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무렵 ‘아라아트’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형! 이성 구청장이 오셨는데, 이제하선생 모시고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그 전화 한 통에 밀린 일을 정리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형제처럼 지냈기에, 마음 한 쪽에 그에 대한 걱정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인사동에 ‘아라아트’를 세우며 시작된, 그의 십년 세월은 지옥 그 자체였다.
무리한 투자로 매달 돈을 빌려 이자를 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아슬아슬한 곡예에서 금방 추락할 것 같았으나 십년이나 버텨 낸 끈기는,
인사동 르네상스를 이루겠다는 꺾을 수 없는 그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가까웠던 사람에 의해 감옥 까지 가야했던 지난한 세월을 책으로 엮는다면 몇 권은 될 게다.

그런 와중에도 돈과는 무관한 좋은 전시를 기획하지 못해 안달했고,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술값과 용돈에 거리낌 없이 주머니를 털어온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없는 것 같다.

사업가는 세상의 가치나 사람보다 돈이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 돈 벌려는 자체가 인간성을 버리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될까?

가끔은 인연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할 때가 있다.
호연이던 악연이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헤어지며 인연을 맺어왔다.
함께 사는 아내를 비롯하여 가까운 벗들의 만남은 필연적인 숙명일 거라는 생각을 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좋은 일이나 싫은 일이나 이토록 가슴 조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길 바랄 뿐이다.

먼저,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이제하선생 그림부터 보고 싶었으나 ‘안동국시’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 곳에는 이제하선생 내외를 비롯하여 청백리 이 성 구청장도 계셨다.

이제하 선생은 20여 년 전 대학로에서 한 번 뵙고 처음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으나, 내가 생각해 온 모습과는 달랐다.

이제하선생 얘기가 숱한 술자리에 회자되었으나, 추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선생 역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계셨다.

전시오프닝 때는 지방에 있어 찾아뵙지 못한데다, 전시장에도 잘 나오시지 않는다고 했다.

어렵사리 만나뵈었으나, 그 날은 마무리 할 원고가 있다고 하셨다.

술을 드시지 않는 선생께서는 식사가 끝나자 곧 바로 차를 몰고 떠나버려,

선생의 문학과 미술세계에 대한 인터뷰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좌우지간 이제하선생과는 연이 맞지 않았다.










김명성, 이 성씨와 함께 안국동 ‘로마네 꽁티’로 자리를 옮겼다.
박인식씨가 꾸려 온 ‘농심마니’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30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 모임이라는데, 20여명이 모여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봄가을 매년 두 차례씩 전국에 산삼을 심어 왔으니, 이젠 곳곳에 산삼이 뿌리 내렸을 게다.

삼십년 전에 심은 산삼은 내 거시기만큼이나 컸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뜻밖에도 그 자리에 ‘한겨레’ 노형석 기자가 나타났다.

박인식씨는 올해의 사업계획을 알려 주었고,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노래도 들었으나,

흥이 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자정이 가까워 송상욱, 김명성, 노형석, 서길헌, 황예숙, 송미향씨 등 여러 명이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부터 신바람 난 송상욱선생의 가요 반세기 메들리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지나치던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도 합류하였다.

세시까지 소주를 퍼 마셨으니, 그 다음 날은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 흥겹던 자리가 진주기생 산홍이의 애환이 담긴 ‘세세연연’이 나오자 돌변했다.
처량한 구절구절들은 산홍이에서 자신의 생으로 오버랩 되었는지, 다들 슬퍼보였다.
김명성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말로만 전해들은 산홍이의 비극보다 훨씬 진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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