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내가 어릴 적에 장(場)이 열리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은 잔칫날처럼 들썩거렸다. 안동 아재의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이르면 깨순이 엄마 보따리가 제일 먼저 실렸다. 뒤이어 마을 사람들 보따리가 하나둘 올라가면 사방이 초록으로 덮인 신작로 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봄이면 들판에 앉아 있던 자연도 덩달아 장에 나와 그 지역만의 삶의 이야기를 초록빛으로 품어냈다. 후미진 장 골목에서는 갈퀴와 도리깨, 체와 쟁기를 만들었고, 정월 보름을 앞두고 농악놀이에 쓸 짚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았다.
대장간 앞에는 날이 무뎌진 호미와 낫을 벼르려고 노부부가 앉아 있었고,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와 농로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가지고 나온 박씨 아짐은 생산자이면서 판매자였다. 또한 장터 끝 골목에는 엄마 따라온 삼식이가 새끼 돼지가 도망갈까 봐 새끼줄을 붙들고 동그마니 앉아 있었고, 털북숭이 복숭아를 머리에 이고 온 순덕이, 소금물에 우린 감을 베어 먹던 주근깨투성이 깨순이도 있었다.
이렇게 장은 자연과 흙과 나무에서 흘러나온 푸르디푸른 이야기가 살아 있어 움직이는 박물관이 됐다. 지금 장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이 지역 농산물로 만들어가는 농민 장터가 살아야 한다. 장은 단순히 뭔가를 사고파는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과 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장을 통해 소통하는 백성의 삶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일장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34년째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터를 장터답게 만들 계기는 무엇일까 숱하게 고민했다. 사진 한 컷 촬영하지 못하고 파장 무렵까지 장꾼들과 장에 나온 농민들과 이야기만 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자신이 사는 곳에 어떤 보물이 숨어 있는지 책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 말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중략)
이 책은 내가 이전 책들에서 다룬 적이 없었던 장터와 지역 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한 장 말고도 지금 작업 중인 장이 열 곳이 넘는다. 30여년 전 흑백필름으로 작업했던 예전 장터 모습과 요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30년 세월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으나 장에 오는 사람들이나 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더 크게 말하자면 장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불과 55년 전인 1965년에는 버스비가 1원이었고, 쌀 한 말 값이 360원이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 이후 엄청나게 발전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장터에 가면 고향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을 느끼고 싶어 구경하러 나온 사람처럼 장을 몇 바퀴나 돌며 헤집고 다닌다. 어떤 물건이 새로 나왔는지, 난전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고 싶다. 계절 따라 파는 물건이 다르기에 사계절 모두 장에 가봐야만 그 생리를 알 수 있다.
겨울철 구례 산동장에 가면 산수유 열매로 장 안이 온통 새빨갛다. 이처럼 장터는 그 지역의 삶이 그대로 펼쳐진 한 폭의 풍속도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면서도 인정 넘치는 백성의 문화 공간이다. 내게 남은 숙제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장의 특색을 잘 살려낼 고유한 문화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네 시골장은 선조들의 역사이고 우리의 현재이자 아이들의 미래다. <5~7쪽>
『장에 가자』
정영신 지음│이숲 펴냄│248쪽│18,000원
출처 : 독서신문(http://www.reader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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