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12일엔 전라도 정읍에 갔다.
정읍 장터를 돌아다니다, 장꾼에게 “정읍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팥죽과 쌍화탕은 꼭 먹고 가야한단다.






난 이가 신통찮아 죽을 더 좋아하지만, 그 것도 새알 팥죽이라니, 구미가 쏙 당겼다.
어느 집이 맛있냐고 재차 물었더니,
무슨 비밀 알려주듯 귀엣말로 ‘엄마네 팥죽’이라고 소근 거렸다.





가서 아침 겸 점심으로 팥죽을 시켰는데, 팥죽그릇이 거짓말 좀 보태 세수 대야만 하더라.
너무 많이 먹어 올 동지 날은 팥죽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맛이 없었다면 다 먹지도 못할 양이었다.






한 두 시간 돌아다니다 이번에는 쌍화차 가게가 열 한곳이나 몰린 전설의 쌍화차거리를 찾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가 들어간 ‘자연이래’ 쌍화차집이 제일이란다.
여지 것 쌍화차를 여러 차례 먹어 보았지만, 이런 진국은 진즉에 먹은 적이 없었다.






스물세가지의 천연약초를 넣어 마치 보약 같았는데, 먹고 나니 진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혹시 정읍의 전봉준장군도 이 쌍화차 드시고 힘 쓴 것 아닐까?

한 잔으로 아쉬움이 남아, 팩에 포장된 제품까지 사 왔다니까...
주인인 김세명[063-538-6803]씨의 자상한 제조방법까지 듣고 왔다.






몸보신을 했으니, 이젠 정읍의 볼거리를 찾아 나서는 일 뿐이다.
정읍하면 그 유명한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작은 고추가 맵다 듯이, 키 작은 전봉준장군의 기개에 탐관오리와 왜놈들 생 똥을 쌌을 것이다.






봉기한 장소와 생가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장군을 체감할 만한 유적은 없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의 흔적을 남겼겠는가?
떠도는 사진을 바탕으로 정읍에도 제대로 된 동상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부터 삼일동안 남원지역 및 영암지역의 장터와 그 주변 문화유적지를 찾았다.

 

이 일은 올해 초부터 시작한 정영신씨의 지역장터와 연계한 문화유적 탐방 프로젝트인데,

간다는 기별만 오면 동자동 일이건, 인사동 일이건 모두 팽개치고 총알처럼 따라 나선다.

계약에 따른 동지로서의 협력이기도 하지만, 떠돌아다니는 게 체질이 되어 일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생각하니,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어디 있겠는가?



 


단지 정해진 일정과 행선지에 따라 데려다 주는 기사 역할이지만,

장터 사람들의 텁텁한 냄새와 더불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지역 문화재들을 하나 둘 다시 만나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문화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이젠 문화재와 연관된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그러나 풍류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았던 양반의 유적은 많으나, 상민들이 살아 온 흔적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어차피 역사란 잘 난놈이 만드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번 탐방지는 성춘향이의 절개로 이름 떨쳤던, 연애사의 고향 남원이었다.

남원만 오면 약간의 설레임이 따르는 것은 행여 춘향을 방불케 하는 미녀라도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 때문일까?

그러나 춘향이란 여인의 미색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아마 마음속의 여인상이라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경 도착한 곳은 남원장의 고추전이었다.

마침 고추를 실고 온, 두 모자에게 장사꾼이 달라 붙었다.

흥정하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대단한 신경전을 펼쳤다,

장사꾼은 먼저 받을 금액을 말하라하고, 아낙은 살 금액을 먼저 말하라 했다.

똑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줄다리기 한 시간이,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20분은 족히 되었다.



 


결국 상인이 근당 6천원을 주겠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낙이 아들더러 짐 싸라며, 고추포대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다급한 상인이 칠천원이라 해도 듣지 않자, 팔천원, 구천원, 만원까지 계속 가격을 올렸지만,

그 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추를 차에 실고 떠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장삿속이라 하지만, 그건 도둑놈 심보였다.



 


그런 치열한 흥정이 벌어지는 중에 한 쪽에선 신명난 놀이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앰프에선 시끄러운 트로트 곡이 귀청을 울리는 가운데, 남원의 선녀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장구야 놀자라는 팀이 먼저 걸방지게 한 판 놀았다. 신바람이 장터를 휘몰아 쳤다.

얼마나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노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보았다.



 


정규직이라 명찰을 단 사회 보는 사내가 사진 찍는 늙은이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아제는 캐이 비 에스 방송국에서 나 왔는 것이여?”라고 묻길 레,

캐이 비 에스가 아니라 조선방송국에서 나왔다고 했더니,

우메! 세상 참 좋아 져 버렸네라며 낄낄거린다.



 


두 번째는 동내 아낙들로 만들어진 난타그룹이 나왔는데, 일사불란하게 두들겨 팼다.

아마 애먹이는 신랑 생각하며 북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이름 없는 가수들 까지 나와 알 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으나,

아쉽게도 춘향이는커녕 향단이의 미색을 떠 올릴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굶었으니, 배가 슬슬 고파지기 시작했다.

점심 때 쯤 만나서 밥 먹기로 약속했는데사진 찍으러 간 여자는 강원도 포수였다.

그녀를 찾아 장터를 한바퀴 돌아 다녔는데, 한 쪽 구석에서 장터 아지매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난 우야라고? 정말 믿을 년 한 년도 없더라.”



   



오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춘향이를 보기위해 광한루에 있는 춘향이 사당을 찾았다.

누가 그린 초상화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이 같더라.

왜 우리네 선조 여인들의 초상화는 대개 비슷비슷하고, 개성 없게 그렸는지 모르겠다.

가름한 얼굴에다 대부분 야윈 체구였다.



 


그 때는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는 풍만한 육체와 통통한 얼굴이 미인이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의 기준에 맞춘 초상화 같았다.

개성적인 소피아 로렌이나, 마리린 몬로 같은 글래머 여인은 과연 없었을까?

이런 저런 마음속의 춘향을 그리며, 광한루를 돌아 나왔다.



 


그 다음엔 실상사를 갔는데, 절 입구의 석장승이 나를 아는 체 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툭 튀어나온 눈에다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달고 있었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인 1725년에 세운 장승으로 적혔는데,

귀신을 쫓는 장승의 표정이 험상궂기는 커녕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실상사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이 있지만,

약사전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은 4,000근의 철을 녹여 만든 통일신라시대 걸작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으로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뒤 혼불 문학관에도 들렸는데, 손님은 커녕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

문학관을 다 돌아보고 나올 때 까지 개미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관리하는 분은 도대체 어디 갔을까?



 


비단 이 곳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자체에서 조성한 문화재는 놀부 집 같은 한옥만 지어 놓고 관광객을 기다리지만,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였다.



 


그 다음 날은 월출산이 아름다운 영암장으로 떠났다.

도갑사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를 돌아보았지만,

책 나오기도 전에 다 불어버리면 정영신씨에게 목 잘릴까 걱정되어 입 다물란다.



 


오후5시 무렵 서울로 출발했는데, 네비에는 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특별한 약속은 없었으나 빨리 가려고 좀 밟았더니, 차가 생 지랄을 떨었다.

휴게소에 들려 살펴보니, 엔진오일이 줄어든 것 외는 별 이상 없었다.

고물차라 천천히 다니라는 계시였다.

2차선에서 화물차 처럼 경제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더니, 아무 이상 없었다



 

 


사실 십 수년 동안 고물차 끌고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죽는다는 것은 발버둥 친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다 죽을 때가 있는 것 같더라.

지켜보던 정영신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마디 했다.



 


우린 언제 말썽 피우지 않는 새 차 한번 몰아볼 수 있을까?”

늘 써 먹던 수법이지만, 점잖게 흰소리를 했다.

조금만 기다려. 라이타돌 실은 밀수선이 곧 인천항에 도착할거야.

도착하면 제일 먼저 차부터 한 대 뽑자고 말했더니,

그 놈의 라이타돌 실은 배는 가라앉은 지 오래되었어. 와도 죽고 나서 오면 뭘해?”



 


그래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며 넉살을 떨어댔다.


 

사진, / 조문호



























































 





이가 홀랑 빠져버린 장터 할매가 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드신다.
국수 한 젓가락 잇몸에 걸쳐놓고, 졸졸 빨아 드신다.
젓가락으로 받치면 팔이 아파 천천히 드신단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딱 맞다.

이리 먹으나, 저리 먹으나, 넘어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시간은 걸렸지만,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깨끗하게 드셨다.
“살라고 묵는 기 아니라, 맛있어서 묵는데이!”
카메라 든 사내 눈길을 의식해 하시는 말씀이다.

호박 팔아 국수 사 드시면 남는 것도 없지만, 사람 만나는 재미다.
자식들은 편하게 살라지만, 혼자 감옥살이 하는 게 어디 편한 것이더냐?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며, 마음 가는대로 사신다.
집에 가면 티브이를 친구삼지만, 그래도 자식 걱정은 있다.

사는 게 뭐 별 것 있겠나?
객지에서 며느리 눈치 보며 사는 노인네들 보다 백배 낫다.
다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만,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빨려 가는 국수발처럼 넘어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속리산에서 자연이 빚어낸 색의 향연에 흠뻑 빠져버렸다.
비에 젖어, 좍 가라앉은 단풍색은 꿈길을 걷는 듯 황홀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따라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난 26일 새벽녘에 일어나 충청도 보은장에 갔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으나,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비오는 날은 또 다른 장터 분위기를 만들어 주니까.






비가 오는 날은 차가 속력을 내지 않으니, 기름 값도 절약된다.
늦은 아홉시 쯤 도착했는데, 젖지 않을 만큼의 가랑비가 내렸다.
그래도 팔 것은 다 팔고, 살 것은 다 사갔다.






그런데, 보은하면 대추로 유명한데, 대추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추가 흔하니 살 필요도 없겠지만, 대부분 농협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한 두 시간쯤 돌아다니다, 장터 백반으로 아침 겸 점심을 해 치웠다.






시장이 반찬이라 듯, 맛있게 먹고는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난, 풍경엔 흥미가 없어, 어제 밤에 못잔 잠이나 보충할 생각이었다.
정영신씨만 법주사로 갔는데, 막상 의자를 눕혀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 죽으면 원도 없이 잘 건데, 기념사진이나 찍어주자"며 따라 붙었다.
와~ 그런데, 가면 갈수록 기가 막힌 신천지가 펼쳐졌다.
자연은 색의 마술사였다.

좋아하는 사람에 다친 마음, 자연으로 풀었다.






단풍 구경하러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이해되었다.
평소 남들처럼 산행이나 여행을 떠나지는 않지만, 이처럼 촬영 길에 우연히 맞닥트릴 때가 종종 있다.
도랑치고 게 잡는, 이 맛을 알랑 가 모르겠다.






법주사는 20년전에 기록해 두었어나, 다른 절에 비해 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에 중창된 미륵신앙 중심도량이다.
더구나 올 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던가.






쌍사자석등,·석련지,사천왕석등,·마애여래의상 등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많으나 눈여겨 볼 것은 단연 팔상전이다.
각 층마다 구조가 다르고, 재목의 사용이나 공포구성법·이 다른 우리나라에 단 하나 뿐인 5층 목탑이다.




 


알랑방구 낀다고, 물든 단풍 아래 정영신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 재꼈다.
우리가 언제 비에 젖은 단풍놀이를 다시 할 수 있겠는가?





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세상살이 보너스로 준 이 행복감,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은 정영신씨와 강원도 양양으로 떠났다.
장터 찍으러 갔지만, 마침 양양 연어축제가 열려, 연어 잡는 티켓도 구해 두었다.
그러나 방정맞게 그날 따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로 행사가 취소되어버린 것이다.
비가와도 장은 열려 가야했는데, 한 시간 쯤 지나니 날씨가 서서히 개었다. 
이미 취소된 행사라 되돌릴 수 없어, 연어 먹을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난 지랄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전 날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마치 소풍가는 어린이들이 잠을 설치듯이, 밤새도록 뒤척이는 것이다.
운이 좋아야 한 두 시간 잘 수 있는데, 그 버릇을 잘 아는 정영신씨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두 번 다니는 것도 아닌지라, 이젠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다닌다.






양양장에 도착하니, 오전 아홉시 가량 되었다.
장터 찍느라 여기 저기 돌아다녔는데, 양양 송이가 많이 나왔더라.
올 해는 송이 풍년이라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정영신씨와 흩어져 다니지만, 가끔 장터에서 부딪히기도 한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와 걸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계령’으로 잘 알려진 정덕수 시인이었다.






양양에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너무 반가웠다.
아마 정영신씨와 양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 했다.






정덕수씨를 보니 박근혜퇴진을 위해 촛불 들고 싸웠던 광화문광장이 생각났다.
양양에서 올라와 광화문광장에 텐트 치고 살았는데,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추운 겨울 내내 텐트 속에서 지내는 게, 안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광화문광장에서 치루어지는 굳은 일은 그가 도맡았다.
나중엔 양양에서 공구까지 싣고 와, 현장의 가설 토목 공사에 봉사했다.
매주 진행되는 '광화문미술행동'의 설치작업도 그의 도움이 컸다.





박근혜가 퇴진하여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의 삶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온 몸을 던졌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세월 따라 그의 이름마저 잊혀져갔다.
지금은 산나물을 채취하여 어렵게 살지만, 틈틈이 시작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또 인정은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동자동 쪽방까지 찾아 온 적도 있다.

그 당시 정덕수씨가 준 상황버섯으로 술을 담았는데, 위스키는 저리가라 였다.
아끼고 아껴 아직까지 약처럼 마시고 있으니, 어찌 그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오랜만에 만났으나,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거하게 마실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막걸리를 상황 버섯주처럼 찔끔 찔끔 마셨으니, 그와의 인연은 찔끔 찔끔 인연인가 보다.






그의 안내로 낙산사에도 들렸다.
90년대 초반 불교유적 촬영할 때 가보고 처음이니, 이 얼마만인가?
2005년 산불로 화염에 휩싸였던 낙산사를 뉴스에서 보았는데,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지어 진 절집들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말끔하다.

불길에 녹아버린 범종의 잔해가 당시의 참혹함을 대변했다.






양양에서 떠나 오는 길에 정덕수 시인이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장터 이모가 만든 묵이라는데, 그의 따뜻한 정이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녹였다.


"서울 올라오면 꼭 연락해요, 달라 빚을 내서라도, 코가 비틀어지게 술 한 잔 대접하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5일은 정영신씨 따라 포천 신읍장에 장보러 갔다.






포천장은 다리 밑에서 열리는 장으로 경기북부에서 가장 큰 장이다.
포천읍내에 있던 장터가 무질서한 교통문제로 지금의 다리 밑으로 옮겨졌단다.






다리 밑이라니 별난 생각이 많이 난다.
어릴 적엔 다리 밑에 내다 버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당시의 다리 밑이란 거지들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했지만,
나병환자들이 많아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중엔 다리 밑을 고향처럼 동경했지만... 




 


한 시간 남짓 달려 다리 밑에 당도하니, 장마당이 시끌벅적 했다.






“단감이 한보따리 오천원이여. 오천원! 이제 몇 개 안 남았어요.”


장꾼들 이야기는 숨 쉬는 소리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 듯이, 한 보따리 라는 게 겨우 일곱 개 담긴 봉다리었다.
그리고 뒤편에 세워 둔 트럭에서 수시로 가져왔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게 장사꾼이니, 어쩌겠는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게 장터 생리니, 아무도 탓하는 이는 없다.
그래도 사람냄새 물씬 나는 신읍 장터는 고향에 온 듯 정겹더라.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라 장꾼들도 다들 밥 먹느라 바빴다. 
모두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니, 밥 먹는 모습도 빼 놓을 수 없는 정경이다.





뺏어 먹을까 혼자 숨어 까먹는 사람도 있고, 두 내외가 마주앉아 정겹게 먹는 사람도 있고,
장꾼들 여럿이 둘러 서서, 노닥거리며 먹는 등,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심지어 중국집에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도 하고, 휴대용 버너에 라면을 끓이는 장꾼도 있었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포장마차도 바글바글, 호떡집은 불난 호떡집처럼 장사진을 쳤다.






노리짝 하게 구운 호떡에 군침이 돌았으나, 동자동서 줄 서는데 질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밥 먹는 것조차 귀찮은 놈은 살 자격도 없다. 그러나 죽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정영신씨는 사진 찍으랴 인터뷰하랴 바빴으나, 물건 사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일 중 하나다.
가평 잣 장사 구라에 못 이겨 잣도 한 봉지, 포천 단감도 한 봉지, 심지어 내 바지까지 사서 갈아 입어란다.






청바지 뒤가 헤어져 팬티가 보인다는데, 팬티는 옷이 아니던가?
어떤 사람은 멀쩡한 청바지에 구멍 뚫어 입고 다니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포천 신읍장은 시 소재지 장이지만, 시골 장 못 잖게 재미가 솔솔하다.
물이 밖으로 흘러 생긴 이름이 포천이라는데, 물이 밖으로 흐르면 몽정이 아니던가?

다리 밑 장터라 자연과 어울려 정답지만, 흉하게 지어놓은 장옥이 없어 더 좋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포천장에 장보러 가자.
밑져야 본전인 신읍장은 5, 10일에 들어서는 장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사는 일 떨치고, 장에 따라 나섰다.
장터와 지역 문화 답사 가는 정영신씨 기사 노릇을 자청해 콧바람 씌러 간 것이다.






첫 날은 경상북도 점촌장에 들렸다.
점촌하면 왠지 점잖은 촌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동내이름도 그렇지만, 야박한 다른 장 인심에 비해,
몇 년 전 받은 후덕한 인심이 그런 생각을 각인시킨 것 같았다.






점촌장은 급변하는 장터에 비해 아직 덜 망가진 시골장이다.
난전에 둘러앉아 한담 나누는 할머니의 모습도, 무뚝뚝한 사내들 사투리조차 정겹더라.





장에는 벌써 송이버섯이 나왔는데, 고추만한 버섯 여섯 개 놓고 팔 만원이라했다.
가난한 사람들 눈에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 돈이면 고기로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텐데...






장터를 기웃거리며 떠도는 여인도 만났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장터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다.
세상이 미치도록 했겠으나, 어쩌면 그녀가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단돈 천원에 싱글벙글 좋아했는데, 요즘은 어린애들도 천원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 아니던가?
큰 욕심 없이 즐겁게 사니,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장터에서 문경의 문화 활동가인 이선행씨를 만났다.
아마 정영신씨와 연락 닿아 나오신 것 같았다.
지난 겨울 정선 동계올림픽 얼음축제장에서 열린 정영신씨 장터사진전 때 한 번 뵌 적 있는 분이었다.
문경에서 정선까지 장터 전시 보러 온 지극정성에 놀랐었다.





정영신씨의 페친으로 장터문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는데, 이번 문경 여행 안내를 맡아주셨다. 
점촌과 함창의 맛집에서 음식도 사 주셨는데, 너무 황송스러운 환대를 받았다.
그 중 함창의 버섯요리전문점 ‘테마촌’에서 먹은 버섯탕수육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오디로 만든 달짝한 소스에 찍어 먹으니, 입에 살살 녹았다.






그 뿐 아니라,'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옛길박물관’을 비롯해 문경의 여러 곳을 안내해 주었다.

 ‘옛길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오래된 장터 사진으로 처음 보는 사진이 많았다.





산북면 사불산에 둥지 튼 '대승사'로 향하니, 죽도록 고생한 이십사년 전으로 필름이 돌아갔다.
한국의 불교 유적을 찾아 전국 사찰을 돌아다닐 때인데, 새벽에 도착하기 위해 매번 한 밤중에 떠났다.






지금에야 길 안내 해주는 내비라도 있지만, 그 때는 사람조차 만날 수 없는 시골 밤길 헤매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그 뿐 아니라 졸음을 견디지 못해 창을 내려 운전하다보니,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불구가 되어버린,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 전국 명찰 문화재를 모두 촬영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으나,

일곱 권의'한국불교미술대전' 도록을 만들다 경영난에 허덕인 출판사의 부도로 원고료조차 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돈 되는 일 하나 맡았다고 생각했으나,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덕에 사진이라도 남았지만, '대승사'를 보니 갑자기 힘들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이어 이선행씨는 전통도예가 천한봉 명장의 도천도자미술관으로 안내했다.

도천 천한봉선생과 선생의 따님 천경희 도예가를 소개해 주었는데,

같은 듯 다른 두 작가의 도자를 감상하며 우리 고유의 멋에 빠지는 시간을 가졌다.







천한봉 선생께서는 일본을 자주 가신다고 하셨는데,

일본의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셨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께서 반세기 동안 천선생의 가마터를 오가며 기록했던

흑백 사진앨범 두 권을 보여주었는데, 한국전쟁 직후의 희귀한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치매에 걸렸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삼년 전 귀국하셨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쪼록, 별 탈 없기만을 빌 뿐이다.





그리고 점촌장에서 사주신 머루포도는 먹을 때마다

이선생의 고마움이 새록새록 나는 감칠 맛이었다.






"이선생, 고마웠습니다.

서울 오시면 맛있는 것 사드릴께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은 경북 성주장을 찾아 나섰다.

성주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게 사진계 전설로 통하는 이명동선생이시다.
삼 년만 있으면 백순을 맞는 이명동선생 고향이 바로 성주가 아니던가.
소 판돈 몰래 들고 나와 카메라 구입했던 그 현장이다.






선생께서는 고향 조카들에게 부탁하여, 성주 참외까지 보내주는 자상하신 분이다.
그 짱짱하시던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외출도 않으시고,
이젠 몸도 많이 수척해 지셨다.
한 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성주에 당도하니 갑자기 죄책감으로 밀려드네.






그런데, 3년 만에 들린 성주장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었다.
그 고색창연한 장옥의 정겨움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조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 가볼만한 장터로 성주장을 빼 놓지 않고 소개해 왔는데,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래된 문화를 깡그리 말살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문제는 돈 들여 장옥을 바꾸었지만, 장사가 잘되기는커녕 장사꾼들의 불만만 더 높았다.
손님은 날로 줄어드는데다, 도저히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본 후,
행여 추억의 자락이라도 만날까 장터 주변을 맴돌았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노부부가 열심히 텃밭을 파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왜 파내냐고 물었더니.
“자식들이 찾아와도 차댈 곳이 마땅찮아 주차 공간 만든다”고 하셨다.
골목이 좁아 텃밭이라도 깎아내어, 자식들 편하게 주차하라는 배려였다.






차 댈 곳이 없어 자식들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자식이 알기나 할까?






도식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성주장에서 다시 확인할 뿐이지만,
마냥 자식만 기다리며 사는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이 더 가슴에 묻힌다.
이젠 주변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마저 메말라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이러다, 죽기 전에 가족 해체되는 세상 올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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