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全羅右道 群山鎭 地圖)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京浦)에 큰 하천이 있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장이 크게 섰다. 전라, 충청도에서 걷어들인 모든 물화가 여기에 쌓여지고 이것들을 배편으로 서울에 옮겨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백제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고려, 특히 조선시대에는 그 물량이 다양했다고 한다. (아래 줄임)" -'설애(京浦)' 안내문에서
경포리(설애·서래)는 요즘의 군산시 중동 지역을 일컫는다. 수문(水門) 턱밑까지 고깃배와 장삿배가 드나들었고, 오일장(五日場)이 열렸다. 1917년 제작된 지도에서도 경포리 마을이 중동 중심으로 조성돼 있음이 확인된다. '경포교' 역시 이곳 수문을 지칭했으나 경포천 직강화 공사로 보(봇물)가 매립되고 수문이 군산경찰서 부근에 설치되면서 이름도 따라갔다.
▲ 1950~1960년대 서래포구(경포) | |
ⓒ 조종안 |
▲ 경포천 수문과 흡사한 구암천 수문 | |
옛날 신문에 따르면 경포리 수문은 1915년경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물 부족 사태를 겪어오던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이 바닷물 유입을 막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배수갑문'을 설치한 것. 당시 수리조합들은 용수가 부족하여 일본인 지주들이 추진하는 농사 개량 사업도 예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전한다.
호남 7정 중 하나였던 군산 진남정(鎭南亭)도 서래산을 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역 유림과 유지들 발의로 1921년 경포천 주변에 신축했다가 하천 범람으로 1928년 월명공원 아래로 이전한 것. 당시 진남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전통 목조건물이었으나 2006년 지금의 자리(개정면 최호 장군 유적지 내)에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래장터, 장시 기능 위축 후에도 사랑받아
▲ 서래산에서 바라본 ‘경포천 수문’ 자리.(2011년 찍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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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길 왼쪽 목공소 건물 자리는 고깃배와 장삿배가 주야로 드나들던 포구였고, 오른쪽에는 농업용수를 가둬두던 보(洑)가 있었다. 금성산 산록에서 발원한 경포천이 석교뜰을 지나 아흔아홉다리(송경교)와 댓교(꺼먹다리)를 거쳐 이곳 보에서 쉬었다가 수문을 통해 금강으로 유입됐던 것. 보는 겨울에는 아이들의 얼음썰매장, 여름에는 아낙들의 빨래터가 됐다.
도로 시작점은 경포천 수문이 있던 자리다. 농업용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배수갑문으로 경포교, 물문다리, 서래다리(설애다리), 경포다리 등으로 불렸다. 비록 폭은 좁았으나 군산에서 웅포, 임피, 강경, 논산, 공주, 천안, 서울 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대형 트럭과 시외버스가 오갔던 중요한 지방도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개설된 전군도로가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로 알려진다. 이 도로(구암 3·1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서양선교사가 구암리 주민들 불편 해소에 써달라고 보내온 600달러로 다리('구암교'로 추정)를 설치했다는 기록과 1909년 사진에 서래장터-구암리 구간 도로가 가는 선으로 나타나는 것 등이 추정을 가능케 한다.
서래장터(경포)는 경장시(경장시장) 기능이 위축된 후에도 장시와 포구 기능을 병행하며 보부상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치가 경장시보다 금강 본류와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던 점도 장꾼과 소비자가 자주 이용했던 이유일 터다. 소설 <탁류>(1939)에서 정 주사가 '안스래(경포천 서쪽)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는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난장(亂場)이 서기도 하였다. 풍물패(농악단)와 사당패 공연도 들어왔다. 그중 난장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두 달씩 이어졌단다. 난장과 풍물패는 광복 후 1960년대까지 서래장터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특히 난장 때는 건달패·야바위꾼·장타령꾼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온갖 야바위 게임과 각설이 공연으로 사행심을 부추겼다.
중동 당산제, 일제의 감시에도 300여 년 지켜
▲ 경포천변에서 풍물한마당 펼치는 중동 경로당 풍물패 | |
ⓒ 조종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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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산(돌산) 중턱에는 3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당집도 있었다. '서래장터'를 지켜준다고 믿는 주민들이 당집과 당지기 집을 지었던 것. 주민들은 일제의 무속(巫俗) 감시와 단속에도 정월 열나흘에 당제를 지내왔다. 광복 후 채석작업으로 보존이 어렵게 되자 1970년대 중반 마을 노인들이 '당우(堂宇)'를 중동 경로당으로 옮겨 보존해오고 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스래(서래)여. 그전이는 여그로 강(경포천)이 지나갔어. 배들이 쩌그 물문다리 아래까지 들왔다 나갔다 혔응게. 그때는 쩌그 독산(서래산)에 있던 당집으로 동네 친구들하고 같이 많이 놀러 댕겼지..."
중동이 고향이라는 한씨 할머니(84)의 추억담이다. 결혼하고 시집에 살았던 몇 년을 제외하고 중동에서만 살고 있다는 할머니는 "어렸을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당집 주변에서 놀았는디 철들면서 출입을 금했다"며 "그때는 배부리는 사람(선주)이 많이 살았고, 당산제 지내는 대보름날은 풍물 잔치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으로 우리의 토속신앙이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 지역도 각 섬을 비롯해 하제포구, 중앙로(노서산), 신흥동(절골) 등 여러 마을에서 당제를 지냈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고, 중동 당제만 유일하게 남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오전 재현행사가 열린다. 주민들은 오후 만조시간에 맞춰 풍물패를 앞세우고 경포천변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선조들 항일정신 깃든 지명 '구암 3·1로'
구한말 지방의 상업은 주로 장시(장터·장마당)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장시는 개인과 생산자가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공간이었다. 어지러운 시국 상황 등 각종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때로는 농어민들이 모여 불만을 토로하는 여론 형성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장날에 맞춰 거사를 기획하는 등 장터는 정치적 기능도 겸하였다.
▲ 군산 서래장터 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 |
ⓒ 조종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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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장터는 한강 이남 최초로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군산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래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계획했던 것. 장날(3월 6일)에 맞춰 궐기하기로 했으나 전날 주모자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하루 앞당겨 시위에 들어가 '3·5만세운동', '서래장터 만세운동(설애장터 만세운동)' 등으로 불린다.
만세 시위는 영명중학교 학생과 구암병원, 구암교회 등이 주축이 됐다. 멜볼딘여학교를 비롯해 천주교, 불교인, 보통학교 학생까지 합세했으며 구암동산을 출발한 시위대가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군산 인구는 1만361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으로 일인 도시화 되어 있었다.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됐다. 3월 한 달에만 군산경찰서 방화사건(12일), 군산보통학교 학생들 집단 자퇴서 제출 사건(14일), 군산보통학교 방화사건(23일), 시민, 학생들 횃불 시위(30일), 군산법원 재판정 앞 만세시위(31일) 등이 일어났다. 연인원 3만여 명(총 28회)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등의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일본헌병과 무장 경찰의 총칼 앞에 한국인의 20% 정도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셈이다. 서래장터 만세운동은 남부지방의 각 도시와 마을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명(옛 서래장터~구암리 영명중학교 구간)도 '구암 3·1로'다. 지명에도 선조들의 항일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스크랩] 오마이뉴스 / 조종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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