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이 승하한 곳 ‘안동별궁’ 집터
여성교육의 산실 풍문여고 ‘옛 배움터’
얼레와 공예 과정 보여준 어린이박물관
대리석·테라코타·마사토 온기있는 풍경
걸음걸음 만나는 건축물마다 ‘공예’ 담아
시간 흔적들의 연결체 공간으로 재탄생
종로구 율곡로3길 4. 공간엔 ‘시간의 역사’가 쌓였다. 길게는 560년, 짧게는 70년.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의 집터이자 세종이 승하한 곳,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던 ‘안동별궁’(안국동별궁). 최근의 기억엔 싱그러움이 넘실댔다. 골목 안으로 이어진 돌담 너머는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다. 낡은 건물의 학교, 마주 보이는 한옥, 키 작은 다세대 건물들까지.... “북촌 근대화의 상징”처럼 서 있던 풍문여고 자리에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설계를 맡은 송하엽 중앙대 교수는 이곳을 “시간을 걷는 공간”이라고 했다.
지난달 16일 관람을 시작한 서울공예박물관은 등장과 함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코로나19로 예약제로 운영되지만, ‘핫플’을 모른 척하는 ‘인싸(인사이더)’는 없었다. SNS를 도배하는 새로운 ‘포토존’의 등극. 서울공예박물관은 발길이 이어지는 공간마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길로 들어서면 담장도 문도 사라진 박물관 마당이 사람들을 맞는다. 서울공예박물관의 탄생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시는 당시 박물관 건립을 위한 기본계획을 세우고, 2016년 설계공모를 시작했다. 이듬해 풍문여고 부지를 매입, 학교가 강남 자곡동으로 이사하자 리모델링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미경 서울공예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새로 짓지 않았지만, 기존의 풍문여고 건물이 너무 낡아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하면서도 건축법을 지키기 위해 애로사항이 많았다”고 말했다.
“동쪽으로는 창덕궁, 서쪽으로는 경복궁”이 있고, “인사동과 북촌을 맞댄 곳”에 세워지는 박물관. 공모에선 행림종합건축사사무소(대표 이용호), 송하엽(중앙대학교 교수), 천장환(경희대학교 교수)이 제출한 ‘크래프트 그라운드(Craft Ground)’가 당선됐다.
최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난 송하엽 교수는 이곳을 “21세기 예술공공 공간이란 키워드 아래 시간과 공간을 엮는 플랫폼으로 만들고자 했다”며 “시간의 흔적들의 전체가 되는 시간연결체로서의 공간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당시 심사위원회는 “건축적 과시를 절제하고 근대의 흔적을 담아내려 노력한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지어진 풍문여고의 기존 5개동은 시대별로 캠퍼스처럼 늘어섰다. 이들 5개 건물은 증축해 지은 안내동과 한옥 공간을 포함해 7개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공예박물관은 모든 건축물의 중심에 400년 된 은행나무를 두고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모습을 하고 있다. 송 교수는 “얼마만큼 옛 모형을 지킬 것인지를 고심했다”며 “배치는 지키되 껍데기는 다 바꿔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했다.
윤보선길로 들어와 마주하는 서울공예박물관은 첫인상부터 ‘공예의 면모’를 풍긴다. 1970년대 콘크리트 PC공법으로 지어진 전시3동 벽면에 설치된 강석영 작가의 ‘무제’. 주입 성형으로 만든 백자, 청자, 분청사기의 고유한 색과 질감이 되살린 도자 타일 2800여 개가 섬세하게 건물을 메웠다. ‘무제’를 올려다보며 개방된 길을 따라 박물관 안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운동장을 따라 ‘니은’자로 세워진 옛 풍문여고의 흔적을 만난다. 7개의 건축물은 흥미롭게도 저마다 모양이 다르다. 송 교수는 이에 대해 “시간의 파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지 않고, 시간의 단속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리로 지어진 안내동은 사실 싱크탱크 플랫폼을 염두하고 지어졌다. 작고 소박한 창작소라는 의미의 ‘크래프트 헛(CRAFT HUT)’으로 명명한 ‘공예 파빌리온’으로, “24시간 열린 밝은 공방처럼 누구나 와서 창작을 하는 공간”으로 상상했다고 한다. 윤보선 길의 아이콘과 같은 건물이다.
“유럽의 궁궐에 온 것 같다”는 후기가 줄을 잇는 전시1동은 풍문여고의 메인 얼굴이었다. 건물의 외벽부터 기존의 박물관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박물관 건물은 회색 빛깔의 화강석으로 지어진 반면, 이곳은 아프리카산 대리석을 공수했다.
송 교수는 “노란색 페인트로 칠했던 학교 건물의 따뜻함을 유지하고 싶어 베이지색 대리석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말했다. 대리석 하나하나는 송 교수가 직접 골랐다. 돌에 남겨진 패턴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송 교수는 “개인적으로 삼엽충도 박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대리석이 축적된 시간을 건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2동은 서울공예박물관 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건물의 입구를 뚫어 400년 된 은행나무를 앞에 두고 박물관 전체를 내려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여기에 옛 건물 그대로 둔 관리동과 “북촌의 한옥 문화 유산을 보여준” 공예별당(한옥) 건물이 더해졌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가장 ‘혁신’에 가까운 설계는 어린이박물관이다. 기존 십자 형태의 건물은 동그란 원형의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다. 건물의 외관은 ‘하나의 공예품’이다. 송 교수는 “안내동이 윤보선길의 아이콘이라면 어린이박물관은 감고당길의 아이콘”이라고 했다. 어린이박물관을 짓기 위해 디자인부터 재료까지 신중하게 결정했다. 건축의 재료가 된 것은 스페인에서 공수한 테라코타다. 송 교수는 “현대건축에선 보통 가벼운 소재를 쓰지만, 박물관의 부지가 가진 역사적 무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거운 재료를 사용했다”며 “반짝이는 메탈 소재는 아니었고 목재라는 대안이 있었지만 공공 건축물의 시공, 관리의 특성상 테라코타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형태적으로는 실을 감는 ‘얼레’를 형상화했다. 속이 빈 테라코타 관이 둥그렇게 말려 독특한 외관을 보여준다. 외관 자체엔 “공예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담았다. 흙으로 구운 ‘자연의 재료’인 “테라코타의 혁신성으로 공예 과정과 건축을 접목”했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는 “반복되는 원의 형태는 대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실을 여러 번 감듯이 무게있게 표현했고, 담으로도 나눠지지 않는 공공 공간의 연속성의 중심이면서 은행나무가 사방에서 보이는 배경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은 이곳을 ‘팬케이크’, ‘돌돌이’ ‘수플레’로 부른다. 송 교수는 “내부 공간은 이미 캠퍼스로 짜여있기 때문에 최대한 원형을 유지했고, 외형적 차별화를 주고 싶었던 곳이 어린이박물관”이라며 “송현동의 랜드마크가 되는 것을 상상했다”고 말했다.
학교의 흔적이 남은 박물관은 거니는 것은 꼭꼭 숨겨졌던 골목길을 탐험하는 것만 같다. 시간의 기억들이 곳곳에 남자, 그 시절 여고생들의 추억도 소환됐다. “여기가 1학년 3반 자리 같은데?”, “도서관 앞을 지나 급식실로 가는 길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후기는 새로 만들어진 공간에 스토리를 더했다. 송 교수는 “건축은 의사 전달성이 약한데, 에피소드가 더해지고 추억과 기억으로 이어지니 이 장소가 의미를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모든 것이 공예’라는 생각으로 설계됐다. 건축의 모든 요소에 ‘공예’를 담았다. “북촌의 장인정신, 인사동에 남은 공예의 흔적, 역사 안에서 공예를 다룬 장인들의 삶이 녹은 공간”으로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공예의 과정을 건축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박물관의 본질을 살리면서도 설계의 의도까지 담을 수 있게 했다.
시간의 역사를 담은 이곳은 ‘박물관 캠퍼스’와 같다. 송 교수는 “기존 학교건물의 추억을 역사로 기억하며, 차가운 건물들이 만든 회색도시인 서울에 따뜻한 재료인 테라코타, 무늬있는 대리석, 마사토 등으로 온기있는 풍경을 만들고자 했다”며 “터의 기억과 도시의 따뜻함을 유발하는 공간장치로의 가치를 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간 환경이 달라지면 사람들의 자존감도 높아진다”며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헤럴드경제 /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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