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가 가른 어르신들의 하루



조선일보 / 스크랩 

  • 이영빈 기자


  • 서울 종로 낙원상가 서쪽에는 인사동, 동쪽에는 탑골공원이 있다. 두 구역을 각각 '낙서' '낙동'이라 부른다. 지난 9일 오후 인사동의 한정식집에서 낙서파 노인 8명이 음식을 앞에 두고 건배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시각 낙동파 노인들은 낙원상가 8번 출구 계단 앞에서 환한 표정으로 장기를 두고 있다(오른쪽 사진).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종로에는 두 개의 '낙원(樂園)'이 있다. 지갑이 얇은 노인은 탑골공원으로, 행색이 좋은 노인은 인사동으로 간다. 이 일대 3000㎡(약 907평)는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동서로 갈린다. 편의상 낙원상가 동쪽을 '낙동', 낙원상가 서쪽을 '낙서'라 부르자. 두 구역은 모이는 사람부터 거리 풍경, 먹을거리와 놀거리, 소음과 냄새까지 판이하다. 형편이 좋든 나쁘든 노인에게는 낙원이다. 두 모습을 나흘에 걸쳐 관찰했다.

    낙동파 vs 낙서파

    지난 9일 오후 7시 탑골공원 근처 포장마차. 의자는 없다. 주인의 앞, 양옆에 'ㄷ'자 모양으로 탁자가 있다. 손님은 선 채로 술과 안주를 먹는다. 가오리 초고추장 무침, 삶은 꼬막 등을 5000원 안팎에 판다. 꼬막을 주문한 할아버지가 "요즘 안주가 영 부실하다"고 불평하자 주인이 대꾸했다. "잔술 서비스 먹으려면 입 다물어!"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빨간 소주'를 종이컵에 8부쯤 담아주는 잔술은 1000원짜리다.

    한 할아버지가 기자에게 "젊은 친구가 어쩐 일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인천 서구에 사는 강금성(71) 할아버지. 지하철 1호선으로 곧장 올 수 있기 때문에 편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항구를 드나드는 배에서 물건을 옮기는 등 힘쓰는 일을 주로 했다는 그는 "여기서 소리 내 웃고 떠들다 보면 옛날처럼 에너지가 솟는다"고 말했다.

    강 할아버지는 '낙동파'가 된 지 15년째다. 탑골공원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사회와 정치를 논한다. 대화 상대가 떠나면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르는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게 이곳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가 이날 밤 쓴 돈은 도합 1만원이다.

    '낙서파'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6일 오후 4시 인사동의 한 찻집. 회색 롱코트에 와인색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 중절모를 쓴 권명현(73) 할아버지가 들어섰다. "언제 오셨나?" 찻집 안 3명과 인사를 나눈다. 테이블에 오미자차, 생강차, 쌍화탕 2잔에 가래떡구이가 놓여 있다. 차를 마시던 한 할아버지가 "안동 문중에서는 권씨가 최고 아닌가?" 운을 띄운다. "유성룡의 유씨를 빼면 섭섭하지" "김씨를 빼면 우리나라 역사를 논할 수 없다"로 대화가 흘러간다.

    이들은 오후 7시 고급 민속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1인당 약 5만원의 코스와 2만원 상당의 전통주가 상에 놓였다. 술잔을 부딪치며 축하의 말이 오갔다. 한 할아버지의 손자가 내과 병원을 개업했기 때문이다. "손주가 준 용돈으로 내가 사겠다"고 하자 박수가 터졌다.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 정세균이를 자주 봤는데, TV보다 훨씬 인상이 좋다"는 등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무용담이 이어졌다.

    권 할아버지는 경기 군포시에 살지만 10년째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인사동을 찾는다. 합판 등을 유통하던 개인 사업에서 은퇴하고, 시(詩)에 관심을 가지며 자주 드나들게 됐다. 그는 "인사동은 조선왕조 시절부터 예술의 거리였기 때문에 나 같은 시인에게는 더 의미 있다"고 했다.

    물가는 천지 차이, 행복감은 비슷해

    탑골공원 동쪽 담장을 따라 해장국집과 포장마차 20여 곳이 늘어서 있다. 8일 오후에 가보니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2000원 하는 시래기 해장국이나 황태 해장국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다. 낙동의 해장국은 다른 7000~8000원짜리 국밥보다 국물이 묽고 건더기가 적다. 그래도 공깃밥은 한가득 담아준다.

    이들은 주로 두꺼운 무채색 패딩 재킷에 귀까지 내려오는 '군밤장수 모자'를 썼다. 이제 무엇을 할 예정인지 묻자 "그냥 있다" "별생각 없다"고 했다. 그 자리에 서서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다. 이날의 주제는 차기 대선 후보였다. "오세훈이 슬슬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하면 "아직은 시기상조니 조금 더 몸을 사릴 것"이라고 전망하는 식이었다.

    낙원상가 8번 출구 계단 앞에 있는 장기판 4개에도 노인들이 북적였다. 영하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기판 하나에 훈수꾼이 5~10명이 붙어 있다. 한 할아버지가 "아 XX, 방금 마(馬)가 왼쪽으로 갔으면 장군 막을 수 있었잖아!"고 하자 구경꾼들이 모두 웃었다. 모두 이날 서로 처음 본 사이라고 한다. 박오윤(64)씨는 "아는 사람이 없어도 그냥 와서 이야기하고 담배를 피우면 친해진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낙서 거리에는 노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찻집이나 식당에서 모임을 갖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인사동의 한 찻집에는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향해 "너무 좋은 밥을 먹어서 그런지 차도 맛있는 거 같아"라며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코트의 보풀을 떼며 "다음에는 내가 자주 가는 솥밥집에 가자"고 했다. 각자 배우자와 사별하고 소개로 만난 사이라고 한다.

    고급 한정식집 방 안에서는 60~70대 할아버지 5명이 자작시 낭송에 여념이 없다.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시 낭송회로 6년째를 맞았단다. 가장 잘 쓴 시를 뽑는 순서도 있다. 이날 수상작은 양모(72) 할아버지의 '화무십일홍'. '희푸른 갈매기에게/ 우리의 추억을 보낸다'라는 구절을 읽고서 탄식을 내질러 호응을 얻었다.

    낙동과 낙서는 노인이 쓰는 돈도 하늘과 땅 차이다. 인사동은 방문할 때마다 10만원가량 지출이 생긴다. 찻집에서 만나 차와 다과를 먹으면 1만원이 조금 넘고 저녁으로 술을 곁들여 7만~8만원짜리 식사를 한다. 낙동은 1만원이면 충분하다. 탑골공원 근처 가게들의 국밥 가격은 대체로 2000~3000원. 소주와 막걸리도 2000원이다.


    두개의 '낙원'


    '낙원' 사라질까 두렵다

    서울은 물론 멀리 경기 평택·수원·인천의 노인들도 낙원상가 일대를 찾아온다. 한국을 대표하는 노인문화지구다. 20년 넘게 탑골공원에서 황태 해장국집을 운영하는 김모(72) 사장은 "전국에서 노인들이 찾아온다. 멀리 전남 여수에서도 온다"고 했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친구를 만나러 인사동에 왔다는 구갑회(64)씨는 "노인을 위한 거대 상권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종로3가 근처 돈의동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은 매달 20일 기초연금(약 26만원)이 나오면 낙동의 값싼 먹거리로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입금되는 오후 4시쯤 포장마차촌에 연금 수급자가 몰린다. 21년째 쪽방촌에 사는 고민영(60)씨는 "7000~8000원 하는 식사는 부담되지만 5000원하는 안주에 잔술 정도는 한 달에 한 번 쏠 수 있다"며 "무료 급식과 자선 단체에 의지하는 우리에겐 한 달에 한 번 허락되는 사치"라고 했다.

    노인들은 "최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우리가 갈 곳을 잃는 것 아닌가"라며 걱정하고 있다. 종로구 익선동이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낙원상가 쪽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5년째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노모(49)씨는 "젊은 친구들이 늘다 보면 거대 기업이 들어서지 않겠 느냐"면서 "그때는 우리가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노인에게 성(性)을 파는 '박카스 아줌마'도 최근에는 뜸해졌다고 한다. 박카스 아줌마를 종종 불렀다던 한 할아버지는 "연락해도 받지 않고 다른 아줌마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탑골공원 서쪽 담벼락에서 만난 60대 박카스 아줌마는 "이쪽은 젊은 사람들이 늘어 종묘공원으로 많이들 이동했다"고 전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