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부터 3일 동안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로 사진 여행을 떠났다.
첫 날 부산 오시게장부터 들렸는데, 쇠퇴해 가는 시골장과는 달리 사람들이 북적였다.
다행히 장옥을 짓지 않아, 천막으로 이루어진 노점상이라 좋았다.
예전과 달리 시장기능에 더해 먹거리전이 성행했다.
오후에는 관광지가 된 초량 168계단과 감천마을을 돌아본 후, 남포동에 숙소를 잡았다.
이 시대의 투사 이광수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얼마 전 이광수교수 장모 상을 당했으나, 알리지 않아 미처 몰랐다.
남의 일에는 사방팔방 쫓아다니지만, 정작 자신의 일은 알리지 않았는데,
남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은 이해 하지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늦었지만 한 번 가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 늦었는데,
정영신씨의 부산지역 촬영 길에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따라 나선 것이다.
이광수교수는 이 시대 몇 안 되는 의인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정의감은 정치와 교육, 예술 등 사회 전 분야의 모순과 부조리에 칼을 휘두른다.
한 번은 직속상관에게도 직사포를 쏘았는데, 쪽 팔린 대학총장이 삼일동안 결근을 했단다.
정의사회를 위해 물불가리지 않으며, 한 번 물면 놓지 않고 끝장을 본다.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도 예외가 아닌데, 4년 전에는 ‘최민식 사진상’ 비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들 찍힐까봐 남의 일처럼 등짐만 지고 있는 현실이라 눈이 번쩍 뜨였는데,
그것도 문제의 당사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그동안 사진계 비리와 모순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지만,
모두 잘 아는 분과 연관되어 입을 다문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했던 처신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난, 혁명가기질의 이광수교수를 존경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이은영씨가 보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그 글을 신문에 옮기고 싶다는 부탁을 받아들였는데,
그 게 계기가 되어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는 칼럼을 쓰게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 2년 동안 연재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도 따랐다.
가까운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도 하고, 동강할미꽃 훼손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 까지 했다.
지인 한 분은, 그 일을 맡은 후로 사람 좋은 조문호가 칼럼 제목처럼 빼딱하게 변했다는 조롱도 받았다.
그런 조롱이 그 일을 그만두게 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 다음 부터 전시리뷰만 쓴 것이다.
더구나 돈 한 푼 받지 않고, 정영신씨 까지 합세하여 가난한 신문사를 돕다, 3년을 기점으로 손을 떼어 버렸다.
지나치면 공짜로 부려먹는 것도 습관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교수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게 해준 고마움에 대한 사족이다.
우리나라에 이광수씨 같은 분이 열만 있어도 요지경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사실, 그처럼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작은 잘못이 있어도 뒤통수 맞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 그만큼 청렴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자기가 맡은 교수 직분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동안 인도고대사를 비롯하여 척박한 사진계에 내놓은 연구논문들과 비평서 등 이루어 낸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정치평론가로서 내 지르는 발언은 더러운 정치판에 속이 다 후련해진다.
족집게 도사처럼 예견하는 것이 척척 들어맞았는데, 그만큼 정치판의 속성을 꿰뚫고 있다는 거다.
그가 펴낸 정치평론서 ‘정치인에게 안 속고 정치판 꿰뚫는 기술’이 잘 말해준다.
약속한 오후6시 30분 무렵, 자갈치시장에 먼저 나와 있었다.
자갈치시장과 집이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 날은 한 시간 밖에 안 걸려, 좀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다.
같이 만나기로 한 부인 유재희씨는 서울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요즘 부산에 감성 코칭 사무실을 차려 바쁘다고 한다.
감성 코칭이란 직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겨졌다.
자갈치 신동아 횟집으로 들어가 과분한 술상을 받았는데,
좀 있으니, 사회다큐사진집단인 ‘비주류사진관’을 끌어가는 사진가 정남준씨가 나타났다.
정남준씨를 만난 적은 시위현장에서 한두 번 뿐이지만,
폐북에서 그동안의 활동과 사진들을 많이 본 터라, 좋아하는 사진가다.
사진적 주관이 뚜렷한 노동현장의 리얼리티 넘치는 사진에 늘 존경감을 느껴왔는데,
뜻밖에 만난 분과 술 잔을 나눌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이광수 교수는 정말 희생정신이 투철한 학자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내는지 모르겠다.
부산지역사회연대기금인 ‘만원의연대’를 주선하는 것을 비롯해
요즘은 ‘518에 관한 주제로 전국을 쫓아다니는 무료강의를 시작했다.
문제점이 있는 곳이라면 정치비판에서 종교비판, 역사비판, 사학재단비판, 사진비판 등 닥치는 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전문가가 아니고는 문제 삼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 날은 “마누라가 나 보다 더 바빠요”라는 즐거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좀 불편하지만, 은근히 자유로움을 즐긴다는 것이다.
난, 이광수교수를 교주로 모시는데, 천하의 교주도 상전은 있었다.
아무튼, 교주와의 술자리는 스트레스 푸는 데 최고다.
직사포로 쏘아대는 말 펀치에 속이 다 후련해진다.
나도 가끔 술자리 분위기 살리려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지만,
다들 그 자리선 웃지만 돌아서선 욕한다.
그렇지만, 교주님은 그런 농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직설적인 욕이라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술자리에서 점잖은 말만 골라 내뱉으며 은근히 지식 자랑하는 사내들이나
내숭 떠는 여편네들 보면 속이 울렁거려 못 견디는데 말이다.
요즘 숨이 가빠 술을 잘 못 마시지만, 그 날은 기분이 좋아 술술 들어갔다.
자갈치 시장에서 술을 마시니, 40여 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남포동에서 ‘한마당’이란 국악주점을 할 때인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민식선생은 자갈치시장에서 사진 찍다 가끔 들리셨다.
어느 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진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지 못해 안달하시던 모습도 생각났고,
이웃한 달 동내 포주였던 아마추어 사진가 최시병씨도 생각나고,
'한마당'에서 사진전시를 했던 사진가 김석중씨도 생각났다.
어느 날 새벽에는 남포동에서 '전원음악다방'을 운영하던 친구 신윤택씨가 문을 두드렸다.
박정희가 총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왔는데, 잠결에 좋아했던 생각도 났다.
그 뒤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게 코카콜라 작은 병이 거들 났다.
돌맹이가 귀한 도심이라 그보다 좋은 무기가 없었다.
그런데, 이광수씨도 정남준씨도 다들 잘 마시더라. 빈병이 줄을 섰으나 이차를 가잖다.
늙은이 몸 보신시켜준다며 끌고 간곳은 꼼장어 집이었다.
다들 술이 취해 안주는 먹지 못하고 바가지만 덮어썼지만...
이 교수는 돈 잘 번다고 큰 소리 쳤지만, 버는 것보다 쓰는 게 중요하다.
좋은 일 하러 다니느라 길에 다 뿌리고 약자들 돕는데 아끼지 않으니, 그보다 잘 쓰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늙은이 안심시키려 한 말이지만, 월급쟁이가 벌어본들 얼마나 벌겠나?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며 푸념도 늘어놓았다.
“인도종교사 정리해야지, 한국과 인도의 사진작가론 논문 마무리 해야지,
부산 노동운동사 정리해야지, 518도 뭔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5년 밖에 남지않았는데 가능할까?“라며 걱정을 했다.
17년 동안 한 번도 타 먹지 못했다는 안식년이라도 찾아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여지 것 장터 다닐 때는 그 지역 지인들께 연락 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
만나다 보면 일에 차질이 생길 우려도 있지만, 술에 골아 힘들어서다.
그 이튿날은 대변과 기장 항을 거쳐, 포항 구룡포장이 목적지였다.
요즘 유적지나 관광지를 따라 다니다 보니, 관광사진을 많이 찍게 된다.
제일 싫어하는 사진 스타일이지만, 살아가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블로그 화보로 사용하지만, 찍어도 한 지역에 몇 컷만 올리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대변항으로 가다보니 이름만 듣던 ‘용궁사’란 안내판이 보였다.
일정에 없던 용궁사를 들렸는데, 돈이 돈을 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광이 좋은 해변에 세운 절이라 관광객이 흘러 넘쳤다.
종교도 사기라는 이광수교수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시장끼가 돌아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왜 바닷가 음식점은 비싼지 모르겠다.
대변항의 멸치 쌈밥이 최하가 2만원이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돌고 돌아 바닷가를 벗어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포항 구룡포 장을 돌아, 일본인 가옥 터와 호미곶도 들려보았다.
호미곶 조형물 사진을 많이 보아 그런지, 가 본 줄 알았는데 처음 간 곳이었다.
해변을 끼고 도는 드라이브코스가 더 멋지더라.
밤늦게 경주에 여장을 풀었는데, 여관비가 삼 만원이었다.
얼씨구나 들어갔지만, 싼 것이 비지떡이었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이라 그런지, 인터넷 불통에다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
그 이튿날은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선덕여왕능, 분황사, 불국사, 석굴암 등을 돌아 다녔는데,
역시 불국사는 보물의 천국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유적만도 다보탑과 석가탑을 비롯하여 불국사 삼층석탑,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신라시대 석조물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궁궐을 방불케 하는 회랑도 독특하지만, 반야연지의 아름다움은 절의 기품을 더해준다.
그 다음에 간 석굴암은 올라가느라 다리가 아팠지만, 최고의 산책로였다.
이 곳은 일본인들이 망쳐놓은 절이다.
본존불 이마에 박힌 보석도 일본인이 빼 갔지만, 초창기 내부 공사를 잘 못한 것이다.
통풍이 안되어 습기가 차는데다 어떤 곳은 시멘트를 발라 원상복구가 어렵게 만들었다.
여러 차례의 보수 끝에 간신이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유리에 갇혀 일반인의 본존불 친견이 어렵지만,
20여 년 전 전국 사찰을 기록할 때, 조명까지 동원하여 구석구석 다 찍어 두었다.
석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에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원숙한 기법으로 자비롭게 만든 본존불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의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석조각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마지막으로 들린 불국사장은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한산했다.
30여 년 동안 불국사 장에서 장사를 했다는 사주책장사 할아버지 이야기로 대신했다.
그것도 모델료 2천원을 드리는 조건으로...
거지처럼 돈 달라는 버릇도 사진인 들이 만든 업보다.
요즘 정영신씨 작업 덕분에 인생말년의 유람을 제대로 즐긴다.
다들 처음 가는 곳은 아니지만, 일하러 다닐 때와는 전혀 달랐다.
어디, 사진 찍는 일에 얽매이지 않은 채 여유롭게 여행 다닌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둘도 없는 사진동지와의 여행이라 오붓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런지 대상을 보는 눈도 달랐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지만, 죽어도 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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