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와 연계한 전국 탐방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정영신씨가 그 첫 취재지를 담양으로 정했다.

제20회 담양대나무축제가 시작되는 지난 2일 새벽 일찍 출발하였는데,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려, 모처럼의 담양 나들이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정영신씨 혼자 떠날 생각을 한 모양이나 장터와 축제장만 가는 것이 아니라 소쇄원과 삼지천 마을 돌담길 등

명소까지 두루 다니려면 자동차 없이는 힘들 것 같아, 운전기사를 자청하여 따라 나선 것이다.

속담에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따라간다.’는 말도 있지만, 난 거름은 커녕 늘 메고 다니던 카메라가방까지 잊고 간 것이다.





정영신씨의 보조카메라를 빌려 쓰기로 하고 갔는데, 담양이 가까워오니 비도 서서히 그쳤다.

담양 관방천 뚝방 위로 늘어 선 장터부터 돌아보았다.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들어 선 난장도 좋았지만, 장꾼들의 구수한 사투리에 옛 장터의 향수가 스물스물 묻어났다.

대나무 고장답게 곳곳에 죽순을 팔고 있었다.






장터가 마트와 다른 점은 카드로 찍찍 긋는 것이 아니라 현찰이 오 가는 맛에 있다.

물건 팔아 돈 받아 챙기는 장사꾼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첫 마수라고 침을 뱉거나 머리에 대는 풍정도 머지않아 하나의 전설이 될 것이다.





담양하면 새벽에 서는 죽물시장부터 떠오른다.

30여 년 전 죽물시장 촬영하러 두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갈 때마다 눈이 내린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다.

눈 내리는 담양죽물시장의 서정적인 풍경은 이제 사진에서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중국산에 밀려 난 죽물이라 요즘은 장터에도 없었다.

간신히 볼 수 있었던 것은 담양대나무축제에서 마련한 ‘추억의 죽물시장 체험’이란 부스뿐이었다.






올해로 20회나 되는 담양대나무축제장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유명세를 떨치는 축제지만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볼거리도 축제마다 대개 비슷비슷한데, 이젠 지역축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지방마다 별의 별 축제로 넘쳐나는데, 축제에 소요되는 예산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대나무 숲인 '죽녹원'과 영산강 상류의 '관방천'을 무대로 열리는 담양대나무축제는

'대숲 향기 천년을 품다'라는 선비정신을 주테마로 진행되고 있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웅장한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이 하나 있었는데, 어울리지도 않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더라.

차라리 담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큰 대나무 광주리나 하나 만들어 놓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담양에 왔으니 대통나무 밥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보다 죽순무침이 더 맛있었다.





울창한 죽림으로 이어진 녹죽원을 산책하는 맛도 일품이었다

난, 다리가 아파 정영신씨 혼자 돌게 하고 대나무로 만든 흔들침대에 한 20분 정도 누워 있었는데,

청량한 대나무 숲 공기에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듯 시원했다.


그 곳에 ‘이이남 아트센터’가 자리잡아, 담양 작가 이이남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오후에는 '가사문학관'을 비롯하여 조선중기 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소쇄원’도 돌아 보았고,

고풍스러운 삼지천 마을 돌담길도 거닐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정영신씨 덕에 담양 구경 한 번 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야야~ 이거 가져가서 반찬 해 무라.”
“괜찮심더. 그냥 놔놓고 파이소”

지난여름 의성 봉양장에서 만난 정겨운 모습이다.

장바닥에 좌판을 벌인 할머니가 잘 아는 아낙을 만나
팔던 농산물을 챙겨주려 실랑이 하고 있었다.
그냥 못이기는 척 받아 가면 좋으련만, 아낙의 마음은 달랐다.
힘들게 농사지었으면 한 푼이라도 더 팔았으면 하는 배려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뿌리치는 손을 부여잡고 기어이 손에 쥐어주고 만 것이다.
아낙은 무거운 짐 진 듯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전해 준 할머니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쩌랴!
자기밖에 모르는 도시인들이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인정병이
방방곡곡에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진한 쾌감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보부상 축제’인 '보부상, 문화를 전하다'의 마지막 행사가 지난 29일 ‘논산 강경대흥시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보부상 맥을 이어가고 있는 충남 보부상단인 예덕상무사와 저산팔읍상무사, 원흥주육군상무사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신명난 판을 벌였다.

사물놀이패를 앞세운 보부상단 길놀이에는 엿장수와 독장수, 비단장수, 어우동, 등의 옛 보부상 차림의

사람들이 제각기 물건을 지게와 등짐에 메고 그 시절 모습을 재현했다.






또한 조선시대 보부상에는 없었지만, 저산팔읍상무사의 윤태순씨가 분장한 등짐 북도 눈길을 끌었다.

길놀이 외에도 우리소리와 줄타기공연도 있었고, 보부상체험프로그램, 청년보부상단의 프리마켓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진행돼 현대화된 시장문화에 전통을 접목시키는 문화장터를 선보였다.






이번 ‘보부상, 문화를 전하다’ 마지막 행사가 열린 강경대흥시장은 조선후기에 번성한 장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의 3대 내륙시장이었다.

충청도 내륙지방의 산물들이 금강 뱃길 따라 강경으로 흘러 왔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돛단배들이 줄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1890년대에는 군산항이 열려 외국과도 교역하게 되므로 외제 물품까지 강경으로 들어왔다.






논산강경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물산을 곳곳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충남 보부상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장날이면 봇짐장수 등짐장수는 물론 뱃사람과 우마차를 끌고 온 농부들로 장터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젓갈시장으로나마 알려져 김장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지역특산물인 젓갈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강경발효젓갈축제’를 매년 10월마다 열기도 한다.






‘2017 문화가 있는 날, ‘보부상, 문화를 전하다’ 축제는 지난 3월 예산 덕산장을 시작으로

4월 에는 홍성시장, 5월에는 부여시장, 그리고 6월에는 보령중앙시장과 서천장항시장, 7월에는 천안성환 이화시장,

8월에는 청양시장, 9월에는 금산인삼시장과 서산해미시장, 10월에는 당진시장과 아산 온양온천풍물시장으로 이어졌고,

11월의 마지막 행사를 강경대흥시장에서 치루는 아홉 차례로 그 막을 내렸다.






조선시대의 보부상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인간 띠였다.

단순히 물건을 팔아 이윤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민족 기층문화를 이어주는 인간 고리 역할을 하며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또한 보부상은 단순한 물건 교환을 넘어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상거래를 이끌어왔다.

이들은 솜뭉치를 단 패랭이를 쓰고, 등짐과 봇짐으로 고개를 넘나들며

마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야기를 전달하는 우체부 역할을 했다.






장터는 세상만물이 다 모이는 움직이는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다.

살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 남녀노소 막론하여 모두가 좋아하는 날이 장날 아니던가?

예전에는 장마당에서 농기구도 직접 만들어 팔았었다.

그래서 장터는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민중 문화가 모두 어울린 곳이다.

세상 돌아가는 여론과 당대의 유행풍습까지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퍼져 나갔다.





요즘 장에 가면 전통시장 활성화라는 이름아래 국적불명의 축제가 종종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상인문화의 뿌리를 물어야 할 만큼 상품만이 아니라 민속놀이조차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번에 마련된 ‘보부상전통문화축제’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번기회에 오일장 문화콘텐츠를 보부상과 연결하여,

전통시장만의 새로운 민속축제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만에 정영신씨와 함께 34일의 장터 여행길에 나섰다.

동자동에 들어 간 후로 숙박을 동반한 여행은 처음이니, 일 년도 더 된 여행이다.

정영신씨는 그동안 대중교통으로 가는 당일치기로 다녔다.

서로 바삐 살아 시간 맞추기도 어려웠지만, 솔직히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얼마 전 황규태선생께서 동자동에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해 침낭 사라며 주셨는데,

필요 없는 침낭보다 여행경비가 더 절실했다.

한편으론 송구스럽지만 염려하신 것처럼 몸도 마음도 춥지 않으니 염려마시길 바라고,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여행이 필요했으니,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니, 10여년이 넘도록 장터를 엄청 쫓아 다녔다.

한 번 떠나면 34일이나 45일 일정으로 떠났으니, 필요경비도 만만찮았다.

하루 밥 한 끼와 군것질로 때우고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며 장돌뱅이 노릇을 했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기름 값과 통행료였다.

한 참 다닐 때만 해도 경유 값은 또 얼마나 뛰는지, 기름 싼 집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벌이도 없는 둘이서 길에 돈을 뿌리고 다녔으니, 신용불량자 딱지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장터는 많이 기록해 두었으니, 후회는 없다.


 

둘이서 주구장천 떠 돌아다녔으나, 신기하게도 의견마찰이나 다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이 같고 목적이 같으니, 감정의 불씨 같은 건 끼일 틈이 없었다.

그때 다진 동료애가 부부로서의 애정보다 더한 신뢰감을 갖게 된 동기일 것이다.

그토록 금실이 돈독했으나, 난데없는 이혼 소동을 벌여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에겐 법적인 부부관계 보다 일이 더 중요했으나, 다들 용납하지 않았다.

합의 이혼에 도장 찍을 때만해도 서로 동의했으나,

주위의 입방아에 정영신씨 마음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해를 지나며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함께 생활할 때 보다 궁핍함도 좀 덜었지만, 동자동 작업까지 진척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차피 한 사람은 장터에서 죽고, 한 사람은 쪽방에서 죽을 팔자지만,

살아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니, 부부연이나 서로의 일에 하등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장터여행 이야기도 산더미 같은데, 사적인 이바구가 너무 길어버렸다.


 

지난 4일 출발한 장터여행의 첫 목적지는 함안 군북장이었다.

그 많은 장에서 하필이면 군북장을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몇 년 전 남았던 아쉬움도 있지만,

그날 저녁 마산에서 환경사진가 조성제씨의 전시개막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장에는 오후 세시 쯤 도착했는데, 이미 파장이 되어 있었다.


 

장돌뱅이 세 사람만 남아 짐을 싸는  흔한 풍경이지만, 여기도 파리만 날린 장인 것 같다.

보따리 보따리에 싼 짐이 몇 십개나 되지만,내일을 기약하는 듯 했다.

옷 파는 박씨에게 얼마나 팔았냐고 물었더니, 다섯 사람 받아 사만원 어치 팔았단다.

사만원 모두 남아도 두 내외 점심값에 기름 값 제하면 아무 것도 없겠지만, 안달하지 않았다.

실속 없는 행상이지만, 행여 단골손님들 헛걸음시킬까 걱정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으론 부초처럼 떠도는 장돌뱅이 삶 자체에 대한 애착인 듯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것이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현실인 것을 어쩌랴!



 

차를 몰아 조성제씨 전시가 열리는 마산 경남은행 본점의 갤러리로 옮겼더니,

축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시장에는 한경호 경남도지사 권한대행에서부터

교육감 등 내노라 하는 명사들과 기업인들로 가득했는데, 좀 의외였다.

전시 축하하러 누군들 못 오겠냐마는, 마치 세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숙소에서 만난 조성제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경남은행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조성제씨 초대전을 추진할 때,

은행의 높은 분들께서 어찌 사진을 초대전으로 하느냐며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사진을 우습게 보는데 따른 홧김에, 아는 분들을 대거 초대하였고,

최상의 사진 퀄리티를 만들기 위해 돈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진해 마천장을 돌아, 내 고향인 창녕 영산장을 찾아갔다.

볼 품 없는 작은 장이지만 어릴 적 추억 따라 구석구석을 찾아 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예전 장 모습과는 딴판이었지만,

어린시절의 장터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애들은 가라~ 일단 한 번 자셔보세요. 소변 보면 변기 나프타린이 튕겨나옵니다

너스레를 떨어대던 약장사 자리도 가보았고,

아버지 심부름에 개장국 사러 다닌 장국밥집이 있던 곳도 가보았다.

국밥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국 쏟을까 조심스레 걷던 골목길의 정취는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을 선명하게 한 것은 넓은 싸전 입구에 선 종대로 불리는 철탑이었다.

한 때 싸이렌을 울리기도 했던 종대의 녹슨 형상만이 옛날 장의 상징인 냥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에 인식된 장터의 규모보다 훨씬 작게 느껴지는 것은

장터에 빼곡하게 늘어 선 자동차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들린 고향인지라 영축산 중턱에 있는 대암골 산소에도 가보았다,

제실이 무너져 사라지고 없었는데, 무덤에 계신 아버지의 노여움이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성묘하는 불효막심에 큰 절 올리며 사죄했다.


 

그 다음에 찾은 장은 합천 초계장이었다.

이 장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몇 년 전 병든 남편을 리어커로 모셔 와 장사한 할머니가 궁금해서다.

아픈 사람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장에서 병 수발들며 장사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돌아가셨는지 걱정되어 인근의 장꾼에게 물었더니, 요즘은 병이 깊어 모셔오지 못하고,

할머니 혼자 나와 한 두 시간만 장사하고 일찍 가셨다고 했다.

장꾼들만 모여 잡담을 날리는 쓸쓸한 장바닥을 돌아보며 자리를 옮겨야 했다.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전라도 해남이었다.

이장은 큰 읍장이지만, 새벽에 서는 고도리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해남에 도착하니 어두워져 식당부터 들려야 했는데,

정영신씨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천일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떡갈비로 유명한 집이라지만,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인당 28,000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몇 일 후에 있을 자신의 생일을 앞당기자는 말에 퍼져 않았다.


 

복에 없는 과분한 식사를 한 덕에 잠은 싸구려 여관에서 자야했다.

두 노인이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청소한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방바닥은 머리카락 투성이고,

또 여름용 홑이불은 얼마나 지저분한지 얼굴에 닿을까 염려되었다.


 

그 이튿날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고도리장으로 나갔으나

추운 겨울이라 좀 늦게 선다기에, 해남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마당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나온 장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장꾼들의 모습에,

전쟁터인지 장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자리다툼에 욕지걸이를 퍼 부어며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도대체 그 놈의 돈이 무슨 요물인지, 억장이 무너졌.

돈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이게 과연 사람 사는 것인가?


 

바닷가에 있는 장흥 회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해변은 조그만 항구로 변해있었다.

관광객을 염두에 둔 듯한 공연장과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손님이라고는 동네사람들 뿐이었다.



그런데 정영신씨가 팔다 남은 병어와 조기새끼를 엄청 싸게 사는 횡재를 했다.

직접 잡은 큰 생선은 경매에 넘기고 잔챙이만 팔았는데, 삼 만원에 한 광주리였다.

동네 사람이 사러왔으나, 자네는 다음에 줄 테니 서울손님부터 드리자며 아이스박스에 담아주었다.

새끼지만 병어고 조기가 아니던가 한 달 반찬거리는 해결할 듯싶었다.


 

그 이튿날은 장흥 용산장에 들렸다.

말이 장이지 장꾼 두 사람만 나온 썰렁한 장터로 머지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지난 세월의 이야기나 듣기 위해 장터식당에 들렸다.

식당 주인 백외자씨는 김장하느라 양념을 잔뜩 해두었고,

옆자리는 동네 노인 세분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아 연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신옥성씨란 분의 나이가 여든 하나란다. 얼굴은 나보다 젊게 보였지만, 열 살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이란 아무 소용없다며 이웃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6세 된 할머니는 멀쩡한데. 치매 걸려 누워있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총알처럼 빠르다며, 인생은 뜬구름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백반으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상은 온통 김치잔치였다.

백김치, 물김치, 갓김치 등 김치만 네 가지가 나왔는데,

금방 버무린 김장김치도 맛있지만, 갓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식당주인인 백외자씨는 김치가 맛있다는 칭찬에

엄마가 자식에게 싸 주듯 김장김치와 갓김치를 바리바리 싸 주었다.

이걸 어떻게 그냥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두어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입맛이 없어 후암시장에 반찬 사러 간 적이 한 번 있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갓김치를 버무려 팔고 있었다.

맛이나 보게 삼천원치만 달라고 했더니, 오천원 어치도 팔 수 없다며 퇴박 주던 야멸찬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 김치에 비하면 오만원어치는 족히 될 만한 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끝날 일이지만, 야박한 현실에서는 그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김치가 연이 되어 정영신씨와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인근에 있는 장흥 장평장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곳도 장터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폐가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이곳에 곧 토목공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장터에 뭘 만든다고 될리 있겠는가?

괜히 나라 돈 축내어 공무원이나 업자들 잇속 챙기는 일만 만들고 있다.

사라져가는 장터의 종말을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 촬영여행을 끝냈다.



여기까지 왔으니, 땅끝 마을에 가 보자는 정영신씨의 제안에 또 다른 여행길에 올랐다.

땅끝 마을에 닫기 전에 미황사부터 들렸다.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 서족에 자리한 이 절은

20여 년 전 전국의 절 찍을 때 들린 적이 있으나, 그 때보다 요사채가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절의 창건설화도 재미있다.

돌로 된 배가 포구에 왔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조가 목욕재계하고 맞으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는데,

배에 올라보니 큰 상자 안에 경전과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 나한, 불화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이라고 했다.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다며,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 했단다.

그래서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금의인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 했단다.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인 후, 땅끝 마을로 향했다.

몇 년 전 땅끝 마을에 있는 송지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맞았던 기억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땅끝 마을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으로 한반도의 기가 가장 많이 뭉친 곳이라

기 좀 받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마지막 여행지라 정영신씨와 호젓하게 바닷가를 거니는 데이트코스로 정했으나

추위가 분위기를 앞질러 서둘러 끝내야 했다.

서울 돌아 갈 일이 아찔하였으나, 차안에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니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땅끝 마을에서 기를 받았는지, 추위 속의 강행군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한 여행에 어디 피곤 따위가 감히 넘 볼수 있겠는가?

아무튼, 행복한 장터 여행을 만들어 주신 황규태선생께 감사드린다.

나흘간의 지루한 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게도 감사드리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이번 바이칼여행에서 가장 신바람 난 건, 칼호이저 야시장이었답니다.
나의 사진 적 관심사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정에도 없는, 버스 안에서 발견해 내렸지만,
그 짧은 30분이 나에게는 아주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똥인지 된장인지는 구분하거던요.
그 외는 함께 떠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게 전부입니다.
마치 전속사진사처럼 찍었지만, 그게 나에게는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칼호이저 야시장은 주말에만 서는 장터지만, 이르쿠츠크 사람들의 검소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서는 골동야시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답니다.
심지어 입던 내복을 가져나오기도하고, 어린이는 자기가 갖고 놀던 장난감도 갖고 나와 팔았답니다.
돈으로 거래되는 시장의 속성이야 같지만, 우리의 옛 장터를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모습이었습니다.

장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냄새지요. 

마지막 사진 넉 장은 리스트비앙카의 노천시장 풍경입니다.
드럼통 같은 아줌마가 외치는 ‘오물이~ 오물이~’란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오물’이란 이름의 어감은 별로지만, 바이칼호수에서 나오는 생선이름이지요.

사진,글 / 조문호
















































삼년 전, 의성 옥산장에서 만난 김치욱씨(79세)다.
할멈이 쓰던 모자를 내가 쓴다며, 먼저 떠난 할멈을 그리워했다.
갈 날만 기다린다는 그의 말처럼, 세상에 대한 아무 미련도 없어 보였다.
담배를 꺼내 무는 그의 표정에서 삶의 허무가 느껴졌다.

아직 살아 계실까? 그이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용산도서관'에서 마련한 ‘길 위의 인문학’ 충남 예산장 탐방이 지난 20일 있었다.
강사로 참여한 아내 정영신씨 덕분에 보람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장터를 기록하려는 사진가로서 보다 인문학적으로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산장은 세 번째 걸음이지만, 장터에서 만나는 한 사람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에 더 관심이 많았 던 적은 여지 것 없었다.
소통 없는 개인주의를 나무라지만, 나 역시 그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예산가는 버스 안에서 아내 정영신의 강의를 들으며, 그렇게 마음 졸인 적도 없었다.
아내가 ‘장터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인터넷 강좌는 하고 있으나,
탐방 팀들을 직접 인솔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흔들리는 차안에서 말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기우였다. 조금만 더 정리, 보충한다면 전문 약장사들 뺨 칠 정도는 되겠다.

수강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잡았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장터를 돌며, 그들을 유심히 살폈는데, 어떤 분은 좌판에 깔린 탱자를 보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말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난전을 벌인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여기 저기 보였다.

나는 삼년 전에 만난, 국수 뽑는 김성근씨와 시계 고치는 이희천씨도 만났다.
정말 열심히 사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만나기로 약속한 두시가 되어 버스로 갔더니, 모두들 물건을 봉지봉지 들고 나타났다.

그걸 보니 ‘오는 정 가는 정’이란 옛말이 생각났다. 아!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하겠구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역사문화체험강사인 이미옥씨의 도움말도 있었다.
장터가 형성되었던 옛날이야기들로 한국의 시장사를 들었다.
남산의 용산도서관에 도착해서는 강의실에 모여 탐방후기를 쓰는 간담회도 가졌다.
어린 시절 시장에서 장사했던 부모를 돕던 추억에서부터, 다양한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분은 사전에 시장조합에 연락해, 자신들의 저서를 한 부씩 기증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용산도서관'에서 실시한 장터에서 만나는 희망인문학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개인주의로 치 닿는 현실의 대안으로, 서로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인문산책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IBS교육방송 ‘디지털평생교육원’의 ‘장터에서 만나는 인문학’이 개강되었다.

아내는 강의 준비하느라 몇 달을 낑낑댔지만, 여지 것 지켜보기만 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참견할 상항도 아니었다.
녹번동에서 송파까지의 먼 거리를 오갔지만, 한 번도 데려다 준적도 없다.

마지막 12강이 열리는 24일, 처음으로 IBS방송국에 따라 나섰다.
강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내의 말솜씨가 걱정되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그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장터의 약장사처럼 말을 잘했고, 강의 내용도 괜찮았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우습기는 했으나
참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녹화하면 두고두고 재방이 가능 하다니까...

강의를 끝내고는 '나도여행작가다' 라는  과목을 하나 더 맡겠단다.
얼마나 많은 수강생이 모여들지는 모르겠으나,
이러다 사진가에서 약장사로 전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돈 못 버는 자신이 새삼 한심스럽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굶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만도 고맙게 생각한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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