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 지키고 있죠”


 

 

 

서울 인사동길 어귀에는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는 오래된 서점이 하나 있다. 1934년 문을 연 뒤 삼대째 고서적들을 다루고 있는 ‘통문관(通文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래된 책 향기와 함께 수만 권의 고서를 지키고 있는 이종운 관장을 만나 100년를 향한 통문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 보았다.


1934년 문 연 고서의 보물창고


매미 소리마저 사라지고 차량의 움직임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어울리지 않는 듯한 아이돌들의 음악 소리 가득한 인사동은 이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전통의 거리가 아닌 퓨전의 거리가 돼 가고 있다. 파릇한 차향보다 커피향이 번지고 거친 듯하지만 맛만큼은 최고였던 칼국수 대신 스파게티 가게가 생겨나는 그곳 인사동의 터줏대감인 ‘통문관’의 역사는 한국의 고서적과 국학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34년 당시 25세의 나이였던 고 이겸로 선생은 16세의 나이에 배가 고파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서점에 취직하게 된 지 9년여 만에 인사동의 고서점 금문당을 인수하고 상호를 금항당으로 바꿔 직접 고서점 운영과 수집에 나섰다. 이때부터 통문관의 역사가 시작됐다.

배고파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겸로 선생은 남다름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고서에 관한 그의 안목은 여느 학자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고서에 대한 정가제를 도입해 자칫 부르는 게 값일 수 있는 고서적에 정가를 매겨 통문관을 본궤도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하는 뛰어난 사업 수단도 지녔다.

그러나 무엇보다 통문관과 이겸로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수만 권에 이르는 고서의 장서량보다 통문관과 이 선생을 통한 국학의 발전과 고서와 관련한 국보와 보물급 문화유산의 발굴·보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통문관은 자연스럽게 국학자들의 사랑방이자 정보 교환의 장소가 됐다. 국어학자인 이희승 씨와 미술사학자 김원룡 씨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그리고 이곳 통문관을 통해 ‘월인석보’와 ‘월인천강지곡’ 등이 발굴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 밖에 많은 국보와 보물급 고서들이 통문관을 통해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 귀중한 자료로 남겨지게 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최근 조선 후기 시조 작가인 김천택 선생의 ‘청구영언’ 자필본이 한글박물관에 안착하게 된 것 역시 통문관이 큰 역할을 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통문관은 출판에도 관심을 두고 1943년 처녀 출판물인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 김천택의 ‘청구영언’, ‘두시언해’ 초간본, 김민수의 ‘주해훈민정음’ 등 많은 대표 서적을 발간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가재도구 대신 ‘조선군서대계’ 80권을 지고 피란을 떠났던 이겸로 선생의 고서에 대한 애정은 광복 이후에 이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멈췄던 국학 연구에 불씨를 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통문관은 한국 고서의 보고로서 역할을 톡톡히 함은 물론 국학 연구에 속도를 더하는 원동력이 됐다.

2006년 이겸로 선생이 97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 지금의 통문관 주인은 이겸로 선생의 손자인 이종운 관장이 맡고 있다. 할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부터 통문관을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는 이 관장은 할아버지가 25세에 금문당을 인수해 고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보다 4년 늦은 29세의 나이에 통문관의 주인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고서와 함께 자란 때문에 커다란 부담감 없이 미래의 통문관을 책임지는 사명을 안게 됐다. 더욱이 국문학도였던 이 관장에게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라 온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드나들던 기억과 거부감 없이 고서와 접했던 추억과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서 자부심과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났다.

“지금 이곳에는 고려 말부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조선시대의 각종 학술서 등이 가득하고 근현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주요 서적들 또한 많습니다. 예전 할아버지 때는 국학 원로들의 사랑방이자 전화가 귀한 시절 연락 창구로 활기를 띠던 통문관이 이젠 전통과 추억의 장소로만 회자되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죠. 통문관은 단순히 고서를 다루는 서점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활자로 남겨진 역사의 결집체이자 역사 해석의 올바른 해독소와 같은 곳입니다. 일반 서점이 점점 사라지고 통신 기술의 발달로 통문관 역시 점점 찾는 발길이 줄고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역사에 대한, 발자취에 대한, 기록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곳 주인인 저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서는 단순히 오래된 책으로 정의할 수 없다. 역사적 가치로서 고서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예술 등을 엿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자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고서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기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불합리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인쇄물에 대한 가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서의 가치는 요즘의 인쇄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값어치가 아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쌓임인 역사가 기록된 데 따른 값어치인 때문이다.


시간의 쌓임이 낳은 역사적 가치 봐야


“사실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높은 희귀 서적이나 고서적들 중 몇몇 책은 거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세상이 되다 보니 높은 가치의 고서 한 권보다 수십 권의 책을 구매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 때문에 고서에 대한 평가나 가치 판단이 크게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책은 갈 데 가야 한다’는 말씀처럼 고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들과 점점 설 자리조차 잃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국학을 연구하는 교수님들이나 학생들,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어 통문관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통문관은 고려시대 역어교육(譯語敎育)과 통역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관장이 맡고 있는 통문관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세대와 세대 간을 서로 통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러기에 통문관의 미래는, 아니 역사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아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겠다면 물려주겠지만 사실 통문관 주인의 삶은 매우 정적이고 인내와 기다림의 삶입니다. 강요하지 않겠지만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통문관이 100년이 되는 때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백년을 향한 통문관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의 일환으로 경매 등을 통해 가치 있는 고서들이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갈 데 가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고서의 매력과 고서만이 지닌 역사의 진한 향기에 취한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찾을 수 있는 고서점으로 남길 기대합니다.”


한국경제매거진 / 조범진 객원기자 cbj6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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