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세종대왕 영능과 명성왕후 생가가 있는 여주장에 들렸다.

코로나 자가 격리로 묶이기 전에 나선 마지막 나들이였다.

 

정오 무렵 여주장에 도착했는데, 한적한 시골장과는 달리 장터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주장은 1980년대부터 중앙시장이라 불리다, 2016년 문화 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따라 여주한글시장으로 바뀌었는데,

입구에 설치한 장터이름이 세종장인지 한글장인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헷갈렸다.

 

어느 지역을 가나 고유의 장터이름을 두고 왜 엉뚱한 이름으로 바꾸는지 모르겠다.

그 지역을 말해주는 여주장보다 더 친근하고 알기 쉬운 이름이 어디 있는가?

 

여주장이 여주한글시장으로 변신한 뒤, 곳곳에 한글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벽화가 들어섰지만, 한글과 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인들 말에 의하면 장사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가 올 듯한 후덥지근한 날씨였는데, 길에서 벌이는 행인의 신경전이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시장 길이라 차량이 줄을 잇지만, 어떤 남정네가 차를 못 가게 막고 선 것이다.

약 30분이나 버티고 있어 장꾼들이 수습하려 나섰으나 운전자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차에서 내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을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길이라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나, 둘 다 똑 같았다.

더구나 승용차 안에는 어린이와 여인도 타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게 부끄럽지 않았을까?

차안은 시원할지 모르나 교통정리까지 해가며 땡볕을 지켜 선 남정네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얄팍한 자존심 싸움에 많은 행인들만 불편을 겪어야 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여 두 사람을 연행해 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의 전형이 아닐 수 없었다.

 

장터에서 벗어나 여주 명성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갔다.

개화정책을 주도하다 쥐새끼 같은 왜놈들 칼에 무참히 살해된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숙종 13년(1687)에 지어진 집인데, 당시 건물로는 안채뿐이란다.

1996년 안채가 수리되며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큰방, 작은방, 대청마루, 부엌, 광, 사랑채, 별당채 등 모두 13칸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대문인 일주문과 정침이 있는 등 전형적인 조선후기 사대부 가옥구조였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비'(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라 쓴 고종의 어필비가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도 있었다.

거북이 모양의 기단석 몸통을 가졌는데, 특이한 것은 용 형상을 한 머리가 그곳으로부터 150m 지점에 있는 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에 부모를 여의고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6세에 왕비가 된 후 대원군과의 불화가 지속되자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 한 가운데 있었다.

명성황후는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 성향으로 굳혔는데,

명성황후 세력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킨 을미사변에 의해 무참히 시해 당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7시 경복궁에 일본군 140여 명과 낭인들이 나타나 궁궐수비대와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총격전이 한창일 때 은밀히 궁궐의 담을 넘은 한 무리의 칼잡이들이 건청궁으로 진입했는데.

그곳에는 고종의 침전인 곤녕전과 명성황후의 침전인 옥호루가 있었다.

이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살해하고 궁녀와 환관 40여 명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 뒤, 옥호루에 있던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여 시신을 불태운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는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었다.

그 곳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을 비롯하여·같은 시기에 활약한 여흥 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시 사용한 일본도(복제품)와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 낭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고 적혔는데,

명성황후의 시해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참상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의문점으로 남는 것은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신문물이 들어와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할 무렵이라 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손 사진이 남았으나 유독 민비 사진만 불분명한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얼굴에 마마 자욱이 있어 사진 찍기를 꺼렸다고도 하고, 가름한 계란형의 얼굴에다 콧날이 오뚝 선 미인이라는 상반된 기록도 있었다.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대면록은 이러했다.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왜놈들이 사후에 사진을 모두 불태웠다는 설과,

시해 중 아무도 민비의 얼굴을 몰라 더 많은 궁녀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상반된 설이 있는데,

어쩌면 정적에 대비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놈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여주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을 찾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된 최초의 합장릉으로 조선의 왕릉 중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란다.

영릉 묏자리 덕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원래 영릉은 헌릉 서쪽 대모산(현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는데, 세종의 능이 조성될 때부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 자리를 옮기자고 권했지만 세종은 "다른 곳에서 복지를 얻는다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세종의 고집대로 능이 조성되었으나 예종 때 천장한 곳이 지금의 영릉자리다.

그 묏자리는 본래 이인손의 묘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러 지관들이 천장 장소로 여러 곳을 추천했는데도 굳이 우의정을 지낸 공신의 묘를 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천하의 명당이기도 하지만, 광주 이씨의 기를 잘라내기 위해서라는 말도 따랐다,

 

어떻던 최고의 명당자리에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합장릉인 지금의 영릉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만들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고 한다.

 

합장릉 봉분 둘레에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 석을 받치는 동자 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봉분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서로 엇바꾸었고,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가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이었다.

 

봉분 앞 중계에는 문인석 1쌍, 하계에는 무인석 1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고 있었다.

 

세종은 우리 장례문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국 풍습에 따른 수레에서 상여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며 대중화를 꾀했다.

상여는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논두렁을 지나갈 때 양쪽의 상여꾼들은 각각 발을 좁은 길의 벽에 붙이면서 한 발 한 발 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경사진 산비탈은 물론 아무리 좁은 길도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삼각형 피라미드 형태를 취해 힘을 분산시켜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자랑하는 지게 원리와 비슷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안으로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밖으로는 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최고의 군왕이었다.

 

묘역 인근의 세종대왕동상 주변에는 세종 16년 장영실, 김빈 등이 왕명을 받아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비롯하여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 혼천의, 측우기, 조선 시대에 사용하던 해시계 앙부일구 등 많은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세종대왕의 위업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주는 조선의 화려한 위업과 비참한 운명을 함께 간직한 곳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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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행가사의 효시로 통하는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이 장흥에 살았고,

임금이 중심을 잡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만언봉사'를 상소한 존재 위백규도 장흥사람이다.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도 장흥사람이라 장흥을 '문향'이라 부른다.

 

지닌 토요일 정동지와 ‘정남진 토요시장’이 열리는 장흥에 갔다,

도착하니 점심 때라 장마당이 식당 같았다.

할머니들이 장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정겨운 풍정이었다.

 

정동지는 밥 먹으라는 인사에 기다린 듯 달라붙어 쌈을 싸 먹었다.

장돌뱅이 수 십 년에 장꾼들에게 꼽사리 끼이는 게 몸에 베어버렸다.

더러 아는 장꾼을 만나면 죽은 사람 만난 것 처럼 반가워한다.

“아이구! 어찌까이~ 이리 와보랑께~ 뽀짝 와바야~ 한나도 안 늙었네”

가까이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신세타령을 풀어놓는다.

 

장터에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몇 되지 않는 손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매실이나 양파 등 집에서 키운 야채를 가져와 펼쳐놓았지만, 파리만 날렸다.

 

그 중 어물전에 손님이 많았다. “영감 밥상에 자반이라도 한 손 놓아야제!”

사람이 줄어들어 변해가는 오일장이지만, 아직은 노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 노인는 반주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쉼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장흥의 마동욱씨 전화를 받고서야 장터에서 벗어났다.

가는 길에 교촌리 장흥천도교당부터 들리기 위해서다.

장흥천도교당은 목조전통한옥인데, 왠지 왜색 분위기가 풍겼다.

 

정면 5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개축할 때 정면 입구에 포치형을 덧단 형태로 만든데 다

거무스름한 나무색갈이 주는 이질감인 것 같았다.

 

대청의 중앙후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전면에는 유리창으로 된 네쪽 합문과 쪽마루를 두었는데,

‘성화회실’, ‘사무실’, ‘응접실’이라 쓴 글씨체가 둔탁했다.

 

장흥천도교당은 교당 건물로서 몇 개 남지 않은 건축물이라는 점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과 연계된 공간구조라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구조양식의 변형은 전통한옥이 개화기 여러 문화와 변용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 과정의 대표적 표상이라고도 한다.

 

이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옥당리 효자송을 찾아갔다.

밭을 가로지르는 농로 옆에 자리 잡았는데, 나무 높이가 12m로 가슴높이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넓게 퍼져있었다.

나무 나이는 150년이란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위씨가 어머니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뙤약볕에 앉아 아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안 스러워

그 곳에 곰솔을 심어 어머니가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옥당리 효자송 맞은편을 바라보니 궁전 같은 이상한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가보니, 2012년 SBS 드라마 '신의' 세트장으로 사용한 ‘전관대’라고 적혀 있었다.

인적 끊긴 천관대는 잡초만 무성했다.

 

한 때 ‘사상의학 체험랜드’로 바뀌어 한방의학이 필요하거나 농촌 숙박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는데,

찾는 이가 없어 점차 폐허화 되어가고 있었다.

 

건물은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는데,

풀숲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자연은 살아있었다,

 

다음에는 장동면 만수리 천관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해동사`를 찾아갔다.

해동사는 국내 유일의 안중근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이면 제향을 지낸다.

 

장흥 죽산안씨가 안중근 의사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55년 만수사 부지에 안중근의사 사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받아 해동사로 이름하게 되었단다.

장흥의 죽산 안씨들이 장흥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순흥 안 씨의 안중근 의사 사당을 세운 것은

민족과 대의를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높은 정신을 볼 수있는 대목이다.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숭모와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해동사를 찾는 발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흥군은 안 의사 숭모 열기를 감안해 2021년까지 70억 원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을 역사교육 현장으로 만드는

역사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느라 주변일대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장흥에 가면 꼭 가보아야 할 사찰은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다.

신라 선문구산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 말사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이 산에 들어온 체징이 터를 잡아 860년에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고 한다.

공비들이 이 절을 소굴로 사용하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 남았다고 한다.

 

16세기 초에 제작된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안치된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세밀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과 활달한 율동감이 탁월한데, 사천왕상이 일반적으로 긴 칼을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양손에 짧은 칼을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오른쪽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쓴 동방 지국천왕이 성난 표정으로 있다,

갑옷과 천의를 입은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는데,

발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림사 사천왕 4위의 신체 구조는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만 변화가 있을 뿐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목조사천왕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팔뚝처럼 신체의 강건함을 강조하려는 듯 다리 자세에서도 두툼한 질량감을 드러낸다.

 

그 외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보물로는 동부도와 서부도, 보조선사창성탑,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남·북 삼층석탑 및 석등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이 큰 데 비해 하층기단은 좁게 구성되었다.

탑신부의 폭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가늘고 옥개석 낙수면도 얇아 가냘픈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보주 순으로 각 부의 부재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앙화석까지는 양쪽 탑이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으나 남 탑의 보륜은 삼륜, 북 탑은 오륜이 장식되어 있다.

이처럼 상륜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퍽 드문 예라고 한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석등이다.

지면에는 네모난 지복석과 지대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지대석 위에는 3단의 8각 하대석 받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높은 받침과 복련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받침 측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었고 복련석에는 연판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탑 속에서 발견된 탑지에 의하여 확실한 건탑 연대를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또한 석탑과 석등 모두 온전한 형태로 남아 귀중한 복원자료가 되고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지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았는데, 이 불상 왼쪽 어깨 부분에 여덟 줄의 불상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머리 부분이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데. 육계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이다. 편편한 콧잔등과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으로 보아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보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든 위축된 느낌이라 긴장감과 탄력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이처럼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해이해 보이는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은 유적인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머리처럼 변하였으며, 조각의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납게 보인다.

등 뒤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를 두어 비신을 받치게 했다.

이수 아래는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수법이 훌륭하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란다.

 

그리고 40미터 위쪽에는 보조선사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도는 높은 8각 지대석에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모난 받침을 마련하여 세웠는데, 기단부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상하단 모두 8각인 것이 확실하나 파손이 심하여 그 윤곽이 분명하지 않으나,

하단은 각 면에 안상이 있고 상단에는 사자상을 조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길게 뽑지 않고 탑신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 들도록 폭을 좁게 하여 전체적으로 이 부도가 늘씬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탑신석은 유난히 넓고 크며, 8각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대접받침 등이 모각되어 목조가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탑신 여덟 면에는 문비형을 모각하고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갑주가 화려하다.

사천왕상은 각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몸 좌우로는 천의가 휘날리고 있다.

창과 탑을 든 북방 다문천상을 제외하면 모두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이다.

염거화상탑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등장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의상암지 석불입상은 제암산 중턱의 의상암으로 전해지는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75년 인근 장흥교도소 정문 앞에 옮겼다가, 1994년 보림사 경내로 모셔온 불상이다.

석불입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 돌에 새겼는데, 광배는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이다.

민머리에 커다랗고 둥근 육계가 솟았으며, 얼굴은 원래 둥글고 온화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수된 지금의 이목구비는 여성적이다. 체구가 아담하고, 각부의 균형과 비례감이 좋고 조각기법도 우수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엄지와 둘째손가락을 둥글게 맞대었으며, 왼손은 손목 아랫부분이 깨어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 외 유적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있는데, 곳곳에서 석기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고인돌이 수백 기나 되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 100여기가 무리 지어 있다.

산성으로는 장흥읍 건산리의 중녕산고성, 용산면 계산리와 안량면 수양리에 걸쳐 있는 학성,

관산읍의 성산리에 석남산성, 방촌리와 외동리에 회주산성과 천관산성 등이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정동지 따라 지리산 권역의 산청으로 갔다.

 

산청하면 지리산이 생각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지만, 5월에는 산청한방약초축제나 황매산 철쭉제도 열린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곳은 장터 아니면 유적지 뿐이다.

 

정동지의 취재 일정이 어떻게 짜였는지 모르지만, 일단 산청 장부터 들렸다.

 

읍내 산청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시골장답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산청장 역시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기존장옥에는 사람이 없고 골목에만 행상들과 손님이 몰려 있었다.

 

점포를 지닌 기존상인만 힘들게 하는 이러한 전국적인 현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박근혜정부의 문화관광형시장 정책 때문이다.

전통시장의 특성을 무시한 채, 장옥현대화에만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토목 업자 배 불리는 일에 올인 한 것은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아서 일까?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어울리는 우리네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었다.

이에 따른 또 하나의 문제는 장터 박물관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에

수십 년 된 기존의 장옥을 모두 철거해 오래된 장옥의 씨를 말렸다는 점이다.

 

나랏돈 쏟아 부어 장터 기능 망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안한 정책 책임자를 찾아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골목 장터에는 한 할머니가 집에서 따온 딸기를 팔고 있었는데, 뼈마디 마디 앙상한 거친 손이 딸기에 물들어 있었다.

정동지는 할머니 손을 어루만지며 안 서러워 하다, 딸기 한 바구니를 사 드렸다.

긴 시간동안 차에 실려 다니다 뭉개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옆에서는 한 아낙의 손님 부르는 호객소리가 구수하다.

“산에서 금방 따온 드릅 입니더. 한 소쿠리 만원만 주이소“

 

장터에서 나와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덕천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숲이 많아 산그늘이 진다고 해서 산음(山陰)이라고도 불린 산청은 온통 갈맷빛이었다.

물기 머금은 산은 영롱한 초록빛으로 눈부셨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으로 1576년 선조 때 세워졌다.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의 중심건물인 ‘경의당“과 함께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제와 서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경의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敬’과 ‘義’를 중요시한 남명선생의 학문정신을 담은 곳이다.

 

뒤편에 자리한 승덕사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낸다.

 

덕천서원은 1600년 임진왜란과 1870년 고종 때 불탄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된 서원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과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편에 있는 전학 후묘의 배치로,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다.

 

고즈넉한 고건축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아 옛 서원의 풍모를 자랑했는데,

서원 맞은 편 물가에 ‘洗心亭’이란 편액이 걸린 정자 하나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에 앉아 마음을 씻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 마냥 아쉽다.

 

그 다음에는 삼국시대 창건된 지리산 동쪽 기슭의 ‘대원사‘로 갔는데, 절 앞에는 지리산 계곡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이 절은 1685년(숙종)에 ‘대원암’으로 창건하였으나, 1890년(고종)에 중건하며 대원사로 격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1955년에 중창하여 비구니 선원을 개설하였다. 선원은 석남사, 견성암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 도량으로 꼽힌다.

 

해인사 말사인 대원사 당우로는 대웅전, 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 ·봉상루, 천왕문,·범종각, 등이 있으며 절 뒤쪽에는‘사리전’이란 암자가 있어 수도하러 온 여승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절 입구에는 부도와 방광비가 있고, 선비들의 수학처인 거연정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은 사리전 앞에 우뚝 서있다.

646년 자장이 세웠다는 이 탑은 돌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탓으로 붉은 물이 스며 나와 탑신의 전체형상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드물게 남은 조선 전기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웠다. 전체적인 체감비율이 뛰어나고 조각은 소박하다.

 

이 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기단 위층 모서리다.

기둥 모양을 새기는 대신 인물상을 두었고, 4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처마가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약간 들렸는데, 8층 지붕돌에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탑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근처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산청 도전리에 있는 마애불상군을 찾아 나서다 ‘남사예담촌’에 잠시 차를 세웠다.

담장 너머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펴보며 잠깐 쉴 작정이었는데, 부부회회나무를 비롯하여 18~20세기에 지은 전통 한옥 40여 채가 남아 있었다. ‘예담’이란 이름은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마굿간 갤러리’에 들어가 보았다.

고가를 활용한 창작공간이라 참고할 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대문에 ‘색과 서에 빠지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누구의 작업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천연염색을 한 천이 빨랫줄에 널려 있었고, 다양한 글귀가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즈넉한 예향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고 싶은 집이었다.

저만한 고택을 구할 수야 없겠지만, 정선 만지산에도 저런 집을 짓고 싶었다.

 

한옥에서 다시 도전리로 향했는데, 마애불상군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사이로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니, ‘부처덤’으로도 부른다는 자연석 암벽이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자연암벽에 29구의 불상들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4단으로 새겨놓은 불상은 1층에 14구, 2층에 9구, 3층에 3구, 4층에 3구가 있었는데, 크기는 30cm 안팎이었다.

 

대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아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강했다. 대개 비슷비슷하게 새겨졌으나 옷 모양이나 손모양 등의 세부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찾아다닌 유적지 외에도 산성이나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등 가 볼 곳이 많았지만, 당일치기로는 무리였다.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지만, 그래도 정동지 와의 유적 여행이 유일한 낙이고 행복이다.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전국을 헤집고 다니는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씨도 모르는 장이 있었다. 전국장터 목록에도 빠진 아산 둔포장을 김선우씨로부터 알아낸 것이다.

 

 

 

지난 12일 동자동에서 열렸던 정의당 공공개발 현장간담회 끝나기 무섭게 정동지와 함께 아산 둔포로 내려갔다.

 

 

 

네비 안내 따라 정오 무렵 둔포 장에 도착했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작은 장이 아닌가 싶었다. 고정 상가라고는 식당뿐이고, 잘동뱅이 열 한 팀이 자리 잡은 조그만 장인데. 손님이라고는 30여분 동안 일곱 명 밖에 보지 못했다. 품목도 야채모종이나 과일, 옷 등 몇 가지뿐이라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마지막 풍경 같았다.

 

 

 

장터는 보잘 것 없으나 먹을 복은 있는지 식당은 근사했다.

아산 ‘공유공간 마인’의 김선우씨를 만나 보리밥집에 들어갔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푸짐했다.

 

 

 

시골에서 9천 원짜리 비빔밥이면 비싼 편이지만, 수육까지 나왔다.

 

 

 

맛있게 얻어먹고 김선유씨 안내에 따라 ‘백암길185 미술관’ 터가 있다는 염치면 백암리로 갔다.

 

 

 

 

현충사 둘레길이라는 현장에 도착해 보니, 한적한 길가에 자리잡은 시골 집 이었다; 가난한 목수와 딸이 살다 떠난 집이라는데, 곳곳에 부녀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작은 문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가동된다는 냉장고만 버틴, 천장 낮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벌써 날씨가 더위지기 시작해 마당에 퍼져 앉았는데, 김선우씨가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가져왔다. 

 

 

김선우사진 스크랩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하는 ‘백암길185 미술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 할지 기대된다. 현충사 둘레 길 모퉁이에 자리 잡은 ‘백암길185 미술관이 또 다른 아산의 문화아지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상주장 가는 길에 ‘옥동서원’을 들렸다.

‘옥동서원’은 영동과 경계를 이루는 백화산 물줄기 아래 자리잡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다.

백화산 자락에 고즈넉하게 수줍은 듯 웅크린 ‘옥동서원’에서 선조들의 여유와 멋을 체감했다.

 

옥동서원은 명재상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황희는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교 숭상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지냈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 왕을 보좌했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하기 까지 했다.

 

이 서원은 1518년 창건하여, 1580년 영당 지어 향사를 지내면서 지금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한 곳이다.

경내는 사당인 경덕사와 강당인 온휘당이 있다.

그리고 청월루의 진밀료와 윤택료가 작게나마 동재와 서재 역할을 한다.

 

그동안 이곳저곳 서원을 다녀보았지만, 옥동서원 외삼문은 좀 특이한 구조다.

누각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 벽 사이에 일정한 공간을 두었는데,

이는 동재와 서재 역할 하는 방에 군불 지필 때 아궁이의 열기를 피하기 위한 것 같았다.

아궁이 또한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지피는 형태가 아니라 서서 장작을 집어넣도록 만들어 놓았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올라 가 보았다.

대청마루의 삐걱대는 소리조차 정겹더라. 누각 가운데에는 ‘청월루’ 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문제는 어느 서원이나 책을 보관하는 문고가 없다는 점이다.

 

 

서원 중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병산서원의 문고보존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열람이나 이용은 거의 불가능하고,

종손이나 서원관계 후손 집에 분산되어 있다고 한다.

서원의 서적보존과 체계적인 관리가 절실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답답한 즈음, 서원의 고고한 자태에 둘러싸여

선인들의 선비 정신을 되세기며, 여유로운 풍류에 젖어 보심이 어떨지...

 

사진, 글 / 조문호

 

그리고 2일 7일에 맞추어 간다면 상주장에 들리는 것도 좋다.

따뜻한 햇살받은 할머니들 봄나물 다듬는 모습들이 정겹다

봄 향내 속에 무뚝뚝한 보리문둥이들의 인정 맛보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재미

 

아래는 2일 7일 같은 날 장이 서는 선산장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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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全羅右道 群山鎭 地圖)를 보면 옥구군 경포리(京浦)에 큰 하천이 있고 여기에 긴 다리 하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 장이 크게 섰다. 전라, 충청도에서 걷어들인 모든 물화가 여기에 쌓여지고 이것들을 배편으로 서울에 옮겨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백제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고려, 특히 조선시대에는 그 물량이 다양했다고 한다. (아래 줄임)" -'설애(京浦)' 안내문에서


경포리(설애·서래)는 요즘의 군산시 중동 지역을 일컫는다. 수문(水門) 턱밑까지 고깃배와 장삿배가 드나들었고, 오일장(五日場)이 열렸다. 1917년 제작된 지도에서도 경포리 마을이 중동 중심으로 조성돼 있음이 확인된다. '경포교' 역시 이곳 수문을 지칭했으나 경포천 직강화 공사로 보(봇물)가 매립되고 수문이 군산경찰서 부근에 설치되면서 이름도 따라갔다.

 

  1950~1960년대 서래포구(경포)
ⓒ 조종안

  경포천 수문과 흡사한 구암천 수문
   

옛날 신문에 따르면 경포리 수문은 1915년경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물 부족 사태를 겪어오던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이 바닷물 유입을 막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배수갑문'을 설치한 것. 당시 수리조합들은 용수가 부족하여 일본인 지주들이 추진하는 농사 개량 사업도 예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전한다.

호남 7정 중 하나였던 군산 진남정(鎭南亭)도 서래산을 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역 유림과 유지들 발의로 1921년 경포천 주변에 신축했다가 하천 범람으로 1928년 월명공원 아래로 이전한 것. 당시 진남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전통 목조건물이었으나 2006년 지금의 자리(개정면 최호 장군 유적지 내)에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래장터, 장시 기능 위축 후에도 사랑받아

 

  서래산에서 바라본 ‘경포천 수문’ 자리.(2011년 찍음)
ⓒ 조종안

 


위 사진에서 길 왼쪽 목공소 건물 자리는 고깃배와 장삿배가 주야로 드나들던 포구였고, 오른쪽에는 농업용수를 가둬두던 보(洑)가 있었다. 금성산 산록에서 발원한 경포천이 석교뜰을 지나 아흔아홉다리(송경교)와 댓교(꺼먹다리)를 거쳐 이곳 보에서 쉬었다가 수문을 통해 금강으로 유입됐던 것. 보는 겨울에는 아이들의 얼음썰매장, 여름에는 아낙들의 빨래터가 됐다.

도로 시작점은 경포천 수문이 있던 자리다. 농업용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배수갑문으로 경포교, 물문다리, 서래다리(설애다리), 경포다리 등으로 불렸다. 비록 폭은 좁았으나 군산에서 웅포, 임피, 강경, 논산, 공주, 천안, 서울 등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대형 트럭과 시외버스가 오갔던 중요한 지방도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개설된 전군도로가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로 알려진다. 이 도로(구암 3·1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서양선교사가 구암리 주민들 불편 해소에 써달라고 보내온 600달러로 다리('구암교'로 추정)를 설치했다는 기록과 1909년 사진에 서래장터-구암리 구간 도로가 가는 선으로 나타나는 것 등이 추정을 가능케 한다.

서래장터(경포)는 경장시(경장시장) 기능이 위축된 후에도 장시와 포구 기능을 병행하며 보부상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치가 경장시보다 금강 본류와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던 점도 장꾼과 소비자가 자주 이용했던 이유일 터다. 소설 <탁류>(1939)에서 정 주사가 '안스래(경포천 서쪽)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는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난장(亂場)이 서기도 하였다. 풍물패(농악단)와 사당패 공연도 들어왔다. 그중 난장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두 달씩 이어졌단다. 난장과 풍물패는 광복 후 1960년대까지 서래장터 인근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특히 난장 때는 건달패·야바위꾼·장타령꾼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온갖 야바위 게임과 각설이 공연으로 사행심을 부추겼다.

중동 당산제, 일제의 감시에도 300여 년 지켜

 

  경포천변에서 풍물한마당 펼치는 중동 경로당 풍물패
ⓒ 조종안

 

 
서래산(돌산) 중턱에는 3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당집도 있었다. '서래장터'를 지켜준다고 믿는 주민들이 당집과 당지기 집을 지었던 것. 주민들은 일제의 무속(巫俗) 감시와 단속에도 정월 열나흘에 당제를 지내왔다. 광복 후 채석작업으로 보존이 어렵게 되자 1970년대 중반 마을 노인들이 '당우(堂宇)'를 중동 경로당으로 옮겨 보존해오고 있다.

"이 동네가 옛날부터 스래(서래)여. 그전이는 여그로 강(경포천)이 지나갔어. 배들이 쩌그 물문다리 아래까지 들왔다 나갔다 혔응게. 그때는 쩌그 독산(서래산)에 있던 당집으로 동네 친구들하고 같이 많이 놀러 댕겼지..."
 
중동이 고향이라는 한씨 할머니(84)의 추억담이다. 결혼하고 시집에 살았던 몇 년을 제외하고 중동에서만 살고 있다는 할머니는 "어렸을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당집 주변에서 놀았는디 철들면서 출입을 금했다"며 "그때는 배부리는 사람(선주)이 많이 살았고, 당산제 지내는 대보름날은 풍물 잔치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으로 우리의 토속신앙이 대부분 사라졌다. 군산 지역도 각 섬을 비롯해 하제포구, 중앙로(노서산), 신흥동(절골) 등 여러 마을에서 당제를 지냈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고, 중동 당제만 유일하게 남아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오전 재현행사가 열린다. 주민들은 오후 만조시간에 맞춰 풍물패를 앞세우고 경포천변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선조들 항일정신 깃든 지명 '구암 3·1로'

구한말 지방의 상업은 주로 장시(장터·장마당) 중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장시는 개인과 생산자가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공간이었다. 어지러운 시국 상황 등 각종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때로는 농어민들이 모여 불만을 토로하는 여론 형성의 마당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장날에 맞춰 거사를 기획하는 등 장터는 정치적 기능도 겸하였다.

 

  군산 서래장터 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 조종안

 

 
서래장터는 한강 이남 최초로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군산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서래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계획했던 것. 장날(3월 6일)에 맞춰 궐기하기로 했으나 전날 주모자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는 바람에 하루 앞당겨 시위에 들어가 '3·5만세운동', '서래장터 만세운동(설애장터 만세운동)' 등으로 불린다.

만세 시위는 영명중학교 학생과 구암병원, 구암교회 등이 주축이 됐다. 멜볼딘여학교를 비롯해 천주교, 불교인, 보통학교 학생까지 합세했으며 구암동산을 출발한 시위대가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군산 인구는 1만361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으로 일인 도시화 되어 있었다.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됐다. 3월 한 달에만 군산경찰서 방화사건(12일), 군산보통학교 학생들 집단 자퇴서 제출 사건(14일), 군산보통학교 방화사건(23일), 시민, 학생들 횃불 시위(30일), 군산법원 재판정 앞 만세시위(31일) 등이 일어났다. 연인원 3만여 명(총 28회)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등의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일본헌병과 무장 경찰의 총칼 앞에 한국인의 20% 정도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셈이다. 서래장터 만세운동은 남부지방의 각 도시와 마을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명(옛 서래장터~구암리 영명중학교 구간)도 '구암 3·1로'다. 지명에도 선조들의 항일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스크랩] 오마이뉴스 / 조종안기자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이 이제 종반에 접어들었다.

개막 후 이틀 동안의 전시장 방문객 사진은 보여드렸으나,

그 이후부터 컴퓨터와 만날 시간이 없어 많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포스팅은 13일부터 16일까지 방문한 분들의 모습과 전시장 풍경이다.

전시장을 비워 뵙지 못했거나,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한 분들에게는 송구스럽다.

 

지난 13일 정오 무렵에는 곽명우씨가 다시 방문했다.

첫 날 늦게 와 사진을 찍지 못한 것 같았다.

 

김남진관장과 곽명우, 정영신씨와 ‘진수성찬’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

‘진수성찬’은 처음 가본 정식집인데,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반찬이 정갈하고 구수한 누룽지가 일품이었다.

 

그 다음 날 정오 무렵에는 소설가 김승환선생 께서 먼저 와 계셨다.

강민 시인께서 살아계실 적엔 가끔 인사동에서 뵐 수 있었으나,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전혀 뵐 수 없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먼 거리를 와 주신 것만도 황송한데, 선물이라며 가죽가방 하나를 꺼내 주었다.

아마 선생님께서 애용하신 가방 같은데,

이젠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정영신씨를 준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았다.

 

그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대개의 식당이 문을 닫았더라.

문이 열린 집이라고는 순대국밥 뿐이라 썩 내키지 않았는데,

반주에다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식사 후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으나, 기어히 사양하시며 발길을 재촉하시네.

김선생님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그 뒷모습이 바로 내 모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하룻밤을 지나면 한 달이 지난 것처럼 세월이 쏜살같다.

들려오는 주변 분들의 부음조차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난, 동자동에서 지내다 필요할 때만 나가니, 뵙지 못한 분도 많았다.

없는 시간에 다녀 간 분으로는 전활철, 한선영, 류엘리, 노연덕, 황성호, 권순광,

안옥철, 이정숙, 황인선, 최치권, 김준희, 권혜진, 김기덕, 서은화. 정명식, 김광안,

정남준, 안현수, 이세연, 노은향, 최재순, 남 준, 이태호, 이수만, 하춘근, 정주영,

김소연, 이성표, 심지윤, 김중호, 김명점, 이창수,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더라.

 

지난 15일 오후에는 화가 나종희씨가 전시장을 찾았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전시할 계획은 없냐?’고 물었더니,

이 달 25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연다더라.

 

마치 알고 물어 본 것 같았는데,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벌써 기다려진다.

그 날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2주기 추모전과 겹쳤지만,

가까운 거리라 일거양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다음 날은 끝 날 시간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들렸는데, 사진가 하형우씨가 와 있었다.

좀 있으니 강릉의 황지웅피디와 이승구피디가 멀리서 찾아왔다.

먼 길을 와 주신 것만도 황송스러운데, 밥 값을 계산해 버렸네.

다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다.

 

도시 재생을 위해 철거된 화광아파트와 광부들의 애환을 담은,

황지웅PD가 만든 '광부의 기억 화광아파트'가 방송문화진흥회가 시상하는

2020 지역프로그램대상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역방송사의 열악한 예산과 인력 탓에 휴일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취재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 긴 과정에 아들이 조수 역할을 맡았는데,

상보다 더 값진 선물은 작업 과정을 지켜 본 아들로부터 들은 ‘자랑스러운 아빠’라는 말 한마디였다.

이 보다 더 한 보상이 어디있겠는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 좋은 일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지난 16일 오후에는 뮤지션 김상현씨가 동자동에 찾아 와 함께 전시장에 들렸다.

사진가 김범수씨와 판화가 류연복씨, 미술평론가 황정수씨와 오란석씨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차례대로 나타났다.

김범수씨는 인도커피를 가져 와 즉석에서 뽑아 돌렸는데, 그 맛이 귀가 막혔다고 한다.

쓴맛, 단맛, 짠맛 등 갖가지 맛이 어우러진 별난 맛이라는데, 나만 사양했다.

믹스커피나 마시는 커피 맛도 모르는 촌놈이 귀한 커피를 축낼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사람 좋기로 소문난 류연복씨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한 편으론 안스러운 생각도 든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할지 모르겠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롭기 때문이다.

아니면 중의 팔자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황정수씨는 날 잡아 류연복씨 집을 방문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인근에 있는 정복수씨나 변승훈씨 작업실은 가 보았으나,

류연복씨 작업실은 가보지 못했다.

날짜만 맞으면 이참에 따라 붙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 날 황정수씨가 보여 준 이청운씨의 오래된 작품 한 점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보아왔던 작품과 달리 콩크리트 골조가 화면을 채운 현실 비판적 그림이었다.

 

난, 이청운화백을 감히 천재 작가라고 말한다.

하루속히 병석에서 일어나 머리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화폭에 쏟아냈으면 좋겠다

지난 병문안 때의 활기찬 모습에 기대했는데, 다시 입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 날 묵은지 갈비찜이 맛있는 ‘김삼보’집에서 어울려 기분좋게 술 한 잔 했다.

지하철 탄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요즘은 코로나에 목숨 걸고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취하는 것도 유별나다.

 

영원한 동지 정영신씨가 요즘 고생을 사서한다.

전염병으로 개막식 초대를 없애는 대신, 항시 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손님들로 인해 마음 편히 쉴수도 없겠더라.

몇 날 몇 일을 전시장에 틀어박혀 손님만 맞았으니 몸이 견디겠는가?

 

자!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장돌뱅이는 죽어도 장에서 죽어야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23일 정영신씨의 ‘장터길 문화탐방(가제)’ 출판 마무리 작업에 따라 나섰는데,
문경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마침,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의 기념관에 간다는 것이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의 궤적도 인상적이지만,
항일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적에 비해 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하여 일본 히로히토 암살을 모의한 당사자다.
‘대역사건’으로 검거되어 23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출옥되어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조선인거류민당’을 차례대로 창립하기도 했다.



2012년 생가 터에 박열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 부터 자리 잡았다는 가네꼬 후미코의 묘소도 있었다.
감옥에서 꽃다운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가네꼬 후미코는
일제에 저항한 공로로 일본인으로 두 번째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얼마 전 김명성씨가 소장한 박열의사의 많은 친필서한들을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서한들을 접하며 그를 다시 알게 된 것이다.
기념관에는 어떤 유적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문경새재에서 아침시간을 보내고, 정오 가까이 기념관에 도착했는데,
공원화한 유적지의 기념관은 엄청난 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람객은 커녕 관리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가 터도 복원해 놓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는, 민속촌에서나 본듯 한 초가였다.




기념관에는 여러가지 사료들을 모아두었으나,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복제였다.
눈 짐작에도 몇 백억 예산은 족히 들어갔을 텐데, 껍데기에 불과한 토목공사에 돈 처바르고,
유적구입에는 왜 소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유적 구입에 들어가는 돈은 남는 게 없어서일까? 아니면 몰라서일까?
비록 여기만이 아니라 지자체에서 건립한 대개의 유적들이 이런 식이다.
엄청난 규모로 만들기만 해놓고, 관리나 홍보는 뒷전인 이런 식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다음 행선지는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 온 천연의 요새, ‘고모산성’이었다.
이곳은 옛날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의 애환이 담긴 산길이기도 한데,
포곡식 산성으로 본성과 익성을 합해 총 1,646m에 달하는 성이다.




사방에서 침입하는 적을 모두 방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선인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건축미와 세월의 흔적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마지막 들린 곳은 한 때 문경선 역사였던 ‘불정역’이었다.
1954년 문을 열어 1993년 문을 닫은 불정역은 문경탄광의 석탄산업과 연계된 역사적 장소성이 있다.




역사 아래는 화강석으로 마감했으나, 상부는 인근의 구랑리 천 강자갈을 사용했다고 한다.
멈춰 선 기차의 객실은 문이 닫혔으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 듯 했다,

비록 찾는 이는 없으나, 아담한 간이역이었다.




오후1시가 넘도록 아침식사를 못해, 허기져 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배가 고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경장에 들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는데, 오천원짜리 정식을 시켜 엄청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 이라 듯, 무엇을 먹은들 맛없는 음식이 있겠는가?



 
문경까지 와서 그냥 가면 안 될 분이 있다며, 정영신씨가 이선행씨에게 연락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온 그의 안내로 인근의 단골집 ‘커피 가 로스터스’에 들렸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지만, 가격도 저렴한데다 커피마니아가 운영하는 괜찮은 커피집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일어나 혼자 장터에 갔다.




대목장이라 장터는 붐볐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방앗간에 떡 만들러 온 사람들의 행렬도 보이지 않았고, 생선가게만 붐볐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장터 풍경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장터에서 멋쟁이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연세의 할머니가 뽀얗게 분을 바르고, 빨간 하이일 까지 신었더라.
마지막까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 할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좀 있으니,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터 촬영도 촬영이지만, 우리도 제사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 서산장에서도 몇 가지 샀지만, 나물거리와 생선을 사야 한단다.
따라 온 이선행씨가 단골집에 들려 시금치 한 단을 사주었는데,
가격은 서울과 똑같은 오천원이나, 양은 서울의 곱절이나 되었다.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었다'는 ‘문경새재’라 그런지, 나도 힘들었다.
대목장 마지막 촬영지라 누적된 피로가 몰려 온 듯 했다.
무사히 집까지 오긴 했으나, 졸음운전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사는 것 자체가 곡예 아니던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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