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부터 3일 동안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로 사진 여행을 떠났다.





첫 날 부산 오시게장부터 들렸는데, 쇠퇴해 가는 시골장과는 달리 사람들이 북적였다.

다행히 장옥을 짓지 않아, 천막으로 이루어진 노점상이라 좋았다.





예전과 달리 시장기능에 더해 먹거리전이 성행했다.

오후에는 관광지가 된 초량 168계단과 감천마을을 돌아본 후, 남포동에 숙소를 잡았다.



 


이 시대의 투사 이광수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얼마 전 이광수교수 장모 상을 당했으나, 알리지 않아 미처 몰랐다.

남의 일에는 사방팔방 쫓아다니지만, 정작 자신의 일은 알리지 않았는데,

남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은 이해 하지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늦었지만 한 번 가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 늦었는데,

정영신씨의 부산지역 촬영 길에 님도 보고 뽕도 딸 겸 따라 나선 것이다.





이광수교수는 이 시대 몇 안 되는 의인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정의감은 정치와 교육, 예술 등 사회 전 분야의 모순과 부조리에 칼을 휘두른다.





왕따의 불이익을 당 할 건 불을 보듯 훤하지만 그냥두지 않는다.

한 번은 직속상관에게도 직사포를 쏘았는데, 쪽 팔린 대학총장이 삼일동안 결근을 했단다.

정의사회를 위해 물불가리지 않으며, 한 번 물면 놓지 않고 끝장을 본다.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도 예외가 아닌데, 4년 전에는 최민식 사진상비리를 물고 늘어졌다.

다들 찍힐까봐 남의 일처럼 등짐만 지고 있는 현실이라 눈이 번쩍 뜨였는데,

그것도 문제의 당사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그동안 사진계 비리와 모순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지만,

모두 잘 아는 분과 연관되어 입을 다문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했던 처신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 혁명가기질의 이광수교수를 존경한다글을 올렸는데,

서울문화투데이발행인 이은영씨가 보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그 글을 신문에 옮기고 싶다는 부탁을 받아들였는데,

그 게 계기가 되어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라는 칼럼을 쓰게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 2년 동안 연재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도 따랐다.

가까운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도 하고, 동강할미꽃 훼손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 까지 했다.

지인 한 분은, 그 일을 맡은 후로 사람 좋은 조문호가 칼럼 제목처럼 빼딱하게 변했다는 조롱도 받았다.



 


그런 조롱이 그 일을 그만두게 한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 다음 부터 전시리뷰만 쓴 것이다.

더구나 돈 한 푼 받지 않고, 정영신씨 까지 합세하여 가난한 신문사를 돕다, 3년을 기점으로 손을 떼어 버렸다.

지나치면 공짜로 부려먹는 것도 습관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교수 이야기하다 삼천포로 빠졌는데,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게 해준 고마움에 대한 사족이다.



 


우리나라에 이광수씨 같은 분이 열만 있어도 요지경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사실, 그처럼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작은 잘못이 있어도 뒤통수 맞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 그만큼 청렴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자기가 맡은 교수 직분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동안 인도고대사를 비롯하여 척박한 사진계에 내놓은 연구논문들과 비평서 등 이루어 낸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정치평론가로서 내 지르는 발언은 더러운 정치판에 속이 다 후련해진다.

족집게 도사처럼 예견하는 것이 척척 들어맞았는데, 그만큼 정치판의 속성을 꿰뚫고 있다는 거다.

그가 펴낸 정치평론서 정치인에게 안 속고 정치판 꿰뚫는 기술이 잘 말해준다.


 



약속한 오후630분 무렵, 자갈치시장에 먼저 나와 있었다.

자갈치시장과 집이 가깝다고 말했는데, 그 날은 한 시간 밖에 안 걸려, 좀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다.

같이 만나기로 한 부인 유재희씨는 서울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요즘 부산에 감성 코칭 사무실을 차려 바쁘다고 한다.

감성 코칭이란 직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겨졌다.






자갈치 신동아 횟집으로 들어가 과분한 술상을 받았는데,

좀 있으니, 사회다큐사진집단인 비주류사진관을 끌어가는 사진가 정남준씨가 나타났다.

정남준씨를 만난 적은 시위현장에서 한두 번 뿐이지만,

폐북에서 그동안의 활동과 사진들을 많이 본 터라, 좋아하는 사진가다.

사진적 주관이 뚜렷한 노동현장의 리얼리티 넘치는 사진에 늘 존경감을 느껴왔는데,

뜻밖에 만난 분과 술 잔을 나눌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이광수 교수는 정말 희생정신이 투철한 학자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내는지 모르겠다.

부산지역사회연대기금인 만원의연대를 주선하는 것을 비롯해

요즘은 ‘518에 관한 주제로 전국을 쫓아다니는 무료강의를 시작했다.

문제점이 있는 곳이라면 정치비판에서 종교비판, 역사비판, 사학재단비판, 사진비판 등 닥치는 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전문가가 아니고는 문제 삼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 날은 마누라가 나 보다 더 바빠요라는 즐거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좀 불편하지만, 은근히 자유로움을 즐긴다는 것이다.

, 이광수교수를 교주로 모시는데, 천하의 교주도 상전은 있었다.



 


아무튼, 교주와의 술자리는 스트레스 푸는 데 최고다.

직사포로 쏘아대는 말 펀치에 속이 다 후련해진다.

나도 가끔 술자리 분위기 살리려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지만,

다들 그 자리선 웃지만 돌아서선 욕한다.



 


그렇지만, 교주님은 그런 농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직설적인 욕이라 꽉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술자리에서 점잖은 말만 골라 내뱉으며 은근히 지식 자랑하는 사내들이나

내숭 떠는 여편네들 보면 속이 울렁거려 못 견디는데 말이다.

요즘 숨이 가빠 술을 잘 못 마시지만, 그 날은 기분이 좋아 술술 들어갔다.



 


자갈치 시장에서 술을 마시니, 40여 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남포동에서 한마당이란 국악주점을 할 때인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민식선생은 자갈치시장에서 사진 찍다 가끔 들리셨다.

어느 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진 소식을 듣고, 그 곳에 가지 못해 안달하시던 모습도 생각났고,

이웃한 달 동내 포주였던 아마추어 사진가 최시병씨도 생각나고, 

'한마당'에서 사진전시를 했던 사진가 김석중씨도 생각났다.





어느 날 새벽에는 남포동에서 '전원음악다방'을 운영하던 친구 신윤택씨가 문을 두드렸다.

박정희가 총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왔는데, 잠결에 좋아했던 생각도 났다.

그 뒤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게 코카콜라 작은 병이 거들 났다.

돌맹이가 귀한 도심이라 그보다 좋은 무기가 없었다.



 


그런데, 이광수씨도 정남준씨도 다들 잘 마시더라. 빈병이 줄을 섰으나 이차를 가잖다.

늙은이 몸 보신시켜준다며 끌고 간곳은 꼼장어 집이었다.

다들 술이 취해 안주는 먹지 못하고 바가지만 덮어썼지만...



 


이 교수는 돈 잘 번다고 큰 소리 쳤지만, 버는 것보다 쓰는 게 중요하다.

좋은 일 하러 다니느라 길에 다 뿌리고 약자들 돕는데 아끼지 않으니, 그보다 잘 쓰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늙은이 안심시키려 한 말이지만, 월급쟁이가 벌어본들 얼마나 벌겠나?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며 푸념도 늘어놓았다.

인도종교사 정리해야지, 한국과 인도의 사진작가론 논문 마무리 해야지,

부산 노동운동사 정리해야지, 518도 뭔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제 5년 밖에 남지않았는데 가능할까?“라며 걱정을 했다.

17년 동안 한 번도 타 먹지 못했다는 안식년이라도 찾아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여지 것 장터 다닐 때는 그 지역 지인들께 연락 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

만나다 보면 일에 차질이 생길 우려도 있지만, 술에 골아 힘들어서다.



 


그 이튿날은 대변과 기장 항을 거쳐, 포항 구룡포장이 목적지였다.

요즘 유적지나 관광지를 따라 다니다 보니, 관광사진을 많이 찍게 된다.

제일 싫어하는 사진 스타일이지만, 살아가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블로그 화보로 사용하지만, 찍어도 한 지역에 몇 컷만 올리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대변항으로 가다보니 이름만 듣던 용궁사란 안내판이 보였다.

일정에 없던 용궁사를 들렸는데, 돈이 돈을 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광이 좋은 해변에 세운 절이라 관광객이 흘러 넘쳤다.

종교도 사기라는 이광수교수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시장끼가 돌아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왜 바닷가 음식점은 비싼지 모르겠다.

대변항의 멸치 쌈밥이 최하가 2만원이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돌고 돌아 바닷가를 벗어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포항 구룡포 장을 돌아, 일본인 가옥 터와 호미곶도 들려보았다.

호미곶 조형물 사진을 많이 보아 그런지, 가 본 줄 알았는데 처음 간 곳이었다.

해변을 끼고 도는 드라이브코스가 더 멋지더라



 

 


밤늦게 경주에 여장을 풀었는데, 여관비가 삼 만원이었다.

얼씨구나 들어갔지만, 싼 것이 비지떡이었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여관이라 그런지, 인터넷 불통에다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



 


그 이튿날은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선덕여왕능, 분황사, 불국사, 석굴암 등을 돌아 다녔는데,

역시 불국사는 보물의 천국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유적만도 다보탑과 석가탑을 비롯하여 불국사 삼층석탑,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신라시대 석조물과 석조건축의 높은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궁궐을 방불케 하는 회랑도 독특하지만, 반야연지의 아름다움은 절의 기품을 더해준다.





그 다음에 간 석굴암은 올라가느라 다리가 아팠지만, 최고의 산책로였다.


이 곳은 일본인들이 망쳐놓은 절이다.

본존불 이마에 박힌 보석도 일본인이 빼 갔지만, 초창기 내부 공사를 잘 못한 것이다.

통풍이 안되어 습기가 차는데다 어떤 곳은 시멘트를 발라 원상복구가 어렵게 만들었다.

여러 차례의 보수 끝에 간신이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유리에 갇혀 일반인의 본존불 친견이 어렵지만,

20여 년 전 전국 사찰을 기록할 때, 조명까지 동원하여 구석구석 다 찍어 두었다.





석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에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원숙한 기법으로 자비롭게 만든 본존불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의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석조각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마지막으로 들린 불국사장은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한산했다.

30여 년 동안 불국사 장에서 장사를 했다는 사주책장사 할아버지 이야기로 대신했다.

그것도 모델료 2천원을 드리는 조건으로...

거지처럼 돈 달라는 버릇도 사진인 들이 만든 업보다.



 


요즘 정영신씨 작업 덕분에 인생말년의 유람을 제대로 즐긴다.

다들 처음 가는 곳은 아니지만, 일하러 다닐 때와는 전혀 달랐다.

어디, 사진 찍는 일에 얽매이지 않은 채 여유롭게 여행 다닌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둘도 없는 사진동지와의 여행이라 오붓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런지 대상을 보는 눈도 달랐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지만, 죽어도 고다.


 

사진, / 조문호




















































 





예천군하면 외국 연수 도중 가이드를 폭행해 말썽을 일으킨 박종철 군의원부터 생각난다.

정치판 똥물 튄 촌놈이 실수한 것을 언론이 스타로 만들었는데. 점잖은 반촌 동네를 개망신 시켰다.




지난 2일 이른 새벽 예천장으로 떠났는데, 예천장도 다른 장터처럼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인도 변을 따라 300m에 걸쳐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어물, 채소, 과일을 비롯해서 곡물, 약초, 의류, 잡화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전형적인 오일장이었다.





특히 봄철에는 봄 냄새 풍기는 냉이, 달래, , 돌나물과

산에서 직접 따온 각종 버섯으로 시골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장터였다.

그러나 5년 전에 본 장터와는 달라져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상설시장이 되었지만, 오일장날도 문이 잠긴 가게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다.

전국의 장터를 기록해 온 정영신씨의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시골 농민의 삶을 추적해 장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곧 바로 실행하겠단다.

그 날도 예천장 사진 찍는 일은 뒷전이고, 사과 팔러 나온 할머니 붙들고 사는 이야기 듣느라 시간을 보냈고,

시장에서 월남국수 가게 차린 여인네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후에는 예천군에 있는 유적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년기념물 '석송령'부터 찾았는데,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었다.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별났다.

1927년,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씨가 영험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라 이름 지은 후,

자기 땅 5,259를 상속 등기해 주어, 수목으로서는 유일하게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라고 한다.



 



두 번째 들린 선몽대 일원은 약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이었다.

선몽대 주변의 소나무 숲과 그 앞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펼쳐진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대표적 경승지 중 하나였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선몽대의 제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큰 바위 위에 걸쳐 지은 건축물 구조가 독특했는데, 계단도 돌을 깎아 만들었고,

방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도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선몽대의 방문을 도둑들이 뜯어 가,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래의 현판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사본을 붙여 놓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현판도 잃을 뻔 했다.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어떻게 유적지 방문까지 뜯어갈 수 있을까?

하기야! 무덤까지 파가는 도굴꾼이 인사동 주위에도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세 번째는 양반촌의 상징인 용문면 금당실 마을을 찾았다.

우리나라 최고 명당으로 손 꼽히는 마을 뒤쪽에는 오미봉을 비롯한 산들이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금곡천이 휘감고 흘러, 옛 부터 십 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지켜온 반가(班家)로도 유명한데,

감천문씨 문호검이 15세기 초에 금당실 일대를 개척한 이래 함양박씨, 원주변씨 등이 500년을 이어왔다.





마을 안에는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을 올리는 추원재와 사당,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 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를 지낸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오래된 가옥 12채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흙 돌담길과 800m의 소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지막으로 회룡포를 들려 삼강주막으로 갔는데, 5년 전에 본 삼강주막은 아니었다.

지난 2006유옥연 주모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된 집을

200715천만 원의 예산으로 복원하여 새로운 주모를 선정해 다시 손님을 맞았는데,

이젠 삼강문화마을로 바뀌어져 있었다.





2015년부터 총공사비 942억을 들여 삼강문화마을을 조성했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삼강주막의 원형을 잘 보존하여, 관광객들이 쉬어 갈수 있는 주막과 객사만 있으면 될 텐데,

자기 돈 아니라고 마음대로 쏟아 부었더라. 일단 판을 크게 벌여야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니까...





사람이라고는 한 두 사람뿐인 관광안내소와 문화해설사집도 따로 지어 놓았는데, 마치 놀부 집 같았다.

한 채라도, 자동차 운전하며 온 관광객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묶을 수 있는 객사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삼강주막은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으로,

3개의 강인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이 500년이나 된 거대한 회화나무가 서 있어서 옛 정취를 더해준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를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의 숙식처로 이용된 집이다.

1900년경에 지은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특징을 보여주어 희소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한 부엌 벽에 그려져 있는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도 인상적이다.

생전에 글을 알지 못했던 할머니께서 만든 빗금 외상장부인데,

술 한 잔은 짧은 금, 한 주전자는 긴 금, 세로 줄은 '외상값을 갚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장부를 지우지 않은 금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돈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던 것 같았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은 삼강문화마을 조성에는 박종철 군의원이 개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사진, / 조문호
















































 


 





지난21일은 정영신씨 가방모찌로 전북 순창에 따라갔다.
순창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통시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지닌 몇 안 되는 장터였다.
시골 장의 정취를 모락모락 풍기며 장바닥에 웃음이 번지던 정겨운 장이었다.

좋은 장터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는 분에게 소개해주는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의 때가 묻은 장옥은 돈벼락에 날아가고, 찾는 이 없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썰렁한 장터풍경이었다.

가는 날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없는 사람이 더 없었다.






모든 원인은 장터 살린다며 쏟아 부은 돈 때문인데,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장터를 죽이는 것이었다.

돈 빼먹기 좋은 것이 토목공사니, 오래된 장옥부터 철거하는 것이 제일 먼저였다.

없는 사람이 장옥 바꾼다고 올 리 없는데, 옛 정취마저 사라진 썰렁한 장터는 파리만 날렸다.






오전 10시 무렵에 키가 장승같이 큰 조호순씨가 나타났다.
정영신씨와 연락되어 나오신 분이었는데, 내 이름과 두자나 같아 친근하게 느껴지는데다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SBS 피디로 일하다 십여 년 전 시골로 귀농하였단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가난하게 사는 현실보다 복지부동주의에 빠진 공무원들의 자세가 더 슬프다는 것이다.
순창장에도 많은 애착을 가져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만 도무지 먹히지 않았단다.






장터에 관한 자료는 10년만 지나면 모조리 폐기해 버려 10년 전의 장터사진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다 정영신씨의 30년 전 순창장터 사진을 보고 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창장에서 국밥을 대접받은 후, 그의 안내를 받아 순창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순창객사를 비롯하여 순창여인들의 길로 정해진 홀어머니 산성과 산동리 남근석,
강천산의 구장군폭포와 강천사 등 여러 곳을 돌아보며 순창 여인네들의 애환을 느꼈다.






그 날 밤은 보성 벌교에 여장을 풀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그날따라 보성에 전국체전이 열려 여관마다 만원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방에 머물렀는데, 모처럼 사먹은 꼬막 정식 값까지 더해 다음 날 움직일 비용이 걱정이었다.






그 이틀 날은 보성장부터 찾았는데, 장에 사람은 붐볐으나 후덕한 옛 인심은 오간데 없었다.
하기야! 옛말에 ‘장꾼들 말은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듯이 돈이 오가는 장터라 야박할 수밖에 없고,

속이고 속이는 것이 장꾼들의 생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농사지어 내다파는 순박한 농민조차 예전의 순박함을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그 날 우연히 엿들은 두 할머니가 나누는 이야기가 오늘의 현실을 대변했다.
난전에 농산물을 펼쳐 놓은 한 할머니가 ‘양심에 저려 거짓말을 못하겠다‘는 하소연을 하시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장에 오면 양심은 전당포에 잡히고 와야 하는거야”고 대꾸하셨다.

대개가 싼 수입농산물을 넘겨받아 농사지은 것이라며 파는데, 가격이 서울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도 장에 나온 정영신씨는 사라는 할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없는 돈에 바리바리 산다.

오일장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생각 때문인데,

알면서도 속아줄 때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장터에서 벗어나 보성 팽나무숲과 반석리 석불좌상, 보성판소리 성지 등의 인근 유적들을 돌아보았는데,

판소리성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근사하게 지은 한옥들이 도처에 늘려 있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이 놀부집 같은 대궐에 소리 좋아하는 노인들을 살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경노당에서 세월만 보내는 노인들을 선발한다면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흉가에 다름 아니다.






바람직한 일인 줄 알면서도 행여 잘못되어 다칠까 겁먹는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들 처신 좀 바꿀 수는 없을까?

뼈 빠진 세금을 버러지들 사육비로 사용되어서야 되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찍는 놀이도 이젠 힘들어졌다.

주말이면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들려 청소나 설거지로 알랑방구 끼며 개기는데,

지난 7일은 청양 촬영 가야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방에서 노트북이나 주물럭거리는 것 보다 봄나들이가 낫겠다 싶어 새벽 일찍 나섰으나,

지난 울산 촬영에서 고생한 이래 약간의 두려움도 생겼다.

특히 새벽부터 돌아다니다 밤늦게 돌아오는 당일치기는 파김치가 되어버린다.

이 좋은 봄 놀이조차 힘에 부치는 걸 보니, 봄 날은 갔나 보다.



 


그런데, 정영신씨 건강도 말이 아니다. 한 달 넘게 감기에 시달리나, 이번 촬영엔 처음으로 코피를 쏟았다.

출판사에서 장터와 지역 문화를 연계하는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아 들인지가 일 년이 가까운데,

좋은 책 만들고 싶은 욕심에 기름 값도 되지 않는 원고료에 감지덕지하니. 그건 일이 아니고 노는 것인 모양이다.




 


그 날은 오전 아홉시 무렵 청양장에 도착했는데, 장꾼들만 나왔고 손님이 없었다.

요즘 어느 장이나 일요일은 손님이 없고, 있어도 늦게 나온다.





장터에 애착을 가지는 정영신씨와 달리 난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장터 풍경과 야박해진 인정에 넌더리가 나서다.





정영신씨는 이야기 듣고 사진 찍느라 바빴지만, 난 사람대신 진열된 상품이나 찍었다.

봄철인지라 봄나물이 유난히 많았고, 파종할 씨앗도 정갈하게 진열해 놓았다.



    

 

장터에서 벗어나 청양향교를 거쳐 칠갑산에 있는 장곡사로 갔다.

칠갑산 장곡사는 신라후기 보조국사가 세운 절인데, 특이한 것은 대웅전이 두 개나 있으나 탑이 없다.

그리고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도 다른 절과 다르다.





대웅전에는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는데,

장곡사 하대웅전에는 약사여래부처를 모시고 상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부처를 모신다.

약사여래부처를 모신 전각은 약사전이라 부르고, 비로자나부처를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이라는데,

장곡사는 왜 대웅전이라 부르며, 대웅전 전각을 두 개나 두었을까?





약사불은 병들어 고통 받는 중생에게 쾌유와 희망을 주는 부처고,

비로자나부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주는 부처다.

약사불을 모신 하대웅전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상대웅전을 통해 수행자들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생각일게다.



     


이 절을 보니, 비로자나부처님을 안아 볼 수 있었던 20여 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불교문화를 촬영할 때였는데,

장곡사 상대웅전 비로자나부처를 받치는 광배를 찍으려니 부처님에 가려 찍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아 부처님을 안아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 당시 찍은 목조광배는 중심부에 연꽃무늬를 새기고 테두리에 불꽃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오랜 세월에도 색채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신라 후기에 유행한 광배를 모방하여,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설선당 건물에 걸려있는 長谷寺라 적힌 편액이다.

이 편액은 유신시절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씨가 쓴 글인데, 날 선 글씨체에서 그의 야망이 그려지는 것은 지나친 선입견일까?

노년에 그가 말한 서산으로 지는 노을처럼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는 말이 생각나서다.



 


절 아래 있는 칠갑산 장승공원에는 별의 별 장승이 다 모여 있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청양대장군, 공명선거대장군, 고추대장군 등 별의별 이름을 단 대장군이 많았으나,

미천한 생각에 고추대장군보다 좆 대장군이 나을 듯 싶다.

쌍놈 문화를 물씬 풍기며, 한 번 웃을 수 있으니 그게 낮지 않겠는가?



    

 

이어 정산면에 있는 천장호 출렁다리를 찾아갔다.

2007년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1.5m에 길이가 207m나 되는 국내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





칠갑산 경관과 잘 어우러진 천장호 풍광도 장관이었다.

고요한 호수 안으로 산자락이 드리워 진 출렁다리에 들어서니, 마치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칠갑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은근한 스릴을 선사하는 곳으로, 특히 한국 사람들 좋아하는 공짜라는 점이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은 정말 잘 한 것 같았다.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 야박한 인상을 주는 것 보다 관광객을 끌어들여 먹고 노는데 쓰게 하면 그게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그 날 출렁다리를 찾는 관광객의 수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성공한 작전인 것 같았다.



    

 

거대한 용과 호랑이 조형물이 설치된 출렁다리 건너편의 칠갑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또 하나 명소인 칠갑산 소원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는 일명 잉태바위라고도 불리는데,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시집보낸 딸이 5년 동안 아기가 없자 친정어머니가 이 바위에서 칠백일 동안 정성들여 기도를 하니

칠갑산 수호신이 감탄하여 소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원바위 아래 있는 천장호는 여성의 자궁형상으로 임신과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는

풍수사의 이야기도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 와 소원을 빈단다.




 


천장호 출렁다리 중앙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고추가 세워져 있는데,

이 또한 다산과 연관한 상징물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침 소원바위 앞에서 한 여인이 열심히 소원을 빌고 있었는데, 정영신씨도 등달아 소지를 매달며 빌었다.

환갑이 된 나이에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이 있는건지, 은근히 걱정되는 장면이었다.



    

 

아직 까지 칠갑산 주변의 벚꽃은 몽우리만 맺혔는데, 아마 몇일 후에 만개할 것 같았다.

때를 맞추어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하는 '태암춘추대의제'가 413일 목면 송암리 모덕사에서 열리고,

통일장승을 만든다는 '칠갑산장승문화축제'도 413일과 14일에 장승공원일원에서 열린다니,

청양에서 봄 바람 한 번 씌는 것도 좋을 듯하다.



    

 

출렁다리를 빠져 나오다 보니, 입구에 콩밭 매는 아낙네라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하기야 칠갑산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도 '칠갑산' 노래가 아니던가?

청승맞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칠갑산을 빠져 나왔으나, 서울 갈 길이 막막하다.



    

 

콩밭 메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사진, / 조문호

















































 

 

 

 

 

 

 

 

 

 

 




1952 대구 / 사진가 George A. Van Driessche



‘Designersparty’에서 꾸준히 찾아 보여주는 지난 기록 사진들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해방 직후 일어 난 끔찍한 동족학살에서 부터 한국전쟁에 의한 고단한 삶의 모습까지, 친숙하면서도 낮선 풍경이었다.



1952서울 / 사진가 Inger Schulstad



4,3사건이나 여순사건은 외국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었지만,
한국전쟁 시절의 사진들은 대부분 외국 선교사나 미군들에 의해 기록된 사진이 많았다.
더러는 찍은 사람이 확인되지 않거나 찍은 장소가 불분명한 사진도 있었다.



1950 남대문시장 / 사진가 John Rich



그 당시는 컬러사진이 보급되지 않을 때라, 국내에선 흑백필름만 사용하던 시절이다,
코다크롬의 원색이 생생한 현실감을 더했는데, 여인네들이 입은 저고리 색깔은 또 얼마나 예쁜지...



1953 부산 / 사진가 미확인



그 사진 속에는 50년대 장터 풍경도 섞여있어, 눈이 번쩍 띄었다.

흑백으로 찍은 구한말 장터 사진은 더러 보았으나, 컬러로 찍힌 50년대 장터 사진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삼 십 여년 동안 장터를 기록해 온 정영신씨의 소중한 사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1950대구 / 사진가-야로슬라브 코마렉



어릴 때 기억이라 흐릿하긴 하지만, 몇몇 사진들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1952 장소 미확인 / 사진가  John Rich



그 당시 내가 본 장터라고는 고향장인 창녕군 영산장 뿐이었다.
인접 지역 다섯 장을 다람쥐 체 바퀴처럼 돌던 이웃 장꾼들도 생각난다.
저녁 무렵이면, 트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무가 있었는데, 분명 어머니의 보따리엔 아들에게 줄 선물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트럭에 실린 장꾼 사진을 보니 부러워 했던 동무가 생각났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볼 수도 없게 되었다.



1952  장소 미확인 / 사진가 Kenneth H



장날 아침이 되면 봇짐 등짐을 이고 지고 들어오는 인접 지역민들의 행렬도 줄을 이었다.
길목에서 팔고 가라며 추근대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종종 걸음 쳤다.
그 당시는 땔감이 귀해 장날마다 장작을 사 모우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다.



1953 장소 미확인 / 사진가 J. P



좀 더 성장해 보았던 인상적인 장터풍경은 “애들은 가라~"로 시작되는 약장사다.

"이 약 한 번 드셔보세요. 마누라가 들고 오는 아침 밥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치질 약 바르는 대목에서는 배꼽을 잡았다.
“방문을 걸어 잠거고, 옷을 하나 둘 벗어 걸어두고는 거울을 말 타듯 올라타서 한 번 내려다보세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가 확 펼쳐집니다“



1954 대구우시장  / 사진가 Adam Ewert,Ph



한 쪽에선 살충제 파는 약장사의 종이 마이크도 한 몫했다.

“빈대 모기 파리 벼룩 닭구곰박사이 소 가무나리, 뼈 없는 짐승은 일절 전멸시키는 약입니다”



1952서울 / 사진가 inger schulstad



그리고 군복과 군인들의 비상식량인 시레이션에 대한 기억도 새롭다.
그 당시는 군복이 흔한 시절이라 군복 입은 사람이 장에 많았다.
군인들이 돌아다니며 군복입은 사람 등어리에 검은 먹칠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입어도 검게 염색해 입으라는 말이었다.



1952개성 / 사진가 John Rich



가끔은 군인들의 비상식량인 시레이션이 흘러들어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별미로, 별의 별 것이 다 들어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비스킷도 맛있었지만, 치즈는 맛도 모른 채 먹었다.



1952 사과시장 / 사진가 Rev. Edgar Tainton, Jr



사과시장과 우시장이 펼쳐진 사진도 있었고, 장터는 아니지만 오밀조밀 차려놓은 좌판은 곤궁한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차 승객을 상대로 먹거리를 파는 여인들도 볼 수 있었다.



1952 장소 미확인 / 사진가 John Randolph



기차가 정지하면 장사꾼들이 우루루 창가로 몰려들었는데,

구포역에서 들려준 아줌마들의 호객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질긍 질긍 물이 나는 내 배 사이소, 내 배”

“재칩국 사이소~ 재칩국~”



1952 장소 미확인 / 사진가 inger schulstad



아련한 추억을 불러들이는 데는 역시 옛날 사진이 최고였다.
사진은 세월에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도 새삼 실감했다.



글 / 조문호



1950 개성 / 사진가 John Rich

1950 대전 / 사진가Thomas Benton Hutton


1950 / 장소 맟 사진가 미확인


1950 부산 / 사진가 미확인


1950 부산/ 사진가 미확인


1950 / 장소 및 사진가 미확인


1950부산 / 사진가 미확인


1951 서울 / 사진가 Count Strad


1951밀양시장 / 사진가 Tom Grasco


1952 장소 미확인 / 사진가 John Randolph


1950 서울 / 사진가John Rich


1952 장소 미확인/ 사진가 Kenneth H


1952 장소 미확인/ 사진가 Rev. Edgar Tainton, Jr


  1952 대구/ 사진가 John Randolph


1952 밀양시장 / 사진가 Tom Grasco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David Foster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미확인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부산 / 사진가 Kenneth H


1952 장소 서울 / 사진가 Jerry Rosenstein


1952` 장소 미확인/ 사진가 Kenneth H


1952서울/ 사진가 Inger Schulstad


1952평택  / 사진가 Coleman


1952평택 / 사진가 Ronald Coleman


1953 장소 미확인 / 사진가 George Fleur


1953 장소 미확인 / 사진가 George Fleur


1953 강릉 / 사진가 Jack Williams


1953 대구 근처의 작은 시장 / 사진가  Rev. Edgar Tainton, Jr


1953 대구 / 사진가 미확인


1953 / 장소 및 사진가 미확인


1953 부산 / 사진가 Jim Wright


1953 부산 국제시장/ 사진가 David Foster


1953 부산 / 사진가 미확인


1953 부산 / 사진가  미확인


1953 인천/ 사진가  Royce Raven


1953 인천 / 사진가 Royce Raven


1953 인천 / 사진가 미확인


1953 인천/ 사진가 Royce Raven


1953 장소 미확인 / 사진가 Jerry Rosenstein


1953 장소 미확인 / 사진가  Gordon Burroughs


1953 대전 / 사진가 Thomas Benton Hutton


1953 밀양 / 사진가 Tom Grasco











 

할 일 없이 인터넷에 기웃거리다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을 만났다.

페이스북 ‘Designersparty’에 올라온 구한말 사진들인데,

그 중에는 장시의 원조로 볼 수 있는 장터사진들이 있었다.

    


 



그동안 장터 사진가 정영신씨 따라 다니다보니,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장터 풍정에 속이 뒤집혔다.

세월 따라 바뀌는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불과 20-30년 전의 장옥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부의 장터 살리자는 태풍에 순식간에 다 날아 가버린 것이다.

최소한 한 곳은 남겨야 하는데, 씨를 말려버렸다.

이젠 오래된 장터풍경은 정영신씨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장터박물관이라도 만들어, 한 군데라도 본래의 기능을 이어 가야 한다.



    

 

머지않아 사람 만나 물건 사고 파는 시대는 끝날 것 같다.

이미 인터넷으로 돈과 물건만 오가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정은 커녕, 사람조차 만나지 않게 되었으니, 삭막할 뿐이다.

재미없는 세상일수록, 그 때가 그리울 것이다.



 


퍼 옮긴 사진들을 한 번 살펴보라.

밥집 툇마루에 앉아 밥 먹는 아낙네도 보이고,

갓 만드는 사람보다, 사진기 처다 보는 애들 눈길이 더 낯설다.





소등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나, 옹기장수 등짐은 조각 작품처럼 멋지다.

다들 가난은 몸에 베었으나, 정은 흘러 넘쳤을 것 같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에 배가 고프다.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창내장과 광화문 비각 앞의 장작 시장도 있고, 대구장, 통영장, 함흥 장터 등 대개가 1898년도부터 1937년 사이에 기록된 장터풍경이다. 그러나 대부분 기록한 사진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사진가 게리 스티븐스를 비롯하여 호주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권순형씨, 그리고 캐나다 출신의 Macrae DM 선교사. George Rose 선교사가 찍은 사진은 네 장 뿐이다.

이 사진은 Designersparty에서 스크랩했으나, 포토샵에서 조금 다듬었다.

 
















추운 겨울 날의 노점상은 안스럽기 그지없다. 
그 자리에 얼어 붙어 미라 될까 걱정된다.

한 할머니는 추위를 못 견디어 은행을 무단 점거했다. 
녹번동 '신한은행' 현금지급기 수위를 자청한 것이다.

다 팔아야 만원도 되지 않는 변변찮은 야채를 펼쳐놓고,

늦으막에 돌아 올 지하철 손님을 기다렸다.


자리 지키기가 껄끄럽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팔아서 손주 용돈 주는 재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별 것 있더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군위장에서 포항의 사진인들을 여럿 만났다.
지난 십월 "사진의 섬 송도" 호텔 아트페어 때 만난 분들이다.
‘경북 삶 사진연구회’의 정남호회장과 진영대, 박성두씨 일행이었다.
처음엔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해보니, 그 때 뵌 적이 있었다.





다들 카메라를 두 대식 메고 있기에, 평소의 궁금증도 물어 보았다.
“요즘은 디지털시대라 흑백과 컬러를 같이 쓸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두 대씩이나 메고 다니는 이유가 뭡니꺼?”했더니,
렌즈 갈아 끼우기 귀찮아 그런다는 것이다.






카메라 많이 메고 다니던 분이라면,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홍순태선생이 계셨다.
필름 종류별로 대 여섯 대를 주렁주렁 훈장처럼 메 달고 다니시던 모습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
옆 카메라와 부딪힐까 걱정도 되었는데, 좌우지간 사진도 많이 찍었고, 전시도 많이 하셨다.
역사가 된 좋은 사진도 있지만, 나머지 사진들은 다 어쨌는지 모르겠다.






선생께서는 세계각지를 열심히 돌아다녔으나, 그만 고산병에 걸려 고생하다 운명하신 것이다.
후반기에는 동영상 카메라까지 갖고 다니셨는데, 카메라 무게에 골병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육명심, 한정식선생은 한 대의 카메라로 없는 듯 작업했다.





한국 사진계를 좌지우지했던 삼 교수 중에 먼저 떠난 분도 홍교수였고,
사진 평가도 두 선생보다 덜 되었지만, 후세에는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다.
결국은 붓에 불과한 카메라보다 생각이 먼저라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일거리용 카메라와 흑백 필름 카메라를
두 대씩 갖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요즘이야 콤펙트 카메라 하나만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니, 너무 자유롭다.
상업용만 아니라면, 사진의 질도 전지 프린트를 해도 전혀 하자가 없다.
상대에게 위화감 주는 기관총보다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권총이 좋다는 생각이다.






장에서 사진인을 만났더니, 장터 이야기가 아니라 카메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군위장과 영덕장으로 이틀 동안 싸 돌아다녔는데,
요즘 다니는 정영신씨의 장터순례는 사진 찍는 일보다 이야기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군데 군데 모닥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 문화유적지도 꼼꼼히 돌아보는데, 군위하면 석굴에 안치된 ‘마애삼존불’과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계셨던 ‘인각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영덕에는 창수면에 있는 ‘장육사’가 인상 깊었다.
눈여겨 볼 곳은 대웅전과 그 안에 안치된 건칠보살좌상과 영산회상도였다.






그런데, 영덕까지 가서 영덕대게를 맛보지 못하다니...
“에라이~불쌍한 것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