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신문]

- 1947년 경남 창녕 출생.
- 1985년 “동아미술제”와 1986년“아시안게임 기록사진공모전”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
- 월간사진 편집장,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 등을 지냄.
- 개인전으로 86아시안게임, 87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불교 상징전,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전,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을 가짐.
-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과 사진집 “두메산골 사람들”등을 출판.



어머니를 떠올리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생각난다.

1950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져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취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어머니와 나만 떠나지 못한 채 좀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니 어머니 등에서 겁에 질려 제대로 울지도 못할 때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여 모은 돈을 어머니께서 이곳저곳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미처 챙기지 못해 피난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들쳐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온 마을이 불타 재가 된 줄을 짐작하면서도 위험한 전쟁터로 들어간 것이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의 받쳐 업은 두 손이 내 몸을 꽉 조여 왔다.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기는 하였지만 혹시 뒤에서 총을 쏠까봐 등에 메 달린 나를 가슴에 안고 뛰셨는데, 어머니의 온 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흘렀다. 그 때 느낀 어머니의 거친 숨결속의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이것이 내 기억에 가장 오래된 어머니의 초상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집안은 많은 가산을 잃었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생 시절 동안은 아버지가 벌인 사업이 실패하여 끼니를 잇지 못할 어려웠던 시절도 겪었다.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가는 자식들이 불쌍해 혼자 눈물 지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애절한 마음일 것이다. 집안 체면에 남에게 어려운 소리 한마디 못하시는 어머니지만 한번은 이웃에서 빌린 쌀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갖고 학교에 찾아오신 적이 있다.   교실 앞 화단을 거쳐 유리창너머로 살며시 도시락을 내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버럭 화를 내며 창문을 닫은 불효막심한 짓을 했다. 점심시간에 이웃 형에게 전해 받은 도시락을 까먹으며 남몰래 눈물 흘렸던 그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친구들에게 가난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사춘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한번은 하루 종일 굶어 허기져 있는 자식들을 차마 보지 못한 어머니께서 남의 집 처마 밑에 걸린 보리쌀 삶은 소쿠리를 몰래 들고 나오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일이 있었다.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여 가슴이 뛴다.
“내가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면서 보리밥 담긴 소쿠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긴 하셨지만 한동안 자식 보기 민망해서인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 굶주린 자식을 먹이기 위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본능일지라도 어머니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크나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구구셈을 외우지 못하거나 공부를 제대로 못하면 잠을 재우지 않고 회초리로 다그치던 완고한 어머니셨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큰 소리 한번 안치시는 무기력한 어머니로 변하고 말았다. 자식 앞에서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평생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미어질 것만 같다.

 

어머니는 지금 인천 형님 댁에서 살고 계신다.
세월이 흘러 이제 연세가 아흔 다섯이나 되셨으니, 제발 희미해져가는 어머니의 기억력을 빌어 악몽 같은 지난 일들은 모두 잊으시길 바라지만 너무 크게 마음을 다친 일이라 과연 잊으셨는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엔 화장실에서 빨래하던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돌아 온 손녀를 반기려다 미끄러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로는 늘 앉아만 계셔야하는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이방 저방 기어 다니시며 청소를 하고, 싱크대를 잡고 일어나 설거지까지 하시던 부지런한 어머니셨다.
요즘은 체력이 쇠진하여 아무 일도 못한 채 앉아만 계시지만 가끔 내가 찾아뵈면 일부러 딴청을 부리신다.
“니가 누고? 해나 종덕이 아들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어머니의 유머에 한바탕 웃지만, 한편으론 자주 찾아오지 않아 아들 얼굴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담겨있어 부끄럽기도 하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꼭 껴안으며 “미안합니더. 어무이”라고 나직이 말하면 금세 좋아 “야! 징그럽다. 술이나 한잔도”하시며 분위기를 바꾼다. 평소에 약주를 즐기시어 농담이나 노래를 잘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상을 올린다. 그리고는 평소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를 불러 드린다.

“구름 속에 달빛만 엉큼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당신의 마음도 검구려
한 되 술 이백 원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 묻은 치맛자락 왜 붙드시나요.
막걸리 사랑이란 싸고도 비싸다, 나도 순정은 있어요 사람 괄세 마세요.”
어머니께서는 기분이 좋아 ”야! 구닥다리 노래 말고 내 신식 노래 한번 들어봐라“ 면서 한곡을 뽑으신다.
“예- 삐빠빠 룰라 씨스마루 뻬뻬…”라는 묘한 발음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온 집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엄마를 노래자랑에 내 보내야 한다는 누님의 맞장구에 더욱 신이 나 어깨까지 들먹이신다.

어머니! 이젠 지난일이랑 모두 잊으시고, 오래 오래 노래하며 즐거운 여생을 보내십시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