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보다 찍고자 하는 대상의 삶속으로 들어가 ...2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 

 

 

조문호의 ‘사람이다’ 전이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리고 있다.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열두 번째 마지막 작가로 열린 조문호의 ‘사람이다’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였다.

 

 

 
▲ 사진가 조문호

1년 동안 김남진(갤러리 브레송) 관장의 기획아래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 교수가 작가론을 쓰고, 결과물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1월, 고정남의 ‘불친절한 사진?’를 시작으로 최영진의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영욱의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 김보섭의 ‘인물과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 이재갑의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 제주도에서 국화빵 CEO로 나선 권철의 ‘독대(獨對), 문진우의 ’당신이 보지 못했던 부산의 모든 것, 신동필의 ‘부르지 못한 노래’, 이수철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강정효의 ’제주의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 김문호의 ’사진 문법‘ 에 대한 도전, 마지막으로 조문호의 ’사람이다‘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인을 찾아서’는 사진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 전시란 생각이 든다. 20년 전에 사진 유학파들이 만든 ‘한국사진 수평전’이 한국에 등장해, 만드는 사진이 한 때 유행했었다. 사진이 사진논리에 묻혀가는 것을 경계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많은 사진인들이 서양의 사조에 골몰하고 있을 때, 우리사진은 제대로 숨도 못 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진인을 찿아서’ 프로젝트는 한국 사진사를 다시 쓰는 의미 있는 기획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조문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하는 사진들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초창기 사진에서부터, ‘87 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인사동 사람들’, ‘장터 사람들’과 현재 찍고 있는 ‘동자동 사람들’ 에 이르기까지 한 주제에 10여점씩 묶어 선보이고 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산이나 불교상징 이미지 등 생업과 관련된 사진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일관되었다. 그 사진들은 지나치며 찍은 것이 아니라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살며 찍은 사진이다. 한 때는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기 위해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 방을 얻어 살았고, 성노동자들을 찍기 위해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굴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고 말했다.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순간적 찰나보다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전농동 588번지

한 때는 ‘동강’ 탐사에 참여하다 동강 주변에 사는 산골 사람들을 찍기도 했다. 당시는 동강 댐 논란으로 동강의 자연생태가 사회적 이슈였으나, 그보다는 그 곳에서 평생 살아 온 두메산골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87민주항쟁 사진들도 그 현장에 있는 사람에 집중되어 있다. 방독면을 쓴 청소부아저씨, 최루가스를 못 견뎌 종이로 코를 막은 수녀님, 십자가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박종철 열사 어머니 모습 등 슬프면서도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7 민주항쟁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쳐다 본 입상들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눈동자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애잔한 슬픔과 그리움을 머금은 사진의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감이 짙게 깔려있다. 그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다. 또한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되고 소통되는데 쓰여야 한다고 믿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인사동 사람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조문호 작가론을 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중략-

 

 

노숙인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劇)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 2013 장터 사람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존중하며 찍어 온 대상들은 하나같이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이다. 자신의 몸을 파는 성노동자, 첩첩산골에 사는 농민들,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 동자동 빈민들 등 모두가 사회적 약자뿐이다.

 

   
▲ 2016 동자동 사람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이제 칠순의 나이에 동자동 쪽방 촌으로 들어가 빈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에 대한 그의 집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자신의 삶보다 찍고자하는 대상의 삶이 더 우선인 것 같다.

  “나의 사진은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면 그만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도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2월12일 / 정영신기자

 

 

[브레인 미디어 / 스크랩]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사진작가 조문호는 사진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사진가로서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주로 아는 사람을 찍어왔다. 이런 작업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 조문호, 인사동사람들(천상병),1983.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람을 모르면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눌러 붙어 살며 찍어왔다. 그들을 알려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을 때 조문호 작가는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방을 얻어 살았다. 

 

▲ 조문호, 청량리588, 1985.

 

 

성노동자들을 찍을 때는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귤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조문호의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 조문호, 두메산골사람들, 2000.

 

 

조문호 작가는 올 추석 무렵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갔다. 그가 찍는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만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돈이 사람을 망치는 것을 일찍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그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택한 작업을 한 번도 힘들다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평소 일로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여겼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일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2016.

 

하지만 그 또한 가장이기에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랜 고집을 따랐지만, 한 가정을 지켜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단지 그 가치 판단은 먼 후대에 맡길 뿐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이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문호 작가의 사진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20161월부터 12월까지 열 두 차례에 걸쳐 전시된 사진인 찾아서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작가로 선정된 조문호의 '人本' 사진이 “‘사람이다조문호 이라는 제목으로 10()부터 20()까지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이 사진전은 조문호 작가의 전 작품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한다.

 

이 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이다.”

 

■ 전시개요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전시제목 : “사람이다조문호

전시일시 : 20161210()- 1220()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충무로) 02-2269-2613

개막일시 : 20161210() 오후5


 

[브레인 미디어]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조문호

 

 

 

 

 

 

두메산골 사람들 / 정선, 최돈연 2003

 

 

 

2016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인을 찿아서 12- 조문호論

 

 

'사람이다' 조문호 사진전 

 

전시일시 : 2016년12월10일(토) -12월20일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

초대일시 : 2016년 12월 10일 오후5시

 

 

  

 

조문호

: 人本

 

이광수 / 사진비평가, 부산외대교수

 

사진가 조문호는 올해 칠순이니 얼추 잡았을 때 인생 40 여년 가까이를 사진판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굴지의 사진 저널의 편집장이나 심사위원 등 웬만한 직함도 몇 가져보기도 했고, 위로는 사진계 1세대와 아래로는 사진계 2 세대에 낀 세대의 사진가이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데다, 사람 자체도 무골호인이라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술을 좋아하고, 형식이나 의례를 따지지 않아 그를 좋아하는 사진계 선후배가 들끓는다. 그런데 그가 40년 가까이 가진 사진에 대한 태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지가 그저 그렇고, 독창성이 어떻고, 그래서 직품이라 하기에는 어쩌고 하는 말을 할 뿐, 그가 사진으로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이는 없다.

 

어떤 인터뷰에서 조문호의 아내이자 동지인 사진가 정영신은 그를 이렇게 말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게 없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는다. 정말 어떤 일을 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이 말보다 그를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난, 찾지 못했다.

 

 

장터 사람들 (영덕 권정순) 2013

 

장터 사람들 (남원 박경순) 2013

 

 

1. 사진, 실존으로서의 행위

그는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되어 소통되는데 쓰이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가다. 자신의 사진이 여러 군데 많이 걸리고, 그 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품 값을 비싸게 책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높은 가격으로 한 두 점만 팔려 돈을 벌 수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보고 즐겼으면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거나, 사진으로 예술을 하기 위해 창의적 발상을 하거나 독창성을 계발하려 하거나 깊은 관념을 집어넣어 어렵게 해석하려 하거나 하는 따위의 작업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장터 사람들 (괴산 정숙현) 2014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이렇듯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그의 두메산골 사람들은 이러한 사진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애초에 그는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강원도 동강에를 갔다.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처음 계획은 동강 댐 건설에 반대하면서 그 일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정선에 머물렀으나, 정작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곳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그는 그 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정선에서 6년간 눌러앉아 그곳 사람들을 찍었다. 사회 문제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에게로 이었으니, ‘사람은 사진가 조문호에게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다. 그가 사람 자체에 매료당한다는 것은 그의 사진 스타일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메산골 사람들 /  삼척 김지석 2003

두메산골 사람들 / 정선, 최종대, 이선녀 2000

 

 

결국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예술이나 진보 운동과 같은 어떤 본질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 조문호가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행위다. 행위자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런데 사진가 조문호의 그러한 실존 행위는 그를 소유의 존재로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사람과의 소통과 그 안에서의 능동적 주체성을 찾으면서 사진을 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일곱 살 박이 아들의 눈물을 가슴에 묻으면서 가난에 몸서리치면서 아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가슴을 후빈다. ‘사람을 생각한다면서 가족을 등한시 하는 것에 대한 고뇌가 평생 무겁습니다.’

 

 

인사동 사람들 / 천상병 1983

 

인사동 사람들 / 김언경 1990

 

 

2. 사람, 세계의 중심

사람을 그렇게나 좋아 하는 것이, 사진가 조문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그 누구한테도 규제받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쓴 소리를 마구 던지는,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는, 그런 가난한 예술가 말이다. 조문호는 비록 한 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허기진 뭔가를 그 인사동 사람들을 통해 메웠다. 그 인사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한둘씩 세상을 떠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없어져 갈 때 그들과 나눴던 사람 냄새를 보존하기 위해 그들을 사진으로 박제해두고 싶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지천으로 깔렸던 그 정()과 우애를 담아놓고 싶었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 기억하게 하고, 가난한 예술인들은 사진에 남아 서로를 기억하도록 하고, 그래서 모두 소풍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나누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인사동 사람들 / 신경림 2006

 

사진가 조문호가 사진 평생을 사람에 꽂혀 카메라를 처음 들었던 때부터 사람을 중심으로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80년대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그리 하였듯, 사회 비판에 목소리를 냈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을 치열하게 작업하기도 했고, 사라져 가는 강원도의 산하를 아름답게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꼭 사람이었다. 그 시절 데모하는 현장을 많은 사진가들이 찍어댔지만, 조문호만큼 사람 한 사람 인물을 슬프면서도 재밌고, 웃기지만 뭉클한 사람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방독면을 쓰고 일에 지쳐 기대어 있는 청소부 아저씨, 매운 최루가스에 콧구멍을 종이로 틀어막은 근엄한 수녀님과 경찰 젊은이,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가슴에 달고 십자가를 한 손에 높이 들며 연신 눈물을 흘리는 명동성당 앞의 박종철 어머니’, 역촌동 가는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힘껏 박수를 치면서 시위 부대를 격려하는 이를 앙다문 어떤 아저씨 ... 그는 민주화운동 현장에서도 보이는 것이 사람밖에 없는 모양이다. 사람에 웃고 울고, 천상 사람 앓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팔자일 것이다.

 

 

 

민주항쟁 / 충무로 1987

 

민주항쟁 / 신촌  1987

 

민주항쟁 / 명동성당 1987

 

 

역시나 그랬다. 그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진가 최민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젊었을 때 음악을 좋아해서 고향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마을의 정미소를 개조해 음악 감상실을 차려 음악에 흠뻑 빠져 살다가 부산으로 올라가 남포동에서 국악 주점을 하였다. 그때 사진가 최민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찍은 최민식의 사진에 조문호는 완전히 빠져들었고,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목도하는 도리를 최민식으로부터 배웠다. 그렇지만 사진 찍는 스타일은 최민식과는 많이 다르다. 최민식은 대상에 대해 사진가가 개입하지 않는 채 사진을 찍는다. 소위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문호는 결정적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상의 움직임을 고정시키고 시선을 렌즈에 고정하도록 찍는다. 눈동자란 마음의 거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자르거나 후보정을 과하게 하는 따위 또한 하지 않는다. 사진에 나오는 지금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나중에는 다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사동 사람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다 그러한 그의 사람과 사진에 대한 관점이 깊게 반영된 것들이다. 천상병, 김영수, 신경림, 김언경, 심우성, 공윤희... 그들이 박힌 저 사진은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웃고 울고 떠들었던 술집, 찻집, 골목, 담벼락, 거리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는데 ...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조문호의 사진은 그 슬픔을 머금는다.

 

 

노부부 / 여의도 1990

 

완행열차 / 동해남부선 1982

 

사진가 조문호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사진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대해 날선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어른이다. 2015년도 사진계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문제 때도 조문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진가라면 그 거대 권력 앞에서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평소에 자신에게 많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원로 사진가 선배들에게조차도 거리낌 없이 비판의 메스를 가했다. 한국의 사진계가 인맥과 학맥에 휘둘려 그 썩고 문드러짐이 극에 달했고, 그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그렇데 된 데에는 당신들 원로 사진가들이 자기 제자들을 챙기기만 하지 옳지 못한 일을 한 데에 대해 따끔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라는 일갈이다. 가히 죽비 소리다.

 

그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진계가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금도를 지켜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최민식 사진상이라면 사람이 그 사진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적어도 최민식 사진을 폄하하는 자들이 최민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더럽히는 짓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 홍보에 혈안이 된 협성재단은 최민식의 이름을 빌어 최민식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유명한 사진가에게 상을 주기로 운영위원장과 짜고 부정한 짓을 했음이 드러났다. 사진가란 사람을 존중하고, 작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최민식 정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음에 대해 사진가 조문호는 분노한 것이다. 일부 심사위원은 그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사진가에게는 심장과 같은 을 스스로 파버린 것에 대해 그가 분개한 것이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말이다.

 

전농동 588 / 1984

 

3. 따뜻함, 대상과의 거리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전농동 588 / 1984

전농동 588 / 1985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그 명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이란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이란 순간적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 아닌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이다. 그가 처음에 이곳을 찍으러 갔을 때 그는 사회적 공간성의 의미로 이곳을 찍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서 사람을 찾아버렸다. 그래서 그는 소외라는 이념이나 588이라는 공간의 사회사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돈 벌면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의 사진집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그 여인들의 행위를 사회악으로 규정해서 일소의 대상으로 삼는 정부의 시책에 저항하는 몸짓인 셈이다. 그들은 윤리를 타락시키는 윤락녀가 아닐 뿐더러 우리가 구원해줘야 할 악의 무리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누이였을 뿐이다. 그것을 사진가 조문호는 사진으로 말을 한 것이다.

 

 

동자 동 사람들 2016

 

지금 사진가 조문호는 70 나이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2016년 추석 무렵 그는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 촌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사진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곳은 지금은 다 잃어버린 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과 한 식구(食口)가 되었다. 얼마 후 동료 사진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작은 사진전을 열고, 사진을 한 장씩 그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사진이 잘 나오거나 못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못 나왔다고 사진을 삭제해버리면 그 찍힌 사람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 누군가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느끼게 되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그는 동자동 사람들작업이 사진가로서 하는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니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 작은 콤팩트 카메라 들 힘만 있으면 그는 또 어딘가 힘없고 무시당하지만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그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나누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숙인 2016

 

 

 

 

 

 

 

 

 

   

 

 

 

  

 

 

 

 "그림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찍는 것이 다큐 사진, 소외 속 따뜻한 마음 담아내고파"


[서울문화투데이]2016년 07월 29일

인터뷰·정리 이은영 편집국장/임동현 기자


본지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많은 전문 예술인들이 직접 자신들의 현실을 기사로 쓰고 칼럼으로 쓰면서 독자들에게 문화의 현실을 알리고 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각 분야에서 활동 중인 이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대해 심도있게 전해주는 이야기는 문화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호기심을 갖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중 독자를 사진의 매력 속으로 초대하고 때로는 사진계, 나아가서는 문화계에 대해 쓴소리를 내는 작가가 있다. 사진작가 조문호. 지난해 '청량리 588' 사진전으로 다시 주목을 받은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진을 찍고,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후배의 사진들을 소개하며, 본지를 통해 문화계의 나아갈 길을 이야기해주는 예술인이다.


그의 옆에는 소설가에서 이제는 '장터사진 찍는 작가'로 더 잘 알려진 정영신 작가가 있다. 이들에게는 '내조'나 '외조'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들은 같이 움직이고 같이 행동하며 같이 생각한다. 비록 '다름'은 존재하지만 그들은 그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부부'에서 '동지'로 발전했다. 정영신 작가가 보여준 장터 사람들의 표정과 조문호 작가가 보여주는 성노동자들의 애환은 얼핏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하루하루를 따뜻한 마음으로 살려는, 우리들의 부모이자 할머니, 누나이자 여동생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렇게 어느 여름날 오후, 본지는 부부를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식 인터뷰'라기보다는 편안한 대화의 시간이었고 '작품 세계'니 '미술계의 현실'을 논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두 '예술 동지'의 인생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편안했기에 더더욱 좋은 이야기들이 나왔던 그날의 대화를 여기에 옮긴다



▲ '찍사 본능!' 기자가 사진을 찍는 사이 조문호 작가가 카메라로 기자를 찍었다. 역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조문호 작가는 어떻게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


조문호(이하 '조')  : 최민식 선생의 작품을 보고 사진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내 촛점은 사람이었다. 작년에 다시 전시한 588 사진도, 그 당시 ‘동아미술제’공모전 주제가 직업인이었기에 접근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상을 받아, 그 곳에 머물며 다시 찍게 된 것이다. 그 전시로 세상의 주목은 받았으나 그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다가 동강 댐에 반대하며 정선에 머물렀으나, 그 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웃음)


정영신 작가는 본래 소설가로 알려졌고 '장터사진 찍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작업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정영신(이하 '정) :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로 갔다. 장터는 열려있는 공간이라서 누구나 갈수 있다. 더구나 난 산골사람이다 보니 장터가 내가 놀던 시골마당처럼 편안했다. 장터에서 만난 노인들 얼굴속에서 그사람의 희노애락을 읽을수 있어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지금은 장돌뱅이가 된 것이다. 1986년부터 시작해 얼마동안은 장터바닥에서 장터사람들과 장에 나오는 사람들과 놀았다. 그런데 내눈에 장터가 변화는 것이 보여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당시 장터는 우리일상과 똑같았다. 주위에서는 재미없는 작업을 한다며 핀잔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장터에 가면 고향에 두고온 당산나무가 보이고, 당산나무 평상에 앉아 긴 곰방대로 쌈지담배를 피우는 외동할매도 보였다. 땅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할매들과 놀다보면 고향에 온것처럼 내 정서와 딱 맞았다.


1986년부터 시작한 장터는 내 놀이마당이다. 지금 딱 30년째 장터를 다니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옛날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장터는 여전히 열린다. 다만 사람이 바뀌고 물건들이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 들어 80년대 사진을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사를 보는 것 같다. 왜 좀 더 디테일하게 작업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을 다 촬영해 뿌듯하다.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그래서 요즘은 여유있게 촬영하러 다닌다. 그 지역의 햇빛과 바람과 땅의 냄새를 담아보려고 한 장터에 오래 머물러 작업하는 편이다.



▲ 사진가 조문호 정영신 부부


지난해 수상자 자격 논란을 빚었던 최민식사진상이 올해는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문호 작가가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다.


조 : 제일 큰 문제는 그 상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심사하는 이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우습게 보는 데 있다. 상도 최민식선생의 휴머니즘 정신을 계승하기보다, 우아한 예술사진에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지 것 끼리끼리 나누어 먹던 갑질을 재탕하다 결국 사단이 생긴 것이다. 심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 둘 밝혀졌으나 다들 묵묵부답이다. 상을 만든 ‘협상재단’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잘 못된 운영으로 문제가 제기되면, 공청회라도 열어 개선해 나가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다 상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런 무책임한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심지어는 운영위원장과 협성재단 측의 밀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혹도 사고 있다.



조문호 작가는 얼마 전 바이칼을 다녀오셨고 본지에 바이칼을 다녀온 글을 기고하기도 하셨다. 현재 그와 관련해 전시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조문호 사진가

조 :  바이칼. 일단 기가 센 곳이라고 생각했다. 무속적인 신기가 느껴졌다(웃음). 여건이 된다면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아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획전 진행에는 다소 차질이 있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해 다이칼과 관련된 작품을 작가 당 한 두 점 밖에 제작하지 못한 억지춘향 격이 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작가들의 제작비를 여행경비로 전용하는데도 불만이 많았다. 다른 분들은 여유가 있어 여행 다닐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사람에서 찾은 나는 바이칼에서 남자 알몸을 찍었는데, 지방이라는 이유로 그 것도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결국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전시는 했지만, 만약 표현의 자유에 제약을 받았다면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말씀대로라면 기획자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도 조문호 작가가 기고한 글을 보면 다큐 작가들이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그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작가들의 삶이 힘든 상황인데...


조 : 상은 그런 사람들에게 줘야한다. 어렵게 살면서 자기 스타일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정 : 한국에서 소신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잖나. 제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막노동해서 작업하고 돈 모아지면 사진 찍는 이들이 많다.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봐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 산다. 이는 제도로는 고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어느 정도 자신의 작품을 지키기위 해 막노동을 선택한 것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렵더라도 활동하는 이들을 돕고 싶다. 그래서 남편에게 소외된 곳으로 가라고 떠밀고 있다(웃음). 혼자가 안되면 같이 가서 할 것이다.


두 분의 사진을 보면 '인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물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정 : 장터는 열린 공간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에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다 들어있다. 사람을 알고 싶으면 도서관 대신 배낭하나 메고 시골장터로 가 할머니와 얼굴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두꺼운 책에서 얻지 못한 지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이다.


조 : 전혀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정면으로 찍어보면 차이가 확연히 난다. 결국 상대와 얼마나 소통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것이다. 사람을 찍으려면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찍히는 사람의 눈빛을 중시하며 정면사진을 많이 찍는다.


정영신 작가의 사진을 보면 따뜻한 느낌이 담긴 사진이 많다.


  
▲ 정영신 사진가/소설가

정: 장터사람들은 스스로 소외당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이들도 많다. 겉으로 보면 가난하고 소외된 듯 하지만, 몇 천원, 몇 만원을 벌기위해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숭고함이 묻어있다. 장터에 나오는 사람들은 옛날 우리의 정서와 한을 갖고 있어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자체가 따뜻하다.


경상도 장터에서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을 본적이 있다. 중풍걸린 남편을 리어카로 장터까지 데려와 장사하면서 온종일 남편을 보살폈다.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이고 친구를 불러와 어눌한 남편과 이야기를 시키면서도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던 할머니 모습이 한동안 눈에서 떠나지 않더라. 노부부가 살아내는 삶을 보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오히려 장터에 가면 내가 더 많이 배운다.


사진을 찍다보면 간혹 촬영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을텐데


정: 장터에 가면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는다. 장보러 온 사람처럼 온 장안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돈다. 친해지면 오후에 사진을 찍는다. 농사얘기부터 시작해 자식이야기 하다 보면 금새 친해진다. 그다음부터는 다 응해주는 편이다.


조 : 사람을 찍으려면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예전에 588 사진 찍을 때도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결국 나의 진정성을 읽고는 허물없이 촬영에 임해주더라.


조문호 작가가 이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 "사진은 편하게 찍어라"라고 말했더라. 사실 말은 쉽지만 막상 편하게 찍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조 : 다들 근사하거나 예쁘게 찍으려 하지만, 그게 안 좋다. 그 사람의 개성과 마음이 읽혀져야 좋은 사진이다. 요즘은 인위적으로(예를들어 포토샵 등) 시선을 분산시키는 장애물을 쉽게 제거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가 말하려는 포인트만 확실하면 그대로 두어라, 나중에 그 배경이 역사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다큐사진은 결국 정확한 기록이다.


정 : 요즘 뉴스도 너무 특종 위주로 가는 것 같은데 사진도 그런 것 같다. 있는 그대로 찍는 토대가 있어야할 것 같다.


두 분에게 있어 '카메라'란


정 : 내 친구다. 어디든 같이 갈 수 있어서 좋다. 종종 카메라를 놓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차표를 두 장 사거나 카메라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 정도로 친구다.


조 : (콤펙트 카메라를 꺼내며) 이 카메라로도 충분히 작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게 없어지면 정말 내 몸 하나가 없어진 것 같고 불안하다. 언제든 찍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비싼 카메라는 아니지만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부부'를 넘어 '예술적 동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다면


조 : 이해심이 많다. 정말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지(웃음)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웃음). 우린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것은 밤낮으로 함께 다니며 쌓은 동지애가 힘이 된 것이다. 마누라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사진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도 간섭도 하지 않는다. ("더 좋은 부분도 있지 않냐?는 질문에) 조(팀워크)가 너무 잘 맞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촬영가자면 반대하지 않는다. 어려운 형편에 전시를 하겠다면 한 사람은 말려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주변에서는 우리 내외를 불안하게 보지만, 우리는 오늘만 있지,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정 : 남편을 보면 집중을 잘한다. 작업에 온 정열을 바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간혹 안좋은 쪽으로 정열을 바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웃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는다. 정말 어떤 일을 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멋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고 있고 많이 배운다. 그렇기에 터치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을 다 촬영한데는 남편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난 아직까지 운전을 못한다. 기차타고 버스타고 혼자 다녔으면 아마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후배 사진가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조 : 간혹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답시고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말도 안 된다.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하는 짓이다. 생태사진은 물론 풍경사진도 자연 그대로 찍어야 한다.


정 : 접근 방식이 다 다른 것 같다. 장터의 예를 들자면 종종 사람을 찍는 것이 아니라 풍경 찍듯이 그냥 찍고 인물을 찍어도 그냥 바쁘게 찍고 돌아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면서 찍기만 하는 것이다. 10분이라도 찍기 전에 미리 장에 대해 알고 어떤 인물을 찍어야할지를 생각해야하는데 아쉬움이 있다.


조 : 그림처럼 멋지고 예쁘게 찍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져 그런 것이다.


현재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조 :내년이 민주항쟁 30주년이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구입하겠다고 했는데, 마지막 결제라인에서 보류되었다고 하더라.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돈으로 할 일이 많은데... (웃음) 오는 9월에는 내가 칠순이라고 후배가 창원에서 전시를 열어 준다고 했으나, 전시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그리고 작업은 쭉 인사동을 기록해 왔으나, 최근 종로에서 몸을 팔며 생활하는 새터민들이 있다고 들어, 그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8월하순경에 80년후반에 찍어놓은 옛날장터사진집이 '눈빛출판사'에서 나온다. 사진집이 나오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8월24일부터 개인전을 할 계획이다. 개인전을 마치면 시장 안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 시장이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만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사계절이 살아있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다. 장돌뱅이로 시작했으니 평생 장돌뱅이로 남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일전에 조문호 작가가 "작품값을 비싸게 받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조 : 나는 내 사진이 많이 걸리고, 그 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품 값만 비싸게 책정해 두고 팔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나? 난 아무 일을 안 해도 국가에서 20만원이나 나온다(웃음). 집이 오래되어 주저앉을까 걱정이지만, 정선에 마음 편히 지낼 곳도 있다. 기름 값 때문에 정선도 한 달에 한 두 번 밖에 못 가지만, 자연이 텃밭을 잘 보살펴주니 걱정할 것도 없고...(웃음)


정 :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산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다.


후세 작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는지


조 : 그건 세월이 지나야 아는 것이고, 지금은 열심히 기록할 뿐이다. 이젠 사진 정리하기도 바쁜데,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다. (웃음).


정: 누가 평가를 해주는 것보다 우리 삶의 원천인 장터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걱정이다. 우리부부가 다른 욕심은 부리지 않지만, 딱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은 있다. 정선 집터에 장터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이것도 부질없는 것이려니 하지만 이런 바램이 오늘을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글 / 최형순[미술평론가]


작가는 홀로 있는 개인이 아니다. 미술에서의 작가 역시 다르지 않다. 사회에서,역사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그러기에 나른한 데카당스와 근거 없는 보헤미안으로서의 작가를 기대하지 말자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하우저는 그렇게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 우리의 현실을 줄기차게 말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백두대간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작가로 살았다는 것은 광복 70년의 무게만큼이나 미술에서도 뜻 깊다. 그들이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하는, 우리의 ‘산과 함께’ 담은 ‘70년’은 어떤 것일까. 진정한 강원미술의 의미를 물어도 될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예술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온 몸을 던져 살아낸 작가의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고 믿는다. 예술이 어떤 혈통을 타고나서 귀족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예술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듯,작품이 예술성을 담아야 예술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곳 백두대간의 한 가운데서 함께 아리랑을 노래하는 그들의 미술이,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기에 그것이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 감동으로 전율하게 된다면,더 더욱 의심 없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예술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기에 더 독한 패러독스를 내뿜게 된다. 황효창의 인형그림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다. 술독에 빠진 인형이라니 기가차기 그지없다. 인형의 입을 틀어막은 그 권력이란 참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개명하지 못했던 시대를 그렇게 견뎌온 1970, 80년대의 그림과 같이 오늘의 인형도 우리에게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광부화가로 이름난 작가 황재형. ‘광부의 옷’으로 중앙미술대전을 휩쓸고 ‘황지연작’을 그리던 그는 기어이 관찰자로만 기웃거릴 수 없다고 그곳에 들어가고야 만다. 30년이 넘는 작가로서의 활동기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이제 달라진 그곳의 현실도 계속 담아낸다. 탄광은 폐쇄되었지만 여전한 자본의 막장 극에 대해 할 말이 아직도 그곳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홍등가에 들어가 그들 삶의 현장을 담았던 사진작가 조문호도 강원의 작가가 되었다. 정선,영월,삼척의 두메산골 사람들을 담으려 정선에 터를 잡고 작업해왔다. 권용택 또한 그렇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실경을 찾아 강원을 찾았던 것처럼,강원의 산하를 담으려 정선에서 작업하고 있다.

신대엽,서숙희,백중기,김용철,김대영,길종갑이 그 세대를 이어 오늘의 리얼리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아니다. 미화한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거칠고 가슴 아픈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미술(美術)이라고 오해하지 않을 일이다. 진선미,위악추가 모두 예술의 대상이고 희로애락 어느 것도 미술의 대상 아닌 것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그 예술이 빚어내는 감동의 크기에서 찾아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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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현 시국을 예술로 표현하다


동아일보 /2016,12,1 / 이인모기자


강원 예술인들 시국전 ‘순실뎐’ 열어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 중인 ‘시국전’에 전시되고 있는 황재형 작가의 작품 ‘속아 넘어가다(Buffaloed)’(왼쪽 사진).

넘어진 소를 표현하며 속이고 속는 세태를 풍자했다. 오른쪽 사진은 조문호 사진작가의 ‘광화문 시위’. ‘시국전’ 기획자 제공


강원 지역 예술인들이 암울한 현 시국을 예술적 관점에서 표현한 ‘시국전(展)’이 30일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막돼 관심을 끌고 있다. 긴급 특별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비선에 의한 국정 농단을 개탄하며 예술가로서의 의무를 지각하고 시민들과 뜻을 함께하기 위해 마련됐다. 5일까지 엿새 동안 열릴 예정으로 전시 타이틀은 ‘순실뎐’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황효창 강원민예총회장을 비롯해 권용택, 조문호, 김진열, 황재형, 길종갑, 서숙희 씨 등 작가 16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100호 크기의 그림과 사진 1∼4점을 출품해 총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광부 화가’ 황재형 작가는 ‘속아 넘어가다’를 풍자해 소가 넘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Buffaloed’와 지난 대선 결과에 대한 느낌을 담은 ‘징후’를 전시 중이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국민의 광화문 시위와 유진규 마임이스트의 퍼포먼스, 양혜경 무용가의 넋전춤 등 시대의 몸짓을 담은 사진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최형순 씨는 “시국선언이 쏟아질 때 우리 예술가들은 촛불 집회의 머릿수 하나를 채우는 일로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다”라며 “이번 시국전은 예술가들에게 시국선언과 같은 의미”라고 밝혔다. 

이인모기자 imlee@donga.com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두 번째 기획전 정선에서 열려..

 

M이코노미뉴스 김미진 2015.07.17

 

 

다큐부부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이 열린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오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관계자는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사진전에서 오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하게 된다면서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부부 다큐사진가 전시회는 추억의 장터풍경'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전시일정은 오는 20-815일까지다. 전시공간은 정선시외버스터미널 '문화공간'’ 지하1층 전시실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작가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는 초상사진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행사 기간 동안 전시장 입구에 간이 스튜디오를 설치하여 전통시장을 사랑하는 관람객 모두에게 초상사진을 무료로 촬영해 주고 즉석에서 프린트도 해주는데 촬영일자는 720, 22, 25, 26, 27, 81~2, 7~9, 12, 15~17일이다. 촬영은 매일 오후1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한편, 정영신 작가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 522개 장터를 기록한 사진가이며 소설가로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장터"(정선 사진굿당), '정선아리랑제 설치사진전', '정영신의 장터'(서울, 덕원갤러리), '장에가자'(서울, 아라아트) 및 다수의 단체전을 개최했다.

2002년 진선출판사에서 '시골장터이야기', 2012년 눈빛출판사 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 2015년 눈빛출판사의 '전국오일장 순례기'를 출판했으며 농민신문에 '정영신의 장터순례'2년간 연재했다. TBN교통방송에서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2년간 방송한 바 있다.


조문호 작가는 30여 년간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사진가로 '동아미술제''아시안게임기록공모전'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전농동588번지', '87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사람들'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청량리 588'등 열여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저서로는 '동강 백성들' 포토에세이집,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사진집, ‘전농동588’사진집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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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부부사진작가의 5일장 사랑하기 '장에가자Ⅱ'전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 풍경', 조문호의 '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

 

[서울문화투데이 / 강다연기자]

정영신작 장수장,1991년

 

장터 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함께 보는 다큐 사진전

 

전통 오일장을 집요한 애착으로 돌아보고 기록하는 사진작가 부부 정영신(58) 씨와 조문호(69) 씨의 장터 사진 전시회가 오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정선버스터미널 문화공간에서 열린다.

 

이들 부부는 정선에 거주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 오일장 522개를 기록해왔다.

 

정영신 작가의 '추억의 장터 풍경'에선 시장의 어제를, 조문호 작가의 '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에선 새로운 시장문화를 만들어가는 오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 캠페인 '프로젝트 장에 가자Ⅱ'는, 이들의 서울전시 '장에 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으로 이번 전시는 정선문화원이 주최했다.

 

작가가 직접 초상 사진을 찍어주는 '장터 인증샷' 이벤트도

 

프로젝트 장에 가자 현장'에선 희망자에게 초상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도 연다. 오는 31일(금)~8월 2일(일), 8월 7일(금)~8월 8일(토), 8월 12일(수), 8월 15일(토) 오후 1시~6시까지,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정선여행의 또 다른 소중한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

 

정선문화원 관계자는 "빠름, 편리함, 개인주의로 치닫는 현대문명에서 전통시장 활성화는 희망적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작가 소개>

정영신 3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오일장 522개 장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소설가로서,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 '정선아리랑제 설치사진전', '정영신의 장터'(서울, 덕원갤러리), '장에 가자'(서울, 아라아트) 및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다. 저서로는 <시골 장터 이야기>(진선출판사), <한국의 장터>(눈빛 아카이브), <정영신의 5일장 순례기>(눈빛)가 있다. 농민신문에 "정영신의 장터 순례"를 2년간 연재했고, TBN 교통방송에서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를 2년간 방송하기도 했다.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동아미술제'와 '아시안게임기록공모전'에서 각각 대상 수상.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사람들',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등 열 여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저서로는 <동강 백성들> 포토 에세이집,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사진집, <전농동 588> 사진집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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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문화원,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정선=뉴시스】홍춘봉 기자 

 

 

 

 

 강원 정선문화원(원장 윤형중)은 20일부터 오는 8월 15일까지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다큐부부 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전시회를 연다고 19일 밝혔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 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오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 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사진전에서 오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될 전망이다.

자세한 사항은 정선문화원 홈페이지(www.jscc.or.kr) 또는 전화(033-562-5471)로 문의하면 된다.

casinoho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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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문화원,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개최

 

 

[정선=참뉴스] 이태용기자

 

 

 

강원 정선문화원(원장 윤형중)은 오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정선터미널 문화공간에서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다큐부부 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전시회를 개최한다.

5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 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 5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보여준다.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사진전에서 5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된다.

정선문화원 관계자는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leegija@chamnews.net




 

 

프랑스의 니엡스가 처음 사진 인화에 성공한 때는 1826년. 니엡스를 만나 다게르는 이후 은판 감광제를 발명하여 빠르고 실용적인 사진 제작법을 보급했다. 당시 사진은 조물가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회회가 발붙일 곳이 없다고 괴로워했다. 이스트먼에 의해 롤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빠른 속도로 사진기가 보급되기도 했다. 그 뒤 사진은 기록이 됐다. 개인의 기록은 최근 들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에레즈 에이디든과 장바티스트 미셸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에는 2013년 4월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 결승점에서 벌어진 테러의 범인을 검거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연히 찍힌 고해상도의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의도치 않게 기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기록은 사생활 침해라는 어두운 그늘도 지니게 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사진에 생활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교실에서 필기 대신 칠판을 그대로 찍고, 친구들과의 일상생활도 사진으로 남겨둔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우스은 모습도 아무렇지도 않게 찍어둔다. 친구에게 삭제를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는 친구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자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의 양면성을 보지 못한 결과다. 기록으로 남는 사진 한 장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봄과 겨울 사이 새봄의 출발을 알리는 봄비가 시나브로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빗물 사이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스며들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싶다. 해피 클래식.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클래식 기타로 연주해 본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고 배영식 선생님으로부터 6년 동안 기타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스런 시절이었다. 낮에는 구두닦이와 연탄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등으로 바쁘기만 했다. 밤에는 야간중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시 그렇게 살아라고 해도 아찔하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2015년 1월 부인 정영신(57)씨와 전국 장터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차렸다. 지금도 서울 인사동과 전국 장터들을 오가며 군상들을 담는다. 젊을 적부터 음악다방, 주점 등을 하며 자유인으로 살았고 대가 최민식의 작품에 이끌려 다큐사진에만 탐닉했다.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투시하는 도리를 배웠다. 항상 바닥을 생각하는 그 겸손한 시선 덕분에 80년대 풍속생활사의 가장 인상적인 기록이라 할 <청량리 588>이 나올 수 있었다. 작가는 사진 사진들을 추려 올해 2월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판도 벌인다.

80년대 중반 서울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역 사창가 여성들과 동고동락했던 조문호 사진가(68)는 자신이 지켜본 30여년 전 청량리 풍경을 하나하나 렌즈에 새겨넣었다. 588의 공간 풍경을 작가가 최근 사진집 <청량리 588>(눈빛)을 출간하며 되살려냈다. 85년 동아미술제에 선보였지만,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1984-1988년 청량리 사창가를 세밀화처럼 그려낸 기록이고, 겉과 속이 달랐던 5공화국의 사회적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곳 인간 군상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쫓는다. 강퍅한 2층 벽돌 슬래브 쪽방 건물들 속에서 과로와 슬픔에 찌든 사창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과 주름진 알몸, 앳된 초보 성노동자의 단아한 얼굴 등이 휙 문 앞을 스쳐가는 남자들의 실루엣과 얽힌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지난 1978년부터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우연적인 필연, 필연적인 우연으로 만났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슬프고도 기쁜, 불행에서 행복한 사진여행으로 만났다. 접객실에서 여인들은 다 해진 의자에 앉아 남자들의 주문을 기다린다. 그들의 앞 벽면에 있는 밀대걸레와 연탄보일러 탱크 등은 구질구질하지만 엄숙한 소품과도 같다. 조 작가는 재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2012년 이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청량리에 30여년 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날 서지 않은 사람살이 장면들로 보여준다. 평론가 이광수씨는 사진집에 실은 글에서 작가는 윤락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작은 이들의 세상을 기록하는 조문호 사진작가. 소외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는 사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눌변, 그것이 조문호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다. 사진은 우리 시대의 증언이며 동시에 기록이다. 역사의 현실 앞에서 카메라로 영혼의 시를 나는 쓰고 있다. 슬픔의 힘으로 눈물의 힘으로 기록하고 증언하고 싶다. 나는 사진이다. 나는 그림이다. 나는 노래다. 조문호의 청량리,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권태원 / 시인. 사진가

010-2624-8440
ktw7519@hanmail.net
www.mariasarang.net/kwontw

 

F.OUND ISSUE > #56 April, 2015   by F.OUND / 2015.04.15
에디터 > 최인희   포토 > 정재호 사진 제공 > 조문호  

 

 

그래도 사람
CHO, MUNHO

 
역사의 시작과 끝에는 조문호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홍등가 청량리 588번지와 87민주항쟁을 비롯하여 ‘동강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사진전 등을 열었고, 그 외에도 천상병 시인과 전국의 500여 개가 넘는 장터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문호 작가를 만나기 전, 친한 선배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진심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때 그 사람들도 보고 싶고,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이제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 시절 연인과 동생들이 오면 소주 한 잔 받아주고 싶다.” 이 글귀는 전시회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사진을 보고 있을 무렵 한 신사가 다가와서 막대사탕을 건넸다고 한다. “이거 먹으면서 봐요” 따뜻한 미소에 달달한 사탕까지 ‘청량리 588’ 전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법했지만, 이내 그녀 또한 사진에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끝내 막대사탕을 건넨 신사가 작가님이라는 것을 알고 아쉬웠다고 감상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막대사탕 맛이 궁금해 전시회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한 서울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을 벌고자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떠밀리듯 사창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졌고, 없는 집에서 자란 죄 없는 여성들은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았다. 전농동 588번지는 대표적인 홍등가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민낯이 투영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암흑기였던 군사독재 시절 그들은 정화되어야 할 1순위의 인간들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녀들의 꿈은 빨간빛에 으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달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아라아트센터에서 ‘청량리 588’ 전시가 열렸다. 이는 1990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초대전을 연 후, 조문호 작가의 두 번째 전시다. 당시 매춘에만 관심을 가지는 언론의 행태에 화가 난 작가는 다시는 이 필름을 꺼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돼 그녀들의 삶이 왜곡되는 게 싫어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지만, 그것 또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우리 시대의 민낯이라고 말했다.

 

 

 

필름을 영영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셨다구요. 
불태워 버리려고 했어요. 안 태우길 천만다행이지. 

공개하길 잘한 거 같으세요? 
예, 언젠가는 발표되어야 할 사진이었어요. 

전시회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이번 전시는 처음 전시보다 좀 달랐다는 걸 느꼈어요. 기성세대의 편견 가득한 시선은 바꿀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보더라구요. 성노동자 모임이나 그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와서 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만든 책을 주면서 자기 이야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정말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어요. 아쉽긴 하지. 자기도 서먹서먹하고, 나도 서먹서먹해서 책 받고 기념사진 찍어주고 끝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걸.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이 좀 변한 것 같은데요. 사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이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막는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보면 우리나라처럼 폐쇄적인 나라도 없어요. 지구 상에 인간이 있는 한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제거든요. 의도적으로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을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시선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로 소재주의가 심해지고 있잖아요. ‘성노동자’라는 타이틀만 보고 외설적으로 보는 시선이 생기기도 해요. 
그 당시에도 그랬어요. 너무 소재주의 아니냐고. “맞다, 이게 소재주의라서 안되면 누가 기록 할 거냐?” 그랬죠.

누가 기록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도 안 하잖아요. 


사진을 찍기 위해 588번지로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셨잖아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청량리를 담으려는 이유는 뭐였어요? 
처음에 작정을 하고 가봤어요. 근데 찍을 상황이 아니더라고. 살벌해서 접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마침 동아일보 신문에 사진 공모가 났는데, 주제가 직업인이었어요. 아, 그럼 이걸로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찍기 시작했죠. 처음 들어갔을 때 건달들한테 맞기도 하고, 필름도 뺏기고, 소통하기 위해 몸까지 섞다 보니까 성병도 걸리고 그랬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1985년도에 공교롭게도 대상(동아미술상)을 받았어요. 참 난감하더라고요. 정작 그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 후에 100만 원 상금을 가지고 아예 588로 들어갔죠. 부산에서 빈털터리로 올라와서 <월간 사진> 편집장 할 때였는데, 요즘 잡지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말이 편집장이지 돈을 조금 줘서 살 수가 없었어요. 청량리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마누라가 부산 내려간다고 이삿짐을 싸는데 그날따라 비가 오는 거예요. 근데 옆에서 자식 놈이 한쪽에서 가기 싫어서 울고 있더라고. 그 얼굴이 잊히지 않네…. 저는 좀 사진에 미친 놈이에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어떻게 처자식을 버릴 수 있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  

그의 사진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아니,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독특하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에 윤락가를 촬영했던 외국 작가들은 화려한 촬영 기법과 렌즈를 이용하여 윤락가를 왜곡시켜서 촬영했다. 구미를 당길 만한 소재고, 더 특별하게 포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문호 사진에는 어떠한 왜곡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사진 속 여성들은 전혀 불편한 표정 없이 일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놀라운 건 이 모든 사진들이 50mm 표준 렌즈로 촬영됐다는 거다.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작업을 하려면 그들하고 동화되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다가 정숙이란 애를 참 좋아하게 됐어요. 혼자 있을 때기도 했고. 그 친구가 마음을 열어줬으니까 작업이 가능했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설득도 해줬고. 

‘본인은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사진집의 소개 글귀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잘 나타낸 것 같았어요. 
출판사에서 꾸준히 책을 만들자고 했었어요. 근데 안 된다 그랬죠. 출판사에서도 20년만 지나면 초상권 문제도 없어져서 괜찮다고 하는데, 초상권은 둘째 치고 인간적인 문제잖아요. 근데 정숙이는 그때도 워낙 의식이 뚜렷한 아이여서 지금도 당당할 거예요. 오히려 그들은 당당한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괜히 불쌍하게 보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죠.     

사진에도 그런 시선이 담겼던 것 같아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외국 작가들은 사창가를 찍으면 왜곡시켜서 찍고 그래요. 근데 저는 50mm 표준렌즈로만 촬영을 했어요. 표준렌즈는 우리의 시선하고 가장 비슷한 렌즈거든요. 과장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지. 사진은 재미가 없겠지만.  

그분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일부러 프린트를 한 컷에 두 장씩 했어요. 한 장은 본인들 오면 주려고. 특히 정숙이 사진은 다 뽑아놨는데 안 왔어. (웃음) 사람들이 나이 들면 티브이나 보고 있지 신문은 안 보거든요. 그래도 지금 588 가니까 다 알고 있더라고. 아저씨가 그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 사랑]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숙명과도 같은 ‘기록’은 온전히 타인을 향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사진기를 품 안에서 떼어 놓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세월이 가는 것에는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런 조문호에게 정영신 작가는 삶을 기록해주는 또 하나의 매개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여 개의 장을 기록했다. 그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부인의 수족이 되어 파김치가 되도록 촬영을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평생 타인을 기록해온 그의 삶을 기록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같이 촬영 다니시면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렇죠. 지금 만난 마누라는 10년 됐는데, 나한테는 그 10년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우리 둘은 생각이 똑같거든. 다 빈털터리 개털이에요. 오늘만 살지, 내일은 없다 그래요. 우리는 주머니에 돈 10만 원만 생기면 촬영하러 가요. 대부분이 아내가 동조를 안 하잖아요. 근데 아내가 나랑 생각이 똑같으니까. 참 살 맛 나네. (웃음)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사동에 흑백 암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내가 계속 프로포즈를 했는데 안 먹히더라고.

저놈은 워낙 잡놈이다 그러면서. (웃음) 근데 세월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란 걸 알았던 거 같아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낌없이 주는 거… 


아낌없이 주고 계세요? 
줄 게 없으니까. 허허허. 얼마 전에 내가 니한테 줄 건 없고, 세월이 지나면 사진첩 하나 멋지게 만들어줄게 그랬어요. 

사진 찍으면서 서로 작품을 평하기도 해요? 
이야기 절대 안 합니다. 자기도 장에서 30년 사진을 찍은 전문간데, 내가 감히 언급하진 못하지.

그의 주관이 누가 이야기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 칭찬받으면 기분 좋으시죠? 
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 질투도 느껴요. (웃음)

 

 

 

사람을 통해 배운다고 하잖아요. 장터에서 사람들을 기록하면서 뭘 배우셨어요? 
사람이 제일 중요해요. 부산에서 장사할 때는 돈도 좀 벌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우리 가게에 사진가 최민식 씨가 왔었어요. 그분이 동아일보에서 나온 <휴먼>이란 책을 한 권 주더라고. 백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 강하는 걸 느꼈어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일관되게,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라도 꾸준히 기록해나가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중간에 그만해버리면 안돼요. 

천상병 시인을 추모한 사진집도 인상적이었어요. 참 소년 같으시더라구요. 
부산에서 처음 올라왔을 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가 인사동이었어요. 일 끝나고 인사동 가면 천상병 시인이 앉아 계시거든요. 그 양반은 만나면 노잣돈으로 천 원을 내라 그래요. 천 원 있어서 주면 그렇게 행복해하세요.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거죠. 그분 책을 내면서도 참 아쉬운 게 많았어요. 책을 만들 줄 알았으면 계산해서 찍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 책을 보여주면 두고두고 욕 얻어먹겠다 싶었지. (웃음) 

기록 뒤에는 사라진다는 의미가 내재돼 있어요.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경모 선생님이 있어요. 그분이 옛날에 호남신문에서 일하면서 여수, 순천사건을 다 찍었어요. 근데 그 당시만 해도 그분이 기록 사진의 소중함을 몰랐던 거예요. 원로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사진에만 빠져있었거든. 모델을 찍거나 텅 빈 공원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런 게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책을 만들기 위해 필름을 끄집어내면서 기록사진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지금 보면 1960년~1980년대 사이의 우리 기록들이 제일 없거든요. 그 당시에 카메라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잖아요. 소중함을 몰랐기에 남겨지지 않았던 거지.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
1985년 연작 ‘홍등가’로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한 조문호는 다음해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에서 같은 상을 받았다. 이후 <월간 사진> 편집장을 역임하고, 한국 환경사진가회 회장을 지내면서 사라지는 수많은 것들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 사진을 찍는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를 알아야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알 수 있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 논리 속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강댐 건설 논란이 한참이던 1999년, 조문호는 정선군 귤암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산골 사람들의 모습을 6년간 기록했다. 생태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흑백 사진 속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故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봤던 때의 감상이 저절로 떠오른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것. 이것이 기록 사진이 가진 힘이 아닐까.   
 
사진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월간 사진> 있을 때 공부를 많이 했죠. 집에서는 엄청 반대했지. 딴따라 될 거냐고. 처음에는 혼자  올라와서 책 외판원을 했어요. 뭐 됩니까. 책 갖다 주고 나면 회사가 사라지고 없어져서 돈을 띠이기도 하고요. 결국 누나가 연락해서 잡혀 내려갔지. 잡혀 내려가서 마음에도 없는 공부를 했었어요.  

<월간 사진> 편집장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길이 없었어요. <월간 사진> 사장을 아니까 어려우니 일 좀 달라고 했죠. 그러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편집장을 하라는 거예요. 막상하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나보고 편집장 하라는 거였지. 이 잡지가 외국 포토그래피지를 번역해서 만든 책이어서 모르는 정보를 많이 알게 됐어요. 근데 너무 베끼니까 문제지. (웃음) 

아드님도 사진을 전공하셨죠? 반대 안 하셨어요?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죠. 

현실도 무시 못 할 조건이잖아요. 
처음에는 웨딩샵에 들어가기도 하고, 패션사진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생활이 안 됐던 거 같아요. 헤어진 마누라하고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니까 더 어렵지.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사진과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니까 학비를 줘야 될 거 아니에요. 편집장도 그만둘 때여서 돈이 없었거든. 그때 삼성 카메라에서 사진 사업부를 만들어서 이것저것 했었거든요. 거기에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자식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있었어요. 

사진 찍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어요. 
책임감이지.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사진을 찍으실 거예요? 
이름 알려지는 거 그거 아무 소용도 없어요. 오히려 알려지면 더 불편해요. 결국은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거든. 

이 전시를 하면서 수시로 인터뷰 하자고 그래. 그래서 마누라보고 니가 좀 막아주라 그랬어요. 

<파운드 매거진>도 결국은 기록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인터뷰는 왜 응해주신 거예요? 
책을 봤어요. 보니까 그런 여성잡지는 아니구나 그랬지. 1990년도에 내 전시를 주로 다뤘던 매체들이 스포츠지나 월간 여성지가 많았어요. 홍등가 이야기니까 선정적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심지어는 스포츠지에서 헤드라인을 ‘창녀들을 찍는 찰칵 사진사’ 이런 식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결국 걔들이 전시회에 안 온 거예요. 인터뷰하면서도 누누이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하는데도 그런 건 다 묻혀버리니까  안 하려고 했죠. 

사진을 찍으면서 만족했다는 순간도 오세요? 
만족이 있을 수 없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요? 
정의하기가 애매해요. 자기는 좋은데 딴사람이 볼 때 안 좋은 사진이 있고, 반대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세월이 지나봐야 아는 것 같아요. 세월이 가면 가치가 드러날 거예요. 전시회에 통인가게 회장이 부인하고 온 적이 있어요. 그분 부인도 콜렉터니까 나한테 와서 “조 선생님, 꽃 사진처럼 예쁜 것 좀 찍지. 왜 이런 거만 찍으세요”하면서 꽃 사진 찍으면 많이 팔아준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아지매 그런 소리마소. 꽃 사진은 세월이 지나면 쓰레기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사진은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갈 거예요” 그랬지. (웃음) 

저 같아도 샀을 거 같아요. (웃음) 언제쯤이 돼야 작가로서 만족하는 날이 올까요? 
나는 아직 말단이야. 나이만 먹었지 잘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요즘 하도 좋은 사진들이 많아, 그런 사진보면 입이 안 다물어지더라고. 나이가 내일 모레면 70이에요. 사진은 다리 힘 없으면 못하잖아요. 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찍고 싶어요. 인사동을 왜 잊지 못하냐면 내가 거기서 많은 것들을 배웠거든요. 안타까운 건 사람들이 몰리니까 정서가 바뀐다는 거죠. 낮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뿐인데 저녁에 골목길 들어가 보면 옛날 사람들이 많아요. 이제는 누구든 만나면 카메라를 들어요. 

사진 찍는 걸 다 허락해주시나 봐요? 
이제 너무 오래돼서 별 신경도 안 써요.  

사진 찍어야 하는 모습을 놓치면 아까우시겠어요. 
그래서 항상 가슴에 끼고 있어요. 그제 인사동에서 친구들 만나면서 술을 한 잔 마셨어요. 15명이 모였다고, 사발에 술을 막 부어재끼는 통에 많이 취했거든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용기가 생겨요. 청량리가서 대담하게 찍었더니 건달한테 걸린 거예요. 카메라 내놔라 그래서 지우라고 줬지. 자기가 일일이 다 지우더라고. 집에 와서 다시 복원했어. (웃음)  

 

 

 

 

 

 

[그래도 사람, 결국은 사람]
조문호의 사진은 늘 뜨거운 감자다. 오랜 끈기로 이루어낸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의 사진은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 속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셔터만 눌러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시대의 명암이 공존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로서의 욕심과 욕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술적으로 과시하거나, 화면을 왜곡시키지 않고 현실 그대로를 전하는데 의미를 둔다. 

인간은 늘 아름다운 순간만을 기억하길 바란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찬란한 순간만을 남겨두려는 습성이 그렇다. 이러한 습성에 오래 길들여진 탓인지 조문호의 사진은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두운 민낯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그의 화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바로 잡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깨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두꺼웠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한다. 그의 꾸준한 발자취는 그가 기록해온 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먹먹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작가는 가방에 놓여있던 카메라를 들었다. 몰래 등 뒤로 숨긴 후, 우리가 사진 찍는 틈을 타 셔터를 빠르게 몇 번 눌렀다. 그리고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전 “저쪽에 서 보이소”라고 말하며 에디터와 포토그래퍼를 한쪽에 세우곤 다리를 구부려 사진을 찍었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귀에서 멀어지기도 전이었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예…”그가 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그토록 편해 보이던 것이 이해가 됐다. 부디 그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더 오랜 시간 동안 찍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본 기사를 취재한 'F.OUND'의 최인희, 정재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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