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보라매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연영철씨 병문안을 갔다.
쪽방에 살던 그가 지난 달 3층 계단에서 넘어져 목뼈가 부러지며 꼼짝을 못하게 된 것이다.

몸은 마비되었으나, 의식은 살아있어 넘어진 경위를 묻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시인 강민선생으로 부터 ‘4,3 광화문 추념식’에 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깜박 잊어버린 일이라, 서둘러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종로1가에서 내려 걷다 보니, 광화문 입구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마치 조형물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들은 '4.3, 대한민국을 외치다' 퍼포먼스를 펼치는 403명의 일원이었다.





‘4.3범국민위’의 기획과 주관으로 진행되는 이 퍼포먼스는 영화감독 양윤호, 연극 연출가 류성,

한예종 무용원 교수 김용걸씨 등 세 사람이 공동으로 연출한 것으로 배우와 일반인들이 어울린 대규모 행위예술이였다.






"출연자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 눈빛과 소리를 통해 제주 4.3의 존재를 드러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과 교류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는데,

마치 4,3학살의 원혼들이 깨어 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행위 예술이지만 대부분의 출연자 눈가에는 눈물 자욱이 선명했다.

그 억울한 원혼들을 생각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날 퍼포먼스는 광화문 일대에 흩어져 각각 퍼포먼스를 펼치다 광장으로 모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짓으로만 연기하던 출연자들은 울분을 토하는 듯 울음소리를 내기도 해 70년 전을 회상하게 했다.






광장으로 모인 출연자들은 하나둘씩 앞으로 나가 겉옷을 벗으며 ‘통일 정부수립’, ‘완전한 자주독립’ 등이 적힌

깃발을 들고 풍물패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여러 대형으로 움직였다.

세종대왕상 뒤로 다시 모여 희생자들을 기리는 분향소에서 헌화하며 광화문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실상 제주4.3은 미국 주도의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항쟁이었지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깝다.

내가 태어난 해 발단되어 초등학교 들어 갈 무렵 끝났지만, 은폐하여 잘 몰랐던 참변이기도 한데,

뒤늦게 듣게 된 ‘빨갱이의 반란’이란 말에 주눅 들어 쉬쉬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학살의 주범은 바로 미국으로, 이제라도 감추어지고 왜곡된 현실이 제 자리를 찾아 조금의 위안은 되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어, 부디 원혼들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






광화문광장의 4,3 행위예술 현장에서 연락주신 강민 시인을 비롯하여 무용가 장순향 교수,

사진가 김봉규, 정지현, 윤성광씨 등 반가운 분들도 여럿 만났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1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다.

요즘 몸이 편치 않아 꼼짝도 싫지만, 안 나갈 수 없었다.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있었던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시상식 날,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이행자, 김승환, 방동규 선생등 원로 문인들께서 축하하러 오셨더라.

창피하여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 노구를 끌고 시상식장까지 찾아 오신 것이다.


 

그러나 주관처가 마련한 수상자들의 자리가 따로 있어,

점심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식사 대접 하는 날을 셋째 수요일로 잡은 것이다.


    

이제 인사동에도 자주 나오기가 힘들어, 나온김에 많은 분을 만나고 싶었으나 욕심이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그 빈 시간을 혼자 보낼 일도 예사 일이 아닌지라,

정영신씨 노트북까지 빌려나왔다.


 

정오 무렵,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 민, 방동규, 김승환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옆자리에는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도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는데다, 날씨마저 받쳐 주었다.

춘분인데도 인사동에 진눈깨비가 내린 것이다.



아직 오시지 않은 분이 계셨지만, 술 없이 앉을 여유가 없었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첫잔의 술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좀 있으니, 이행자, 장봉숙선생께서 온 몸에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들어오셨다.

그런데, 왜 내 눈에는 할머니로 보이지 않고 소녀로 보였을까?

행여 이 말도 미투에 걸리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백기완, 황석영 씨와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 선생께서 첫 포문을 열었다.

따님 방그레양이 중국 대학교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라라면 확성기 들고 인사동거리에서 소리칠 기분좋은 뉴스였다.

첫딸인 방그레양은 그림을 잘 그리지만, 둘째 딸 방시레는 배추선생처럼 운동을 잘 했다.

방그레, 방시레란 예쁜 이름처럼,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자식들 재능까지 알아보신 것 같았다.

그림 잘 그리는 그레, 운동 잘하는 시레로 지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배추선생의 재밋는 구라에 단번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 앞에서 헛소리도 지껄이며, 미친 망둥이처럼 부산을 떨어댔다.

인사동 눈 오는 풍경도 그냥은 찍기 싫었다.

옆자리에서 마시던 덕원스님과 최명철씨를 밖으로 끌어내어 사정없이 박아버렸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다음 셋째 수요일은 자기가 밥을 사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얻어 먹은적도 있으나, 다른 선생님보다 형편이 나으니 고맙게 받아들였다.

다음 달 역시 셋째 수요일로 잡는 것은,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나가는 날로 못 박기 위해서다.

약속하여 만나는 것보다, 우연히 만나는 기쁨이 더 반갑다.


 

'나주곰탕'집에서 나와서는 장봉숙선생께서 커피를 쏘셨고,

강민선생께서는 정승재씨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로 안내해 주셨다.

난 개인전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정승재씨는 행정법률과 교수지만, 소설가로 더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평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그리기 시작한

질주하는 하나된 열정이란 주제의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스포츠 그림인데,

선수나 작가의 강인한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는 27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나왔으나, 난 갈 곳이 없었다.

그 때까지 유목민 문이 열리지 않아, 옆집 커피숍에서 노트북으로 페북 질이나 했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인사동을 여러 차례 돌아다녔다.



 

이날은 급히 나오느라, 페북에 알리지도 못했지만,

눈이 내린 후 날씨가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술도 못 마시는 화가 이종승씨만 서둘러 돌아가고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유목민에서 머뭇거리다 그냥 동자동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개인주의로 빠지는 야박한 세상이지만,

인사동을 드나드는 정든 예술가마저 그러지들 맙시다.

평소에는 관광객에게 인사동을 뺏기지만,

그 날만이라도 곳곳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는 날 만듭시다.

셋째 수요일 따뜻한 봄 날, 인사동서 신명 한 번 푸입시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모처럼 나오신다기에, 신년 인사드리려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는 요즘, 유일하게 인사동을 챙기는 분이 강민선생이시다.
용인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오시는
선생의 인사동에 대한 애착에 그져 고개가 숙여 질뿐이다.
삭막하게 변해가는 인사동을 보면 속만 답답하실 텐데 말이다.






점차 친구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엔 소설가 이호철선생과 극작가 신봉승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작년에는 심우성선생마저 공주 요양병원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살아 남은 분이라도 자주 만나고 싶어하시나
다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잘 나오지 않는단다.






년초부터 감기에 걸려 이틀 동안 누워지내다 3일에서야 간신히 추수릴 수가 있었다.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약속장소인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김승환, 장봉숙선생이 와 계셨다.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다. 페북에서야 가끔 인사 드리지만, 뵌 지가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선생께선 낮에만 나오시고, 난 올빼미처럼 밤에 출몰하니 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다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삼아 조촐한 신년하례식을 가졌는데,
강민선생은 방동규선생께 미처 연락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셨다.
방동규선생이 계셔야 호탕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모처럼 식사 한 끼 대접하려 했으나 장봉숙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새해부터 어른들께 신세지는 일을 없애려 했으나, 첫날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 마시러 ‘인사동 사람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인사동을 사랑하는 옛 사람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말이다.


붙잡아도 머물어 주지 않는 세월을 원망해야 할지,
갈수록 야박해지는 세상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 둘 변하고 사라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 선생님들 앞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감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술이 오르니 갑자기 잠이 몰려온 것이다.

눈을 떠보니 정영신씨 혼자 남아 있었는데, 선생께서 일어나시면 깨워야 하지 않는가?

죄 없는 정영신씨만 원망하고 있으니, 전활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민선생께서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유목민잠시 들렸다고 했다.

그 곳에서 강민선생은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김승환, 장봉숙선생은 떠나시고 없었다.

그동안 말씀이 없어 잘 몰랐는데, 강민선생께서 오래전 넘어져 다친 팔목이 아직 불편하다고 했다.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셔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빨리 완쾌하셔야 할텐데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민화 그리는 장춘씨가 '유목민'에 나타난 것이다. 

홍두깨처럼 나타났다 증발해 버리는 그의 행적이 늘 궁금했기에,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웠다.

오죽하면 북한의 지령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을까?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장춘씨와 정영신씨를 '유목민'에 남겨두고, 강민선생 따라 일어서야 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종민씨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밑에 잃어버린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찍힌 사진파일이 더 필요했고,

그 사진파일보다는 그와의 인간적 신의를 되돌리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더 이상 절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20년 전만 해도 인사동은 전통문화와 예술의 거리였다. 문화예술인들이 도심 속의 사랑방인 양 모여들면서 문예의 향기가 풍기는 격조 높은 거리로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은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 별다른 약속 없이 인사동에 와서 길 위아래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노라면 촉촉한 고향의 향기가 있었다고 했다.


긴 연휴 기간 세상사 기삿거리가 마땅치 않았던지 텔레비전 뉴스에 모처럼 문화계 소식이 많았다. 그중 한 방송에서는 ‘터줏대감들 사라지는 인사동 골목’이라는 제목하에 전통문화가 숨쉬던 인사동만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밀착카메라의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20년 전만 해도 인사동은 고서점, 화랑, 고미술상, 민예품점, 표구점, 필방, 한지, 공예품 가게들로 이루어진 전통문화와 예술의 거리였다.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도심 속의 사랑방인 양 모여들면서 문예의 향기가 풍기는 격조 높은 거리로 되었다. 소설가 김주영은 외롭고 지치고 힘들 때 별다른 약속 없이 인사동에 와서 길 위아래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노라면 촉촉한 고향의 향기가 있었다고 했다. 고은 시인은 그런 인사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안국동 로터리에서 남쪽 광장까지 1킬로미터 남짓 되는 인사동길은 본래 작은 개천이었다. 이 길이 가볍게 휘어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엔 개천 양쪽으로 충훈부, 도화서 등 여러 관아와 양반들의 저택이 퍼져 있었다.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개화기 박영효의 집이 이 동네에 있었다. 400년 된 회화나무, 민가다헌, 경인미술관의 한옥이 그 시절의 자취이다.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인쇄소, 출판사,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면서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태화관 터, 해정병원 등이 그 옛날을 말해준다.


그러다 이 개천이 복개되면서 새로 생긴 인사동길 좌우로는 상가가 형성되었다. 먼저 종로, 충무로에 있던 고서점들이 들어섰다. 한때 간송 전형필이 인수했던 ‘한남서림’과 이겸노의 ‘통문관’이 그 상징이다. 그 시절엔 일석 이희승, 동빈 김상기 같은 학자들이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6·25동란 이후에는 주인 잃은 고서, 고가구, 고미술품들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1960년대까지는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의 거리로 되었다. 통인가게, 상문당 표구, 구하산방 그리고 수도약국이 그 시절을 말해준다.


70년대로 들어서면 현대화랑을 필두로 상업화랑이 등장했다. 미술 붐이 일면서 동산방, 선화랑, 가나화랑, 노화랑, 가람화랑 등이 속속 문을 열었다. 운보 김기창의 화실, 일중 김충현과 여초 김응현의 서실도 여기에 있었다. 고옥당, 금당, 고정실 등 고미술상도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절 인사동길에선 도상봉, 장욱진, 소정 변관식 같은 노화가들이 거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인사동이 명실공히 문화예술인의 거리로 되면서 샛길 안쪽의 한옥에는 전통의 분위기가 있는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문인들은 선천집, 예술인은 사천집, 최순우 관장 팀은 영희네집, 언론인은 경향식당이 단골이었다. 가난한 화가들이 잘 가는 사동곰탕, 부산식당도 이때 들어섰다. 펜클럽의 문인들, 어문학회의 학자들, 미술단체의 화가들은 월례, 연례 모임을 인사동 식당에서 갖곤 했다.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왔지만 정치인은 밥만 먹고 떠났을 뿐 이 거리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 그 대신 골목 안쪽에 우정, 다미, 가회 등 많은 음식점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로 들어서면 오랜 불경기로 상업화랑은 위축되었지만 전시장을 대여해준 관훈미술관, 민중미술가들의 그림마당 민 등 대안공간이 생기면서 인사동은 젊은 미술인들의 차지로 되었다. 그때부터 매주 수요일은 전시회 오픈이 있는 축제의 요일로 되었다.


80년대 후반 민예총, 민미협이 인사동에 들어서고 <한겨레신문> 창간 사무실이 안국빌딩에 자리 잡으면서 민족예술인, 해직기자, 해직교수 등 시대가 낳은 보헤미안들이 인사동에서 한데 어울렸다. 리영희, 임재경, 성유보 등이 그 면면이다. 여기에다 명동에서 노닐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평론가 구중서, 시인 신경림 등 문인들이 대거 인사동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명동이 번화가로 변하자 관철동 뒷골목으로 옮겨갔다가 거기마저 젊은이들 차지로 되자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것이었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차린 ‘귀천’, ‘수희재’ 같은 전통찻집이 그 시절에 태어났다.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의 문화예술 분위기는 강력한 흡입력을 갖고 젊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 화가 연극인 사진작가 언론인들을 끌어들였다. ‘실비집’ ‘평화만들기’ ‘소설’ 같은 술집은 언제나 이들로 만원이었고 항시 예술 담론이 전개되었다. 누구의 말대로 인사동은 작가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뇌관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술집 ‘소설’엔 손님과 주인이 따로 없었고 ‘평화만들기’엔 평화가 없었다. 그때가 사실상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그런 인사동이 아이러니하게도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전통문화의 거리에 관이 개입하여 꽹과리 치고 떡판을 두드리는 축제를 벌이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인사동 거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처음으로 일요일을 차 없는 거리로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루 10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인사동길의 주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뀌게 되자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값싼 기념품 가게와 호떡집, 실타래 엿, 쫀득이 아이스크림 집이 길가를 차지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참이었다. 이에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집달리의 퇴거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참다못한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건축가 최문규에게 의뢰하여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치 인사동길을 4층 건물 안에 재현한 듯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1년부터 인사동은 365일 차 없는 거리로 실시되면서 완전히 젊은이와 관광객의 거리로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망했다고 한탄을 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일어날 세대교체였다. 오히려 나는 이들이 신촌, 홍대 앞,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유흥의 거리가 아니라 그 옛날의 예향(藝香)과 문기(文氣)를 배우고자 인사동에 나오고 있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변함없이 인사동을 사랑하며 드나든다. 골목골목엔 아직도 내가 잘 가는 음식점, 찻집이 있고, 보고 싶은 전시회, 갖고 싶은 민예품, 간혹은 반가운 얼굴도 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역시 아쉽고 그립기만 한 법. 연휴 끝 여지없이 인사동에 나갔다가 ‘흐린 세상 건너기’에서 아무도 못 만나고 수정과 한잔 마신 뒤 샛길로 돌아나오자니 노시인 강민이 읊은 황혼의 인사동 노래가 가슴 저미게 다가온다.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겨레신문 / 스크랩]



지난 5일 오전 무렵, 강 민선생으로 부터 인사동에서 점심이나 먹자는 연락이 왔다.
전 날 정영신씨와 밤늦도록 퍼마신 생일 술에 빌빌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지만, 요즘 식욕마저 없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냉수만 들이 키고 세수도 못한 채 나갔으나 선생님께서 먼저 나와 계셨다.

툇마루 건물 1층의 ‘나주곰탕’집에 돌아 앉아 계셨는데, 그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계절 탓일까? 아니면 친구들이 떠난 빈자리 때문일까?






선생님께 인사드렸더니 대뜸 “요즘 인사동에 나오면 아무도 못 만나.
‘유목민’까지 문 닫혀 갈 곳도 없어”라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렇다. 요즘은 미리 약속 하지 않고 나오면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저녁시간이라면 단골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는 분이라도 있지만,
낮 시간에는 갈 때도 마땅찮아 관광객처럼 거리만 기웃거려야 한다.






인사동에서 자주 만났던 심우성 선생은 요즘 ‘공주요양원’에 가 계시고,
방동규선생은 바쁜 일로 뵐 수 없고, 오늘은 김승환선생 마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창백한 선생님의 얼굴빛에서 외로움이 묻어났다.
식욕도 잃고 몸이 편치 않은 것도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주변머리가 없어 선생님께 위안조차 드릴 수 없었다.






쏙이 쓰렸지만, 밥보다는 술이 더 땡겼다.
빈 속에 들어가는 소주의 짜릿한 쾌감을 한 두차례 느꼈더니, 바로 어제 밤으로 돌아갔다.
그때사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타나 주절주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머쓱한 술자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나이가 들면 유식한 말보다는 실없는 이야기들이 훨씬 듣기 편하다.






마침 밥집 앞을 지나가던 화가 박성남씨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수송동의 ’고도‘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도 주었다.
아버지 박수근화백에 이어 아들까지 화가 길을 들어 서,
이제 삼대 째 화업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인데, 그의 전시 작품이 궁금했다.
박화백은 동갑내기지만,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멋쟁인데,
몇 년 사이 많이 늙어 보였다.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혼자 낮술에 취해 추접을 떨어 댔는데,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철들기 어려울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밀려오는 외로움에 지랄발광을 떨지만, 공허할 뿐이다.
그 사이 강민 선생님께서 밥값을 먼저 계산해 버렸다.
모처럼 밥 한끼 대접하려고 단단히 마음 먹었는데, 그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인사동 사람들’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것 같았다.
다방커피 한 잔으로 먼저 일어나야 했는데, 선생님께 인사라도 제대로 드렸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던 지하철에서 맞은 마광수씨의 자살 소식에 술이 뻔쩍 깼다.
그건 마광수씨 개인의 죽음에 앞서 사회적 소외와 인간적 외로움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죽음이었고,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 나가는 게 습관이 되어 토요일만 되면 엉덩이가 들썩인다.

지난 토요일은 집회가 없었지만 나갈 채비를 했는데, 마침 ’눈빛출판사‘의 이규상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류가헌‘ 전시장에서 만나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다.

사실 ’류가헌‘이 옮긴지가 제법 되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더구나 나도 출품한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첫 날 일이 있어 못 들리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길눈이 어두워 물어물어 찾아 갔는데, 가보니 촛불집회 때마다 들락거린 청와대 가는 청운동이었다.

전시장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이규상, 이규철씨가 나와 계셨고, 뒤이어 석재현, 박진영, 하지권씨도 만났다.

다들 반가웠으나 황규태선생을 뵈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몇 일전까지 ‘류가헌’에서 열었던 황선생님 개인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좋은 전시를 못 본 건 내 손해인데, 스스로의 게으름을 자책해야 했다.






2관에서는 강제훈씨를 비롯한 13명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찍은 ’촛불의 구술사‘전이 열리고 있었고,

1관에서는 사진가 이규철씨가 컬렉션한 ‘我 之 我’전이 열리고 있었다.

매년 한 장씩 20년 동안 모은 작품 20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진가가 매년 사진작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진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기에 허턴 작품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잘 알려진 작품도 있었는데, 사진보는 안목이 덜한 분은 믿고 살만한 작품들이었다.

전시된 작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작가와 연결시켜 주는데, 부담 없는 가격이라 제법 팔렸다고 한다.

또한 사진집을 구입한 분께는 작품사진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고 있었다.

사진 컬렉션에 다시 한 번 관심 갖게 하는 좋은 사진나눔운동이었다.






이규상, 황규태 선생과 전시장 옆에 있는 떡 만두국 집에서 식사를 하고 ‘광화문광장’까지 걸어왔는데,

경복궁 앞길에는 유난히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았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은 여느 때와 달리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순신동상 부근에는 ‘사회를 위한 대학생공동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인사동터줏대감 강 민시인과 방동규선생이 계셨고 옆에는 미모의 소설가 김단하씨의 모습도 보였다.

술 한 잔 하자는 강 민선생의 말씀에 간재미집으로 안내했다.

방배추선생의 구수한 옛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방동규선생 사모님께서 광장에 기다린다는 전갈이 받고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사드저지 및 세월호 진상규명, 적폐청산의 날‘이란 퇴진행동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사진가 고 헌씨의 모습도 보였고, 무대에는 장순향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문제는 눈앞에 닥친 대선에서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는 분은 이재명, 심상정 후보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드철회는 물론 모든 진상규명과 적폐가 청산될 때까지 촛불을 꺼서는 안 된다.

토요일마다 ‘광화문광장’을 문화예술난장으로 만들어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진기지로 만들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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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4일 열린 7차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내세운 슬로건은 ‘새로운 나라로!’였다.

새로운 나라가 되기에는 세월이 걸릴 것 같지만, 일단 박근혜 부터 구속시키고 황교안을 사퇴시키자.

광장갤러리에 설치된 걸개그림은 판화가 김준권씨의 ‘청죽’을 비롯하여 30년 전에 그린 김진하씨의 작품도 먼지 털며 나왔고,

정비파씨의 독수리 무리도 경주에서 날아왔다. 박홍규, 김봉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이철수, 홍진숙,

홍선웅씨 등 대가들의 그림이 줄줄이 내 걸렸다. 이젠 알미늄 틀도 만들어져, 다들 반듯하게 걸렸으나,

김진하씨의 작품만 바람난 여인 치맛자락같이 펄럭였다. 오히려 흔들리는 형상에 더 눈길이 끌리더라.


오는 정월대보름 날 열릴 8차 프로젝트에서는 ‘광장갤러리’를 시와 사진으로 꾸밀 예정이다. 

서예퍼포먼스와 함께 춤판도 벌일 예정이나 매주 예술행동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

세화를 찍고, 판화를 파는 등 다방면으로 후원금을 모아 왔으나,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가난한 작가들의 예술저항이라 십시일반 나누는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한 실정이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 세화로 꾸민 판화전은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판화가 류연복씨는 세화 찍느라 바빴고, 옆에서는 김가영씨가 열심히 도왔다.

이날은 반가운 분들도 연이어 등장하셨다.

원로 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시골서 상경한 홍석화씨, 맹문재교수, 양문규시인, 장영도이사도 함께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왔으나 ‘청진동해장국’으로 따라갔다. 신축건물이라 옛 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밥값만 비싸졌더라.

맹문재씨가 카드로 결제했지만, 만원씩이나 하는 해장국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비웠더니, ‘광화문 미술행동’의 서예퍼포먼스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여태명씨의 서예퍼포먼스는 끝 난 뒤였다.

여태명씨는 ‘탄핵대길. 안민다경’을 써 놓았고, 박수훈씨는 탄핵농자지대본’을 쓰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 위에 시민들이 쓰는 자유발언대 참여도 이어졌다.

이날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송경동, 김남선, 김진하, 깁봉준, 정덕수, 김 억, 김 구, 양혜경, 정영신, 장순향,

김영배, 이광군, 장진영, 이윤엽, 이재민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일을 도왔고, 신학철, 신상철, 박 철, 권 홍, 최석태,

하형우, 김보영씨 모녀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신학철선생께서 한 턱 쏘았는데,

술 한 잔에 맛이 가 꾸벅꾸벅 졸다 돌아와야 했다. 아직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오는 정월대보름날 열릴 15차 촛불집회의 ‘광화문예술행동‘을 기대하시라.
김준권씨는 충북 옥천에서 행진에 사용할 깃발용과, 광화문 달집용 대나무를 벌채하는 사진이 페북에 올라왔다.

정월대보름의 신명난 굿판이 기다려지는 하루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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