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반불레’라는 풀이 있다. 눈이 녹고 밭고랑의 보리 순이 생기를 얻기 시작할 때, 우리네 들판 어디서나 파랗게 돋아나는 풀이다. 전라도 남쪽 지역에서는 초봄에 그 어린 풀을 보리 순과 섞어 된장국을 끓인다. 깊은 향취가 있다. 홍어 내장을 조금 넣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달포 전에, 담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소설을 쓰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가 전화를 걸어 인사말도 끝나기 전에 대뜸 질문을 했다. 표준말로 곤반불레를 뭐라고 부르느냐는 것이다. 어조가 심상치 않아 나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별꽃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곧바로 노기 띤 목소리가 되돌아 왔다. “아니 곤반불레로 국 한 번 끓여 먹은 적 없는 것들이 왜 저희들 마음대로 별꽃이야.” 전화는 곧 끊겼다. 선배의 불평에는 부당한 점이 없지 않다. 온갖 풀과 나무의 이름을 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 식물 하나하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렇긴 하나, 별꽃을 영어로 chickweed라고 하지만 starry라고도 부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남는다. 우리의 ‘별꽃’이 영어의 속명을 옮겨 놓은 것일 리는 없겠지만, 역시 별을 뜻하는 라틴어 stellaria가 들어 있는 학명을 곧바로 번역한 것일 수는 있겠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의 ‘곤반불레’가 식물학자들에게서는 한때 이름 없는 고아였더란 말인가. 

 

 

 황현산 |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영남 사람이 경상도 말을 하고, 호남 사람이 전라도 말을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국어란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이 태를 묻고 성장한 땅의 방언이기도 하다. 이 방언은 세상의 모든 말을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좋은 문체를 지닌 지방 출신 작가의 글을 살펴보면 그 문체가 그의 방언과 표준어의 교섭 속에서 성립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방언은 자주 우리의 언어 감각을 현실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경상도 사람이 어디서나 경상도 말을 하고, 전라도 사람이 어디서나 전라도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함이 또한 마땅하다. 방언은 혈연과 지연에서 비롯되는 원시적 감정 속으로 우리를 자주 끌고 들어간다. 공공성이 앞서야 할 모든 자리에서 이런저런 지역 갈등이 온갖 선의를 망쳐버리기도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표준어를 장려하는 언어 정책은 지역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모국어에 대해 통합된 의식을 갖게 하는 데도 목적이 있겠지만, 우리들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깊은 감정을 공공의 광장으로 끌어내는 데도 목적이 있다. 이 점에서 방언을 자기고백의 언어라고 한다면 표준어를 토론의 언어라고 하더라도 무방하다.

한편으로는 방언과 연결되어 있는 은밀한 정서가 표준어의 틀 안에서 표준화되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학술발표회 같은 행사에서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의 토론은 짧고 메마르게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풍성한 대화가 오가는 사례를 적지 않게 본다. 공공성이 강조된 언어의 억압이 그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을 비롯한 여러 문화적 제도의 역할이 요청되는 것도 그 지점이다. 문학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토론의 언어다. 이를테면 시의 여러 기능 가운데는 방언을 떠나서는 표현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의 은밀한 구석에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그것을 공공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방언을 버리고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진실인 것은 어느 날 다른 사람에게도 진실이 되듯이, 지극히 은밀한 방언의 정서도 공공성의 빛 속으로 개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 믿음이 내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공의 제도도 그 폭이 넓어지고 유연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토론은 고백을 끌어안아야 토론이고 표준어는 방언을 포섭해야 표준어다. 강원도에 가면 쉽게 먹을 수 있는 곤드레밥을 고려엉겅퀴밥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곤반불레된장국을 별꽃된장국이라고 고쳐 말할 수는 없다. ‘곤드레밥’과 ‘곤반불레’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각기 ‘고려엉겅퀴의 어린잎을 넣고 지은 밥’, ‘식용할 수 있는 별꽃의 새순’ 정도로 뜻을 달아주면 그만이다. 공공의 언어는 게으를 수 없다.

 

[경향신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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