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거리에 선 소설가 박인식

 

 

글 : 박인식 /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은 미술과의 인연이 아주 깊다. 조선조 때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의 거주지가 인사동이었다. 그 덕에 인사동은 조선 초기에 이미 미술 활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때 가닥 잡힌 ‘미술거리-인사동’의 이미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 굳어졌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서점, 필방, 화구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 1930년대에는 우리 전통예술의 상징인 골동품상거리로 탈바꿈했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박명자 씨의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금호미술관,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빠짐없이 인사동에서 문을 열었다. 이들을 따라 크고 작은 화랑들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민속공예점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500여 미술 관련 업종이 밀집한 인사동은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되었다.

인사네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인사동 5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하나로빌딩이 나온다. 그 빌딩 현관에 자그마한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나의 인사동 나들이 출발점이다. 서울중심표석!

그랬다. 서울을 사대문 안으로 좁혀 보던 시절에 인사동은 분명 서울의 중심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이 자리가 ‘나라의 중심’임을 선언하는 표석을 세운 1395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사동은 우리 미술의 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 표석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과연 서울의 중심에 서 있는가? 서울중심표석 앞에 선 너는 너라는 존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사이,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미끄러지는 타임슬립이 일어났다. 타임슬립은 인사동에 맨 처음 난장을 펼쳤던 조선조 화공과 도공이 ‘여기가 세상의 중심일세’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멈춘다.

그들과 서울의 중심에 함께 선 ‘인간중심’을 공유하는 것도 잠깐. 곧 역타임슬립 사면을 미끄러져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 자리는 이미 서울의 중심이 아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모른다. 다들 서울의 중심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돈에 영혼까지 팔게 된 요즘 세상이고 보면 ‘서울의 중심’은 다른 곳이 아니라 ‘돈의 중심’인 강남이나 여의도의 증권가나 금융가로 옮겨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 자리가 더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게 된 시점에 즈음해서 인사동을 떠난 ‘한국 미술의 중심’들을 생각해 본다. 어떤 화랑들은 강남 가는 제비가 되었고, 또 어떤 화랑들은 북촌이나 서촌 또는 평창동으로 옮아갔다. 1990년대 중·후반쯤 인사동의 땅값이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면서다. 초기 인사동을 대표하던 화랑 가운데 아직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화랑은 동산방과 경인미술관, 관훈미술관, 선화랑 등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동을 떠나는 화랑 주인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해하는 내게 표석이 돌의 입을 연다. 목소리가 그지없이 단단하다.

“이봐! 힘내, 인사동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나는 이제 서울의 중심은 아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의 중심이라 자부하고 있어. 생각해봐. 인사동에 자리 잡은 1000여 상가 중 문화예술 업종이 그 절반인 500여 개가 되잖아. 그 나머지 절반도 거의 카페나 찻집 음식점들인데 모두 한국 전통을 표방하고 있거든.”

돌의 격려로 나는 ‘서울의 중심’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존재의 중심을 그 돌의 중심이 받쳐 주자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제야 나는 돌의 중심에 받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30년 넘게 인사동 소풍을 다녔지만 매번 새롭게 눈에 띈 화랑이 두어 개씩 나타났었다. 내가 눈썰미 없어서가 아니라 인사동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인사동에는 죄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화랑이 많았던 것이다.

인사동의 미술문화지킴터인 경인미술관의 정원

 

이름이 잘 알려졌건 아니건, 크건 작건, 인사동에서 저 나름으로 미술문화의 꽃을 피웠던 그 낭만시대에 작가로서의 내가 만들어졌기에 그 낭만시대의 버팀목이 되어준 몇몇 미술관을 들러 안부 전해 달라고 그 돌은 내게 당부했다. 나는 거기로 가야 했다.

표석을 뒤로하고 다시 인사네거리로 갔다. 인사동 길과 마주치는 거기서부터 관광객 물결에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 물결은 거침없고 드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가 우리말을 압도한다. 그들이 주로 들락거리는 쇼핑몰로는 아리랑명품관, 동일전통공예관, 덕원빌딩, 인사아트프라자, 인사동마루, 그리고 쌈지길 등이 있다. 그 쇼핑몰들을 빼고는 죄다 화랑이거나 표구점이거나 공예품가게거나 전통찻집들이다. 쇼핑몰에도 어김없이 미술 전시 전문 갤러리가 들어 있다. 요는 인사동에 자리 잡은 이상 아무리 잡다한 관광기념품으로 관광객을 상대한다 해도, 그 공간에 문화예술의 낌새를 풍겨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사동이 인사동의 자리를 지켜가게 하는 가장 듬직한 힘이다.

중국 관광객 요우커(遊客)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인 한국 전통공예품(그런 것들이 인사동 좌판에 많다)을 한국제로 알고 구입한다 해도, 그곳이 인사동인 이상 그 물품은 한국 전통예술기념품으로 둔갑하고 만다. 다른 곳에서 잡은 조기도 영광에서 말리면 영광굴비가 되듯이.

수도약국 못미처 오른쪽으로 꺾어진다. 이 길은 한산하다. 관광객 인파가 쓸고 지나가는 인사동 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이토록 달라진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인사동 길은 사람 물결로 굽이쳐 흐르는 대하(大河) 같다. 사람 많이 몰리는 곳 또는 사람 가는 곳만 찾아가는 관광객인 것이다.

인사동 10길로 접어들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경인미술관이 나온다.

여기 들를 때마다 고마움이 앞선다. 이 미술관은 옛 인사동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사동 길을 벗어난 지 2∼3분이 지나지 않는데, 먼바다를 건너 외딴 섬에 닿은 느낌이다. 1983년에 개관했을 때와 지금의 경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옥 전시관과 2층의 아담한 현대식 건축물이 정원에게 가운데 자리를 양보하고 한쪽으로 물러앉아 점잖다.

수도약국 맞은편의 가나인사아트센터와 북인사마당 가까이 올라간 곳에 있는 가나아트스페이스가 평창동으로 본거지를 옮겨간 가나화랑이 인사동에 남긴 흔적이며 그리움이다. 가나아트스페이스 바로 곁에 있던 학고재는 삼청동 쪽으로 떴다. ‘이즈’라는 대관 전문 화랑이 학고재를 대신하고 있다.

인사동 길 중간쯤에서 조계사 쪽으로 빠지면 인사동홍보관이 나온다. 모든 인사동 화랑주인으로부터 원로로 존경 받고 있는 박주환 옹이 창업한 동산방과 이 인사동홍보관 사이에 2012년 가을 지하 4층에 지상 5층 그러니까 9층의 큰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9개 층이 모두 전시실이다. 그림을 걸어두고 파는 상설공간은 일절 없다. 9개 층의 2000평(6600㎡) 공간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단일 미술관으로는 뉴욕이나 파리나 런던 등 미술 선진도시의 세계적 미술관이 무색할 만큼 큰 스케일에 공간 활용이 멋지고 기품이 넘치며 당당하다.

 

 

인사동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아라아트'


인사동을 상징할 랜드마크가 들어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화랑들이 속속 인사동을 뜨고 있을 즈음에 ‘시류의 반항아’인 김명성 씨가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이곳에 터를 잡은 2007년부터 나의 인사동 소풍 발길의 종점은 이 아라아트센터가 되었다.

기적이 따로 없다. 한국 미술시장이 해체 지경에 이르렀다는 한탄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인사동에 이런 전시관이 한 사내의 집념으로 세워졌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다.


이 기적이 인사동 부흥의 기치를 한국 미술사에 드높이 치켜세우는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아라아트센터를 찾는 인사동 사람들의 발길이 요즘 끊이지 않는다. 김명성 씨는 인사동 사람들의 술값 밥값 치르며 지난 삼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아라’라는 이름은 내가 지었다. 한자 표기는 ‘亞羅’다. 아시아로 뻗쳐 나가라는 바람을 담았다. 영어로는 ‘Asia Renaissance Action’ 곧 ‘아시아문예부흥운동’의 이니셜을 땄다. 인사동 아라아트센터가 ARA의 빛나는 거점이 되길 바랄 뿐!

이렇듯 인사동에는 아직 미술과 더불어 숨 쉬는 공간이 500곳 넘게 살아 있어, 인사동은 오늘도 미술세상의 중심에서 예술을 외친다.

[소설가 박인식씨가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

 


 

김명성씨의 생일은 아내 생일과 하루 차이라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해마다 함께 생일파티를 해왔으나, 이번에는 지방에 떨어져 있어 어려울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아라아트’ 전인미 팀장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당사자가 바빠 원하진 않지만, 그냥 넘길 수 없어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단다.

24일 오후8시 30분경 ‘유목민’에서 지인 몇 분이 만났다.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박인식, 전활철, 정현석, 정영신, 전인미, 권양진씨가 함께한 가운데
케익에 촛불을 밝히며 축배를 들었다.
헤어지기 아쉬워 들린 ‘로마네꽁띠’에서 임태종씨 내외도 만났다.

“명성씨! 생일 축하해요. 만사형통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지난 20일,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으나,
할 일이 많아 서둘러 귀가해야 했다.

집에 도착해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유목민’의 전활철씨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형! 오늘 전시오프닝 아닙니까? 신용이 형과 조해인씨가 와서 기다립니다.”
"아뿔사!" 일전에 술좌석에서 한 말을 그대로 믿고 나온 모양이었다.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지만 다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목민”에는 김신용씨와 조해인씨가 마주앉아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미 김신용씨는 불콰하게 취해 있었지만, 오랜만의 만남이라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얼마 전 출간된 김신용씨의 소설 ‘새를 아십니까?’가 독립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
그리고 조해인씨의 소설이 내년에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는 등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조금 있으니 김명성, 박인식, 전인미, 김억씨 등 지인들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채현국선생께서 많은 손님들을 모시고 오셨다.
년 말 분위기가 무르익은 대폿집 ‘유목민’은 시끌벅적 달아올랐다.
한 사람 두 사람 빠져나간 자정 무렵에는, 몸도 마음도 취해 비틀거렸다.

 

사진,글/ 조문호

 

 

 

 

 

 

 

 

 

 

 

 

 




마지막 남은 달력마저 달랑거리는 12월 10일의 수요일이었다.

 

인사동의 수요일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축제날이나 다름없다.
전시장마다 새 전시가 열리고, 식당과 술집들은 뒤풀이로 부산하다.
가는 곳마다 반가운 사람들이고, 거리 곳곳에 낯익은 모습들 뿐이다.

 

12월10일은 평소 수요일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로 인사동이 들썩였다.

한 때 민중미술가로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목판화가 김준권씨와
화가 박불똥씨의 전시가 열려, 옛 민주인사들로 인사동이 도배됐다.

 

그 날은 민중봉기 기념일이 아니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다.

이 곳 저 곳 돌아 다니며 사진 찍고 술 마시느라 혼자 바빴다.
불알에 요랑 소린지, 구세군 종소린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사진,글/ 조문호

 

 

 

 

 

 

 

 

 

 

 

 

 

 

 

 

 


지난 3일 오후7시 무렵,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만찬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박인식, 오세필, 공윤희, 전인경,
황인호, 윤재문, 허미자, 전인미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뒤늦게 최백호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효교의 교주로 자처하는 최백호씨의 건강론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모임에서 틈틈이 건강에 대한 정보들을 전해 주는
그의 몸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갑자기 살이 빠져 병원에서 검진을 받아 본 결과, 위에 조그만
종기들이 돋아났다는 것이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정도라지만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 엄청 놀란 것이다.

그런데 그 병인이 하잘 것 없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저녁 방송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습관적으로 땅콩을 먹었다고 한다.
그 땅콩이 주범인데, 몸에 좋은 견과류도 조금 먹으면 약이 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몸으로 체험해 가며 알려주니 최고의 멘토가 아닌가?
모두들 ‘로마네꽁띠’로 자리를 옮겼더니,
벌써 크리스마스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이 싸구려 기념품이나 파는 관광지로 변했지만,
밤이 되면 골목 구석구석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낭자하다.
인사동의 멋이 살아남은 곳이란 고즈넉한 골목 길 뿐이다.

지난 3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무세중, 무나미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상현, 유진오,
장경호, 정영신, 전인경, 전인미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김상현씨의 애끓는 노래 소리를 안주삼아 기분 좋게 마셨다.
옛 생각나는 많은 노래를 들었지만, 마음에 남는 노래가 있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에 상처 잊을 길 없네..“
바로 ‘검은 상처의 부루스’다.
사라져가는 인사동 낭만을 노래한 것 같았다.

사진,글 / 조문호

 

 

 

 

 

 

 

 

 



오랜만의 인사동 외출입니다.

지난 13일은 반야월선생 추모가요제와 최백호 ‘효교’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제법 가을분위기가 감도는 인사동의 오후는 몰려 온 관광객들로 붐볐고요.

이 날 부산시절에 만난 옛 친구들이 일찍부터 올라 와

‘아라아트’김명성씨, 무용가 안재은씨 내외와 어울렸습니다.

‘아라아트’에서 전시 작품들을 둘러보는 등 여기 저기 인사동을 돌아다녔습니다.

 

 

 

 

 

 

 

 

 

 

 

 

 

 

 

 




지난 21일 정오 무렵, 인사동 '허리우드'에 인사동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최백호씨가 말한 '효교'의 발기대회를 한다는데, 발기되지 않는 사람은 어쩌지?" 

‘아라아트’의 김명성, 공윤희씨, 서양화가 최인선, 전인경씨, 가수 최백호씨, 사진가 정영신씨, 큐레이트 전인미씨, MBC광장페스티벌 대표 변 석씨, 광장페스티벌 작가 함상희씨, 산악인 정기범씨, 사업가 권영진씨 등 많은 분들이 약속이나 한 듯 차례차례 모여 들었다.

자연스럽게 지난 모임에 나왔던 '효교'가 재론되기 시작했다.
부모를 잘 모셔야 한다는 '효교'의 취지에 찬동하는 분들이 점차 늘고 있고,
구체적인 방안도 하나 둘 마련되고 있다. 쉽게 말해 '창예헌'의 연장선상으로 보면 된다.
인사동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좋은 일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 날은 최백호씨가 체험한 새로운 건강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몇 일만에 효능을 봤다는 그 처방이란, 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잠자리 들기 전에 한 번, 하루에 두 번씩만 소주를 입속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 내면 된다.

10분이상 머금었다 완전히 뱉어내면 내장은 물론 기력까지 향상된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호흡기에 이상이 있는 분은 특효라고 한다. 최백호씨도 비염으로 고생했으나
소주 머금은 몇 일만에 코가 시원하게 뚫렸다는 것이다.
이젠 예전의 맹맹이 소리가 없어졌으니 노래 소리도 새로워 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술을 머금고 뱉는 것만으로 인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이치를 설명하며,
체질에 따라 몸을 보양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했다.

예전에는 만났다하면 술부터 마셨는데, 그 날은 모두들 술을 마시지 않아 입이 간지러웠다.
요즘은 술을 많이 못 마시지만, 없으니 더 그리운 것이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오래된 술 사랑이니 어쩌겠는가?

‘효교’의 공식적인 첫 모임은 오는 9월13일 오후5시에 '아라아트'에서 모이기로 했다.
회비는 모일 때 마다 한 사람 당 만원씩 내어 술값에 충당하고, 모자라면 교주가 책임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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