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부터 삼일동안 남원지역 및 영암지역의 장터와 그 주변 문화유적지를 찾았다.

 

이 일은 올해 초부터 시작한 정영신씨의 지역장터와 연계한 문화유적 탐방 프로젝트인데,

간다는 기별만 오면 동자동 일이건, 인사동 일이건 모두 팽개치고 총알처럼 따라 나선다.

계약에 따른 동지로서의 협력이기도 하지만, 떠돌아다니는 게 체질이 되어 일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생각하니,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어디 있겠는가?



 


단지 정해진 일정과 행선지에 따라 데려다 주는 기사 역할이지만,

장터 사람들의 텁텁한 냄새와 더불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지역 문화재들을 하나 둘 다시 만나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문화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이젠 문화재와 연관된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그러나 풍류를 즐기며 여유롭게 살았던 양반의 유적은 많으나, 상민들이 살아 온 흔적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어차피 역사란 잘 난놈이 만드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번 탐방지는 성춘향이의 절개로 이름 떨쳤던, 연애사의 고향 남원이었다.

남원만 오면 약간의 설레임이 따르는 것은 행여 춘향을 방불케 하는 미녀라도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 때문일까?

그러나 춘향이란 여인의 미색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아마 마음속의 여인상이라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경 도착한 곳은 남원장의 고추전이었다.

마침 고추를 실고 온, 두 모자에게 장사꾼이 달라 붙었다.

흥정하는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대단한 신경전을 펼쳤다,

장사꾼은 먼저 받을 금액을 말하라하고, 아낙은 살 금액을 먼저 말하라 했다.

똑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줄다리기 한 시간이,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20분은 족히 되었다.



 


결국 상인이 근당 6천원을 주겠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낙이 아들더러 짐 싸라며, 고추포대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다급한 상인이 칠천원이라 해도 듣지 않자, 팔천원, 구천원, 만원까지 계속 가격을 올렸지만,

그 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추를 차에 실고 떠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장삿속이라 하지만, 그건 도둑놈 심보였다.



 


그런 치열한 흥정이 벌어지는 중에 한 쪽에선 신명난 놀이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앰프에선 시끄러운 트로트 곡이 귀청을 울리는 가운데, 남원의 선녀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장구야 놀자라는 팀이 먼저 걸방지게 한 판 놀았다. 신바람이 장터를 휘몰아 쳤다.

얼마나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노는지, 침을 질질 흘리며 쳐다보았다.



 


정규직이라 명찰을 단 사회 보는 사내가 사진 찍는 늙은이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아제는 캐이 비 에스 방송국에서 나 왔는 것이여?”라고 묻길 레,

캐이 비 에스가 아니라 조선방송국에서 나왔다고 했더니,

우메! 세상 참 좋아 져 버렸네라며 낄낄거린다.



 


두 번째는 동내 아낙들로 만들어진 난타그룹이 나왔는데, 일사불란하게 두들겨 팼다.

아마 애먹이는 신랑 생각하며 북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이름 없는 가수들 까지 나와 알 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으나,

아쉽게도 춘향이는커녕 향단이의 미색을 떠 올릴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굶었으니, 배가 슬슬 고파지기 시작했다.

점심 때 쯤 만나서 밥 먹기로 약속했는데사진 찍으러 간 여자는 강원도 포수였다.

그녀를 찾아 장터를 한바퀴 돌아 다녔는데, 한 쪽 구석에서 장터 아지매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난 우야라고? 정말 믿을 년 한 년도 없더라.”



   



오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춘향이를 보기위해 광한루에 있는 춘향이 사당을 찾았다.

누가 그린 초상화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아니라 인형 같이 같더라.

왜 우리네 선조 여인들의 초상화는 대개 비슷비슷하고, 개성 없게 그렸는지 모르겠다.

가름한 얼굴에다 대부분 야윈 체구였다.



 


그 때는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는 풍만한 육체와 통통한 얼굴이 미인이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의 기준에 맞춘 초상화 같았다.

개성적인 소피아 로렌이나, 마리린 몬로 같은 글래머 여인은 과연 없었을까?

이런 저런 마음속의 춘향을 그리며, 광한루를 돌아 나왔다.



 


그 다음엔 실상사를 갔는데, 절 입구의 석장승이 나를 아는 체 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툭 튀어나온 눈에다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달고 있었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인 1725년에 세운 장승으로 적혔는데,

귀신을 쫓는 장승의 표정이 험상궂기는 커녕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실상사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이 있지만,

약사전에 봉안된 철제여래좌상은 4,000근의 철을 녹여 만든 통일신라시대 걸작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으로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뒤 혼불 문학관에도 들렸는데, 손님은 커녕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

문학관을 다 돌아보고 나올 때 까지 개미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관리하는 분은 도대체 어디 갔을까?



 


비단 이 곳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자체에서 조성한 문화재는 놀부 집 같은 한옥만 지어 놓고 관광객을 기다리지만,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였다.



 


그 다음 날은 월출산이 아름다운 영암장으로 떠났다.

도갑사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를 돌아보았지만,

책 나오기도 전에 다 불어버리면 정영신씨에게 목 잘릴까 걱정되어 입 다물란다.



 


오후5시 무렵 서울로 출발했는데, 네비에는 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특별한 약속은 없었으나 빨리 가려고 좀 밟았더니, 차가 생 지랄을 떨었다.

휴게소에 들려 살펴보니, 엔진오일이 줄어든 것 외는 별 이상 없었다.

고물차라 천천히 다니라는 계시였다.

2차선에서 화물차 처럼 경제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더니, 아무 이상 없었다



 

 


사실 십 수년 동안 고물차 끌고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죽는다는 것은 발버둥 친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다 죽을 때가 있는 것 같더라.

지켜보던 정영신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마디 했다.



 


우린 언제 말썽 피우지 않는 새 차 한번 몰아볼 수 있을까?”

늘 써 먹던 수법이지만, 점잖게 흰소리를 했다.

조금만 기다려. 라이타돌 실은 밀수선이 곧 인천항에 도착할거야.

도착하면 제일 먼저 차부터 한 대 뽑자고 말했더니,

그 놈의 라이타돌 실은 배는 가라앉은 지 오래되었어. 와도 죽고 나서 오면 뭘해?”



 


그래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며 넉살을 떨어댔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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