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⑦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민중의 승리를 확인하는 6월항쟁의 절정이자 걸개그림으로 상징되는

민중문화예술의 대향연이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출발한 운구 행렬을 호위중인 최민화 작 ‘이한열 부활

도-그대 뜬 눈으로’로, 결국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작품은 부서지고 말았다. 그해 3월부터 연세대 동

아리 ‘만화사랑’의 지도강사를 맡아 이한열과 인연이 있던 최민화는 전날 저녁에야 장례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밤샘 작업 끝에 작품을 완성해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70년대초 문화운동 논쟁의 추억


‘용태 형’과 만나 함께 일했던 시기를 떠올리다 보니 새삼 ‘문화운동’의 개념을 되새기게 된다. 1970년대 초 ‘문화운동’에 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은 당시 전국 각 대학에 들불처럼 번졌던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과, 역시 젊은이들 사이에 대유행을 한 통기타와 청바지로 표상되는 청년문화 현상과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당시 그 젊은이들 사이에 어떤 적대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둘은 천박한 독재권력의 폭압적인 정치상황과 폐쇄적인 문화 질곡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호 우호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은 당시 병영국가로 치닫던 유신정권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현실참여 문학예술뿐 아니라 사소한 이유로 유행가 가사까지 문제 삼아 금지시키고 심지어는 미니스커트와 장발까지 유치하게 단속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거의 탈정치적인 수준의 외래 수입 청년문화 현상을 두고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당대의 바람직한 청년문화운동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생겨나자, 탈춤부흥 민속문화운동 쪽에서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반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갈 점은 문화운동은 결코 탈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문화운동적 성격을 지닌 정치·사회적 움직임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나는 우리 근대사에서 최초의 대규모 문화운동을 동학사상의 포태와 이에 바탕을 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로 본다. 동학의 핵심 사상인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개념에는 가히 ‘문명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일컬음직한 엄청난 세계관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최고의 정치원리와 사람 삶의 관계를 담아낸 근원적인 문화윤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학운동 이후 일제강점기에 민족자주의 시각에서 애국계몽사상을 보급하려 한 활동들, 무엇보다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온 선각들의 활동 역시 본래적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그러한 ‘문화적’ 활동들이 -설혹 탈정치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끝내는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학의 자주평등사상이 결국 반봉건 농민혁명과 반외세 농민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적이었으리라.


문화운동은 문화적 기제와 방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 국가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내는(혹은 지켜내는) 운동이다. 사람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먼저 바꾸어서(혹은 지켜서), 일상의 관습과 생활태도를 바꾸고(혹은 지키고), 그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문화운동의 진정한 의미이고 목적이다. 이처럼 문화운동이 본래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성을 지니고 있는바, 난폭한 독재권력의 시선에서 보면 민중문화운동이란 것은 문화를 빙자한 불온한 정치운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고, 완고한 보수 문화예술진영한테서 ‘민족예술운동’ 따위는 예술의 품격을 저해하는 불순한 반예술행동으로 공격받기도 한다. 어떻든, 80년대 이후 용태 형과 나는 그러한 민중문화운동과 민족예술운동의 거친 광야를 함께 헤쳐나간 동지였다.


민중문화운동 표방 첫 단체 ‘민문협’
84년 만들면서 만난 그는 대번 형노릇


민문협이 남긴 의미 있는 유산은
기관지 ‘민중문화’와 비합법 테이프
책자는 민주화운동의 씨알이 되고
신경림·신동엽 등 민족시 낭송과
내가 작창한 ‘똥바다’ 녹음한 테이프
몰래 복사해 비공식 판매됐다


온몸 내던져 독재 맞서던 처절함이
6월항쟁서 거대한 에너지로 빛났다
마당극으로 걸개그림으로 춤으로


 

■ 민중문화운동의 첫 결집체 ‘민문협’


‘민중문화운동’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최초의 재야 운동권 단체는 84년 결성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다. 이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을 보면 작가 황석영을 비롯해서 동아투위 김종철, 춤꾼 이애주, 화가 김용태, 불교계 여익구, 기독교계 최민화, 출판계의 김학민, 문학평론가 채광석, 탈춤원조 채희완, 영화감독 장선우 그리고 마당극판의 광대 필자 등이 선배 그룹을 이루고 있었고, 문학평론가 김도연, 문화정책가 박인배, 화가 김봉준, 문화기획자 김영철, 연극기획자 유인택, 문화이론가 정희섭 등이 후배 그룹을 이루어 실행위원회와 사무처를 담당했다.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에서 보듯 이 단체는 문학을 비롯해서 미술·연극·탈춤·무용·영화 등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언론·출판·종교 그리고 문화정책까지를 망라하는, 문자 그대로 문화계 전반을 포괄하는 구성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민문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야 ‘김용태’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지, 그 전에는 그를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민문협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초기 각 장르의 대표 인물들과 접촉해 참가를 독려해야 하는데, 그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화가는 두렁패의 김봉준과 현실과 발언 그룹의 ‘오윤’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윤 형은 그런 조직운동에 나선다거나 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어서 다른 인물을 물색해야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김용태라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근무한다는 인사동 어느 사무실로 찾아가 처음 인사를 나눈 것이다. 거기가 미술 관련 잡지사였는지, 진학 관련 잡지사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만나보니 그는 이미 민문협 추진에 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눈치였고, 나는 그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탐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당시 몇해 전 <창작과 비평>에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라는 마당극론을 제창한 적이 있고, ‘이야기와 판소리’ ‘살아있는 판소리’ 등의 창작판소리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었으므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용태 형은 아마도 오윤 형을 통해서 내 얘기를 들어 좀 더 알고 있는 것 같았고, 현발 창립 멤버로서 미술계를 대표해 민문협 참여를 암묵적으로 수락한 셈이었다. 그 뒤 두번째 만남부터 용태 형이 대번에 말을 놓으며 형 노릇을 하려고 했음은 앞서 필자들의 경험과 똑같다.


1987년 7월9일 최병수 작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가 내걸린 연세대 학생회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최병수는 앞서 6월11일 신문에 실린 최루탄 피격 현장 사진을 보고 학생회관에서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밤새워

그림을 그려 다음날부터 건물 외벽에 걸었고, 이는 6월항쟁의 상징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 폭압정치가 낳은 문화운동의 절정기


민문협은 그 포악스럽던 전두환 정권 시절, 김근태 등이 앞장서 출범시킨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와 더불어 독재정권 타도의 깃발을 가장 높이 치켜든 단체 중 하나다. 그처럼 무자비하게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5공화국도 말기가 가까워진 85년 이후에는 일종의 문화통치로 전략을 교묘히 수정한 까닭에, 문화운동의 깃발을 든 민문협의 임무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그 무렵 민문협의 상임대표는 동아투위의 김종철이었다. 초기 민문협 내에서 용태 형의 위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현발 기획전시회나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같은 데 더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민문협에서는 단지 장르별 실행위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한편 민문협을 창설하는 데 앞장서 바람을 잡았던 황석영은 김종철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벌써 바깥에서 또다른 일을 개척하고 있었다. 85년 봄, 나는 ‘석영 형’과 함께 독일 베를린의 ‘제3세계문화회의’에 초청받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윤이상 선생과 송두율 교수 등과도 만났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바로 귀국했지만 석영 형은 남았는데, 그 머무름은 3년 뒤 형이 방북을 결행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시절 민문협이 해낸 사업으로 크게 두 가지 유산이 남아 있다. 하나는 기관지 <민중문화>다. 비록 부정기적으로 나온 얇은 책자였지만 민청련이 발행한 <민주화의 길>과 더불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씨알 같은 기록이 되었다. 이 책의 기획 책임은 기자 출신 상임대표 ‘종철 형’의 몫이었지만, 편집 디자인은 본업이 화가이고 각종 편집디자인의 달인이었던 용태 형의 몫이었다. 그의 손이 간 책들은 아무리 허름해도 검박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또 하나 민문협이 남긴 유산은 이른바 ‘비합법’ 카세트테이프들이다. 비합법? 우리는 불법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저들이 합법으로 허용해주지 않으니 부득이 찾아낸 신조어가 비합법이었다. 대한민국 비합법 카세트 1호는 성내운 교수가 낭독한 ‘분단시대의 민족혼과 민족시 낭송’이다. 그는 전업적인 시 낭송가가 아님에도 재야 인사들이 모인 작은 모임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담아낸 민족시들을 스스로 선정해 낭송하곤 했는데, 시의 내용과 낭송의 감정이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곤 했다. 이 테이프에는 성 교수의 음성으로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신경림의 ‘4·19날 고향에 와서’,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백기완의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 고은의 ‘화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비합법 카세트 2호는 김지하 원작 담시를 원재료로 해서 내가 작창한 판소리 <똥바다>다.

 
당시 민문협 후배들은 운영 재정을 만들기 위해 이 비합법 카세트를 몰래 복사해서 비공식으로 판매했는데, 한번에 3개씩밖에는 복사가 안 되는 구형 복사기인지라 돌아가며 밤새워 작업하는 날이 많았다. 정식 음반이 아니었으므로 조야한 재킷이나마 스스로 만들어야 했는데, 다들 어렵게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용태 형 손에 닿기만 하면 마술처럼 금방 쉽게 풀리곤 했다. 민문협은 비록 가난했지만 각 갈래가 모여 있어 분업과 협업이 언제든 가능한 체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포악의 극치였던 전두환 시기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민중문화운동의 절정기였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화려해서가 아니라 가장 처절했기 때문에 절정기였다. 왜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하는가? 첫째는 문화 전반의 각 분야가 그만한 크기와 결속력으로 다시 모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문화가 어떤 형체였는지 점차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온몸을 내던져 상황을 타개하려는 처절함이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문화예술의 신명과 민중의 함성 일치


마침내 87년 6월! 그간 십수년 동안 축적된 민중문화운동, 민중예술운동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분출하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팽창해온 국민적 분노가 이른바 ‘6월항쟁’으로 폭발하던 시기, 탈춤·마당극·풍물굿 등 공연예술 장르와 더불어 민중예술운동의 커다란 축으로 부각된 갈래가 바로 민중미술이었다. 전시장 액자 그림이 아닌 걸개와 벽화를 시도하던 민중미술의 방향이 얼마나 절실한 바람이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던 날, ‘미술’은 눈부시게 빛났다.


이한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그날, 87년 7월9일 연세대 교정에는 거대한 걸개그림과 수백개의 만장들이 세워졌다.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와 더불어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압권이었다. 특히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최병수의 그림은 그 자체로 거대한 깃발이었다. 깃발로 흔들어 불러일으키는 항쟁의 절정이었다. 그림이 말을 하고, 그림이 외치고, 그림이 절규하고, 그림이 통곡하고, 그림이 분노하고, 그림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이한열의 주검을 실은 거대한 상여를 풍물패와 상여꾼이 운구하는데, 뜻밖에 소복한 어떤 여인 하나 튀어나와 몸부림으로 춤을 추며 베를 갈라 죽은 이의 넋을 걷어내니, 춤꾼 이애주였다. 백기완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썽풀이춤’이다. 그날 우리는 민중문화와 민중예술의 어떤 신명이 거대한 시민항쟁의 분노 함성과 일치하면서 최고의 정치적 경지에 이르는 순간을 분명히 목격했다. 87년 6월! 용태 형과 민족미술 진영, 그리고 우리네 민중문화운동 진영이 길러낸 문화역량이 한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로 전환되는 순간이었고,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문화와 정치가 일치하는 황홀함을 맛보았다.


그리고 6월항쟁은 일단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월의 대선을 앞두고 민주진영이 균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용태 형과 나는 무언가 급박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또다른 문화운동이었다. (계속)


필자 임진택 마당극 연출가·판소리 명창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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