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세종대왕 영능과 명성왕후 생가가 있는 여주장에 들렸다.
코로나 자가 격리로 묶이기 전에 나선 마지막 나들이였다.
정오 무렵 여주장에 도착했는데, 한적한 시골장과는 달리 장터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주장은 1980년대부터 중앙시장이라 불리다, 2016년 문화 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따라 여주한글시장으로 바뀌었는데,
입구에 설치한 장터이름이 세종장인지 한글장인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헷갈렸다.
어느 지역을 가나 고유의 장터이름을 두고 왜 엉뚱한 이름으로 바꾸는지 모르겠다.
그 지역을 말해주는 여주장보다 더 친근하고 알기 쉬운 이름이 어디 있는가?
여주장이 여주한글시장으로 변신한 뒤, 곳곳에 한글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벽화가 들어섰지만, 한글과 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인들 말에 의하면 장사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가 올 듯한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 길에서 벌이는 행인의 신경전이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시장 길이라 차량이 줄을 잇지만, 어떤 남정네가 차를 못 가게 막고 선 것이다.
약 30분이나 버티고 있어 장꾼들이 수습하려 나섰으나 운전자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차에서 내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을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길이라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둘 다 똑 같았다.
더구나 승용차 안에는 어린이와 여인도 타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게 부끄럽지 않았을까?
차안은 시원할지 모르나 교통정리까지 해가며 땡볕을 지켜 선 남정네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얄팍한 자존심 싸움에 많은 행인들만 불편을 겪어야 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여 두 사람을 연행해 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다.
장터에서 벗어나 여주 명성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갔다.
개화정책을 주도하다 쥐새끼 같은 왜놈들 칼에 무참히 살해된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숙종 13년(1687)에 지어진 집인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뿐이란다.
1996년 안채가 수리되며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큰방, 작은방, 대청마루, 부엌, 광, 사랑채, 별당채 등 모두 13칸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대문인 일주문과 정침이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였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비'(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라 쓴 고종의 어필비가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도 있었다.
거북이 모양의 기단석 몸통을 가졌는데, 특이한 것은 용 형상을 한 머리가 그곳으로부터 150m 지점에 있는 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6세에 왕비가 된 후 대원군과의 불화가 지속되자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 한 가운데 있었다.
명성황후는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 성향으로 굳혔는데,
명성황후 세력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킨 을미사변에 의해 무참히 시해 당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7시 경복궁에 일본군 140여 명과 낭인들이 나타나 궁궐수비대와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총격전이 한창일 때 은밀히 궁궐의 담을 넘은 한 무리의 칼잡이들이 건청궁으로 진입했는데.
그곳에는 고종의 침전인 곤녕전과 명성황후의 침전인 옥호루가 있었다.
이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하고 궁녀와 환관 4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뒤, 옥호루에 있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여 시신을 불태운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는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었다.
그 곳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을 비롯하여·같은 시기에 활약한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시 사용한 일본도(복제품)와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낭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고 적혔는데,
명성황후의 시해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참상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의문점으로 남는 것은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신문물이 들어와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할 무렵이라 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손 사진이 남았으나 유독 민비 사진만 불분명한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얼굴에 마마 자욱이 있어 사진 찍기를 꺼렸다고도 하고, 가름한 계란형의 얼굴에다 콧날이 오뚝 선 미인이라는 상반된 기록도 있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대면록은 이러했다.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왜놈들이 사후에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는 설과,
시해 중 아무도 민비의 얼굴을 몰라 더 많은 궁녀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상반된 설이 있는데,
어쩌면 정적에 대비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놈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여주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을 찾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된 최초의 합장릉으로 조선의 왕릉 중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란다.
영릉 묏자리 덕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원래 영릉은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는데, 세종의 능이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옮기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이 조성되었으나 예종 때 천장한 곳이 지금의 영릉자리다.
그 묏자리는 본래 이인손의 묘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러 지관들이 천장 장소로 여러 곳을 추천했는데도 굳이 우의정을 지낸 공신의 묘를 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천하의 명당이기도 하지만, 광주 이씨의 기를 잘라내기 위해서라는 말도 따랐다,
어떻던 최고의 명당자리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합장릉인 지금의 영릉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만들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고 한다.
합장릉 봉분 둘레에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 석을 받치는 동자 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봉분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서로 엇바꾸었고,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가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이었다.
봉분 앞 중계에는 문인석 1쌍, 하계에는 무인석 1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고 있었다.
세종은 우리 장례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국 풍습에 따른 수레에서 상여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며 대중화를 꾀했다.
상여는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논두렁을 지나갈 때 양쪽의 상여꾼들은 각각 발을 좁은 길의 벽에 붙이면서 한 발 한 발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경사진 산비탈은 물론 아무리 좁은 길도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삼각형 피라미드 형태를 취해 힘을 분산시켜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자랑하는 지게 원리와 비슷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안으로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밖으로는 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최고의 군왕이었다.
묘역 인근의 세종대왕동상 주변에는 세종 16년 장영실, 김빈 등이 왕명을 받아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비롯하여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 혼천의, 측우기,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해시계 앙부일구 등 많은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세종대왕의 위업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주는 조선의 화려한 위업과 비참한 운명을 함께 간직한 곳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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