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늦잠에 빠진 지난 6, 강민 선생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박병문씨 사진전도 있어 서둘렀다.

연휴를 맞은 인사동 거리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으나 사람들은 분주했다.

울긋불긋한 우산 행렬이 인사동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치다, 페친이라는 오현경씨의 반가운 인사도 받았다.

요즘 전시장이나 거리에서 페친이라며 반기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늙은 주제에 오현경씨 같은 미인을 친구로 두고 있으니, 늦복이 터진 것이다.


꼽꼽하게 비가 내려 술 땡기는 날씨라,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어도 쑥스러워 말 못했다.

아마 술을 마셨더라면, 그녀의 소매 자락을 부여잡았을 텐데 말이다.

난 어떻게, 술 마셨을 때와 술 마시지 않았을 때가 이렇게 180도로 다른지 모르겠다.

 

혼자 쓴 웃음 지어며, 강민 선생님과의 약소장소인 인사동 사람들에 갔더니,

정승재씨도 와 있었다술집 문이 열리지 않아 커피로 시간 죽이고 계셨다.

뒤늦게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때까지 문은 잠겨있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에게 전화해 자리에 앉았더니, 노광래씨도 왔고 이수호선생도 오셨다.

 

그런데, 강 민선생께서는 막걸리를 따뜻하게 데워 드신다.

난 따뜻한 술은 빨리 취해 좋아하진 않지만, 전시 뒤풀이에 가면 또 마실일이 있었다.

딱 두 잔만 마셨는데도,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다.


때 마침 스피커에서 박인수의 봄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가 마음을 슬슬 건드려 나를 슬프게 했다.

나를 울려주는 봄비가 아니라, 나를 죽여주는 봄비로 들렸다.

 

사진, / 조문호

 

  





























좌로부터 김승환, 박정희, 강민, 추은희, 심우성, 장소임, 채현국, 신경림, 김희연, 장경호씨, 앞엔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민선생의 생신기념 오찬회가

지난 3일 인사동 가회에서 있었다.

 

끈질긴 감기로 어렵사리 나갔더니, 인사동은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옷을 너무 두텁게 입고나와 걱정스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돌아보니, 그림 그리는 장경호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재환선생 전시 때문에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깜빡 잊어버린 일을 새겨 주었는데, 시간이 남아 함께 갔다.

 

가회오찬장에는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여럿 나와 계셨다.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 시인, 소설가 김승환,

김희연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요즘 유명세를 타는 채현국선생,

도서출판 답게장소임대표 등 아홉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본래 2월이 생신이었던 강 민선생께서 따뜻한 3월로 바꾸셨다는데,

답게출판사 장소임씨가 매년 생일 오찬회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풍성한 음식에 배 두드려가며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한 때 탄광을 운영하신 채현국선생의 말씀으로는,

그 당시 회사 경리직원이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소임씨라는 것이다.

회사에 강도가 들어 와 금고에 있는 돈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죽을힘을 다해 돈 보따리를 잡고 늘어져 기어이 뺏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감한 소녀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신 채현국선생과 신경림선생은 키가 엇비슷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어느 분이 큰지 여쭈었더니, 신경림선생께서 좀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민 영시인도 키가 작은 분이나, 그중 나아 항상 어깨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 그런데, 두 선생님을 나란히 세워 확인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회입구에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 민, 김승환, 신경림, 장경호씨만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재환선생의 전시 개막식에 가려면 시간이 남아 예당에서 한 잔 더 하실 모양이었다. 

감기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인사동 거리나 쏘다녔으면 좋으련만,

시간만 죽이다 학고제 가야 했다.

 

강 민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사진,/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시인 강 민, 소설가 김승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모처럼 인사동에 나셨다.

‘툇마루’건물 1층에 새로 생긴 '나주곰탕'이 괜찮다며, 세 어르신께서 오찬모임을 가진 것이다.

복분자를 반주로 맛있게 드셨는데, 심우성선생은 다음 달 넋전공연을 앞둬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날은 돈을 부쳐왔다며 선생께서 밥 값을 내셨다. 사실 세 분 중에는 주머니 사정이 제일 낫다.

여관비나 식권을 대주는 후배도 있고, 원고료도 가끔 들어오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 옛 날에 즐겨 다니신 인사동 술집들은 어디였는지 여쭈어봤다.

80년대 중반은 ‘실비식당’이나 ‘하가’였지만, 그 이전 선생님들께서 다니신 곳이 궁금해서다.
관철동을 주 무대로 오가던 문인들이 70년대 후반부터 하나 둘 인사동으로 옮겨왔으나,

갈만한 술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참 뒤에는 천상병시인의 부인께서 운영한 찻집 “귀천”이나

“누님손국수”에 자주 다녔고, 그 밖에 '사천집', '이모집' 등이 기억난다고 하신다.

‘인사동 사람들’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시간죽이다, 심우성, 김승환선생은 먼저 들어가셨다.

강민 선생따라 술집을 찾아나섰으나 ‘유목민’은 아직 문이 걸려있고,‘푸른별 주막’은 청소가 한 창이었다.

그래도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막걸리와 노가리를 시켰다.
물 뿌려 빗질 한 후라 먼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먼지 냄새에 옛 생각이 왈칵 밀려왔다.

80년대 ‘실비집’에 들려 청소를 지켜보며 술벗들을 기다리던 생각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인사동을 찾는 예술가들은 벗이 그리워 인사동에 나올게다.
예전에는 핸드폰이란 게 없어, 무작정 나와도  벗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화통을 몸에 달고 다니지만, 더 만나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상대를 배려한다지만, 어쩌면 마음의 벽이 두터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강 민 선생도 술이 고파 인사동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
인사동에 그 많은 술집들이 널렸지만, 굳이 문 닫힌 뒷골목을 배회하는 것도,

행여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날까하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낭만은 사라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인사동,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4일, 해 바뀌고 처음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싸늘한 돌덩이 위에 잠든 노숙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화지업사’ 자리엔 또 다른 대형건물이 들어 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거리는, 힘든 사람이나 인사동이 변하는 것엔 관심없는 듯 분주했다.




“인사동사람들”에 들리니, 강 민선생님 혼자 쓸쓸이 계셨다.
선생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든 없던, 인사동에 나와야 마음이 편한 분이다.
양촌리 커피 한 잔에 시름 달래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활철씨가 반갑게 맞았으나, 유작전 개막으로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복분자 한 잔 마시고 일어나려 했으나, 주머니가 비어 난감했다.
마침, 안쪽에 김명성씨와 이상훈씨가 술 자리에 있어 떠넘겨 버렸다.




그렇게 새해의 인사동은 쓸쓸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해들어 시작한 '문화알림방' 일거리가 하나 둘 들어오고 있다.
그 일에 신경써느라, 이 이야기도 늦었는데, 이젠 예전처럼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작가를 인터뷰하여 보도자료를 작성 배포하는 일에서부터, 행사장 촬영 등
잡다한 일에 메여, 찍어 놓은 사진들도 정리 못하고 있다. 늙어 철든 건지, 노망든 건지...
하다보면 요령이 붙겠지만, 책임감에 섣불리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탁받은 행사의 성공 여부가 바로 ‘문화알림방’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다.

2016,1,4 / 사진, 글 : 조문호
















오늘 아침, 전시 디스플레이에 쓸 재료 구입하러 청계천에 나갔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인데도, 육 만원이나 날아갔다.
자동차 정비소에 맡긴 차는 브레이크 라이닝 마모로 드럼까지 갉아먹었다는
연락에 골머리를 앓는데, 마누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 강 민선생님과 인사동 있는데, 점심 먹지 않았으면 ‘툇마루‘로 와”
마음이 딴 곳에 쏠려있어 밥 생각은 없었으나, 안 갈 수 없었다.
‘툇마루’에는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김가배시인과 소설가 김승환선생도 계셨다.
다들 식사가 끝나가는 중이라 급하게 된장비빔밥 한 그릇을 해치웠다.

식사 중에 나온 이야기는 김전대통령의 서거를 국면 전환용으로 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수언론들은 김전대통령께서 변절해 합당한 과거사를 “통합과 화합의 승부사”로
추켜세우는 등, 국정교과서문제와 물대포 맞아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에 대한
들끓는 여론을 덮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정치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생전에는 박근혜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기에, 현 정권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가시가 뽑혔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그렇지만 하나같이 장례식장에 나와
무릎을 조아리는 모습에 정치인의 비열한 양면성을 다시 한 번 본다.

고인께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듯이,
별 짓을 다 해도 새벽은 올 것이다. 더 이상 고인을 욕되게 하지마라.

김영삼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영면을 빈다.


사진:정영신,조문호 / 글: 조문호

















몸이 아픈 강 민시인은 단골식당에서 밀려남을 슬퍼하고,
음유시인 송상욱씨는 낙향하자는 사모님 채근에 슬퍼한다.


덩달아 심우성, 김승환선생까지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한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가고, 누군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게 세상이치지만,
인사동 영혼과 그 낭만을 이을 자가 없으니 가슴 아프다.

‘툇마루’ 비빔밥으로 허기 메우고, ‘인사동 사람’ 맥주로 시름 달랬다.



인사동 / 2015, 10, 6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시대정신 전태일'전 개막식이 지난 30일 오후6시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이수호(전태일재단이사장)씨를 비롯하여 김금옥, 김동만, 김명성, 김정대, 도법스님, 정세균, 정지영, 정현백, 조성우, 한상균씨 등 공동추진위원장을 비롯하여 강 민, 김승환, 채현국, 이은영, 장순향, 이강군, 임옥상, 황재형, 강찬모, 임진택, 김영종, 조준영, 이행자, 배평모, 박영현, 유근오씨 등 300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회에는 백기완씨가 기증한 신학철선생의 작품을 비롯하여 임옥상, 황재형 씨 등 중견작가 100여명이 출품한 260여점으로 아라아트’ 4개 층의 전시장을 가득 메웠는데, 너무 돈 냄새가 풍겼다. 전태일 시대정신에 역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터진 것이다. 전시회에 출품한 민중미술가 대부분이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추진위 명단과 참여 작가 명단에 분개한 것이다. 노동개악을 주도한 사람들과 노동개악 저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시대정신 전태일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 날 개막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친동생인 전태삼씨가 전단지를 뿌리고 상자를 내던지며 퇴장하는 일도 벌어졌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투쟁에 대한 퍼포먼서로 알고 지나쳤으나, 사실은 전태일 전시회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틀 날 전태삼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전시회즉각 중지하라며 나섰. “지난해 형의 기일에 대법원이 쌍용차 노동자들의 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네팔 기증 전시는 차후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을 지키기 위해 나선 상황에서 전시회를 중단할 수 없다면 취지라도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태일 또는 노동과 관련된 그림 전시회인줄 알았는데, 작품을 보니 뚜렷하게 전태일과 연관되는 그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비싼 작품은 억대 가격의 작품도 있었는데, 그림을 살 수 있는 부자들에게 평범한 노동자들이 기대어 무엇을 얻을 것이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네팔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많은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이 역시 시대정신과 전태일 정신이 만나는 모습이라며 반박했다. 이번 전시는 기금 마련전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비롯해 전교조와 교총이 손을 잡아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자리라며, 전시에 앞서 시대화합의 장이라 말했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을 짝 사랑해 상사병 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변해가는 풍정에 등 돌리지만,

인사동을 못잊어 안타깝게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다.

고향처럼 정들었던 인사동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낭만의 시절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다.

제주도에 멀쩡한 집 두고, 인사동 여관방 얻어 혼자 지내시다, 이제 요양원에 갇힌 분이다.

매일 유령처럼 인사동을 떠돌며 아리랑 춤을 추셨다.


 

 

 

그 다음은 시인 강 민 선생이다.

두 시간이나 걸리지만, 인사동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시는 분이다.

몸이 불편해도, 만날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며, 인사동을 기웃거리신다

 

 

 

 

음유시인 송상욱선생도 계신다.

인사동에 콧 구멍만한 사무실 하나 얻어놓고, 매일 같이 나오신다.

그 곳에서 시 쓰며, 흘러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몇 일전 길거리에서 만나 통 사정하셨다.

"조형, 인사동에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봐. 심심해 미치겠어!"

 

 

 

 

인사동에 제일 좋은 갤러리 세워서 망한 김명성시인도 있다.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 재산을 털어 넣은 사람이다.

정말 의지의 사나이다.

인사동에서 리어커를 끌지라도 떠나지 않겠단다.

 

 

 

 

인사동에서 미술관장 지낸 화가 장경호씨도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인사동에 반기는 사람 하나 없지만, 나오고 싶어 안달이다.

술을 좋아하지만, 인사동 나와서만 마신다.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로 문전박대 당해 "다시 안 나온다"면서도 또 나온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골목 안 천정 낮은 주청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기에, 나 역시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이다.

 

 예술과 풍류가 넘실대던 그 때의 인사동은 온데 간데 없고, 얄팍한 상혼만 무성한 인사동. 

천상병, 민병산, 중광을 비롯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자취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무정한 인사동.

옛 소문에 밀려드는 관광객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채, 실망감만 안겨주는 인사동. 


인사동 장사꾼들이 모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와

장사꾼 말만 듣는 '종로구청'이 인사동을 망친 공범자다.

 제발, 상사병 난 사람들과, 인사동 살려 낼 방안 좀 연구하라.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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