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은 인사동 구테이블에서 송상욱시인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산에서 하루 전에 올라와, 두 시간 전에 인사동에 사진액자를 부렸는데,

추모제 시동을 건 창예헌김명성이사장과 화가 서길헌씨가 먼저 와 있었다.

 

함께 온 정영신씨만 행사준비에 힘을 보태기 위해 내렸고, 나는 차안에서 잠깐 눈을 붙여야 했다.

요즘 불면증으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늘 잠이 부족해서다.

얼마 전 술이 취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러 그 죄책감으로 실의에 빠져버렸다.

 

이런 저런 일들이 머리를 짓눌러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반세기동안 즐겨 마신 술도 끊어, 술로 마음을 달랠 수도 없었다.

차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죄 없는 담배만 피워댔다.

 

정해진 다섯 시가 되어서야 추모제 열릴 장소에 갔더니, 일찍부터 많은 분이 와 계셨다.

다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 인사 나누기 바빴는데,

송상욱선생 덕분에 모처럼 많은 인사동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방동규, 구중서 원로선생을 비롯하여 오산에서 오신 한봉림선생,

양산에서 온 정명수씨, 지리산에서 온 하태웅씨 등 다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셨다.

 

김명성, 박인식, 최유진, 정기범, 이 성, 조준영, 정영신, 장경호, 최석태,

서길헌, 이만주, 임태종, 이동국, 강찬모, 이두엽, 안혜련, 이명희, 정복수,

칡뫼김구, 박상희, 전강호, 조명환, 노광래, 김정남, 이상훈, 전인경, 심재문,

김각환, 임경일, 노인자, 백남희, 발렌티노김, 박흥식, 강경석, 전활철씨 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분이 모였는데, 6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대수술로 중환자실에서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뮤아트김상현씨가

가족의 부축을 받아가며 악기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병석에 계셔서 원로 선생님은 두 분 밖에 못 나왔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못 나온 분도 많았지만,

송상욱선생 추모를 겸한 인사동사람들의 결집에 다 같이 힘을 보태 주었다.

 

추모제 비용은 1인당 4만원씩 50명의 식사비와 사진 액자 제작비, 제사비용 등을 김명성씨가 부담하였고,

나머지 추가된 10명의 식사비와 술값은 이상훈씨가 계산했다.

그리고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보낸 막걸리 네 박스는 반이나 남아, 아산 설치전 때 사용키 위해 차에 실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참석하기로 한 고인의 미망인은 연락이 두절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의혹이 갖가지 추측만 불러 일으켰다.

 

벽에는 송상욱시인의 자필시를 비롯하여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시가 걸렸고,

생전의 모습이 담긴 여러 장면의 사진도 전시되었다.

 

그러나 행사장으로 사용한 ‘’구테이틀의 구조 상 전시를 보기 힘들었다.

하나의 장식물에 불과 할 뿐, 고인을 추념하는 데는 별 도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은 방을 구석구석 돌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당 구석에 설치한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송상욱선생의 노래가 마음을 움직였다.

기타 치며 부용산을 부르는 지난 모습을 보니, 마치 선생께서 환생하셔서 노래 하는 것 같았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방동규선생께서 고인의 영정 앞에 절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예를 올렸다.

생전의 모습을 떠 올리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지긋 지긋한 세상 졸업하고 떠난 이 기쁜 잔칫날, 슬픔이라니...

하기야!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 하지 않았던가?

 

송상욱 음유시인의 인사동 사랑은 유별나다.

학교를 퇴임한 후 우연히 들린 인사동의 풍류에 매료되어 인사동에 방 한 칸 얻어, 시 쓰며 노래 불렀다.

 

좋아하는 시편들을 모아 멧돌이라는 무가지 간행물을 만들어

시 좋아하는 인사동 사람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시사랑, 노래사랑, 인사동사랑, 삼박자 춤을 춘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열리는 지인들의 전시회나시와 관련된 행사 때 마다

무거운 음향기기를 끌고 다니며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축하해 주었다.

 

기타가 없는 술자리에서 젓가락 장단으로 부르는 노래 또한 얼마나 흥겨운지...

내 이름은 순이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그냥 십팔번으로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니랍니다

괴로워서 마신 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에 부모형제 내 동생이 보고파 웁니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뜬소문도 거짓이예요"

라는 내 이름은 순이가 흥겨운 젓가락 장단에 실려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그러한 풍류의 세월도 뒤늦게 재혼을 하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즐겨 만들어 돌리던 멧돌도 폐간되었고, 인사동 사무실마저 철수하게 되었다.

가끔 기타를 메고 인사동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과 마주치면 마음이 짠했다.

 

고인의 넋을 기리려고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아코디언으로 애절한 연주를 해준

김상현씨의 열정 또한 코끝이 찡했다.

 

김명성씨는 그 고마움에 답이라도 하듯, 김상현씨에게 작품 두 점을 선물했다.

인사동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청운 화백의 100호짜리 대작 두 점을....

이 야박한 세상에, 친구를 위해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물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지 아닐 수가 없다.

 

송상욱 선생이 불러준 부용산 노래가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두 번째 눈물은 감격에 의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옛정을 잊지 않고 모여주시고 도와주시는 고마운 마음에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책과 슬픔, 기쁨이 범벅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인사동은 변했지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반가운 분들이 권하는 술 한 잔 받아 마시지 못하는 불편한 자리지만,

이차로 옮겨간 유목민까지 따라 다니며 자리를 지켰다.

먼 길 떠난 송상욱 시인을 배웅해 드리며, 인사동 사람들의 재기에 박수를 쳤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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