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난 황명걸 시인. 숨이 차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걸음도 불편했다. 그래도 시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의 시엔 유난히 세상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많이 담겨있다. “4·19때 철학과 후배 어머니가 하는 중학동 다방에 있었어요. 2층에서 내려다보니 의대생이 피묻은 흰 가운을 입고 쓰러진 학생들을 들것으로 나르고 있더군요. 그게 눈에 선합니다. 옆에서 주먹만 쥐고 끼어들지는 않았어요.” 시선집이 나온 데는 절친 신경림 시인의 도움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이 ‘죽을 때도 됐는데, 시선집 하나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평양 출신 부친 해방뒤 치안대장
‘완장’ 싫어 미대 원했지만 ‘반대’
시쓰고 그림 그리다 서울대 ‘중퇴’

1962년 시로 등단…첫시집 ‘판금’
‘동아투위’ 거리시위 격문시 맡아
90년대 양평서 카페 운영하기도



시선집 낸 해직언론인 출신 황명걸 시인(82·사진)은 자신의 인생을 ‘자유혼’ 한 글자로 요약했다. 대학 졸업장에 얽매이지 않았고,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언론자유를 외치다 직장을 잃었고, 남한강과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근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 구중서 신경림 엮음)를 펴낸 시인을 10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났다.


“아버지에 대한 역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언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유혼과 불가분의 관계처럼 엮이는 듯했다. “아버진 쁘띠(소) 브루주아 근성이 농후하셨죠.” 의대나 법대를 고집하며 아들의 미대 진학을 끝내 반대했다. 시인은 타협책으로 서울대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미술사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유학도 좌절되면서 결국 졸업을 못했죠.”


시인의 고향은 평양 대동강변이다. “아버지가 완장을 좋아하셨어요. 일제 때 사업을 하셨어요. 자동차도 있었죠. 당시 집엔 일본도가 몇개 걸려 있었어요. (해방 때) 아버지 무릎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유카타(일본식 가벼운 겉옷) 차림에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계셨어요. 해방 뒤에는 권총을 차고 치안대장을 하셨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겹쳤다. “외삼촌은 소련군 장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당한) 친삼촌 둘은 서북청년단 간부였어요.”

아버지의 ‘쁘띠 브루주아 근성’이 너무 싫었던 아들은 화가를 꿈꿨다. 한국전쟁 때 부모는 제주로 피난을 가 냉면집을 했다. 고교생이었던 시인은 제주의 유일한 화방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물방울 화가인 김창렬도 같이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서울 중구 초동에 냉면집을 냈다. 군 복무를 마친 시인은 대학에 복학하지 않았다. “대학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시를 썼어요. 소설도 쓰려고 했죠.” 대학 다닐 때 이화여고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 서상실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대 작곡과나 피아노과를 나온 며느리를 원했어요. (아내가) 고교생이었으니 반대가 심했죠. 집에서 쫓겨났어요.”


‘고졸 가장’은 잡지 편집자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1962년 <자유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이 봄의 미아’란 시로 등단했다. 여성지 <주부생활> 등에서 편집기자로 인정받은 그는 6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8년 뒤 자유언론운동으로 해직당할 때까지 <신동아> 등 잡지 쪽에서 일했다. 해직 기자들의 거리 투쟁 때 ‘격문시’는 등단 13년차인 그가 도맡았다. 해직 뒤 <미술과 생활> 편집장을 거쳐 엘지의 전신인 럭키금성사의 사보 편집자로 취직했다. “격문시를 써서 그런지 형사들이 럭키금성사 시절에도 한동안 따라다녔어요.” 88년 <한겨레> 창간 때 주주로도 참여했지만, 동아일보에서 해직 당한 뒤엔 돈 주고 신문을 사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강제로 쫓겨난 상처가 그만큼 컸다.


시인은 등단 이래 50여년동안 시집 3권을 냈다. 유신 때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76)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20년 뒤 <내 마음의 솔밭>(96)을, 2004년엔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펴냈다. 이번 선집에는 세 시집에서 각 25편을 골랐고, 신작시 25편도 보탰다.


구중서 평론가는 발문에서 “시 ‘한국의 아이’ 한편만으로 황명걸은 불멸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 이 시엔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란 표현이 있다. 기성 체제와 권위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담았다. “65년에 통혁당 사람들이 만든 <청맥>이란 잡지에 이 시를 발표했어요. 내가 객원필자였죠.” 3년 뒤 통혁당 사건이 터졌다. ‘통혁당 핵심’ 김질락은 사형을 당했다. “나도 잡혀갈까 봐 조금 떨었어요.”


시인은 정년 퇴임 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에 터를 잡았다. 91년이었다. “퇴임 뒤 노름에 빠져 퇴직금과 모아놓은 그림도 팔아먹었죠. 아내의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건축가인 아들이 지은 예쁜 집도 화재로 불탔다. 화마를 당한 집을 손봐서 갤러리 카페(무너미)를 냈는데, 대박이 났다고 했다. 예술인의 사랑방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엔 ‘무허가 영업’으로 고발돼 경찰서 유치장에 한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뒤 남한강가인 옥천면 아신리로 옮겨 카페 ‘어린왕자’를 열었다. 역시 아들 작품이었다. 3년 전 사진작가에게 카페를 남겼다. 요즘은 동네 노인정에서 서예 공부를 하는 일 외엔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서재 밖으로 남한강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장애가 있어 운동이나 산책은 못한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최근 <양평문학>에 ‘노 시인의 아내’란 시를 발표했다. “집사람에 대한 속죄를 담은 헌시죠.” 서재엔 그의 그림 200여점이 보관돼있다. “2008년에 시화집을 내고 전람회도 한번 했죠. 그뒤에 그린 그림도 전시하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전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스크랩 / 한겨레]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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