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588‘전시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전시 종료를 이틀 앞둔 지난 주말에는 시인 강 민, 김가배 선생께서
김수영시인의 미망인이신 김현경선생을 모시고 오셨다.

김현경선생께서는 구십을 넘긴 연세지만 아직 짱짱하시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김수영선생의 생전 일화들을 심심찮게 들려주신다.
‘청량리588’전시를 둘러보신 후, 익숙한 풍경이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돌아가신 김수영선생께서 옛 홍등가인 ‘종삼’에 가끔 들리셨다는데,
한 번은 술이 취해, 아끼는 군용 털내의를 두고 나와 통탄해 하셨다고 한다.
어느 집, 어느 방인지도 몰라 안타까워하시기에, 다시 사주겠다며 달랬다는 것이다.
정말 간 큰 남편이고, 통 큰 아내였다.

그 날은 가수 최백호씨와 기와장 오세필씨도 들려 김명성씨와 함께 '툇마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최백호씨는 축구를 하다 넘어져 한 달 넘게 고생하였다고 한다.

점프를 하다 그만 발에 걸려 넘어졌는데, 머리로 바닥을 쳤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큰 일 날뻔한 사고로, 좋아하는 축구도 이제 못하게 됐다.

 

사진가로는 한정식, 전민조, 변홍섭씨가 오셨고,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사진가 구본상, 이경수, 김봉규씨와 함께 들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 날엔 막차로 서양화가 장경호, 김정대씨가 찾아 와 ‘화신포차’에서 소주 한 잔하였는데,

이 날은 이대훈, 노인자 내외가 늦게 와 염소 고기집에서 소주 한 잔 했다,
옆 자리에는 서양화가 김종숙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박인식, 조근숙씨 일행도 있었다.

 

술, 웬수같지만 난 버리지 못한다. 세상이 술 취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게 만드니까.

술, 담배, 섹스, 모두 마약처럼 중독성을 가졌지만, 버릴 수 없고 버리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그 것 다 버리면, 사는 재미가 뭘까?.... 

 

 

글:조문호/사진: 정영신, 조문호

 

 

 


 

 

 

 

 

 

 

 

 

 

 

 

 

 

 

 

 

 

 

 

 

 

 

 

 

 

 

 

 

 

 

 


'청량리588'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지난 5일에는 시인 강 민, 이행자씨, 서양화가 김영덕, 박불똥씨, 미술평론가 박용숙씨, 무이도 예술촌장 정중근씨,

'예당국악원' 조수빈원장, 오마이뉴스 박 건 시민기자, 전통염색인 이명선씨 등 많은 분들이 다녀갔지만,

다른 개인전 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진가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사느라 바쁘고, 일하느라 바빠,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우들을 요즘 이산가족 만나 듯 만난다.

그동안 사는 곳은 물론 전화번호까지 몰라 연락주지 못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모두들 찾아 온다.

지난 7일에는 대전에 사는 이석필씨와 그의 조카 이주영씨를 비롯하여  박옥수, 양재문, 신동필,

유성준, 최영규씨를 만났고, 사진평론하는 최건수씨는 많은 아마츄어 사진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지척에서 룩스갤러리를 인수하여 운영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늦은 시간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가  엄상빈, 이젬마, 김지연씨를 모시고 와 즐거운 주연을 가졌다


 

 

 

 

 

 

 

 

 

 

 

 

 

 

 

 

 

 

 

 

 


지난 3월5일 정오무렵, 시인 강 민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한정식식당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대표 장소임씨가 마련한 이 자리에는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씨, 소설가 김승환,

남정현, 김이연씨, 시인 이행자, 박정희, 정두리씨가 함께해 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정영신,조문호의 ‘장에 가자’ 전람회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전시가 한 달간이나 이어져 지루한 감은 있지만, 언론사 나팔 덕택에 관람객은 꾸준했다.

 

지인이나 재방문 하신 분으로는 서양화가 문영태, 정복수, 장경호, 이길원씨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조각가 이재욱씨, 도예가 김용문씨, 시인 강 민, 김신용, 조준영씨, 시인 김수영씨 미망인 김현경선생,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부부가 재방문 하셨고,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는 매일같이 출근하셨다.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지난 27일 원로시인 강 민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인사동 '여자만'에 나갔다.
강 민선생과 이행자시인이 먼저 와 계셨는데, 뒤 따라 공윤희씨가 왔고

좀 있으니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선생도 오셨다.

오랜만에 방동규선생의 걸쭉한 구라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관한 쉼 없는 구라도 그의 꾸준한 독서습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도 모임에 오기 전에 교보문교에 들려, 책 몇 권을 사오셨다.

사모님께 탄 용돈의 대부분이 책값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꾸준하게 운동하는 방법이 담긴 책을 사와 강 민선생께 드리는 등 자상한 모습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해 온 경북궁 지킴이는 해를 넘길 수 없는 처지라며, 시원섭섭해 하셨다.

술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소설가 김승환선생이 오셔서 '푸른별 이야기'로 옮겨 한 잔 더하고,

술 취해 돌아오는 길에서는 권양진, 김명성, 정해광씨를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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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부터 사흘간의 연 이은 외출로 하던 일의 차질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월요일인 지난 15일, 사진가 한정식선생과의 약속으로 아내와 함께 인사동 ‘여자만’에 갔다,
뜻밖에 그 곳에는 시인 강 민선생과 신경림선생 등 문인 몇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반가웠지만 함께 할 처지는 아니었는데, 오후4시 ‘유목민’에서 이명희씨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식사를 끝낸 후 한정식선생과 ‘장은선갤러리’에서 전시중인 이창남씨의 사진을 보러 갔다.
장시간 노출에 의한 바다 풍경이 마치 회화 같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요즘은 회화와 사진의 경계가 사라졌다.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가하면 그림 같은 사진을 찍는 사진가도 있는데,

단지 붓과 카메라라는 표현도구만 다를 뿐인 것이다.

시간이 되어 ‘유목민’으로 가는 길가에서 이명희씨를 만났다.
반가워하는 말괄량이 여배우의 수다는 여전했다.
술집골목으로 접어드니 강 민선생과 심우성선생께서 노상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술집 문 열기만 기다리고 계셨다.

강 민선생은 “문학의 집. 서울” 9월호에 게재된 “전쟁과 미로‘로 보여주셨는데,

옛 양평 집 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찍었다는 기념사진을 보며 그리움과 아쉬움을 같이 했다.

심우성선생께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화색이 만연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는 10월 초순경 광화문광장에서 이애주씨와 공연을 갖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이 생기면 신바람 나는 것이다.
그 느릿한 지팡이 굿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리고 조상의 가보로 물려받았다는 향통까지 가져와 보여주었는데,
심씨 가문의 기록들이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아내가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 하는 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망설임 없이 “난 여자를 제일 좋아 합니다”고 대답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솔직한 대답이었고, 노익장의 끼를 느낄 수 있는 말씀이셨다.

이 날은 송구스럽게도 심우성 선생께서 찻값에다 술값까지 다 내셨다.

 

 








인사동에 낭만과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고서화점들이 몰려있던 70년대 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과

친구인 강 민, 민 영, 채현국, 황명걸, 신경림씨 같은 문인들이 관철동에서 옮겨오며 인사동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들어서는 술 때문에 먼저 간 사진기자 김종구, 서양화가 강용대, 이존수, 김용태, 시인 최영해씨와,

미국으로 이민간 최정자시인, 늙은 총각 구중관, 공윤희, 시인 김신용, 박종수, 조해인, 박중식, 김명성, 소설가 배평모, 

서양화가 이청운, 박광호, 최울가, 이목일, 전강호, 김언경, 도예가 김용문, 신동여, 사진가 이수영을 비롯해 

노광래, 김민경, 장익화, 장 춘, 이해림씨 등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들었으나,

유명세로 몰려드는 인파와 그에 편승한 장삿꾼들의 얄팍한 상혼에 인사동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게 된 것이다.

 

고풍스럽던 예전의 가게들이 화장품점이나 싸구려 중국산 민예품에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잡동사니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돈에 의해 변하는 인심과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사동 골목골목을 돌다보면 가뭄에 콩 나듯 옛 기억을 소주잔에 부어 마시는

사라지기 직전에 있는 예술가들 몇몇은 남아 떠돈다.


하루라도 인사동에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는 ‘인사동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 민선생,

인사동에 사무실 얻어놓고 팔리지 않는 시집 만들며 노래나 부르는 음유시인 송상욱씨,

제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후 대폿집 문간방 빌려 사무실로 쓰는 민속학자 심우성씨,

불편한 몸이지만 빠지지 않고 인사동 작업실을  지키는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비롯해

극작가 신봉승, 임재경, 김동수, 이계익선생 등이 계신다.

 

그 외에도 사업장을 인사동에 둔 '아라아트' 김명성,'통인가게' 김완규, '옥션단'의 김영복, '유카리화랑' 노광래,

그리고 인사동에서 대폿집하는 '푸른별이야기' 최일순, '유목민' 전활철씨 처럼 생계와 연관되어 터 잡고 사는 분들도 있다.

 

예술로 빌어먹는 술꾼들이 외상술에 개똥철학 풀던 그런 대폿집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으나

그 시절의 낭만과 풍류를 못 잊어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을 배회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 만날 날만 기다리는 유목민들은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시인 조준영, 화가 장경호, 이청운, 연극배우 이명희,

뮤지션 김상현씨 같은 인사동파 예술가들이 있기에 모두들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편하게 죽치고 앉아 회포를 풀 장소도 마땅찮거니와,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

가끔 지인들이 전시회를 열거나 출판기념회라도 하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호사는 누리지만,

술자리 분위기가 예전 같잖다. 이 것 저 것 눈치보여 마음이 편치 않은데다, 신나게 놀 수가 없다.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어 부지런히 사진은 찍어왔지만, 이젠 기력마저 떨어진데다, 

그 동안 찍어 모아 둔 사진 정리할 일이 더 급하게 되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은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낭만과 풍류가 있었던 당시의 인사동 문화는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던 것이다.

이제 모두들 가버리거나, 떠나고 싶어도 마땅히 갈 곳마저 없어,

그 흐릿해 가는 추억만 까먹는 사람들이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래! 이런 케케묵은 감상들을 널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늙었다는 것 일게다.
결국 늙으면 죽는 것이겠지만, 저승에서 만나게 될 선생님들 뵐 면목이 없다.

 

지난 사진첩을 뒤적이며, 그 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본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 글 : 조문호

 

 

 

 

 

 

 

 

 

 

 

 

 

 

 

 

 

 

 

 

 

 

 

 

 

 

 

 

 

 

 

 

 

 

 

 

 

 

 

 

 

 

 

 


이 달부터 용돈이 불어나  한결 마음이 든든하다.
정부에서 기초노령연금을 20만원으로 올려줘 고맙기는하지만,
그러다 나라가 거덜나지 않을지 염려된다.

강 민선생과의 오찬약속에 인사동으로 나가며, 밥값은 내가내기로 작정했다.
약속장소인 포도나무집에는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김가배, 신동명선생 그리고 여행작가 정선모씨가 함께 계셨다.
오뎅탕과 복분자를 주문하였으나 음식도 나오기도 전에 신동명시인께서 계산해 버렸다.
급히 나오느라 은행에 들리지 못해 잠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는 신세를 빨리 면해야 할텐데...

뒤늦게 이행자시인이 나타났다.
이행자시인은 술이 거나해지면 대화가 과거형으로 돌아간다.
옛날에는 어떠했고, 누구와는 어떻게 지냈다는 등 별 재미없는 이야기 일색이지만,
가끔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동요를 불러주는 애교도 있다.
그 날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은, 이행자시인이 50여 년 동안 왼쪽 무릎 없이 버텨왔다고 한다.

멀쩡한 다리로도 걷기 힘들어 짜증 부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분위기를 바꾸려 느닷없는 이행자시인의 애정 편력을 물었는데, 그 답이 걸작이었다.
“연가는 많이 불렀지만 히트곡이 없다”는 것이다.

오후8시부터 시작되는 ‘넋전 아리랑’을 보고 가려니,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전시장도 가고 사진도 찍었으나 도무지 시간이 가지 않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통인가게 대표 김완규씨도 만났고,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만났다.

정말 일하는 것 보다 노는 게 더 힘들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 ‘유목민’으로 오라는 공윤희씨의 전화가 왔다.
'유목민'에는 공윤희, 전활철, 김왕기, 김명성, 신현수씨가 있었고, 뒤늦게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무세중, 무나미선생도 오셨다. 몸이 편치 않으니 술 맛도 없지만 즐겁지도 않았다.
하루종일 마신 술이라고는 ‘포도나무집’에서 마신 복분자2잔, ‘예당’의 막걸리2잔,
‘어머니가 구워주신 생선구이’에서 소주2잔 등, 몸 생각하느라 술을 찔끔찔끔 마셨으나,
결국 마지막 들린 ‘유목민’에서 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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