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원시시대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인간들은 원초적으로 야생 기질을 타고 났으나 서서히 통제되기 시작하여 .

결국은 정해진 틀 속에서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그러한 틀이 싫어 반항도 해가며 나름으로 자유롭게 살려 했지만

어떻게 그 철옹성같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줄 알면서도, 늘 자연과 함께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어 온 것이다.
돈과 지식, 그리고 명예가 필요 없는 원시시대의 세상 말이다.

 

그런 행복한 낙원을 위해 음모를 한 번 꾸며본다.

혹시 내란음모죄나 국가 전복기도 등 국가보안법에 걸릴지 모르지만
제일 먼저 우주 기지국부터 무용지물로 만들어 무선통신을 차단하는 것이다.
세상에 일대 혼란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것도 세월이 지나면 적응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국가를 없애고 개인의 주민등록을 없애는 것이다.
또 은행과 학교 문을 닫아 돈과 지식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서로 농사짓거나 만든 물건들을 서로 바꾸어 사는 원시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오염, 정치오염, 언론오염 등 사회의 온갖 폐악들도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래살고 사치스럽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얼마나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가지면 가질수록 재물의 포로가 되고, 알면 알수록 지식에 묶여 통제된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삶을 최우선시하는 것은 물론, 하고 싶은 일만하며

욕심도 미움도 원망도 없고 사랑만 가득한 진짜 낙원은 정녕 만들 수 없는 것인가? 

 

사람들이 문명에 너무 중독되어 있다는, 그 것이 문제로다. 

온 지구가 멸망되고 다시 시작된다면, 그 때는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겠지..
                   비록 이룰 수 없는 화류춘몽일지라도 조금은 행복해 진다.                 

 

조문호

 

 

 

 

 

 

 

녹각으로 때려 원석을 깨니

떨어져 나온 조각은 날이 섰고

남은 덩어리는 주먹도끼라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하고

열매와 보리이삭을 모은다

가로로 구멍을 파고

띠를 올려 움집을 지으니

그 안에도 부부가 있구나

 

鹿角打擊破原石,,녹각타격파원석

剝片成刃核石斧,,박편성인핵석부

狩獵猪鹿集實麥,,수렵저록집실맥

竪穴茅屋有夫婦,,수혈모옥유부부


2014년 1월12일  강원도 강릉장

 

 

 

 

 

 

 

 

 

 


“장 살린다고 지랄해도 이미 끝났어! 사람이 있어야제..”

지난 달, 설 대목장 촬영 길의 단양 영춘장에서 만난 장돌뱅이가 뱉은 말이다.
사실, 면소재지 장들은 곧 사라질 수밖에 없다.
몇 안 되는 노인들마저 점차 쇠진해가니 장을 지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모두 군단위의 읍소재지 장에 통폐합되거나, 면소재지 상권은 하나로마트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작업하는 동안 하나 둘 사라지는 시골장과 변해가는 풍정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전통시장에 관심을 가져 그곳에 카메라 초점을 맞춘지가 아내는 29년차, 나는 10년차지만, 

잘 알려진 장들만 찾아다녔던 한계가 늘 마음에 걸렸다.  

5년전, 600여개로 파악된 우리나라의 오일장을  모두 기록하자는 나의 무모한 제안에

아내가 흔쾌히 동의함으로 본격적인 장돌뱅이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촬영경비 마련이 가장 힘들었지만, 무리한 강행군으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가도 가도 못가 본 장터들이 더 많았으나 이제사 서서히 장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짜여 진 일정대로라면 3월 9일경 끝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국 장터를  돌아 본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사 장에 대해 뭔가를 알겠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시각적 언어가 자리를 잡아간다는 것이다.

이제 찍어 둔 각자의 원고들을 분류, 정리하며 눈여겨 보아 두었던 장을 찾아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면  

올 년말 쯤이면 서로 다른 사진집으로 엮여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 모든 것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또순이처럼 억척스럽게 해 낸, 아내의 덕이다.

그 많은 주변의 원망까지 뒤집어 써가며, 혼자 경비 조달하느라 마음 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모두들, 빈털털이 주제에 빚내어 돌아다니는 우리 내외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대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미치면 한 사람은 말리는 것이 정상인데, 둘 다 미쳤으니 어쩌겠는가...

남은 빚은 정선 집이라도 팔아 갚으면 되고, 사는데 까지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아내와 장돌뱅이처럼 떠 돈 시간들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지난 대목장을 떠돌 때, 내 카메라에 잡힌 아내 정영신의 모습이다.]

 

        2014.1.14 충남 공주, 유구장에서

 

2014.1,19 전북 김제, 원평장에서

 

2014.1.28 강원도 인제, 신남장에서



지난 12월부터 경기도 일원의 장터를 찾아 다녔다.
대개 가까운 지역은 하루 촬영하고, 하루는 사진을 정리하는 식이라 힘들지는 않으나,

장이 너무 늦게 서 여러 장을 돌아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난장의 할머니들도 없는 장돌뱅이들 뿐이라 기록에 더 의미를 두어야 했다.

새해 들어 세 번째 나선 지난 6일 촬영지는 강원도 휴전선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고성 거진장에서부터 인제 서화장, 철원 와수장으로 향하는 이동 경로는 최전방이라 군부대와 군인들이 많았는데,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길가에는 눈들이 쌓여 있었으나 꼬불꼬불한 도로를 군인들이

깔끔하게 치워 놓아, 설경을 가로지르는 휴전선 드라이브가 꽤 괜찮았다.

간간히 펼쳐지는 이국적 낯선 풍경에 매료되기도 하고....

오전 여덟시 무렵, 거진장에 도착했으나 너무 일렀다. 겨우 서너 명의 장꾼들이 나와 전을 펴고 있을 뿐, 장옥은 텅 비어있었다.

눈이 오면 미끄러워 할머니들이 나오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날씨가 추워 장꾼들이 늦게 나온다는 것이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인접한 거진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진항에는 마침 고기잡이 배가 들어와 여러 가지 잡어들을 내려놓았는데, 게와 도치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생전 먹어 본 적도 보지도 못한 ‘도치’라는 생선은 복보다 좀 크게 생겼는데, 주로 탕으로 끊여먹거나 횟감으로 쓴다고 했다.

도치가 죽으면 먹을 수 없어, 대개 그 지역사람들만 즐겨 먹는 생선이라기에 군침은 돌았으나 참았다.

비릿한 냄새에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사들인 생선들을 고르고 옮기느라 정신없었다.

추운 겨울 새벽 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꿈틀거림, 생동감을 거진항에서 만난 것이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난로 가에는 장정들이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날리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생선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과 풍경, 사물까지도 정겨웠다.

행복감이 손에 쥐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지난 7일 토요일 3시 공연인 "레미제라블"을 보기 위해 조경석선생님과 함께 동숭동에 갔다.

오랜만에 마로니에 공원에서 젊은이들의 넘치는 열정이 보기 좋았다.

 

50대연기자그룹이 주체가 되어 이번 연극 "레미제라블"이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무대에

올려진듯 하다.

 

"나는 누구지. 다른 삶을 살았을 뿐 달라진 것 없다.

나는 언제나 빵을 훔친 장발장이었다.

마들렌도 포슐르방도 아닌 장발장. 그래, 나는 장발장이다.

- 장발장의 독백중에서 -

 

연극 "레미제라블"에서 이명희선생은 테나르디에 처로 나오는 몽페르메유 여관주인이다.

코제트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장발장과 거래를 하는 여관안주인 역할은 훌륭했다.

너무 유명한 빅토르위고의 소설을 국민성이 각색하고 박장렬이 연출한 작품이다.

 

 

 

 

 

 

 

 

 

 

 

 

[법륜신문]

- 1947년 경남 창녕 출생.
- 1985년 “동아미술제”와 1986년“아시안게임 기록사진공모전”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
- 월간사진 편집장,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 등을 지냄.
- 개인전으로 86아시안게임, 87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불교 상징전,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전,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을 가짐.
-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과 사진집 “두메산골 사람들”등을 출판.



어머니를 떠올리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생각난다.

1950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취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어머니와 나만 떠나지 못한 채 좀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니 어머니 등에서 겁에 질려 제대로 울지도 못할 때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여 모은 돈을 어머니께서 이곳저곳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미처 챙기지 못해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온 마을이 불타 재가 된 줄을 짐작하면서도 위험한 전쟁터로 들어간 것이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의 받쳐 업은 두 손이 내 몸을 꽉 조여 왔다.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하였지만 혹시 뒤에서 총을 쏠까봐 등에 메 달린 나를 가슴에 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 때 느낀 어머니의 거친 숨결속의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이것이 내 기억에 가장 오래된 어머니의 초상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집안은 많은 가산을 잃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생 시절 동안은 아버지가 벌인 사업이 실패하여 끼니를 잇지 못할 어려웠던 시절도 겪었다.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가는 자식들이 불쌍해 혼자 눈물 지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애절한 마음일 것이다. 집안 체면에 남에게 어려운 소리 한마디 못하시는 어머니지만 한번은 이웃에서 빌린 쌀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갖고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다.   교실 앞 화단을 거쳐 유리창너머로 살며시 도시락을 내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버럭 화를 내며 창문을 닫은 불효막심한 짓을 했다. 점심시간에 이웃 형에게 전해 받은 도시락을 까먹으며 남몰래 눈물 흘렸던 그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친구들에게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사춘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한번은 하루 종일 굶어 허기져 있는 자식들을 차마 보지 못한 어머니께서 남의 집 처마 밑에 걸린 보리쌀 삶은 소쿠리를 몰래 들고 나오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일이 있었다.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여 가슴이 뛴다.
“내가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면서 보리밥 담긴 소쿠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긴 하셨지만 한동안 자식 보기 민망해서인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 굶주린 자식을 먹이기 위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본능일지라도 어머니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크나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구구셈을 외우지 못하거나 공부를 제대로 못하면 잠을 재우지 않고 회초리로 다그치던 완고한 어머니셨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큰 소리 한번 안치시는 무기력한 어머니로 변하고 말았다. 자식 앞에서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평생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미어질 것만 같다.

 

어머니는 지금 인천 형님 댁에서 살고 계신다.
세월이 흘러 이제 연세가 아흔 다섯이나 되셨으니, 제발 희미해져가는 어머니의 기억력을 빌어 악몽 같은 지난 일들은 모두 잊으시길 바라지만 너무 크게 마음을 다친 일이라 과연 잊으셨는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엔 화장실에서 빨래하던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돌아 온 손녀를 반기려다 미끄러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로는 늘 앉아만 계셔야하는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이방 저방 기어 다니시며 청소를 하고, 싱크대를 잡고 일어나 설거지까지 하시던 부지런한 어머니셨다.
요즘은 체력이 쇠진하여 아무 일도 못한 채 앉아만 계시지만 가끔 내가 찾아뵈면 일부러 딴청을 부리신다.
“니가 누고? 해나 종덕이 아들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어머니의 유머에 한바탕 웃지만, 한편으론 자주 찾아오지 않아 아들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담겨있어 부끄럽기도 하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꼭 껴안으며 “미안합니더. 어무이”라고 나직이 말하면 금세 좋아 “야! 징그럽다. 술이나 한잔도”하시며 분위기를 바꾼다. 평소에 약주를 즐기시어 농담이나 노래를 잘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상을 올린다. 그리고는 평소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불러 드린다.

“구름 속에 달빛만 엉큼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당신의 마음도 검구려
한 되 술 이백 원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 묻은 치맛자락 왜 붙드시나요.
막걸리 사랑이란 싸고도 비싸다, 나도 순정은 있어요 사람 괄세 마세요.”
어머니께서는 기분이 좋아 ”야! 구닥다리 노래 말고 내 신식 노래 한번 들어봐라“ 면서 한곡을 뽑으신다.
“예- 삐빠빠 룰라 씨스마루 뻬뻬…”라는 묘한 발음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온 집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엄마를 노래자랑에 내 보내야 한다는 누님의 맞장구에 더욱 신이 나 어깨까지 들먹이신다.

어머니! 이젠 지난일이랑 모두 잊으시고, 오래 오래 노래하며 즐거운 여생을 보내십시오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 엽서 및 팜프렛

-인사동 사람들-

 

 

 

 

 

 

 

 

 

 

 

 

 

 

 

 

 

 

 

 

 

 

 

 

 

 

 

 

 

 

 

 

[이 로고는 창원의 그라픽 디자이너 김의권씨가 제작하였습니다]

 

“사진굿당이 무당들 굿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굿이란 신명나는 구경거리를 의미합니다, 영문으로 Good이란 뜻도 되지요.” 가끔 듣는 질문으로 그냥 '사진과 함께 신명난 굿판 벌이는 집' 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개인 작업실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4년,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산 자락에 ‘한국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주 환경 친화적인 사진굿판을 벌여 보자며...

 

 

내가 이곳에 들어 온 지는 이름조차 낯설던 동강이 댐 문제로 시끌벅적, 세간의 관심을 끌던 1997년도였습니다. 내가 팀장으로 있던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원들의 생태환경기록 캠프로 자리 잡았으나, 그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발목 잡힌 게지요.

 

1999년 12월 “아우라지 물길 따라 200리, 동강”이란 사진집 출판을 끝으로 팀은 철수했으나 동강 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해 혼자 눌러 앉은 것입니다. 2000년 9월 23일 옛 귤암분교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개최하며 ‘동강 백성들’ 포토에세이집도 함께 출판했습니다. 인사동 예술인 100여명이 버스 3대로 나누어 행사장에 오셨는데, 동강 각 마을의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귤암리 도로가 막히는 일대 소동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일행의 ”동강 넋 건지기“퍼포먼스와 민영선생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 낭송회, 이원창 당시 군수의 격려사, 주민들의 노래자랑 등 밤늦도록 신명난 굿판을 벌였습니다. 숙소가 모자라 폐교 교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별탈없이 행사를 잘 치룰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동강주민들과 인사동 사람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아라아트‘ 김명성씨의 후원에 대한 고마움은 아직 잊지 못합니다.

 

동강변 주민들을 위로하는 축제도 좋지만, 분쟁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동강수몰지역대책위원장이었던 이영석씨의 아내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고, 수동마을의 김진수씨도 빚 때문에 강물에 투신했습니다. 노한 주민들이 무작정 상경하여 추운 겨울 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연로한 노인들이라 걱정스러웠습니다. 밤늦게는 저희가 사용했던 충무로의 사진강의실에 어르신들을 모셔 추위를 피하게 하고, 죽어가는 주민들을 담은 전단을 인쇄해 명동에서 뿌리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각 언론사에는 보도자료를, 김대중대통령에게는 탄원서를 발송했습니다. 이튿날 문화일보 사회면 전면에 실상이 보도 되었고, 오후 늦게 청와대에서 대책위원장을 호출하는 연락이 닿으므로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걸고 부터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보상금에 의해 급변하는 농촌 환경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진으로 강원도의 강원다큐멘터리 지원금을 받았고,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는 구름 속에 가려지는 산 풍경(산을 지우다)도 찍었습니다. 인본주의를 사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왔으나 "팔리지 않는 사람 사진만 찍지 말고, 팔릴 수 있는 풍경사진으로 전시 한 번 하자"는 ‘통인옥션’ 김완규씨 제안에 따른 것인데,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몇 점은 팔았습니다.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사동과 귤암리를 한 달에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사진굿당”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했습니다.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두 차례 가졌고, 산에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팀을 초청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기도 했지요, 그리고 재미있게 놀 줄 모르는 현대인들을 위한 ‘놀자 학교’를 만들어 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젊은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처세에 의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이후 아내의 ‘장터’프로젝터에 합류함에 따라 ‘사진굿당’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사진굿당'에 들리지만 관리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전국장터 촬영이 마무리되는 내년 쯤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병방산에서 내려다보는 열두절여울의 풍경으로, 뽀죡한 만지산 수리봉 자락에 '사진굿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강길 따라 '사진굿당'으로 가다보면 수리봉이 물에 반영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귤암리 다리 위에서 본 '사진굿당'으로 가는  풍경입니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윗만지산길이 나옵니다. 

 

윗만지산 중턱에서 본 풍경입니다.

 

힘들면 귤암리를 떠나게 될까봐 어머니를 만지산에 묻었습니다. 가끔 산보가는 곳이기도 하지요.

 

'사진굿당'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구름 속에 수행중인 스님의 이름없는 절집이 있습니다.

 

'사진굿당' 입구에 세워진 현판입니다.

 

새로 변경된 주소입니다. '정선읍 윗만지산길 56-5'

 

쓰러지는 국화를 서로 묶어 두었습니다. 옆에 있는 나무는 관상용 복숭아나무인데, 꽃이 너무 예쁘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마당이지만, 아내가 없어서인지 쓸쓸해 보입니다. 

 

도라지 밭과 '소나무 숲 쉼터'로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한번도 넘어진 사람이 없답니다. 다들 조심하니까...

 

올 해는 너무 바빠 가마솥에 소머리 한 번 삶아먹지 못했네요.

 

소나무숲 쉼터로 가는 길목의 돌탑인데, 밭에서 나온 돌맹이 들이랍니다. 

 

한 때 최고의 휴식처였던 소나무숲 쉼터에 젖은 낙엽만 쌓여 있습니다.

한 여름철 여기 오르면 등골이 시원해 진답니다.

 

도라지밭 위에 버티고 선 나무가 옻나무 입니다.

옻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칡능쿨이 마치 구렁이같습니다.

 

방에서 보이는 소나무 풍경인데, 한 그루가 잘려 품위를 잃었습니다.

 

4년 전 심은 목련인데, 올 해 처음으로 꽃망울을 터 트렸답니다.

 

텃밭에 힘을 실어 줄 두엄밭입니다.

 

올해도 고추가 신통찮습니다.

 

'사진굿당' 곳곳에는 산초나무가 많습니다. 작년에는 시기를 놓쳤으나, 올해는 '정선아리랑제'

행사 때 다 땄습니다. 산초기름 짤 작정인데,가시나무에 글킨 상처들이 작난 아니네요.

 

산에서 담배 피우면 큰 일 나지만, 나만의 비밀 흡연실입니다.

 

마당으로 내려가는 길 가에 뽕나무가 있습니다.

엄청 달고 많이 열리지만 따는 시기를 번번히 놓친답니다,

 

'큰무당노린재' 가족들이 뽕잎에 붙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가 개복숭아 나무입니다. 두 가랑이를 쩍 벌린 그 자태 자체를 좋아합니다.

열매는 많이 달리지만 벌레 때문에 대부분 떨어지지요. 벌레먹은 개복숭아술은 약이지요.

 

지방으로 돌아다니다 오랫만에 들린 '사진굿당'의 우체통입니다.

 

퇴색한 사진 느낌은 별로지만, 여기 앉아 멍하니 앞 산을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방 안에서 내다 본 바깥풍경입니다. 햇살이 싱그럽네요.

 

방문 위에 걸린 사진은 '인사동, 봄날은 간다'전에 걸렸던 사진이지요.

신경림, 채현국, 무세중, 심우성, 황명걸, 장사익, 김신용, 최백호, 한봉림씨 등 보고싶은 분들이 많군요.

그동안 저승으로 떠난 친구도 둘이나 보입니다. 화가 여 운 과 시인 적음 말입니다. 

 

여기가 식당이며, 작업장이고 침실입니다. 옛날에 고추 말리려고 큰 방을 만든 모양인데,

군불 때는 아궁이도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겨울에는 우풍이 심해 엄청 춥습니다.

 몇 년 전 '생활성서' 수녀님 두 분이 이곳에 취재왔다가, 너무 추워 밤을 꼬박 세운적도 있지요.

 

벽에 걸린 범종 당좌문양 사진은 부적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닙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사진굿당' 맡은 편 골에 사는 최돈연씨인데, 아직 건강하십니다.

 

인화하던 암실입니다. 요즘은 서울서 디지털로 해결하니 그냥 창고가 되어버렸지요.

 

겨울철에 사용하려고 작은 방을 만들었으나 짐이 많아 여기도 창고가 되었습니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방문하는 분들을 위해 따뜻한 물과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예전에 찍어 둔 사진입니다. 

 

'신명' 설치사진전입니다.  햇볕에 노출되어 일년 정도 지나면 퇴색합니다. 

 

 

2008년 '만지산 서낭당축제'에서 무세중선생과 무나미선생께서 굿판을 벌입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설치 사진전입니다.

 

 

정영신의 '장터' 설치사진전입니다.

 

 

 

소나무숲 쉼터에 전기를 당겨 여름철엔 여기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설치미술가 김언경씨의 작품 '바람꽃 나무"입니다.

 

'놀자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각지에서 놀이꾼들이 모였습니다.

선생들은 많은데, 학생들이 없네요.

 

'농심마니'(대표:박인식) 회원 30여명이 만지산에 모여 산삼을 심기 전에 서낭당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뮤아트'김상현씨가 방문하여 절창을 하고 있습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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