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에는 원로시인 강 민 선생과 소설가 김승환 선생께서 전시장을 찾아 주셨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페친이라 알고 오신 것 같았다.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추운 날씨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진보다 나를 만나러 오셨기에,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강민 선생님께서는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 하셨다.
찾아 간 곳은 길 건너편 골목에 숨은 ‘호미곳“이란 식당이었다.
‘문학의 집’ 가까이 있어 문인들이 자주 드나 더는 밥집이었는데,
십 오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선생님도 십 여 년 동안 단골이셨다는데, 싱싱한 해산물이 주 메뉴였다.
시원한 대구탕에다 소주까지 곁들였더니, 엊저녁에 다친 속이 다 풀렸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고나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책 판돈 삼 만원만 집어넣어 왔는데, 술값이 좀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언제 읽었는지, 강민 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삼 만원이라도 꺼냈으나, 막무가내셨다.
매번 신세만 져, 모처럼 밥 한 끼 대접하려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후, 인사동에서 사드릴 작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돌아가시는 두 선생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비가 내린 지난 토요일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동자동 쪽방사람들의 행렬이 인사동을 메웠다.

‘남인사마당’에 집결한 빈민들은 북인사 마당을 돌아 광화문으로 향했는데,

그들이 외치는 “박근혜 방 빼!”라는 함성이 인사동 거리에 울려퍼졌다.

빗길 나들이의 외국 관광객이 박수를 보내기도 했고, 지나치는 행인들은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시냇물이 강물 되듯, 광화문으로 몰려든 시민들의 물결은 광화문 일대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곳곳에 울려 퍼지는 퇴진 함성과 음악소리에 들떠 추위도 잊게 했다.

어두워지자 경찰이 진을 친 청운, 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행진했으나,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오히려 전경을 위로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전경들도 몸은 묶였으나 마음은 똑 같다는 듯 서로 일체감을 보였다.

밤늦은 시간, 인사동에서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 어디 있어? 광화문에 있으면, ‘여자만’으로 와”
빵조각으로 끼니는 메웠으나, 추위를 녹여줄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잽싸게 달려갔다.


‘여자만’에는 김명성씨와 김용국씨가 있었지만, 연락을 받았는지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고중록, 이강군, 김영배, 정영신, 신상철씨에 이어 인사동 어르신들도 오셨더라.

방배추로 통하는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과 강 민시인, 구중서, 전태수선생 등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모두들 시위현장에서 오신 것 같았다.

이미례씨가 차린 술상 옆에는 박기성씨와 김여옥씨도 있었지만, 긴 시간 퍼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급히 마신 탓에 취기도 올랐지만, 시위현장에 복귀하기 위해서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인사동 거리는 붐볐다. 오히려 종로 방면은 사람이 빠져나가 보행이 다소 수월했다.

광화문 군중대열에 합세하여 또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근혜 방 빼! 박근혜 방 빼!”



사진, 글 / 조문호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덕에 지난 18일은 코가 비틀어지게 마셨다.

 

광화문 가자미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종로 빈대떡집, 인사동 사동집’, ‘포도나무집’, ‘유목민’, ‘양귀비

옮겨가며 정오부터 늦은 밤까지 다섯 차례나 옮겨 다니며 마셨다.

그 뒤탈로 어제는 하루 종일 동자동 쪽방에 들어 누워 낑낑거려야 했다.

 

첫 술자리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이인휘, 박몽구, 이수경, 홍명진, 김창규, 안상학, 송경동, 김이하씨

문인들이 모인 가자미집에서 시작되었고, 화가들이 모인 빈대떡집에서는 이인철, 장경호, 류연복, 성효숙,

성기준씨 등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잠시 인사동 커피집에 계신다는 강민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그곳에는 화가 강녹사선생을 비롯한 원로문인들이 모여 계셨다.


세 번째 '포도나무집'에서 열린 문학과 행동출판기념회에선 특별한 분을 만났다.

목포에 사시는 소설가 천승세선생으로 천상병선생 장례식에서 뵌 후 처음인데, 흐르는 세월은 잡을 수 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강란숙, 윤정모, 이공희, 이철경, 박재용, 정소성, 최찬규, 유순예, 한복희, 정명숙, 전비담, 김자흔,

노광래, 임경일, 서정춘, 이승철, 김명지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사동집에는 장순향, 이수환, 현 린씨가 있었고, 유목민에서는 이인섭, 고광록, 최병용씨를

양귀비에는 배성일씨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술값을 누가 냈는지 모르겠다. 낼 돈은 없지만, 알고나 마셔야지...

 

사진, / 조문호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인들이 모인예술행동위원회는 지난 18일 오전10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 정권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문화예술인들을 통제·관리해온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되

이번 사태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우리가 맞닥뜨린 문화예술계 탄압과 같은 사건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문화예술인들 답게 풍자그림전과 양혜경씨의 깃발 넋전춤, 장순향씨의 춤, 성효숙씨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으로 목소리를 높혔다.

 

송경동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기자회견에 첫 발언에 나선 시인 백기완 통일연구소장은

블랙리스트란 우리말로 학살 예비자 명단이라며, 이 땅의 일만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을

학살 예비자 명단에 넣는다는 것은 유럽의 히틀러, 동양의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

한반도에서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때나 있을 법한 얘기라고 말했다.


화가 임옥상씨는 블랙리스트로 살다보니 굉장히 쪼잔해졌다며 내가 왜 전시를 못하느냐 따져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쪼잔한 일로,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만화가 박재동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저 년은 지 애비보다 더 독하다. 어떻게 저리 무식하고 뻔뻔한 인간을 뽑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87민주항쟁사진 사려는 역사박물관 손목을 잡았나?

아무리 지랄발광해도 30주년 되는 내년에는 책도 만들고 전시도 할 거다.

그마, 당장 내려 온나. “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김창규, 장경호, 이시백, 이인철, 류연복, 김이하, 배인석, 김해진,

이인휘, 임정의, 서정화, 박몽구, 이수경, 홍명진, 안상학, 정세학, 유순애, 성기준, 김사빈, 노순택, 이수환,

현 린, 원용진, 정우영, 손병휘, 맹봉학씨 등 많은 예술인들을 만났다.

 

사진,/ 조문호













































































































인사동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날 오가며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일찍부터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오셨습니다. 맛있는 점심 사 주겠다면서요.

아내와여자만에서 쌈밥 얻어먹고, 허리우드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전시장으로 돌아오니 부산에서 최혜영씨와 사진가 김지연, 시인 김생나씨가 오셨고,

사진가 양시영씨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넋전 춤을 추는 양혜경씨를 모시고 오셨습니다.

심선생께서는 신궁장여관이 리모델링한다며 숙소를 옮긴다는 말씀을 들었으나,

어디로 옮겼는지 궁금했는데, ‘종로오피스텔로 옮겼다네요.












반가운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래층의 공창호씨가 장구경 하러왔고, 좀 있으니, 가수 최백호씨도 왔습니다.

잇따라 강 민선생께서 시인 천성우, 이혜선, 김정남선생과 함께 다시 오셨네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강민선생의 옛 친구 박병선선생도 지나치다 올라 오셨는데,

구수한 냄새에 끌려 왔더니, 옛 친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끝 날 시간이 가까워 오니, 곤충사진가 이수영씨가 나타났습니다.

유민목에 장경호씨가 있다는 귀뜸을 전했더니, 거기서 기다리겠다며 먼저 일어났습니다.

뒤따라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내외가 오셔서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로 소주 한 잔 했습니다.

소주 딱 두병만 까고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이수영, 장경호, 공윤희씨가 마시고 있더군요.

막차시간 놓치지 않으려는 이수영씨 따라 일어남으로 하루를 잘 넘겼답니다.









 

그 이틑 날은 미디어아티스트인 이상만회장께서 일찍부터 오셨습니다,

연이어 연극연출가 기국서, 울산의 기와장 오세필, 건축가 임태종씨가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이 날은 장흥에서 이대흠시인과 성은정내외 분이 오셔서,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대흠시인은 아내의 장날사진집 서문을 쓴 인연이라 더욱 기다렸는데,

첫인상처럼 무척 다정다감한 분이더군요. 시간 만들어 장흥에도 꼭 한번 들릴 작정입니다.

















전날 밤, 술이 취한 상태에서 밤을 꼬빡 새웠는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 구석에 누워 잠들어 버렸는데, 이대훈, 노인자 내외분이 오셔서 자는 모습을 찍어,

칠순의 아기천사라는 제목까지 달아 카톡으로 날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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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문화의 날이라 밤 열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으나, 술친구 채근으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전 날 페북에 공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밤 여덟시에 문을 닫는 실수를 그만 저질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사진가 박영환씨가 뒤늦게 다녀 간 흔적이 방명록에 적혀 있더군요.

확인했을 때는 이미 때 늦은 후회였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에 안절부절 하였으나, 결국 젊은 후배에게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그 날은 유목민에서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와 거나하게 마셨습니다.

옆 자리에는 임태종씨가 친구들과 있었고, 김명성, 이상훈씨도 있었답니다.

좀 있으니 오세필씨가 국민은행에 있는 노처녀 지점장 최명숙씨와 김용식 부장 등 여성분들과 나타났습니다.














일행이 있어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인사동 곳곳에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버스킹에 나서자며 길모퉁이 자리잡아 퍼질러 앉았습니다.

난 모자만 내려놓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으나, 이대훈씨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우아한 노래에 한참 빠졌는데, 눈을 뜨보니, 모자에 천원짜리 지폐가 한 장 담겨있더군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 놈이 먹는 꼴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돌아왔답니다.

하하하~

 

사진 :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조준영시인과의 약속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강민 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을 마련한 것이다.
정오 무렵, ‘포도나무집’에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이행자, 조준영, 김상현씨가 나와 있었다.

뒤늦게 장경호씨도 나왔으나, 주문한 음식들이 형편없었다.
주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인사동에 갈 만한 음식점이 별로 없다.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는 것이다.






대충 허기를 메우고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민선생의 순례 코스이기도 하지만, 그 곳은 땅콩이 무제한 제공되는데다, 한적해서 좋다.

좀 있으니, 신경림 선생도 오셨으나, 자리가 편하지 않았던지 슬그머니 나가셨다.
강민 선생도 몸이 편치 않아,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셨다.







그 때부터 김상현씨의 노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신곡이 많았으나, 그의 음색에 잘 맞는 곡이었다.









그 무렵, '경기도미술관장' 지낸 최효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모처럼의 인사동 나들이라 근황이 궁금했는데,
어디 갔다 오는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좋은 술이 있다며 배낭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주었는데, 감로주였다.

알콜 도수가 40도나 되어 그 자리에서 비우기는 좀 그랬다.
맥주로 이런 저런 소식들을 나누었으나,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옮겼더니,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준영씨는 신학철선생 계신 서울대병원으로 떠나고,
장경호씨는 전시 중인 ‘인디프레스’로 떠나며, 나중에 ‘유목민’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마침, 다음 달 12일까지 연장 전시된 김억의 목판화전이 생각났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과 정복수화백이 있었다.
좋은 작품에다, 반가운 분을 만났으니, 어찌 술병이 고개를 쳐들지 않겠는가?
감노주를 꺼내 마셨는데, 전주가 있어 그런지 금방 올랐다.
전시장에서 내려왔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가 없었다.













저녁 약속으로 다시 나와야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야했다.
몸도 피곤하지만, 아침일찍 일터에 나가던 아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다.
집에 들어와 숨도 고르기도 전에, 빨리 나오라는 전화가 이어졌다.






‘유목민’으로 나갔더니, 일터에서 곧장 온 아내도 와 있었고,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편집국장과 임동현기자도 와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서 올라 온 변형주씨와 조준영, 장경호, 공윤희씨 등 여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은영씨는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이라며 신문을 보여 주었다.

술 취한 분들이 신문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 같으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돈 안 되는 문화예술계 소식만 다루는 유일한 신문이 아니던가?

잘 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해야지,

신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만든 신문에 시비를 건단 말인가?

난, 어렵게 운영되는 신문을 아끼는 마음에서 원고료도 없이 글을 보내주고 있다.











옆 자리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장성한 아들을 데려 왔는데, 음악을 공부한다더라.
기타를 연주하였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위키리의 ‘눈물을 감추고’란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얼마 전, 부친 상을 당한 이은영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제일 좋아하던 노래라며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술이 취해,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우고, 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 단양에 사는 설치미술가 김언경씨로 부터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작년 가을, 그의 딸 자연이 결혼식에서 보고 첫 만남이었다. 숙취에 끙끙댔지만, 서둘러 인사동으로 나갔다.

약속장소인 ‘툇마루’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그 맞은 편 ‘사람과 나무’로 옮겼더라.

들려보니, 곤충사진가 이수영씨와 함께 있었는데, 카메라가방을 두 개나 들고 왔었다.
카메라가 괜찮은지 봐 달라기에 열아봤는데, 오래된 필름 카메라였다.

저급한 러시아산으로 마치 기관총 같은 손잡이도 달려있고, 큰 망원렌즈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모터드라이브를 비롯하여 다양한 렌즈들이 들어 있었지만, 실용성 없는 카메라였다.

폼 잡는 것을 좋아하는 아마추어가 사용한 듯한데, 지금으로서는 고철에 불과할 뿐이다.

작년 무렵, 단양에 차린 ‘낭만’이란 카페의 장식품으로 활용하라는 조언을 한 후 자리를 옮겼다.

이른 시간이라 단골술집들이 문을 열지 않아 ‘포도나무집’에 퍼져 않았다.
이수영씨는 곤충사진집들이 잘 팔려 나간다며 신바람 났더라.

주로 5-8세를 겨냥한 책들인데, 이 불황에 8만부나 팔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책 안보는 세상이지만, 자식한테는 아끼지 않으니, 이해가 되었다.

통인동에서 전시하는 장경호씨도 합류했다. 무더운 날, 낮술에 취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창 넘어로 지나가는 강민 선생의 모습이 비쳐 급히 모셔왔는데, ‘예당’에 이행자 시인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인사동에 자주 나오시지만, 만날 사람이 별로 없다는 노시인의 한숨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짝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올 해로 마무리하고, 다른 곳에서 사람을 찾을 생각이다.

사진가 마동욱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거리로 마중 갔더니, 엄상빈씨와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 무렵 ‘브레송’에서 있을 문진우사진전 개막식 보러 일찍부터 나온 듯 했다.

낮 술을 권할 수가 없으니, 사이다로 목이라도 축여야 했다.

한물 간 인사동이지만 이래저래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 하루였다.

한 자리에서 너무 오래 죽치는 것 같아 전활철씨에게 전화했다.

빨리 문 열 것을 재촉하고는, ‘유목민’으로 옮겨 초장부터 돌아가며 노래 불렀다.

석파 김언경의 가곡 십팔번들이 우아하게 울려 퍼졌다.

유진오씨 까지 출근했지만, 더 이상 머물 시간이 없었다. 

충무로 전시장으로 떠나기 전에 나도 노래 한 곡 불렀다.

“목이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러야 옳으냐?”

사진, 글 / 조문호











































작년, '장에 가자'전에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고 김동수선생



지난 6월1일, 예정에 없던 인사동 오찬모임에 나갔다.
오래 전부터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을 못 지켜, 늘 마음에 걸려 왔던 터다.
마침 오후6시에 박진호씨의 사진전 오프닝도 있어, 겸사겸사 전화를 드렸더니,

오후1시쯤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만나잔다.

전 날 밤 애(愛)편내 우울증 풀어 주려 대작하다, 너무 과하게 마셨다.
술김에 광기넘친 사랑 놀음까지 했으나 잠이 안 왔다.
페북에 들어가 씰데 없는 댓글 질로 날 밤을 깠으니, 몸 조시는 보나마나다.

정오 무렵, 마즙 한 잔 마시고 ‘포도나무집’으로 나갔더니,
강민선생 뿐 아니라, 소설가 김승환, 화가 강녹사, 시인 장봉숙선생도 함께 계셨다.
아마 장봉숙선생께서 오찬자리를 마련하신 모양인데, 완전 불청객이었다.
모처럼 친구 분끼리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데, 꾸어다 놓은 보리쌀 자루처럼 지키고 있었으니,
솔직히 밥맛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속은 쓰리지만, 된장국에 밥 말아먹고, ‘예당’에서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강민 선생께서 죽어가는 친구들이 많다는 한탄이 나왔다.
처음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봉승선생 말씀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김동수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 것도 제법 지났단다.
정말 믿기기 않는 소식이었다. 어찌 그 걸 몰랐는지...

김동수선생은 오래전 ‘민속박물관장’까지 지낸 로맨티스트다.
내가 인사동에 사무실 두고 있을 땐, 선생께선 낙원동에 사무실을 두고 계셨다.
인사동에서 만나기만 하면, 같이 술 한 잔하자는 말씀을 하셨으나, 미룬 적이 더 많았다.
친구들과는 매일같이 퍼 마시며, 자주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김동수선생을 마지막 본 것은 작년 ‘아라아트’에서 가진 '장에 가자'전 에서다.
오프닝 때도 오시고, 그 다음 날도 오셨는데, 그게 마지막사진이 될 줄이야...
집에 돌아가시며, 예전에 전시한 ‘인사동 사람들’ 사진 값을 못 주어 미안하니,
술 한 잔 거나하게 사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이제 저승 가서 마시게 되었구나.
가는 길 순서가 없으니, 강 민 선생보다 내가 먼저 갈 지 어떻게 알겠나?
평소 생각대로 재미있게 살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강민선생께서 몸이 불편하셨지만, ‘푸른별 이야기’에 들려 막걸리 한 잔 더했다.
아무 얘기 없이 술만 홀짝거리며, 김동수선생을 추억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근간에 선생님 묘소 찾아뵙고, 꼭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2007년 2월 인사동 '공화랑'에서 전시한 '인사동 사람들'의 김동수선생


오랜만에 만난 인사동 사람들, 좌로부터 강녹사, 김승환, 장봉숙, 강 민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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