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를 맞아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이 시원섭섭하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병석에서 고생한 정영신씨 모친께서 지난 년 말 임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영신씨가 병원비 마련하려 여러 일을 해 왔으나, 이제 한 숨 돌린 것이다.






먼저 정영신씨의 ‘민예총’사무국 상근 직부터 내 놓고, 비상근 봉사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4년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해 준 ‘서울문화투데이’도 새해부터 손을 떼었다. 
미진했던 사진 작업에 매달리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오후 5시 무렵, 계동에 있는 '한국민예총'사무국에 들렸다.

업무 인계하러 갔던 정영신씨가 짐이 있다기에 차를 끌고 간 것이다.
사무실에는 서인형 국장이 새 사무처장으로 임명된 김윤기씨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영신씨는 '민예총'기금마련전 할 무렵부터 사의 뜻을 밝혔지만, 서인형국장은 왜 그만두는가?

조직 내부 일이라 언급할 수 없으나, 이사장이 큰 실수 한 것 같았다.






저녁 먹고 가자는 정영신씨 말에 끌려 '민예총‘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田多‘식당에 갔다.
처음 가본 식당인데, 어머니와 두 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모녀가 정답게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차를 끌고 갔으니,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오늘의 도시락’을 시키고, 서인형, 김윤기, 정영신씨는 모듬전을 시켜 막걸리를 마셨다.
마침, ‘민예총’ 기금마련전을 기획한 최석태씨와 연락 된 것 같았다.

좀 있으니, 최석태씨와 여수에서 활동하는 최병수씨가 함께 왔더라.





이한열열사 대형걸개 그림으로 알려진 최병수는 온 몸을 민중미술에 던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의 갖가지 직업으로 기능을 닦았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반가운 분을 보니 술 생각이 더 간절했지만, 보고도 못 먹는 장떡이었다.
긴 시간 동안 막걸리 반잔으로 입만 축이려니 죽을 맛이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그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래 전 최병수씨 아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귀똥 찬 묘약으로 완쾌한 적이 있단다.
신학철선생 부인 강고은씨가 힘겹게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최병수씨가 그 약을 권했는데,
서서히 효험이 나타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으나, 최병수씨가 단골집에서 한 잔만 더 하자며 손을 끌었다.
차마 거절 못해 따라 나섰는데, 소주 한 잔으로 버티야하는 지루한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석태씨가 오래전 중앙일보 미술잡지 기자로 일할 때, 최병수씨를 취재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때 헤드라인에 쓴 말이 관료작가라 했다는데, 김윤기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신촌 그림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서 받을 때 본인은 화가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경찰관이 화가라고 못을 박아 졸지에 관에서 만들어 준 화가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화제가 비아그라로 옮겨갔다.

서인형씨 말에 의하면, 요즘 한약방이 안 되는 이유가 비아그라 때문이라 했다.
전에는 집사람들이 남편 양기 돋우기 위해 보약을 지어 먹였으나,
요즘은 비아그라‘ 때문에 보약 먹일 필요가 없어졌단다.
웃어 넘기기에는 좀 거시기한 이야기였다.





몸은 술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앞으로 놀 일 궁리하느라 바빴다.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잘 놀겠지만, 나도 동자동에서 재미있게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이제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둘만 먼저 일어나, 녹번동에서 축배를 들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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