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가 부른 비극에 대한 '풍자와 치유의 추임새'

[한국일보 / 장병욱 선임기자 ]


임진택씨의 북 장단과 추임새에 딸 예슬씨의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가 따라 오고, 아내 이애경씨의 검무가 펼쳐졌다.

배경은 고향 김제 집 큰방에 있던 열 폭 짜리 병풍.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 10년 만에 연극 복귀
긴급조치 1호와 4호 사이
'울릉도 간첩 사건' 실체 밝히는
힐링 연극 '상처꽃' 준비 한창

● 창작 판소리 열두 마당은 필생의 목표
'백범 김구' '남한산성' 완성하고
5·18과 동학 120주년 기념
'오월 광주' '녹두장군'도 무대에

● 국악무대 뺨치는 즉흥 협연
남편은 판소리·마당극 넘나들고
부인은 대학서 한국 무용 강의
음악교사인 딸은 미래의 명인


현장 예술로서 판소리의 진수는 아니리(즉흥 사설)나 발림(묘사적 동작)에 있는지도 모른다. 승용차를 몰며 임진택씨가 펼쳐 보인 입심은 가공할 만한 분량이었다. 문화판의 거두들이 안주 삼아 펼쳐 놓던 입담, 배꼽 잡게 하는 재담 등을 포장하는 기술에 넋을 뺏겼다. 느닷없이 펼쳐진 그 이야기는 즉흥 사설이었고, 진보 진영의 풍속사였다. 구절양장 같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한국적 시대 상황이 낳은 위대한 삼인(三人) 고은, 김지하, 황석영에게 동시에 노벨 문학상을 줘야 한다"는 기상(奇想)마저 그럴싸해 보였다. 과연 천하의 소리꾼이다. 홍안에다 살짝 퍼머까지 한 그는 전보다 분명 더 젊었다. 본격 취재로는 4년 만에 만나는 그는 문자 그대로 괄목상대해야 할 지경이었다.

고향집에서 가져 온 병풍 앞에 임진택(64), 아내 이애경(62), 딸 예슬(26) 씨가 한복을 차려 입고 즉흥 협연을 하니 웬만한 국악무대는 뺨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 이애주씨의 동생인 아내는 왕성한 현역이다. 대여섯 살부터 김보남, 김천흥 등 한국 무용의 거장들로부터 춤을 익힌 그는 동덕여대 무용과에서 30년 동안 한국 무용을 강의 중이다. 승무, 살풀이, 국선도, 단무(丹舞)가 특기다.

지금은 무릎을 다쳐 단전호흡에 집중하고 있다. 자기 속의 기운으로 남을 살리는 "힐링"의 전통무예가이기도 한 그가 목검을 휘두르며 펼치는 춤사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인간 사랑과 지구 사랑을 실천하는 거죠. 춤 이외에 사물, 승무 반주 북, 설장고도 연주해요."

타악은 이수영, 김병섭, 임광식, 김타업 등 옛 명인들로부터 전수 받았다, 때마침 일년에 한 번 갖는 단무도인의 잔치'단무도 페스티벌' 준비로 분주했다. 지금 학교 음악교사인 딸은 12현 가야금은 물론 29현, 37현도 연주하는 미래의 명인이다.

겉으로는 장중하되 내면적으로는 격한 단무도를 하니 이씨의 몸이 호소해 왔다. 5년여 전부터 무릎 굴신이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해법이 수벽치기, 국선도, 단무도 등 복합 무예 단련이다. 그 중에는 인사동의 걸인을 수소문 해 스승을 삼고 다듬은 풍류도도 있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관련인들의 잇단 무죄 판결로 새삼 세인의 시선을 끌고 있는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여파까지 그 독특한 춤사위가 아우르는 듯 하다.

"나는 중범이 아니어서 4개월 만에 기소유예 받고 나왔다." 단순 시위 준비였는데 인혁당 재건이라며 조작하면서 덧씌웠다는 임씨의 말이다. 그런데 사형이나 무기 받은 사람이 자신보다 일을 많이 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구치소에 넉 달 있으면서 사형 선고 받은 사람들과 통방했던 것이다.

갇혀 있었으되 그는 영어의 몸이 아니었다. "그러던 하루, 구치소 감방 안에서 '빵장'의 제의로 '소리 내력'을 초연했다." 김지하의 담시(譚詩)를 달달 외우고 있던 그는 잡범 열댓 명 앞에서 오락시간 때 가락을 붙인 것. "서울 장안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 그 소리만 들으면 사지에 힘이 풀리고…" 김지하 원작의 '오적(五戝)'과 함께 최근 CD로도 출반된'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중'소리 내력'을 들으니 어떤 기(氣)가 솟구쳐 오는 것 같다. 10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를 코 앞에 둔 그가 사연을 풀어냈다.

"지하의 희곡 중 최초의 마당극인'진오귀'를 보고 충격 받아 연극을 시작했다." 긴 공백 이후 남양주 야외 공연축제 때의 야외극'해랑과 달집'공연을 거쳐 대학로 무대로 갔고, 1997년'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는 그의 새 출발을 알렸다. 대표 양정순, 연출 임진택이라는 체제의 극단 길라잡이는 1995년 탄생했다. 마당극과 판소리라는 임진택 예술의 한 축이 그렇게 살아났다.

"마당극의 미학과 영속성, 영구성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월을 허송했다." 창작 판소리 열 두 마당 중 '백범 김구''남한산성'은 완성했으나 연극 쪽으로는 심혈을 기울이지 못한 데 대한 임씨의 자탄. 여기서 그의 마당 개념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학 시절 그는 허규가 이끌던 극단 민예의 작품 보고 아주 큰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나의 마당은 민예나 미추의 마당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가 전통 연희의 무대 양식화라면 자신의 것은 '연극의 현장화' 즉 현장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1972년 서강대 언덕 구릉에서 공연했던 '금관의 예수'가 최초였다. 김지하 작에 그와 이상우 등이 출연했던 작품은 전국의 도시를 돌며 새 양식의 도래(到來)를 게릴라처럼 알렸다. 이어 1973년 12월 가난한 개척교회에서 펼쳤던 김지하 원작의 '진오귀'는 "최초의 마당극"이라고 작가가 일컬었던 작품이다. 당시 임씨는 연출과 출연을 함께 맡았다. 공안 당국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동숭동 서울대에서의 공연 시도가 계속 무산되자 1977년 수 천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정문 앞에는 전경이 쫙 깔렸다.

그는 1985년 김지하의 에세이 <밥>을 토대로 한 마당극 '밥'으로 한국 연극사에 방점을 하나 찍었다. 대학 시절 연극반 선배 김지하가 자신의 무대를 보고 퍼붓던 "연출 부재"라는 철퇴는 아직도 그를 닦달한다. 실은 팍팍한 현실에 쫓겨 마당극 미학을 정립하지 못 했다는 후회가 막심하다. "술만 안 마시면 10년 전보다 더 작업 할 수 있다. 두주불사 하는 양반들이 주위에 어찌나 숱했던지…." 앞으로 1년에 판소리 하나, 마당극 하나를 할 것이라는 다짐이 변명처럼 나온다.

필생의 목표인 창작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백범 김구''남한산성' 등 두 편은 완성했다. '백범 김구'는 3시간 넘는 3부작이다. 그와 명창 왕 기철, 기석 형제가 백범기념관 및 정동극장에서 각각 1시간씩 선보였는데 좋은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당대 제일의 명창이라면 나는 광대다. 소리 그 자체의 미학보다는 역사인식의 현실감이 살아 있다는 평이었다."서울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한 덕일까, 풍자에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판은 아기자기한 애드립의 재미로 정평 나 있다. 정통파인 정권진의 제자이면서도 즉흥과 입심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명창 박동진의 맥을 잇는 것으로 평가될 정도다. 오는 5월18일에 맞춰서는 80분짜리 판소리 '오월 광주'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동학 120 주년을 기념해 판소리 버전 전봉준 일대기인'녹두장군'을 꼭 내놓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재정 지원이 없어도 해야죠."

일복이 터졌나 보다. 당장 새 연극'상처꽃'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다. 1974년 개헌 청원 운동하던 장준하 백기완 등을 겨냥한 긴급조치 1호(1월 8일), 인혁당 사건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4월 3일)의 사이인 3월 15일 또 하나의 허구가 반도 남쪽을 얼어 붙게 했다. 두 차례 걸친 재판서 전원 무죄로 판결 난 이른바 '울릉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직접 관련되지 않았지만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과 서대문 구치소서 같이 수감돼 있었다. 민청학련 40주년을 앞두고 이제는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월북 가족, 납북 어부, 재일동포 유학생이 등장하는 남편의 회심작을 두고 아내는 "치유이자 인권 연극"이라 풀이했다.

임씨가 잊혀진 그 사건의 실체를 본 것은 지난해 6월 서울 정릉에 있는 '김근태 기념치유센터' 개관식에서였다. 치유센터 이사인 최창남 목사를 통해 다큐멘터리'울릉도 1974'와 만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의 충격파 속에 묻혀졌고, 결국 무죄가 선고됐으나 한번 간첩으로 몰렸던 그들의 삶은 거덜났다. 간첩으로 몰리는 바람에 아예 구명 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역사마저 그들을 망각하고 있었다.

임씨 역시 이념의 후폭풍을 되게 맞았다. "아버지는 8형제였는데 아버지 등 4명은 우익, 나머지는 빨치산 좌익이었다."연좌제는 부친을 괴롭혔다. 그 덕(?)에 그는 군 면제. "내 전공이 정치외교인데, 사라진 중립화 통일론이 부각될 필요 있다. 곧 역동적 중도다."

그는 김지하의 역동적 중도론이 우선 시인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에 힘입은 개념인 동시에, 전례 없는 탁월한 발상이라 평했다. "정치판의 중도론 때문에 중도의 개념이 손상돼 기회주의로 오독되고 있다. 좌우라는 개념은 방향이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극단을 뺀 중도다. 중도는 절충이 아니다. 변화를 피하는 것은 기회주의다." 그의 지론. 그렇다면 현 정세 하의 중도란? "생명론의 관점에서 인식의 상대성에 입각한 역동적 중도다."

다음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하는 말일까."민주화 세력 10년 집권 후 보수 반동이 온 데 대해서는 반성을 정말 많이 해야 한다. 민주와 정의를 외쳐놓고 막상 그 세상이 오자 또 다른 권력이 돼버린 과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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