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감겨 하늘로 오르는 길… 수평적 인사동 길, 수직으로 연장


 

  • 서울 종로구 인사동 쌈지길 정면. 이곳 터줏대감인 12개의 상가가 단층의 형태로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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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 1.8~2.4m 완만한 경사로 외벽은 검은 전벽돌 사용 
    익숙한 인사동 골목길 재현 
    전통 간직한 열린공간으로 인사동 대로 걷던 사람들 
    자연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상업건물임에도 공공성 공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이라는 전통의 공간에 대형 쇼핑 공간이 들어선다는 우려도 잠시, 쌈지길은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다. 지난 2004년 12월 준공 이후 10여년간 쌈지길을 찾은 방문객들은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줄지어 있는 인사동 대로변보다 이곳에서 오히려 인사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쌈지길은 누구의 소유인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며 인사동의 역사가 된 곳이다. 

    인사동의 새로운 길이 된 건축 

     

    쌈지길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물의 전체적인 외형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가운데 위치한 마당을 중심으로 비스듬히 감겨 올라간 길을 기억할 뿐이다. 기울어진 바닥을 의미하는 '램프(Ramp)'는 쌈지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 건축물을 설계한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수평적인 인사동길이 수직적으로 연장됐다"고 표현한다. 인사동길 길이의 절반인 500m의 길이 쌈지길 1~4층까지 완만한 경사로 켜켜이 쌓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인사동 대로를 걷던 사람들은 발걸음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쌈지길 안으로 들어와 이 길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이 모습에 대해 박길룡 국민대 건축대학 명예교수는 '인사동길 늘리기(건축과 환경 2005년 6월호)'라는 글을 통해 "램프는 사람들을 내뱉었다가 들이마셨다가 뱉었다가 마셨다가 하기를 거듭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쌈지길의 폭은 좁게는 1.8m에서 넓게는 2.4m까지 다양하다. 이는 실제 인사동 곳곳의 골목길 너비를 반영한 것이다. 최 교수는 "인사동 골목에서 서로 살이 맞부딪혔던 것이 쌈지길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불쾌하거나 낯설지 않은 경험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붕 대신 인사동 전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개방된 형태로 만들어진 옥상

     

     

    박제된 전통을 넘어 

    인사동 자체가 전통의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는 탓에 처음 쌈지길을 설계할 때 한옥으로 지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건축가는 기와지붕·한옥 등 형태적인 측면에 집착하기보다는 도시가 품고 있는 내면의 측면들을 담고자 했다. 인사동 곳곳을 구성하는 재료들의 사진을 찍어 분류한 결과 건축물 외벽은 검은 전벽돌로, 내부는 노출콘크리트에 일부는 목재로 만들어 익숙함을 더했다. 특히 인사동만의 전통을 작은 골목길에서 찾아 그 길을 연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최 교수가 생각하는 전통은 '계승·발전하는 것'이다. 그는 "옛날 건물의 형태를 무조건 똑같이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사회·경제·문화적인 것들을 표출시켜야 전통의 계승·발전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영빈가든' 시절의 모습 중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1층 바깥쪽에 위치한 12개의 상가다. 영빈가든은 쌈지길이 들어서기 전 같은 위치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했지만 2001년 화재로 사라졌다. ㈜쌈지가 이곳을 대형 상업시설로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자 가게 주인들과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열두 가게 살리기 운동'에 나섰고 영업권을 그대로 보장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대지면적의 20% 이상은 마당으로 배치하고 건물 높이를 18m 이하로 제한해야 하는 등의 특별계획구역 지침 외에도 12개 상가를 원래의 단층건물 모습대로 되살려야 한다는 숙제를 안게 됐다. 결과적으로 쌈지길은 인사동 대로변과 맞닿은 바깥 부분에 12개 상가를 배치했으며 그 안쪽으로 오름길을 따라 70여개의 새로운 가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공공성과 상업성의 경계에서 

     

  •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 벽을 따라 휘감겨 있는 오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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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쌈지길 내 오름길은 건물을 상업적으로 더 돋보이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공공성을 갖추는 미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오름길은 경사도가 낮아 오르다 보면 1~4층이 아닌, 마치 같은 층을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모든 층이 1층과 같은 구매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최 교수는 "쌈지길은 공공건물이 아니라 상업건물이기 때문에 모든 층이 장사가 잘 되는 건물이 되기를 원했다"고 밝혔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길의 특징은 사람들이 쌈지길을 더 편안하게 찾게 함으로써 건축물이 아닌 인사동의 일부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2006년 쌈지길 유료화 소동은 대중이 이곳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 앤디 워홀 전시회를 열면서 입장료 3,000원을 받으려고 하자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사유재산인 쌈지길이 입장료를 받더라도 사실 문제가 될 이유는 없지만 대중은 이곳을 공공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건축물을 지을 때 공공성과 상업성을 어떤 관계로 놓을지, 경계선을 어디에 둘지는 건축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숙제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저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건축의 공공적 가치가 시장자본주의의 가치와 항상 갈등과 모순 관계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쌈지길은 두 가지가 한 공간에서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가게가 상업적으로 활발하게 운영되면서도 그곳에서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까지 편안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쌈지길이다. 최 교수는 "특정 건축주를 위해 상업 건물을 지었지만 다른 이들까지 공공적인 측면에서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건축가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이라며 "작은 건축가·건축주의 노력이 모이면 그 도시는 좀 더 나은 도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독립된 세계 vs 내외부 소통

     

    오름길 설계 韓美日 세 건물 '같은듯 다른 모습'

     
    쌈지길과 비슷한 건축물로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일본 도쿄의 오모테산도 힐스가 꼽힌다. 세 건물 모두 비스듬한 경사길을 따라 방문객들이 건물을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세 건축물의 오름길은 같은 듯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과 오모테산도 힐스는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건축물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에 따라 건물 내부에 마련된 길을 걷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우 스프링처럼 감겨 올라간 길을 따라 미술품이 전시되기 때문에 방문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 걸어 내려오면서 작품 감상을 하는 구조다. 일본의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스는 쌈지길과 마찬가지로 오름길을 따라 상점들이 배치돼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더 내향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계한 또 다른 건축물인 서울 동작구 숭실대 학생회관은 다양한 폭과 기울기의 경사로가 건물 내외부를 연결하는 구조다. /서울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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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예를 들어 비가 왔을 때 오모테산도 힐스에 가면 우산을 접고 들어가겠지만 쌈지길에서는 우산을 쓰고 그대로 걸어야 할지 접어야 할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며 "쌈지길은 이곳이 건물인지 인사동 어느 골목 어귀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독특한 점"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서울 동작구 숭실대 학생회관도 다양한 폭과 기울기를 지닌 나선형의 경사로를 이용해 설계했다. 최원준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학교건축의 길을 통해 이르다'라는 비평을 통해 "운동장을 제외한 캠퍼스의 모든 부분에서 이 건물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길들의 흐름으로 인식된다"고 설명했다. 
     
    쌈지길과 숭실대 학생회관 모두 길의 연결을 통해 내·외부가 더 소통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최문규 교수는 "모든 것들이 주인공만 하려는 세상 속에서 건축은 다른 입장이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며 "멋진 건물보다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경제 / 권경원기자 naher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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