 남았다.

언젠가 하늘나라 계시는 선생님께 못다한 편지를 쓰고 싶다.

 

일은 마쳤지만 길바닥에 기름 쏟으며 부산까지 왔는데, 반 본전이라도 뽑아야 하지 않겠나!

인근에 있는 경상도 장을 찾아 가려는데, 하필이면 밀양 무안장에 가 잔다.

어린 시절에도 가본 기억이 있는 무안장은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이라고 안 바뀔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사람들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차에 자빠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안까지 와서 고향 산소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장터 마겥에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부곡 온천을 거쳐 고향 영산으로 들어오니, 초입의 만년교가 반겼다.

만년교 풍경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 김형권씨가 생각났다.

김형권씨는 쇠머리대기기능 보유자로 사진을 하셨는데, 주로 민속놀이를 찍으셨다.

삼일문화제를 찾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위해

한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나 농부가 만년교를 건너가는 모습을 연출해주기도 했다.

  만년교 위에서 쥐불 돌리는 사진들은 대개 김형권씨 도움을 받아 찍은 사진일 게다.

 

그리고 박만영씨가 운영했던 '녹지사진관'의 진열장에는 항상 가족사진 대신 흑백풍경이 걸려 있었다.

나도 60년대 중반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텅스텐  전구를 터트리는 텅스텐 스트로보가 멋 있었다. 

친구들 기념사진이나 찍으며 폼 잡고 다닌 것이다.

찍은 흑백필름을 박만영씨 사진관에 맡겼는데, 그 때 암실을 살펴 본 기억이 난다. 

 서정적인 농촌풍경을 많이 찍으셨는데, 그 사진 원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60년대 초반 창녕경찰서장으로 계셨던 이봉하씨도 사진을 찍었다.

이봉화씨는 주로 백로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한 번은 관용차 타고 늪에 사진 찍으러 가다 엠비시 기자한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으나, 

정년 퇴임하여 '사협' 이사장까지 하셨다. 

 

영축산 아래턱의 대암골이라 불리는 산소는 본래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감나무는 고목이 되어 다 넘어졌으나, 지팡이 짚고 버티던 제실마저 넘어지고 없었다.

 

몇 년 만에 왔는지 기억조차 아련하니, 조상님께 어찌 고개 들 수 있겠는가?

언제나 감싸주시던 할머니부터 술 한 잔 올렸다.

마음으로 빌었으나,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힘들게는 살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잘 산다고 말씀드리고.

산소에서 뵙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양상현교수가 미국 뉴저지주 럿거스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 낸

그리피스 컬렉션 사진전이 지난 18일부터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140년이란 긴 세월의 실타래를 되돌려 놓은 장면 장면들은

하나같이 낯설고도 친숙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풍경이 담긴 진귀한 모습이었다.

 

  지게에 걸터앉아 농가의 정겨움을 담은 사진에서부터

종로 대로에 우마차가 다니는 부감사진, 옹기를 가득 짊어진 옹기장수,

거울 앞에서 선 기녀 등 하나같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말로만 듣던 우리 선조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이 사료들은 그리피스 교수에 의해 수집되어 도서관에 잠든 것을 2008년 양상현 교수가 찾아낸 것이다.

 

일주일에 걸쳐 찾았다는 500여장의 사진 속 장면 장면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여 주제별로 분류한 후 몇 편의 학술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양 교수의 갑작스런 타계로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을

그의 부인 손현수 교수가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절감케 하는 소중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78년 동아일보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나

86년 서문당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등 몇몇 사진집에서

흐릿한 당시 풍경을 보긴 했으나, 확대 프린트된 사진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그리피스 컬렉션전은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30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말 뿐인 약자복지, 거짓 정권 물러가라.

매년 1017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에서는 세계빈곤퇴치의 날을 앞둔

지난 14일 오후2시부터 한 시간 가량, 사전집회를 가졌다.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사전집회에는 40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집회에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을 비롯하여 장애인, 노동자,

종교인 등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단체 회원들이 모여

주거권을 당장 보장하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코로나로 인하여 의료와 간병, 보육 등 사회서비스의 필요성은 확대되었으나,

윤석렬 정권의 사회서비스 확대 정책은 민영화로 기울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에게 전가하여 유지됐던 돌봄, 시장공급에 의존해 온 주거,

의료가 절실한 빈민들의 기본권 박탈 등은 더 이상 두고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의 재난은 일상화되었다.

이에 자본주의의 모순은 더욱 극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지난 해 우리가 경험한 반 지하 수해 참사, 최근 오송 지하차도 침수,

경북 산사태, 등 며칠 간격으로 반복하는 폭염과 폭우의

기후재난 일상화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심각한 상황이다.

 

올해 빈곤철폐의 날 슬로건은 주거권 지금 당장이다.

빈곤과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져, 이주대책 없는 재개발로

철거민은 속수무책 쫓겨나고, 반 지하 거주자는 수해로 목숨을 잃었다.

 

전세사기와 깡통전세는 가난한 사람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동자동 쪽방촌의 공공개발도 3년째 밀쳐놓고 눈치만 보고 있고.

장애인은 집이 아닌 시설에 감금하여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한다.

 

윤석렬정권은 약자복지를 정권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어려운 분들을 돕겠다고 강변하지만, 입에 발린 헛말일 뿐이다.

여태까지 약자복지 운운하며 가난한 이를 들러리 세워,

권리를 요구하는 약자를 탄압해 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거짓 정권에 철퇴를 내리고,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자.

 

이날 거리대행진에 앞서 열린 사전집회는

빈곤사회연대 정성철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집회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의 발언을 시작으로

노점상, 전세사기 피해자, 철거민들의 현장 발언으로 이어졌다.

 

박경석 빈곤사회연대 공동대표는 주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자며 독려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게으르네. 너 능력 없네. 너 못 배웠네. 너 여자네. 너 나랑 다르네.’

이게 바로 낙인이자 차별이고 격리이자 감금이라며 가난을 이유로, 못 배움을 이유로,

장애를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는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함께 싸우자고 촉구했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

안에서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를 통해 집을 계약했다. 그런데 전세사기의 책임은 피해자가 다 진다.

국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건 무이자로 대출해 줄 테니 성실히 갚아라고만 한다며,

국가 제도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임대인만 보호 하나?며 울분을 터트렸다.

이게 어떻게 개인의 거래? 윤석열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병찬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중랑지역장은 동대문구에서 벌어진 노점 강제철거 폭력을 고발했다.

지난 316일 새벽, 동대문구청에서 노점 리어카를 탈취해 갔다고 했다.

80대 할머니 노점상들이 어렵게 마련한 리어카를 도둑맞았는데.

노점상을 몰아낸 자리에다 화단을 깔아 놨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노점상의 생존권을 탄압하는 이필형 구청장은 각성하라,

끝까지 투쟁하여 노점상 생존권을 쟁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동자동 쪽방촌의 정대철씨를 비롯하여 홈리스 주거팀 활동가인

림보, 로즈마리, 요지, 달자씨가 등장하여 단막극을 선보였다.

 

줄거리는 정대철씨가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와 겪은 나날을 극화했는데,

동자동공공개발 발표에 따른 희망에서 점점 기대치가 줄어가며, 절망에 빠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로인해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과정을 연출한 극인데, 장애에 의한 정씨의 어눌한 말투가 웃프기도 했으나,

어느 연극이 삶의 현실을 토해 내는,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기후단체, 공공운수노조의 연대발언과 민중가수의 열창도 있었다.

 

조직위는 투쟁결의문을 통해 더 높아지는 건물이 더 깊어지는 절망만을 의미할 때,

우리는 세상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노점상이 사라진 도시를 발전한 도시라고 말하지 말자.

휠체어를 외면하는 버스와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는 노동을 묵인하지 말자.

가난한 이들을 빗물과 더위, 추위에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말자.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집회가 끝난 후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안국동, 낙원동, 종로2가를 거치는 2km가량을 거리 행진했다.

캐리어를 끄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탈 가정 청소년, 강아지와 함께 행진한 시민,

돼지 분장을 하고 동물권을 외친 활동가 등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다.

 

빈곤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우리의 요구

기만적인 약자복지 반대한다. 차별과 동정 말고 가난 이들에게 권리를!

기후위기 시대 주거는 기본권이다. 주거권 보장 지금 당장!

우리에게 더 많은 평등한 땅을, 공동 토지 민간매각 금지, 공공임대주택 확대!

 

사진, / 조문호

 

지난 12일은 이른 아침부터 아산에서 김선우가 올라왔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선우가 강제로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병원 두 곳에다 예약까지 해 두고,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다.

얼마 전에는 강제로 한의원에 데리고 가, 복에 없는 한약을 먹게 하는 등

선우의 극성은 정동지도 못 말릴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그날은 '경노의 달'을 맞아 용산구에서 마련한 찾아가는 어르신 문화행사'가

열리는 '갈월종합사회복지관'에 가기로 되어있어 입장이 난처했다.

 

  문화행사 취재보다 병원부터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신사동 이비인후과부터 데려갔다.

한 쪽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고, 한 쪽마저 청력이 가물가물한 심각한 상태다.

상대방의 입을 보고 말을 알아들을 정도의 귀머거리 행세를 한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귀에 문제가 있으면 어지럼증을 동반한다는 말에 보청기라도 구할 작정이었다.

 

 의사 앞에  죄인처럼 불려 앉았는데, 왼 쪽 귀는 귀지 덩어리가 막고 있어 귀지 빼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귀지를 녹여 간신히 빼 냈는데, 그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들리는 데는 전혀 도움 되지 않아 청력검사를 했더니,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5개월 후에 다시 청력검사를 해도 그대로라면

장애진단을 내려 줄 수 있다는 의사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텅 빈 장애인 주차구역을 보고도 차 댈 곳이 없어 헤매는 어려움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후 두 번째 예약병원인 '청구성심병원' 으로 갔다.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 곳이라 별도의 검진 없이 술과 담배를 끊으라는 유의사항만 들었다.

선우와 정동지는 집으로 가고, 난 행사장으로 내달렸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100여명의 노인들이 나와 공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판소리 수궁가가 장내를 뒤덮었으나, 추임새는 커녕 관람석은 조용했.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동자동 쪽방촌에서 온 노인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방에 갇혀 있는 것보다 사람들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다,

선물까지 준다는데 왜 오지 않았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듯해 더 짠했다.

 

  노래는 뭐니뭐니해도 신나는 유행가가 최고였다.

두 번째로 등장한 가수의 남행열차노래 가락에 노인들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예쁜 가수가 객석을 돌아다니며 손까지 잡아주니,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어 퀴즈 게임이 시작되었는데, “어떤 여자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갔는데,

그 여자를 세 글자로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대답하는 분이 없어 웃기려고 미친년이라고 말했더니 맞단다.

그다음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 온 여자를 네 글자로 말하라는 퀴즈가 나왔는데,

별의 별 답이 다 나왔으나 마지막에 손든 분의 아까 그년이 정답이란다.

 

  오후330분부터 시작된 노인잔치는 한 시간 가량 이어졌는데, 덕분에 건강곡물을 퀴즈상품으로 받았다.

겨울용 상의와 먹거리 등 얻어 온 선물도 한 보따리나 되었다.

 

자랑하러 녹번동부터 달려갔는데, 정동지와 선우는 짐 옮기느라 정신없었다.

계절이 바뀌면 발동하는 정동지의 세간살이 옮기는 병이 도진 것 같았다.

비좁은 집에서 옮겨보았자 거기가 거기건만, 그 무거운 책과 장을 이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가며

환경에 변화를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정동지의 취미생활은 못 말린다.

 

  다른 때는 내가 없을 때 혼자 낑낑거리며 하는데, 이번에는 선우 온 틈을 이용하여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선우는 늦게까지 붙잡혀 일하다 밤늦게 아산으로 떠나는 모습이 영 안 서러웠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방법은 건강하게 사는 것뿐인데,

몸이 송장이나 마찬가지니 이를 어쩌겠는가?

 

사진, / 조문호

 

 

 

박갑석 47 세

빈곤은 늙은이보다 젊은이가 더 문제다.

쪽방 살거나 노숙하는 사람 중에는 젊은 친구도 더러 있는데, 대개 아들 같은 4, 50대로

한창 자식 키우며 신나게 일할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거리를 떠돈다.

지병이 있어 장애등급을 받으면 쪽방이라도 들어올 수 있지만,

대개 주민등록에 문제가 있거나 장애등급을 못 받아 노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중에는 알콜 중독자가 많은데, 문제는 자포 자기하며 산다는 것이다.

 

모처럼 공원에 나갔더니, 짜장면 나누어 주던 봉사원들이 일을 끝내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지경학이는 짜장면을 먹다 말고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었다.

술 생각은 간절하나 돈이 없어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소주 한 병에 육포 하나 사서 같이 술 한잔했는데,

술이 들어가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불안감이 사라진다고 했다.

 

경학이는 이제 쉰 둘인데, 내가 오기 전부터 동자동에서 머문 오래된 사이지만.

사진 찍히는 것을 유달리 싫어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모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니, 사진을 안 찍는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구질구질한 모습을 남기기 싫어서 란다.

 

입버릇처럼 말해 온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며,

자존감 나온 얼굴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야 할 것 아닌가? 라고 말했더니,

자존감이 밥 먹여 주냐고 구시렁대며, 얼굴을 내밀었다.

 

지경학 52 세

그러나 기념사진은 찍을 수 있으나, 초상 사진은 다음에 찍자며 미루었다.

'사진에 술 마신 표가 나냐?'며 되물었지만,

정신이 온전할 때 찍기로 한 나름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며 설득했다.

 

그 와중에 이재안씨를 비롯하여 유정희, 정수일 등 여러 명이 등장했다.

유정희씨는 품속에 감추어둔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놓았고,

수일이는 배가 고프다며, 경학이가 먹다 만 짜장면을 먹었다.

한 시간도 더 지난 짜장면이라 불어 터졌지만,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었다.

 

수일이는 요즘 춘천에서 살고 있는데, 재미가 없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가오로 항상 나이방을 끼고 다니지만 도통 먹히지가 않는다며, 사진이나 멋지게 찍어 달랜다.

 

정수일47세

젊은이 초상사진으로는 지난 '추석 한마당'에서 찍은 강 호와 박갑석씨도 있는데,

다들 하루속히 안정된 일자리를 얻어 젊은 꿈을 펼치길 바란다.

 

강호 59 세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한 원로작가지원사업의 도움으로 시작했던,

버려진 사람들의 초상사진은 이달 말까지 찍은 사진으로 일단 마감해 정산하기로 했다.

 

장정된 초상사진은 오는 동짓날(1222)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 새꿈공원에서 나누어 드릴 작정이다.

오후 6시부터는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추모제'도 열리니, 찍힌 분들은 그 날 찾아가기 바란다.

공원에 먼저 가신 분을 위한 조촐한 추모의 술상도 마련할 테니,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이 초상 사진 나눔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람 없는 초상 사진을 없애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은 지속적으로 찍을 작정이다.

개인이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제도개선을 위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한평생 힘들게 살다 죽는 것도 억울한 데, 죽어서 까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건 인간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제발 인간을 모독하는 얼굴 없는 유령은 만들지 마라! "

 

사진, / 조문호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동자동 쪽방 촌에 한마당 어울림 잔치가 벌어진다.

 

그것도 자선단체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자리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 한 푼 두 푼 모은 잔치라 더 의미가 크다.

 

가난하게 살지만 서로 돕는 인정과 신명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주민이 술 마시며 어울려 놀지만, 한 번도 뒤탈 생긴 적도 없었다.

 

올해로 열두 번째인 동자동주민 한가위 어울림 한마당은 추석을 앞둔 지난 28새꿈공원에서 열렸다.

 

투호, 다트, 윷놀이, 노래자랑 등 민속놀이를 즐기며 음식을 나누는 쪽방촌 최고의 잔치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주관하는 한가위 한마당만은 빠질 수 없어 불편한 몸을 끌고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빨래줄에 사진을 걸어 두고 찍은 사진도 돌려주었지만,

전시를 그만 둔 요즘은 항상 사진을 갖고 다닐 수 없는 어려움도 따른다.

 

행사장에는 고향을 찾지 못한 분을 위해 차례상도 마련되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다.

 

한때는 서울역쪽방상담소도 명절이 되면 차례상을 마련했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 그만두었는데, 주민들이 차례상을 반기지 않는 이유가 뭘까?

조상을 모실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 아니면 기독교 신자라 그런지 잘 모르겠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 열린 한마당 어울림 잔치에서

다들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평소 보이지 않던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났다.

짝을 만나 떠났던 김규수씨도 되돌아왔고, 먼 곳으로 이사 간 강호씨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은 김상진, 박희봉씨를 만나 인화해 간 사진을 전해주었는데,

김상진씨는 만족해했으나, 박희봉씨는 컬러사진이 아니라며 시큰둥하여 다시 뽑아주겠다고 다독였다.

초상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 박갑석, 김봉구, 강 호, 양인숙씨를 찍기도 했다.

 

박갑석씨

민속놀이가 끝나니, 마당에 자리가 펴지며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송편과 묵, 파전 등의 명절 음식에다 돼지 수육까지 한 상 그득했다.

식사하며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공원에서 술이 허락된 유일한 자리인 셈이다.

 

봉사하는 분들은 음식 나르느라 바빴지만, 다들 이웃과 어울려 맛있게 먹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쪽방 주민들이 어려운 노숙인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잔치가 어디 있겠는가?

 

반가운 분들을 만나 인사 나누고 사진 찍느라 끼어들 틈도 없었지만,

문제는 아침부터 굶었으나 밥 생각은 물론 술 생각조차 없다는 데 있다.

이쯤 되면 밥숟가락 놓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즐거운 주연이 끝나자 마지막 순서인 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최갑일씨 사회로 진행된 노래자랑은 공원을 주름잡던 단골손님들 무대였다.

뭐니 뭐니해도 주민들의 인기 속에 신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노래와 춤이었다.

 

다만 천 원씩 내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분이 20명에 한정되어 아쉬웠다,

신청 순서에서 밀려난 주민의 안타까움이 곳곳에 묻어났다.

심지어 순찰하던 경찰관까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노래 부르지 못한 사람은 춤으로 신바람을 일으켰다.

다들 돈이 없어 그렇지 신명 하나는 끝내 주더라.

춤꾼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중 김봉구씨와 양인숙씨의 엉덩춤이 죽였다.

 

노래자랑이 끝나자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추측한 데로 이정애씨가 최고상을 차지하여 상품을 탔다.

노래 부른 사람만 상을 줄 게 아니라, 흥을 돋 군 춤꾼에게도 인기상 쯤은 줘야할 것 같았다.

 

잘 사는 것이란 결코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욕심 없이 사는 데 있다.

요즘은 서울시에서 실시한 동행 식권으로 밥 굶는 사람은 없으니,

신명 나게 놀고 즐기는 것이 최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년 추석에도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지만, 그때까지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다들 행복한 추석 보내며,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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