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6일부터 보름 가까이 더러 누워 낑낑거렸다.
창 너머로 유혹하는 봄바람도,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도 못들은 체, 매일같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처음엔 정선에서 몰고 온 감기몸살로만 알았으나, 숨을 쉴 수 없는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검사 해 보더니, 폐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언어장애는 있었으나, 담배 탓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병원에 가보라는 지인들의 충고를 묵살하였더니, 기어이 올 것이 찾아오고 만 것 같았다,

호흡기에 이상이 있어도 갑자기 이런 경우가 올 때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월부터 전시하기로 되어있는 ‘산골사람들’ 사진을 전해주고 오기 위해

천장 위에서 끄집어낸 액자 때문인 것 같았다.

14년 동안 부엌아궁이에서 나오는 끄름에 쌓여 있었는데, 마스크도 하지 않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하는 장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평소의 미련한 고집을 차마 자백할 수 없었다.

”숨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일만 반복하는 무료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일체 병실을 알리지 않은 채, 문병조차 사양했다.

티브이는 물론 핸드폰마저 꺼 버렸으니,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정영신씨가 노트북을 병실에 갖다 주었으나,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그냥 고통 없이 죽는 주사 한 방에 조용히 눈감고 싶었다.






별다르게 진행하는 치료도 없이 약만 받아먹는 처지라,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안고 퇴원해 버렸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지만, 술 생각과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니, 술도 한 번 마셔보고, 담배도 한 대 피워보자.

모든 것이 사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니, 콤펙트카메라만 호주머니에 넣고 인사동 나들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날은 박진화씨의 드로잉전이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날이지만, 숨이 차 4층까지 올라 갈 기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으로 들어갔는데, 조해인시인과 사진가 이수길씨가 먼저 보였다.

옆 자리에는 윤성광씨와 박혜영씨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눈에 꽂히는 그림 한 점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미 저승으로 떠난 적음선사의 ‘파적’이란 시에 신준식씨가 그린 그림이었다.

두 사람 다 끼가 있는 꾼이었지만,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한 사람은 암자에서 술이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한 사람은 술이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이 무슨 암시인가?

‘가을밤의 춤’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는데, 그 이글거리는 담배불의 유혹에 온 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뒤늦게 다인 최종선씨와 공윤희씨도 나타났고,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도예가 김정범, 터너 이동환씨 등 여러 명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가히 인사동 아지터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 자리잡은 조해인, 이수길씨와 조용하게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는데, 온 몸에 이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말 없이 술집을 나서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소관이라며...





몇 걸음 걷다 한 참을 쉬어 가야하는 인사동의 밤거리가 낯설어 보였다.

그 늦은 밤에도 땅을 파 뒤집고 있었고, 마치 조계사의 야경이 저승 풍경처럼 음산했다. 




적음의  '파적' 부분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다니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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