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의 인사동엔 방배추로 불리는 조선의 삼대구라 중 한 분인 방동규선생과
강민 시인께서 나와 오랜만에 진득한 사람냄새 나는 인사동이 되었다.






강민선생 시집 출판을 기념하여, ‘나주곰탕’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상현, 조준영, 정영신씨가 함께 했는데,
술잔에 녹인 이야기는 노익장 방동규선생의 치열한 삶이었다.





팔순을 넘긴 연세지만, 요즘도 공장에 일하러 나간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삼일이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손톱에서 피가 흐르는 피땀의 시간을 보낸다고 하셨다.





가방 하나 만드는데, 몇 십원 정도이니 받아보았자 얼마 되지 않는 돈일게다.
그 돈으로 체육관을 드나들며 육체미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 본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해라.






‘나주곰탕’에서 커피 마시러 ‘유담’으로 가는 중에 사진가 김영호씨를 만났다.

김상현씨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라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워했다.
‘유담‘’에서 커피로 한 숨 돌린 후, ‘유목민’으로 옮기는 이차가 이어졌다.
강 민선생은 먼저 일어 나셨지만 방동규선생께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날따라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대훈, 노인자 내외가 왔다기에 안쪽으로 들어가니, 부산에 사는 김진규씨가 반색을 했다.
그 자리에는 임경일, 임계재씨를 비롯하여 처음 보는 미녀도 두 분이나 있었다.
김진규씨가 부산에서 전시하러 왔다는 화가 황보 연이씨와 최숙희씨를 소개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털니라도 끼고 나올 걸, 후회막급이었다.






두 분이 ‘인사아트’에 있는 ‘부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최숙희씨는 '욕망에 대한 몸의 사유'라는  전시 리프렛을 주었고,

황보 연이씨는 '그리움은 너야만 했다'라는 리프렛을 건네주었는데, 둘 다 제목이 야릇했다.

정선 갈 일로 전시를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석했다.



 



낮술에 쥐약인 놈이 일찍부터 빨았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본색을 드러내 미투의 경계를 넘나들었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돈도 권력도 없으니, 미투도 아무나 하는 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늦게는 공윤희, 임태종, 이인섭씨 등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날 밤엔 인사동 악사들의 연주도 골고루 이어졌다.
전활철씨와 김상현씨의 노래에 이어 김진규씨의 하모니카 연주도 한 몫 했다.
무슨 기생도 아닌 주제에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며 홀짝거렸으니,
완전 맛이 가버렸다.






이틀 날 새벽부터 정선 갈 생각하니, 더 이상 죽칠 형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방동규선생께서 자리하고 계셨으나, 삼십육계 줄행랑쳐야 했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노래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유행가 자락을 뱉으며...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강민 선생께서 ‘백두에 머리를 두고‘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창비'에서 냈다.

용인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28일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시선집 전달을 겸한 오찬회를 갖는다는 반가운 기별이 왔다.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에 갔더니,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씨도 나와 있었다.

선생께는 송구스러웠지만, 시집 때문에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밥 값은 김명성씨가 계산했고, 시집은 정영신씨가 받았으니 부담도 없었다.

원님이 아니라, 강민 선생 시집 덕분에 나팔 좀 불었다. 낯 술엔 쥐약인 놈이지만...





1962년 등단한 강민 선생께서 팔순이 넘은 연세에 펴낸 이 시선집은 4부로 나눠 98편의 시를 싣고 있었다.

시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의 삶 자체가 지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의 문단사였고 역사라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선생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사적 심성을 늘 간직하고 살아온 서정과 우국의 적절한 조화”라고 했는데,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이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마다 광화문광장에 나타나 후배들을 격려해 주며 바른 세상을 염원하였듯이

인사동 또한 선생처럼 애착을 갖고 사랑하시는 어른이 드물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시 ‘광장에서’에 적혀 있는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소재로 한 시다.





그 때 80대 중반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아서 피가 끓어 나갔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이념이 아니라 양심과 죄책감에서 우러난 시여서 그대로 가슴에 사무친다.

보수 꼴통 노인이거나,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벙어리 노인들만 판치는 세태가 아니던가?





그리고 시선집에 있는 ‘꿈앓이’는 분단시대의 아픔과 북녁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6.25전쟁과 4.19혁명, 그리고 5.16쿠테타에 이르기 까지 질곡의 시대를 양심으로 지켜 본 체험에서 우러난 시다.





강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여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동안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그리고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 문학상도 받았다.





등단 이듬해인 1963년 김수영, 신동문, 고은 시인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활동을 펼쳤다.

5.16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의식적인 타이틀을 내건 시인이다.

1974년 진보적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한 이래, 꾸준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강민선생을 뵙게 된 인사동과의 인연이다.

시집에 나와 있는 ‘인사동 아리랑’의 유목민 이야기는 잊혀져 가는 그리움을 호출하고 있었다.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 그의 부인 목순옥 /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 방송작가 박이엽 /

그 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 (중략) 다시 한 세월은 가고 /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선생은 천상병시인과 함께 인사동 풍류를 노래한 인사동시대의 초창기 멤버였다.

거명했던 많은 문인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신경림, 민영, 황명걸시인 등 생존 작가마저 몸이 불편해 못 나오지만,

강민 선생만이 지팡이를 이끌고 인사동에 나타나신다. 만날 사람은 없어도 그리움에 배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냈고, 친구들도 대부분 떠나보냈다,

선생의 시에는 자신의 늙어감에 대한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가자는 시인의 순정이 아직까지 뜨겁다.


의리도 지조도 인정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이 비정한 세상에 선생 같은 분이 계시니 희망을 갖는 것이다.

예술을 빙자하는 그림이던 문학이던, 사기꾼소리 듣지 않으려면 선생처럼 죽을 때까지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날 오찬회에서 술 한 잔 마신 김에 선생께 감히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기억을 들춰, 못 다한 이야기를 페북에 좀 올려주십시오. 그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는 다른 원로 시인과는 달리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페북도 하니, 후진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남겨 줄 수 있는 분이다.

내가 듣고 옮길 수도 있겠지만, 선생께서 귀가 어두운데다 나는 말이 어눌하니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에 이르기까지 겪은 애환과 아픔을 시로 노래하셨지만,

돌아 가시면 묻혀버릴 시대적 역사를 증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민주주의와 통일,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지사적 심성을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노장이시다.

이번에 발표한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꼭 한 번 읽어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강민시인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2016∼2017년 겨울, 노시인은 촛불을 들고 매주 거리에 나왔다.

함께 나온 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그동안 시인임에도
사회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한 죄책감을 조금씩 덜어냈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 / "머릿수나 채워야지." / 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 / 광장으로 갔다 /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 / 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 / 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 (…) / 밖에서는 다시 촛불의 열기가 올랐는지 / 백기완 작시의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광장에서' 부분)

1962년 '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잔잔한 창작 활동을 한 시단 원로 강민 시인의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가 출간됐다.





시인은 문단에 발을 들인 지 30년 만에 첫 시집을 냈고, 시력 57년 동안 단지 네 권의 시집을 펴냈을 뿐이지만 '걸어 다니는 한국문단사'라 불릴 만큼 문단의 산증인으로서 문학의 삶을 살아왔다.

그의 시집 4권 중 94편을 가려 뽑고 신작 시 4편을 더해 완성된 이 시선집에는 혼돈의 시대를 힘겹게 산 시인의 미로 같은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군사 정권, 최근 촛불 정국까지 노시인은 80여년을 살아오며 몸소 겪은 삶의 애환과 시대의 고통을 가슴에 안아 들고 자기만의 목소리로 노래했다.

늘 밑바닥을 견뎌온 그의 시에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도 생생히 눈앞에 그려볼 정도의 치열한 시대 인식과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 나더니 / 깃발, 옷가지, 손수건 따위를 흔들며 소리치는 / 신문팔이, 구두닦이, 막노동자, 노점상, 지게꾼 같은 / 누추한 몰골의 젊은이들을 뒤칸에 잔뜩 태운 소방차가 와 멎었다 / (…) // 시내 곳곳에서 함성이 일고 / 저녁 어스름이 깔린 거리에서 / 나는 비겁한 방관자였다 / (…) // 그때 학생들이 앞장선 4·19의 혁명은 / 어쩌면 이렇게 소위 양아치들, 밑바닥 민초들의 가담으로 승리했는지도 모른다'('비망록에서1' 부분)

'"이놈의 전쟁 언제 끝나지. 빨리 끝나야 고향엘 갈 텐데..." / 때와 땀에 절어 새카만 감발을 풀며 그는 말했다 / (…)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 그는 가고 없었다'('경안리에서' 부분)

"전쟁 때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해 자꾸 자기네들에 협력하라고 하니 시골에 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걷다가 경안리 부근에 주막에 묵으러 들어갔는데 밤이 되니 북한 인민군이 들어오더라고. 얼굴이 빨갛고 뿔이 났다고 배웠는데 걔네가 그렇게 신사적이데. 그중 한 친구가 내 옆에 앉았는데 함흥에서 왔다며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니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오니까 남쪽으로 도망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픽 웃네. 밤새 얘기하다가 이 친구가 먼저 떠나는데 배웅하러 나갔더니 손 내밀면서 '야 우리 죽지 말자' 그러더라고."(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시인은 "시는 누구나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학이니만큼 상상력과 서정성이 들어가야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도 시대의 억압 속에서 운동권 젊은이의 죽음을 담은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등 은유를 담은 시 여러 편을 썼다고 설명했다.

'노을 비낀 유연한 강물에 / 네 짧았던 생애가 / 눈물로 피는 데 / (…) // 너는 사자였지 / 아니, 호랑이였지 (…) 못난 놈 / 잘난 놈 / 보다 못해 뛰쳐나온 / 한국의 호랑이였지 // 물이야 막힌들 못 흐르랴 / 잠시의 고임 뒤엔 넘쳐서 흐르지 / 영산 낙동 금강 / 한수 살수 두만 압록 / 막아도 막아도 물은 넘치고 /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부분)

통일과 민주주의, 민중 해방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한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그는 지사적(志士的) 심성을 늘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지금도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염무웅 평론가가 "80대 중반을 넘긴 강민 시인의 건강이 많은 후배들에게 희망이 되는 까닭이다"고 적은 이유다.






어제는 새해의 셋째 수요일이라, 술 한 잔 하러 인사동 나갔다.

매번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픈하는 전람회도 돌아보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한 잔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반가운 사람 만나기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지난 16일은 점심때부터 강민선생님을 만나 뵙기로 약속했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청년 전만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에 들려 김진하관장을 만났다.





이 전시는 전만규씨가 주민들을 설득해 투쟁으로 일궈낸 매향리 폭격장 10년의 기록이다.
그동안의 자료를 얼마나 꼼꼼하게 챙겼으면, 격려의 글을 보낸 편지까지 모아두었더라.
투쟁에 사용되었던 깃발에서부터 시사만평에 나왔던 그림과 탄피에 이르기까지, 그 지난한 세월을 살펴보았다.
매향리에 가해진 폭력과 그 아픈 상처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2월1일까지 전시되는 매향리 기록전을 놓치지 마시길...




 


전시를 돌아보고 있으니 ‘강민’선생님께서 오셨다.
이 추운 날, 먼 길을 마다않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선생께선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하셨으니, 그 기록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이다.
김진하관장 설명을 들으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셨다.






선생님의 단골집 ‘나주곰탕’에 들려 소주 한 병에 곰탕 세 그릇 시켰다.
짐 때문에 차를 끌고 와 소주는 한 잔으로 끝내야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몸이 불편한지 따뜻한 물에 소주를 회석시켜 두세 잔 드셨다.
얼굴이 붉어져 낮술을 삼가한다는 김진하씨가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고맙게도 밥값까지 내 주셨네.






점심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 잔 하려니, 갈 만한 곳이 없다고 하셨다.
단골로 가던 ‘인사동 사람들’은 주인도 이름도 바뀐 식당이 되어버렸단다.
하는 수 없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포도나무‘골목의 끝 집으로 향하다
길에서 안숙선 명창과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를 만났다.






강민선생께선 ‘창비’에서 낼 시집 원고를 다 넘겼다고 하셨다.
급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벌써부터 시집이 기다려진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힘없이 앉아계신 선생님 모습이 오늘의 인사동 같았다.


떠나오며, 방향이 달라 신호등 따라 급히 달려간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민예총’ 사무실에 들려 짐 실어 둔 차를 끌고 녹번동으로 떠났다.
차를 놓고 와 술 한 잔 할 생각이었는데, 꾸물대다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나무화랑’부터 달려 갔으나,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매향리 전만규씨를 만나 보고 싶었으나, 날 샌 것이다.






백범영씨의 ‘백두대간’전이 열리는 ‘동덕아트갤러리’로 갔더니,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를 비롯한 일행들은 벌써 나오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작가 백범영씨와 미술평론가 황정수씨를 만났고,
김달진씨와 편근희씨도 만났다.






백범영씨는 '소나무 작가'라 불릴 정도로 소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이번엔 ‘백두대간’이었다.
산 능선을 비롯하여 나무들과 풀꽃 등 자연을 이루는 다양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백두대간의 맥을 잡아 그린 산수에서는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이 전시는 28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을 나와 ‘유목민’에서 이인섭선생을 만났다.
전활철씨와 셋이서 소주 한 잔 했는데,
앞으로는 박혜영씨에게 ‘유목민’을 맡기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이인섭선생께서 비약처럼 넣어 다니는 술 한 잔을 따라주었는데, 58도의 중국술로 이름 하여 ‘오빠’란다.
부드러운 향의 독주 한 잔에 춘삼월이 오가더라.






인사동에서 나주곰탕 한 그릇 드시고 가는 강민선생이나
‘유목민’에서 파적 한 장에 소주 한 병 드시는 이인섭선생이나
이 두 분이 인사동을 지키는 마지막 유목민이 아닌가 싶다.

인사동 풍류도 그렇게 가나보다.

사진,글 / 조문호



“청년 전만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










네오록에 소개된 '매향리기록전' 전시리뷰 http://blog.daum.net/mun6144/5038





백범영씨의 ‘백두대간’전





네오록에 소개된 백범영 전시리뷰 http://blog.daum.net/mun6144/5033














지난 수요일은 강민선생을 비롯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자는 기별을 장봉숙선생께서 보내왔다.
페북에서야 강 민선생을 간간히 뵙지만,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정영신씨가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강 민선생을 기다렸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와 계셨다.

제일 멀리 계시는 분이 언제나 먼저 오신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장봉숙선생께서도 오셨다.

매번 내가 꼴지로 나왔지만, 모처럼 꼴지 신세를 면한 것이다.



  정영신사진


강민선생은 귀가 어두운데다, 내가 하는 말까지 어눌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방동규선생께서 보이지 않아 근황을 여쭈었는데, 구중서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연락하니, 일이 있어 못 나온다"고 했다며,배추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선물 하나를 내놓으셨다.

얼마 전 중국여행 때 사왔다는 이과두주였는데, 병을 보니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강 민선생 드리려 사온 술이겠지만,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눈치 봐 가며 슬슬 포장을 풀었더니, 식당주인이 말했다.

오늘만 강민선생님 때문에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 안 됩니다.”



 


52도나 되는 독주를 낮술에 쥐약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어찌 귀한 술을 마다하겠는가?

맛만 본다며 조금 받아 마셨으나, 술 맛이 슬슬 당기기 시작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나중엔 장선생과 정영신씨가 남긴 술까지 다 마셔버렸다.



 


방동규선생이 안 계시니, 구중서선생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김두환씨가 시라소니 앞에 무릎 꿇었던 옛 이야기를 꺼내시며,

사실은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가 맨주먹으로 열일곱 명이나 때려 눞혔다지만,

선생께 고백하기를 자기도 당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지만, 오래 전에는 다툰 적도 있다고 했다.

백기완과 구중서가 책 보라고 부추긴 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꼴로 살게 됐다"며,

술값은 늘 구중서선생께서 내게 하셨단다.





어느 날 인사동 실내악에서 구선생의 핀잔에 방선생께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일어난 것이다.

가다보니 술 값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술값을 돌려 달라고 하셨다는데,

실내악 주인 김희주가 누구인가? 절대 못 돌려준다며 타박만 주었다는 것이다.





방선생께서 다방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계신 신동문시인께  "구중서와 의절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단.

그 소리를 들은 신동문선생께서 갑자기 꿇어 앉어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먹이 손가락만 슬쩍 밀어도 쓰러질 비쩍 마른 시인의 말에 그냥 무릎 꿇고 앉았다는 것이다.

한참 있다 이제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더 있어라 했단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모습이냐?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구중서선생께서 자주 가신다는 관훈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지러웠다.

술 깨려고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다시 도졌다.

길에서 까딱이를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술 취해 빌빌거리는게 불쌍한지 손도 벌리지 않았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목판대학 전시 때문에 그냥 갈 수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강민선생 따라 기어 오르듯 전시장에 올라갔다.

김진하 관장과 정복수씨가 있었고 뒤 늦게는 김준권씨도 왔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초빙작가인 김진열, 정복수, 김진하, 문승영씨 작품은 물론, 학생들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현숙씨 판화에 눈이 꽂혔다.



   

    

 

전시가 124일까지라 다음에 볼 작정으로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 강민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유목민 들어가 전활철씨께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집에 왔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컴퓨터는 왜 켰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음주 포스팅을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꼴을 보았다. 갑자기 집채가 쓰러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 기둥 사이로 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까지 지붕에 올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소가 기와장을 튕기며 지붕 위를 뛰어 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더니 날 뛰던 소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었다며 일어났더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당겨 보니, 음주 포스팅한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았다.

속은 쓰린데다 망신살까지 뻗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 왜 이리 낮술에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낮술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 들어간 뱃속이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이 뜻 하는 건 뭘까?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는 아닌지, 해몽가라도 한번 찾아 볼일이다.


다시는 낮술과 음주 포스팅을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그 버릇 개줄까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흐르는 세월에 인사동 혼이 다 달아난다.

두 달 전에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심우성선생께서 이승을 떠나셨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신봉승선생 등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 뒤 따라 가신 것이다.



 


인사동엔 여러 층의 예술가들이 드나들었지만, 무엇보다 문인들의 텃밭이었다.

70년대 관철동에서 인사동으로 건너와 인사동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시인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살아계시지만,

기력이 쇠진하여 인사동에 잘 나오시지도 않는다.



 


누구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강 민시인의 외로움만 깊어져 간다.

틈만 나면 노구를 끌고 인사동을 기웃거리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지팡이에 의지한 모습을 보니, 이년 전의 심우성선생 모습이 연상된다,



 


더 걱정인 것은 한 가닥 인사동 정서나마, 이어받을 후배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렇게 인사동 영혼은 빠져나가고, 인사동의 낭만도 사라지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난 24일에는 모처럼 강민선생님과 점심 약속을 했다.

페북에서 간간히 인사는 드리지만, 뵌 지가 오래되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꾸물대는 습관으로 또 늦어버렸는데, 그 자리에는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선생,

'답게출판사' 장소임 대표, 사진가 정영신씨가 먼저 와 식사하고 있었다.



 


강민 선생께선 눈도 침침, 귀도 가물가물하다는데,

곰탕에 든 고기를 끄집어내, 술 안주하라며 접시에 담아주었다.

김승환선생께선 벌주로 술병을 든 채, 잔 비우기만을 기다리시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 단숨에 마시는 원 샷은 한 잔에 맛이 가버려, 잘 마시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밥상머리 화제는 강민선생과 장소임씨의 인연으로 옮겨졌다.

30년 전 강민선생께서 금성출판사상무로 재직할 무렵,

장소임씨가 강민선생의 자문을 구하러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출판사 차릴 의향을 말씀드렸는데, 강민선생께서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출판사 차려 오늘에 이르렀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신 때마다 오찬을 베풀어 드리는 등, 강 민선생을 각별히 챙겨왔다.



 


장소임씨는 올 해로 답게 출판사창립이 3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도 가질 것이라 했다.

출판사 이름도 사람답게로 바꿀 생각이라며,

답게 라는 여러 종류의 상호를 등록하여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등 출판사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는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며,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강 민선생께 드린 것이다.



 


물론, 가난한 시인의 용돈을 챙겨주는 일이 고마운 일이긴 하나, 이 건 도리가 아니다.

드리려면 봉투에 넣어 정중히 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모르게 드리는 게 선생에 대한 예의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걸 모를 분이 아니잖은가?

그걸 보니, ‘답게 출판사와의 오랜 악연이 되살아났다.



 


약 십 오년 쯤 된 일이다.

'답게 출판사'에서 천상병선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내 사진을 사용하였지만, 원고료는 커녕 작가의 승인이나 사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 전재한 것이다.





내가 찍은 천상병선생 사진은 8X10규격으로 뽑아 서명까지 하여 목여사께 드렸는데,

그 사진을 출판사 임의로 사용한 것이다.

물론 목여사는 저작권에 관한 관례를 몰라 주었겠지만, 출판사는 당연히 챙겨야 할 문제다.

더구나 사진에 서명까지 되어있는데도 무단 전재한 것은 상식을 넘어 양심 불량인 것이다.

그 당시는 '답게 출판사'나 장소임 대표를 전혀 모를 때였으나,

전해 준 천상병선생 사모님 얼굴보고 참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넘겼더니, 한참 후 또 문제를 만들었다.

일간신문에 책 광고를 내면서 내 사진을 그대로 게재한 것이다.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어 출판사대표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당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목여사를 시켜 원고료 10만원으로 깔아 뭉갰다.

신문광고용 사진원고료가 얼마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목여사가 아니라그 누가 부탁해도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는 매사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았으니, 어쩔 수 없었.



 


몇 년 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천상병을 말한다는 책을 만든다며 글 쓰 달라는 원고 청탁을 해 왔다.

천상병선생 이야기라 흔쾌히 쓰 주었는데,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그것도 답게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광래씨가 글 쓴 원고료라며 십 만원을 전해 주었으나, 그 책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진이 두장이나 실려 있었다.

사진 원고료는 물론 한 마디 양해도 없었지만, 인사동 궂은 심부름 하는 노광래씨 안면으로 또 그냥 넘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출판사의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스스로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 셈이고, 잘못을 그냥 넘겨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진가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시비를 가리는 것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요 모양 요꼴로 만들었다는 뒤늦은 자책에서다.



 


그 이후 천상병기념사업회이사회에서 답게 출판사대표와의 첫 상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는 커녕,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말이 저작권침해지 한마디로 도둑질인 것을 모를 리 없겠으나, 모른 채 하는 것이다.

가난한 다큐 사진가들의 유일한 수입원이지만, 돈이나 밝힌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다.

다행히 인사동 터줏대감 강 민선생을 잘 모신다는, 고마움에 입 다물었던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식사하며 천상병선생의 책은 8쇄에 이른 책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니, 저작권을 침해한 잘 못도 잊은 것 같았다.

뒤늦게 나온 책에는 사진의 출처나 밝혔는지 모르겠다.

괜히 답게 출판사’ 일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나주곰탕에서 일어나 김진열씨 목판화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옮겼다.

군중들에 휩싸여 걷는 두 선생의 어깨가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4층까지 오르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뒤 따라 갔더니, 김진하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계셨고. 한 쪽엔 '문화연대' 임정희씨도 있었다.

오르느라 힘은 들어도 좋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 좋은 전시를 공짜로 보여 주는데도 안 오는 사람은 왜 그럴까?



 


그 다음엔 커피 한 잔하는 일만 남았는데, 선생님의 단골집이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벽치기 골목의 유담커피숍으로 갔으나, 그 놈의 개는 왜 그리 짖어댈까?

내가 개처럼 생겨서일까? 아니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낮 술에 주저리주저리 떠벌였는데, 선생님들께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이시여! 제발 세월에 휩쓸려 가지는 마십시요.

부디 건강을 지켜 오래 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9일 오후6시 무렵, 인사동 센터마크호텔 지하 ‘경복궁’으로
60여명의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에서 칠백평이 넘는 전관을 갤러리로 운영하다 망한,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재기의 깃발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부도가 나 ‘아라아트’가 중국기업에 넘어갈 때, 가슴을 친 사람은
당사자 뿐 만 아니라,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도 많았다.






몇 년 동안 무료대관으로 전시를 연 작가도 부지기 수지만,
‘창예헌’이란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을 김명성씨가 후원했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빈 털털이도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






그의 몰락과 함께 모임도 흐지부지해 인사동의 구심점을 잃어 갔는데,
느닷없이 옛 벗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다.






그 명목은 청백리 이 성 구로구청장의 삼선을 축하하고,
현충일 추념식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던,
가수 최백호씨가 내세우는 孝사상의 효교 모임을 만든다는
쌍권총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이 날 참석한 분으로는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방배추로 통하는 조선의 구라 방동규선생, 원로 만화가 박기정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이수호, 박재동, 조경석, 정기범, 강찬모, 신상철,
이미례, 진옥섭, 이 성, 최백호, 김신용, 조해인, 이만주, 김상현, 조준영, 이청조,
임채욱, 정영신, 허미자, 임태종, 공윤희, 송일봉, 김혜련, 최유진, 서길헌, 최 윤,
고중록, 이상훈, 김용국, 전인미씨 등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이 어울려,
완전 잔치 집 분위기였다.






그런데, 전주로 간 음유시인 송상욱씨와 도예가 한봉림씨도 나타났고,
울산에서 황금기와로 유명세를 떨친 기와장 오세필씨가 김위경씨를
데려 오는 등 지방에서까지 올라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못오게 된 가수 장사익씨는
그 날 만찬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등, 다들 김명성씨의 재기를 축하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빠진 분이 너무 많았다.
사정이 있어 못 나왔으면 모르겠으나, 미처 연락을 못 했다면 욕먹을 소지가 있었다.
예전에는 ‘창예헌’ 총무가 일괄적으로 통보해 별 탈이 없었지만
김명성씨가 직접 연락했다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아무튼. 별다른 행사 없이 술 마시며 회포 푸는 자리로는 너무 과분했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에다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고,
‘유목민’으로 옮겨 밤늦도록 흥청댔지만, 뭔가 아쉬웠다.






술이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쪽방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거지 행색이 아니라, 바로 거지였다.



 



그래도 인사동이 맺어 준 인연은 아름다웠다.

사진,글 / 조문호





































































모처럼,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총 출동하셨다.
‘엉겅퀴 꽃’의 민영시인과 ‘한국의 아이들‘을 쓴 황명걸시인,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 시인, 문학평론가에서 서화가로 발 넓힌 구중서선생,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등
인사동을 주름잡던 터줏대감들이 여럿 나오신 것이다.






암으로 투병중인 신경림시인께서 나오지 못했지만,
원로 다섯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양평이나 용인 등 멀리 계시기도 하지만, 이제 연세가 많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열 몇살이나 작은 나도 빌빌거리는데, 다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들게 사신다.
이젠 작정하여 모시지 않으면, 한자리 모시기 힘들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 끼리 한데 뭉쳐 살수는 없을까?
별로 나눌 말씀이야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추억이 줄줄 하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는 경로잔치라도 자주 열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창예헌“이란 모임에서 모셨으나, 그마저 풍비박살 나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지난달, 영주의 신동여화백 왔을 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다.
그 날 ‘유목민’ 술자리에서 우연히 구중서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명성, 조준영시인이 한 번 모시자고 제안한 것이다.
29일로 정한 것은 조준영교수의 수업 없는 날로 택한 것이다.






그것도 양평 계시는 황명걸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조준영시인이 차로 모셔 와서는 끝난 후 다시 모셔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영시인은 차 때문에 반가운 자리에서 술 한 잔 못 마시는 징역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저만한 제자 둔 황명걸 선생은 진짜 복 많은 분이시다. 요즘 그런 제자 없다.






29일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오찬회를 갖기로 했으나, 갑자기 ‘툇마루’로 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전활철씨는 시장까지 보아두었는데, 친구 힘들까 바 김명성씨가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유목민’에서 만나 '툇마루'로 옮겨 간 것이다.
된장비빔밥과 북어찜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전활철씨는 꼬불쳐 둔 중국술 한 병을 내놓았다.






그 날 마주앉은 방동규선생께서 여러 가지 충고 말씀도 주셨다.
“네가 쪽방에 들어가므로 결국 쪽방 하나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숙자 탓도 하셨다.
방선생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박킹 끼우는 일을 받아 하신다고 했다.

한 개 끼우는데 3원씩이니 만개를 끼워야 삼 만원 벌지만, 손톱이 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노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다.
질병이나 신체장애로 일 못하는 노숙자도 있지만,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러니 늘 술에 취해 있는데,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나도 서서히 노숙자에 동화되어 간가는 점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 어울리다보니, 이제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노숙자들과의 술자리를 가능한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뜻밖의 중국술에 이게 왠 떡이냐며 두 잔 받아 마셨는데,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오후3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김경린시인 학술심포지움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술 취해 찍는 취사야 몸에 베였지만, 점잖은 분들 계시는데, 쫄랑대면 남사스럽지 않겠는가?






다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서야 했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운 판을 만들었는데, 나만 놀지 못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 날 모신 다섯 선생님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나왔다.
처음 말 꺼낸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 전활철씨 외에도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장경호, 고중록, 이상훈, 김영국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줄줄이 찾아왔다.
우짜든, 김명성씨가 잘 풀려야 이런 자리라도 자주 만들어질텐데...


부디, 선생님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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