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6 / 전농동588번지

“놀다 가세요~”

거짓 사랑을 구걸했지만 지나치는 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야- 니가 좋아서 잡는 줄 아니, 돈이 좋아 잡는다”

체념 섞인 그 녀의 절규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전농동을 기록한 오래된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 소녀를 다시 보았다.

그녀를 잊은 지도 어언 30여년의 세월이 되었나보다.

 

참 착하고 예쁜 소녀였다.

그토록 꿈 많은 소녀가 거기까지 가게 된 건, 가난한 부모 만난 죄 뿐이다.

그 때는 나라까지 가난했으니, 시대적 사회적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그녀 이름은 김정숙이었다.

 

그 때 나이 한참 고운 이십대였으니 이제 오십대의 아낙이 되었을 게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해 돈 벌려고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되었다며 슬피 울던 정숙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나 몸은 망가져도 살기는 그 곳이 더 편했다고 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돈까지 엄마한테 보내 줄 수 있어 그냥 산다고 했다.

다 견딜 수 있으나, 변소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견딜 수 가 없다고 했다.

 

몸 파는 창녀일지라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아주는 사회인식을 바꾸게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인권을 되찾자는데 공감해 사진작업에 많은 힘을 보태기도 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봐 주는 깨어난 세상을 바라며 5년 동안 뛰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90년 2월, 그 사진들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인공인 그녀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나와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는 그녀들의 목소리 보다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둔 선정적인 나팔을 불어재꼈다.

 

그래서 그 전시 이후로 전농동 기록필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쳐 박아 두었다.

사진집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또 하나의 춘화 같은 이야기 거리로 변질될 것도 두려웠으나,

행여 잘 사는 그녀들의 삶이 발목 잡힐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에 파묻혀 간, 그 시절 장면 장면들은 우리 사회사의 중요한 기록이고 역사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본인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듯 싶다.

아무튼 이 사진집 출간을 계기로 그 때 못한 그녀들의 목소리도 전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 만나고도 싶다.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그 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을 보게 되면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께...

디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2014. 12
조문호

마지막 남은 달력마저 달랑거리는 12월 10일의 수요일이었다.

 

인사동의 수요일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전시장마다 새 전시가 열리고, 식당과 술집들은 뒤풀이로 부산하다.
가는 곳마다 반가운 사람들이고, 거리 곳곳에 낯익은 모습들 뿐이다.

 

12월10일은 평소 수요일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로 인사동이 들썩였다.

한 때 민중미술가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목판화가 김준권씨와
화가 박불똥씨의 전시가 열려, 옛 민주인사들로 인사동이 도배됐다.

 

그 날은 민중봉기 기념일이 아니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다.

이 곳 저 곳 돌아 다니며 사진 찍고 술 마시느라 혼자 바빴다.
불알에 요랑 소린지, 구세군 종소린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사진,글/ 조문호

 

 

 

 

 

 

 

 

 

 

 

 

 

 

 

 

 


지난 6일 시인 김신용씨가 인사동에 나왔습니다.

얼마 전 ‘새를 아세요?’란 소설을 출간했으나 공식적인 출판기념회가 없었습니다.
몇 차례의 모임에서 사인회는 가졌지만, 인사동 주변의 가까운 분들끼리 모임을

한 번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참석하지 못한 분이 더 많았습니다.

그 날 김신용씨를 비롯하여 조준영, 이명희, 전강호, 박인식, 노광래,

조경석, 정영신씨 등 10여명이 모여 조촐한 술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관절염으로 술을 마시지 못해 술자리가 너무 조용했습니다.

나도 왠지 사진이 찍기 싫어 조용히 술만 마셨더니, 역시 조용히 취하더군요. 

김신용씨는 집에서 자전거를 많이 타는데, 본인의 키보다 낮은 자전거를 오래 타

관절에 염증이 생겼나봅니다. 자전거 하나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어, 

남의 자전거 얻어 끌고 다니는 가난한 시인의 삶이 참 안쓰럽습니다.

 

사진:정영신 / 글:조문호

 

 

 

 

 

 



이 사람

대 끼가 철철 흐르는 최성월씨

고추모종을 심으며 정선아리랑을 부르던, 15년 전의 최성월씨 모습

 

 

최성월씨는 동강변 귤암리에 사는, 동네 소리꾼이다.

집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시장에 나와 춤추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

 

15년 전 ‘동강 백성들’이란 제목의 전시와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할 무렵,

하귤화 마을의 밭이랑에서 고추모종 심는 최씨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날 일하며 불러 준 최씨의 구성진 ‘정선아리랑’ 노래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동안 들었던 ‘정선아리랑’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삶의 애환이 그의 소리에 배어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담아 풀어내는 가사의 진솔함도 너무 좋았다.

 

‘동강 백성들’ 작업을 마무리한 몇 년 후, 귤암리 ‘사진굿당’에서 ‘서낭당축제’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예정되었던 최성월씨 순서 전에, 음악인들이 록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그 신나는 음악에 가만있지 못하고, 최씨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 온 예술인들과 관람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보캅과 공옥진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듯, 짧은 변화를 주는 춤동작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한 그의 모습에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는 뮤지션들에게 보내는 박수가 아니라 최성월씨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그 때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춤추던 그 분은 어떻게 지내냐?”며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신들린 듯 추는 그의 춤을 놓고 “본래 무당이 될 팔자”라고도 말했다.

 

 

 

 

그 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황기막걸리 출시를 기념하는 공연 단막극에 나와 그의 정선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는데,

나를 만나기만 하면 “영감이 시장에 못나게 하니 말 좀 해달라”는 것이다.

어느 남편이 마누라가 시장바닥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냐마는 참 안스러웠다.

농사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장날만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고 나와 춤을 춘단다.

 

 지난 22일, 정선아리랑시장 문화장터에서 춤추는 최씨를 만났다.

만난 김에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홑겹의 한복만 입은 채 추워 떨고 계셨다.

“날씨도 쌀쌀한데, 내복이라도 입고 나오시지 그랬냐?”고 했더니 대뜸 내복을 입으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지금 연세가 몇인데, 폼만 찾냐?”고 나무랐지만, 춤꾼으로서의 프로기질도 갖고 계셨다.

그리고는 남이 들을까봐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시장에 아는 사람 있으면 부탁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수고비만 받아 가면 영감도 끽소리 하지 않을 거라“며...,

“아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런 부탁할 처지는 아니다”고 둘러댔지만 마음이 짠했다.

 

 

 

최씨는 정선 윗만지골에서 태어나 18살 무렵 개바우골의 이한옥(75세)씨에게 시집왔다.

개바우골에서 8대째 살아 온 이씨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객지에 나가 산다.

시집왔던 어려운 시절엔 먹을 것이 없어 끼니때만 되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시집 온지 3년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했을 때, 군대도 산골처럼 먹을 것이 없어 고생스러운 줄 알았던

그는 늘 남편 걱정에 애태웠단다. 동내에 잔치라도 있어 떡이라도 얻게 되면 휴가 때 주려고 장롱 속에 숨겨 두다

번번이 썩혀 애석해 했다는 등, 어려운 시절 이야기들을 말 했다.

살아 온 게 한이 되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그 때 부른 최씨의 아라리 가락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꽃이라도 낙화하면

오던 나비 돌아가고,

비단 옷도 떨어지면

물걸레로 돌아가네.

좋은 음식 쉬어지면

수채 구녕 찾아간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은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놀던 고향의 놀이터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지겹기도 아쉽기도 하지만,

마치 마누라 떠난 집같이 허전하다.

천상병, 박이엽, 민병산 선생을 비롯하여 김종구, 이존수, 강용대, 김영수, 최영해 등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남은 벗들을 만나려면 인사동으로 가야한다.

도 때도 없이 만날 수 있었던 옛날에 비해, 요즘은 가까운 사람들의 전시오프닝이나 만날 수 있다.

30여 년 전에는 예총의 '사진협회'도, 사우들이 모이는 암실도 인사동에 있었다.
그리고 천상병선생을 뵐 수 있는 찻집이나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실비집'도 있어,
일 없는 날은 인사동 주변을 맴돌며 벗들과 정분을 나누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최정자선생과 김신용, 배평모, 이근우, 이점숙, 박한웅, 박광호 등 자주 어울리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지만, 젠 모두 떨어져 있어 쉽게 만날 수도 없다. 인사동에 모임이 있어도 한 두 사람 나올 뿐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의 인사동은  낭만적이라기보다 장사꾼들이 판치는 난장에 다름 아니다.
인사동 고유의 정서는 사람과 돈에 밀려 난지 오래 되었고,
쉼 없이 밀려드는 인파와 얄팍한 상혼에 주눅 들어 낯설기 그지없다.

 

그래도 인사동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많은 갤러리들이 남아있고,
아직은 인사동 골목의 술집에서 세파에 찌든 예술가들의 한숨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사동이란 지난 날 이산가족들을 만났던 여의도 광장처럼 안타깝다.,

아련한 그리움만 떠도는 서글픈 현장일 뿐이다.

 

사진,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11월 27일의 인사동 거리풍경

 

 

 

 

 

 

 

 

 

 

 

 

 

 

 

 

 

 

 

 

 

 



 

날씨가 쌀쌀한 요즘의 정선시장은 따뜻한 호떡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호떡으로 입을 가리고 다닌답니다.

그러나 호떡은 맛보기일 뿐, 시장 통엔 온갖 먹 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콩은 솥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돌아가고,

토실토실한 찐빵은 김으로 자태를 감춰 유혹하고,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배추전은 아줌마 손놀림에 춤을 춥니다.

 

곤드레밥과 이 것 저것 사 먹느라 집집마다 사람들로 만원인데,

'메밀이야기' 골목의 '회동집'은 불난 집처럼 사람들이 몰려섰데요.

이 집 저 집 맛은 같은데, 유난히 유명세를 많이 탄 집이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니 일단 먹고 봅시다.

다이어트란 말에 늘 주눅 들어 살지만, 옛말에 "먹는 것이 남는 것"이란 말도 있잖아요.

차만 없다면 황기막걸리 한 잔 했으면 딱 좋으련만... 

사진,글 / 조문호

 

 

 

 

 

 

 

 

 

 

 

 

 

 




‘한겨레신문’에 연재되었던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가 마무리되어, 그 연재에 도움 준 분 들을 모시는 책거리가

지난 11월 24일 오후7시부터 ‘낭만’에서 있었다.

'한겨레신문' 편집부에서 마련한 이 자리에는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을 비롯하여 이부영, 황석영, 김정헌, 이애주, 박재동,

윤범모, 임진택, 조성우, 이태호, 문영태, 이종률, 박 건, 최석태, 곽대원, 김명성, 김경애씨 등 2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과 술잔을 들며 저승 떠난 ‘용태형’을 추억했다.

그리고 앞서 출간된 “산포도사랑, 용태형”과  연재된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를 재구성해

다시 출간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한겨레‘ 김경애 부장은 출판부와 협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낭만’에서 ‘소담’으로 이어진 긴 술자리는 자정을 넘긴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22일의 정선아리랑시장은 간헐적으로 가랑비가 내리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난장에서 화롯불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겨웠답니다.

요즘은 김장철이라 배추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정선장에는 배추가 보이지 않습니다.
특산물이 나는 장에 특산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대추로 유명한 보은장에 대추가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지역에서는 흔한 농산품이라 모두 외지로 빠져 나가기 때문인데, 정선의 배추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정선장에 배추가 팔릴 리가 있겠습니까?

장터 공연장에는 주연보다 조연이 더 빛나는 하루였습니다.
군립아리랑예술단의 정선아리랑 공연에 나와 춤을 춘 최성월씨가 더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귀로는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듣고, 눈으로는 최성월씨의 춤에 흠뻑 빠졌습니다.
로봇 춤과 공옥진씨의 문둥이 춤을 접목시킨 최성월씨만의 독창적인 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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