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애를 업고 다니냐?’

 

지금은 남자들도 애를 보지만, 옛날에는 쪽팔리는 일이었다.

조롱하는 친구의 동작과 쑥스러워 하는 표정이 너무 정겹다.

등에 업힌 어린애의 눈길 한 번 보라.

이게 사는 재미고, 이게 사진이다.

 

1972년 이수종선생께서 찍은 사진을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동생을 업고 공부하는 학생

 

학교에서 동생을 등에 업고 공부하는 걸 생각이나 해 보셨나요?

모두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힘들게도 배웠다.

너무 많이 배워 탈인 요즘 보니, 아픈 추억도 그 때가 그립다.

 

부천의 김수열선생이 1974년 낙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고삐 풀린 소

 

소 몰고 나온 소녀에게 이변이 생겼다.

왜 소의 고삐가 풀렸을까?

안간힘을 다해 소꼬리를 움켜진 소녀의 표정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다.

 

1968년 장지영선생께서 포착했다.

‘동아사진컨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한정식선생의 “Don’t go!”

 

이 사진은 한정식선생께서 아마추어로 활동하시던, 1968년에 찍은 사진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한 사진이다.

지금은 선(禪)에 가까운 사진을 하는 선생의 사진세계를 헤아린다면,

너무 재미있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해학적인가?

특히 외래어 쓰는 것을 싫어하는 선생께서 “Don’t go!”라는 사진 제목을 붙인 것도 이례적이다.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 작품집’에서 옮겼다.

 

 

봄 사건 났네.

 

모처럼의 봄나들이에 마냥 즐겁다.

봄바람에 치마만 날리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날린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1966년 봄에, 진주의 이영달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꽃 팔러가는 처녀들

 

아침 햇살을 머리에 이고 꽃 팔러 나서는 처녀들의 뒷태가 너무 정겹다.

70년 전 임응식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의 처녀들은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셔도 백수가 가까운 할머니들이다.

임응식 선생께서 부산 계실 때는 주로 광복동에서 활동하셨으니,

아마 국제시장으로 국화 팔러 가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응식회고 사진집'에서 옮겼다.

 

 

그 시절이 그립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풀풀 날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 당시는 길을 오가며 흙먼지께나 뒤집어썼다.

때로는 자동차바퀴에 튄 자갈에 맞아 이마가 터지기도 했지만...

 

1962년 부산의 김복만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해방의 순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 사진가 현일영선생께서 찍은 감격의 순간이다.

 

"광복60년, 사진60년 / 시대와 사람들"도록에서 옮겼다.

 

 

여기는 마포 종점이 아니라 마포 나루터다.

 

1945년도 정남영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다.

.

'한국사진역사전' 도록에서 옮겼다

 

 

북녘, 도심의 한 모습이다.

 

유령의 도시처럼 텅빈 거리와,

군복을 입은 아버지 가슴에 안긴 애기의 모습에서 찡한 인간애를 느낀다.

 

1997년 평양에서 찍은 Martin Parr 사진이다.

-PRESTEL- 'A YEAR IN PHOTOGRAPHY'에서 옮겼다.

 팜프렛 표지에 실린 찬조출품작 

김정일 /120cm x 85cm Achival pigment print 2018

 

 

‘안국동 '밝은 방’은 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몇 년 전 사용한 작업실이다.

2016년 제자 김정일씨가 ‘밝은 방’에서 개강한 사진아카데미에,

후배들이 한정식선생께서 추구한 ‘고요’를 모티브로 창작의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 ‘존재는 고요하다’전이 지난 29일부터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에서 열렸다.

 

노재학 / 사진을 찍는다 / 120cm x 80cm Achival pigment print 2016

 

 

이 전시는 노재학, 박설림, 장성자, 조헌윤씨가 참여하고,

김정일씨가 찬조 출품한 23점으로 구성되었는데,

원로사진가 한정식 선생 ‘고요’의 모방일 수도 있고 오마주이기도 하다.

다양한 시도를 통한 ‘고요’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전이라 할 수 있다.

 

노재학 / 사진을 찍는다 / 150cm x 100cm Achival pigment print 2016

 

 

한 선생은 70년대 ‘나무’에서부터 2000년대 이후의 ‘고요’ 연작에 이르기까지

오 십 여년을 사진의 추상성에 집착해 온 분이다.

선생의 성함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은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박설림 / 규정되지 않은 사물을 추상하다 / 120cm x 80cm Achival pigment print 2018

 

 

“이게 선(禪)의 경지구나”라고 느껴질 정도의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합쳐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다.

사물이 부유하는 느낌이 일거나, 때로는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가는 무위의 사상을 일깨우게도 한다.

 

조헌윤 / 틈을 비집고 시작된 존재 / 120cm x 80cm Achival pigment print 2019

 

 

이번 전시에서 한정식선생의 대표작도 함께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작품을 보관했던 수장고 화재로 불발에 끝났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뒤늦게 접했다.

 

조헌윤 / 틈을 비집고 시작된 존재 / 120cm x 80cm Achival pigment print 2019

 

 

한정식선생께서 몸이 불편해 전시장에 나올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마치 선생을 대하듯 반가운 마음이 일었는데,  빠른 쾌유와 건강을 기원한다.

'눈빛출판사'에서 선생님의 '포토에세이'를 편집하고 있다는데,

책 나올 때는 완쾌하여 인사동에서 술 한잔 올릴 수 있게 하소서!

 

장성자 / ~좋았더라 / 100cm x 56cm Achival pigment print 2017

 

 

마침 정영신씨 방에 걸린 한정식선생의 작품 ‘도갑사‘ 한 점을 대신 소개한다.

이 작품은 선생께서도 좋아하셨지만, 보면 볼수록 정적감이 느껴지는 명상적 작품이다.

절집에서 공양시간을 기다리다 안내된 방이라고 한다.

 

한정식 / 영암 월출산 도갑사 1986

 

 

이 전시는 8월4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전시장에서 만난 출품작가 노재학씨

 

 

 

 

 

 

 

 

 

 

 

 



한정식선생께서 인사동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서초동 자택으로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까운 분들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을 베풀었으나, 올 해는 그 모임도 갖지 못했다.

초여름에 한번 찾아뵌 후로 정영신씨를 통해 간간히 안부나 전해 들었는데,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일 뿐인데, 소심한 성격이 병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5-6년 전에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는데, 모두 생각의 병이고 마음의 병이다.

우울증에는 대마가 최고의 명약이라고 권했으나,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찾아 뵈어야 할 것 같아, 지난 19일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자택에 들린 적이 있으나, 갈 때마다 내비에 의존해 잘 몰랐는데,

그 곳이 몇 달 동안 검찰개혁하자며 주말마다 쫒아 다녔던 검창청 옆이었다.

육개월 만에 뵌 선생의 모습은 더 수척하셨고, 사모님은 오히려 좋아진 것 같았다.
외출은 물론 책도 전혀 못 보시고, 사모님 귀가 어두워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잘 때마마 수면제에 의존해야하는 처지가 지겹다고 했다.

식탁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 때가 가장 좋았던 꽃 시절이라고도 했다.

죽는 것도 어렵다며, 생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여전하셨다.

“검찰청이 선생님 댁 지척에 있는 걸 미쳐 몰랐네요”라고 말했더니, 나더러 ‘집회에 왔냐?“고 물었다.

”당연히 와야지요“라는 나의 대답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화제를 돌리셨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선생님댁 거실과 연결된 정원이 연립 주택 공용이 아니고 전용 이었다.

연립주택에 그렇게 넓은 정원이 조성된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한 쪽의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만해도 손자들이 저 곳에서 놀았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워했다.




한정식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어우러져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지만,

이젠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인다.




선생께서는 재력이나 명성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죽고 나서의 명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황혼기의 삶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은 되었건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건만, 마음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파출부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지 않아 점심 한 끼는 늘 외식을 한다고 하셨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며 생선구이 전문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잔 걸음이지만 걷는 데도 지장 없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외출이라도 가끔 하시면 저녁에 잠들기가 훨씬 쉬울 것 같건만,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으로 가까운 지인들 불러 모아 생신 잔치라도 한 번 마련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원로 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다.
인사동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자택에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가까워 온다.
해마다 신년만 되면 가까운 분들을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회를 베풀었으나,
올해는 나오실 수가 없어 못한 것이다.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않아 문안드리고 싶었으나 그마저 사양하셨다.





지난 16일 모처럼 정영신씨의 주선으로 한정식선생 댁을 방문하게 됐다.

사모님과 함께 계셨는데, 한 때는 사모님이 더 위중하셨으나, 이젠 선생님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잠을 통 주무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술도 수면제도 통하지 않아, 용하다는 한의원마다 다녀보았으나 소용없었다고 하셨다.

소문난 대부분의 한의사나 침술사들이 엉터리라 믿을 수 없었단다.

의사의 치료나 처방을 받아보면 대개 그 속내가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술수를 훤히 알아 믿지를 못하니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이라도, 믿는 환자는 나은 사람도 있었다는데...



 


외출도 멀리는 못하지만 가까운 곳은 조금씩 움직여 외식 정도는 드시러 가셨다.

인근의 고기 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드시는 데는 전혀 지장 없었다.

식사 도중, 댁으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화가 왔는데 사전에 약속을 했다고 하셨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선생님의 북촌사진을 소장하기 위해 찾아 온 단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니, ‘예술종합상사 봄을 운영하는 문화기획가 이일우씨와

역사박물관학예사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둔 견본 사진들을 보여주며, 모두 가져가 필요한 사진을 고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 장을 매입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머지 사진을 기증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평소에 선생님께서도 원고료 없이 주는 사진이나 사진 기증하는 문제는

어렵게 작업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날은 묵묵부답이셨다.



 


추측컨대, 사진하는 제자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드셨거나,

아니면 오래 사지지 못한다고 생각되니 확실한 곳에 넘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님들이 자리를 떤 후 선생님께 간곡하게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 절대 사진을 그냥 주지 마십시오. 힘들게 사는 후배들의 희망이 끊깁니다.”고 했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곤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다큐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면 그 구멍마저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 국가 기록사업은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돈과는 무관한 기록 사진 찍느라 가정이 파탄되거나 온갖 어려움을 겪는 사진가들이 많으나 정부에서 도와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도 대개 버텨내지 못하고 전업하는 실정이다.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지만, 모든 걸 희생하며 찍어 온 결과물을 털도 뽑지 않고 통째로 먹겠다는 게 말이 될 소리냐?

어떻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사는 사진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려 하는가?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쓸려나가도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사라지고 만다

이제 정부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처해야 되겠지만, 담당 공무원들도 실적 위주로 그냥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진인들도 개인적인 이해득실보다 다른 사진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하기야! 사진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사진인을 등쳐먹는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대개 사진라이브러리 운영하는 사람들인데, 정직하게 계약대로 주는 경우는 더물다.

맡긴 사진의 판매된 곳을 알 수 없으니, 도용이 발각되어야 변명하며 돌려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 여지 것 사진라이브러리를 불신하여 한 번도 원고를 맡긴 적이 없으나, 8년 전 믿을 만한 사진후배의 부탁에 처음 주었다.

유로 크레온이란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다며. 외국 포토에이전시와 연결되어 잘 팔릴 거라는 막연한 말을 믿었다.

전통문양이나 불교문화에 관한 팔릴만한 많은 사진들을 주었는데, 여지 것 감감소식이다.

물론, 팔 년동안 한 컷도 팔리지 않아 돈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전화는 물론 우편물 한 장 받은 적이 없다.

 

더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전모씨와 동업했는데이해관계로 전씨가 먼저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로 크레온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고, 두 사람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사업을 접었다면, 최소한 사정에 의해 폐업했다고 통보하며 원고라도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지 것 그의 체면을 보아 기다렸지만, 이젠 소송절차를 밟기로 했다.

나 혼자만의 피해가 아니라 많은 사진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유로 크레온은 물론 다른 라이브러리에서도 피해를 본 사진가는 모두 나서자.

힘을 합쳐서 기어이 손해배상을 받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사진인들의 원고를 사후에 한 곳에 기증하여 보관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자.

그 곳에서 다양한 원고를 관리 판매하여, 가난한 사진가들의 작업비나 사진인 복지에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

많은 사진가들이 참여하여 투명하게만 활용한다면 정부에서 활용하는 것 보다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고,

그 수익금으로 미래의 사진가들을 도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물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도 평생의 기록물을 흔쾌히 기증하겠다고 답했지만,

원로사진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원고 기증을 권할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 사진가들의 삶이 나아지고, 우리나라 사진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찾아야지,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8일 군위장에서 포항의 사진인들을 여럿 만났다.
지난 십월 "사진의 섬 송도" 호텔 아트페어 때 만난 분들이다.
‘경북 삶 사진연구회’의 정남호회장과 진영대, 박성두씨 일행이었다.
처음엔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야기를 해보니, 그 때 뵌 적이 있었다.





다들 카메라를 두 대식 메고 있기에, 평소의 궁금증도 물어 보았다.
“요즘은 디지털시대라 흑백과 컬러를 같이 쓸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두 대씩이나 메고 다니는 이유가 뭡니꺼?”했더니,
렌즈 갈아 끼우기 귀찮아 그런다는 것이다.






카메라 많이 메고 다니던 분이라면,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홍순태선생이 계셨다.
필름 종류별로 대 여섯 대를 주렁주렁 훈장처럼 메 달고 다니시던 모습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
옆 카메라와 부딪힐까 걱정도 되었는데, 좌우지간 사진도 많이 찍었고, 전시도 많이 하셨다.
역사가 된 좋은 사진도 있지만, 나머지 사진들은 다 어쨌는지 모르겠다.






선생께서는 세계각지를 열심히 돌아다녔으나, 그만 고산병에 걸려 고생하다 운명하신 것이다.
후반기에는 동영상 카메라까지 갖고 다니셨는데, 카메라 무게에 골병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육명심, 한정식선생은 한 대의 카메라로 없는 듯 작업했다.





한국 사진계를 좌지우지했던 삼 교수 중에 먼저 떠난 분도 홍교수였고,
사진 평가도 두 선생보다 덜 되었지만, 후세에는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다.
결국은 붓에 불과한 카메라보다 생각이 먼저라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일거리용 카메라와 흑백 필름 카메라를
두 대씩 갖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요즘이야 콤펙트 카메라 하나만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니, 너무 자유롭다.
상업용만 아니라면, 사진의 질도 전지 프린트를 해도 전혀 하자가 없다.
상대에게 위화감 주는 기관총보다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권총이 좋다는 생각이다.






장에서 사진인을 만났더니, 장터 이야기가 아니라 카메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군위장과 영덕장으로 이틀 동안 싸 돌아다녔는데,
요즘 다니는 정영신씨의 장터순례는 사진 찍는 일보다 이야기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군데 군데 모닥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 문화유적지도 꼼꼼히 돌아보는데, 군위하면 석굴에 안치된 ‘마애삼존불’과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계셨던 ‘인각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영덕에는 창수면에 있는 ‘장육사’가 인상 깊었다.
눈여겨 볼 곳은 대웅전과 그 안에 안치된 건칠보살좌상과 영산회상도였다.






그런데, 영덕까지 가서 영덕대게를 맛보지 못하다니...
“에라이~불쌍한 것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0일 황규태선생께서 점심을 산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강사진상’을 받아 한 턱 쏘는 것 같았으나,
이러다 신용카드 구멍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상금도 사진계 발전을 위해 주최 측에 희사하셨는데,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내심 걱정되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도 엄상빈씨와 이한구씨에게 전화해
남아있는 후배들을 위해 충분히 대접하고, 영수증만 달라하지 않았던가.






약속장소인 ‘한일관’에는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한정식선생, 엄상빈, 이한구, 이규상, 이창남, 곽명우씨가 나왔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따끈따끈한 김용철씨의 ‘경의선’ 사진집을 가져 왔더라.

오랜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좋은 사진이었다.


황규태선생께서 맛있는 갈비에다 냉면, 그리고 소주까지 사 주셨다.
그 날의 화제는 단연 ‘동강사진상’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 기절초풍할 일이 많더라.






몇년 전 노순택씨가 수상할 때 티셔츠 차림으로 참석했단다.
그런데 시상식에 참석한 사진가 윤주영선생께서
‘수상자 차림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영월장에 가서 촌놈 가다마이를 사 입고 상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도 오셨다면, 황규태선생도 영월장에 가실 뻔 했다.
황규태선생도 청바치에 티셔쳐만 걸치고 오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강홍구씨가 상을 받을 때의 일이다.
수상자가 결정된 후, 주최 측에서 작가에게 연락했더니,
강운구씨를 잘 못 알고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단다.


나 역시 받을 군번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심사위원들의 귀띔도 없었을까 의뭉스러웠다.






또 하나는 작년에 수상한 정동석씨 일이다.
당시 병원에 있어 상도 아들이 대신 받았다는데,
문제는 수상자전이 끝난 후, 반송하는 과정하서 작품이 손상된 것이다.
작가가 문제를 제기했으면, 배상하거나 사과해야 할 텐데,
운영위원장이 병원에 찾아와 오히려 작가를 나무랐단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아, 법정에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참 별일들이 많다.
사진박물관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허술하게 다룬다는 것도 그렇지만,
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되 씹는 시간이 되었다.
사진상을 심사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얼마나 전지전능하신 신의 심사위원인지도 궁금했다.






이제 상의 운영규정을 이원화해야 한다.
문제되는 것은 다 돈 때문이다.

더 이상 사진가들이 반목하는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상금은 가난한 젊은 작가들의 창작지원금으로 주고,
사진에 대한 가치나 공적을 높이사는 상은 명예만 주어야 한다.






그 날 이규상씨도 말했다.
일찍 황규태선생께서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께 상을 거절하라고 말리려했으나,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황규태선생께서는 진작 상을 받아야 할 분이었으니, 마지막 좋은 선례로 남기자,
어차피 상금도 받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상 때문에 사진인들 조롱거리를 만들지 마라.

더러운 꼴 그만 보고 싶은데, 목숨이 너무 질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4일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술 마시는 호기를 부리다 혼쭐 난 날이었다.

인사동에서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서 24시간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잤다.

당분간 술과 담배를 자제할 작정이나, 생각을 따라주지 않으니, 한 낱 구호에 불과하다.



 


병원에서의 허송세월로 밀렸던 봄의 일정을 서둘러야 했다.

강진과 정선에도 가야하지만, 중간 중간 서울에서 할 일도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이 스스로를 위한 일인지,


남을 위한 일인지도 분간 되지 않고, 하지 않는다고 문제생길 일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길들어왔던 관습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 귀찮은 관습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른다.




 

16일은 한정식선생의 생신날이라 오찬모임에 가야 했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최경자여사 전민조선생 등 네 분이 만나는

조촐한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나, 갑자기 전민조선생께서 일이 생겨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약 인원수를 맞추느라 계획에도 없던 내가 끼이게 되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최근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병원에 입원한 후로,

매년 치루어 왔던 생신 오찬회를 그만두겠다고 하셨으나,

정영신씨가 손사래를 쳐 자리를 만들었으니,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데다.

불편한 몸으로 긴 시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어떠하든, 정영신씨를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한정식선생의 인사동 작업실을 찾아 그동안 못들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사모님 걱정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습이 역역했다.






지난 해 사별하여 홀로 계신 이명동선생님의 초라한 모습을 늘 안쓰러워 하셨는데,


사진가 이완교선생 까지 사별하시어, 더 힘든 것 같았다.

이완교 선생께서는 사별한 후, 그리도 구슬피 울었다는 말씀도 전해주셨다.

혼자 남는다는 외로움의 웅덩이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일이다.





오찬장인 이화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께서는 운동 삼아 늘 걸어 다니시는 구간이지만,

, 힘들어 택시를 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식당으로 가다 테라로사에 계시던 강운구선생과 이갑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그 다음 일정은 자하문로에 위치한 이안의 개관전시에 참석하는 일이다.

개관전으로 치루어지는 더레퍼런스 #1 : Asia Art Book Library였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중국, 대만 등 아시아 5개국의 아트북 241권을

5명의 작가들이 국가별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는데, 나에게는 좀 생경스러웠다.





발행인 김정은씨를 비롯하여 한정식, 황규태, 박진영, 박지숙, 김다울씨 등

여러 명이 행사장에 있었으나, 전시된 다양한 출판물들만 살펴보았다.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어, 인사동에서 기다릴 작정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디프레스 갤러리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호련씨의 'collaged image'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쇼케이스에 걸려있는 작품 한 점에 나도 모르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전시장에는 작가는 물론 안내하는 사람조차 없었으나,

혼자서 두 개 층에 걸린 작품들을 훔쳐보듯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젊은 여인들의 자유스러운 동작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사진 같은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림인데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여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관음증적 욕망을 끌어내는 이 은밀한 엿보기는

보는 이에게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흥분까지 불러 일으켰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물장난을 치거나, 작업에 몰입하거나,

누워있는 다양한 상황이 연출된 모습을 일방적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

철저하게 시선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이면서도 허구이자 사실적이면서도 어딘지 추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많은 사내가 젊은 여인을 훔쳐본다는 생각에 이르니,

요즘 부는 미투의 휘오리에 휘말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생겼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서평에 이렇게 썼다.

작가가 그린 신체는 단지 대상의 닮음 꼴에 그친 도상,

대상의 외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감각이고 대상의 신체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나름 강렬하게 감각하고 욕망화한 것, 체험한 신체의 대상화이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신경, 감각을 다분히 건드리는 그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저기에 있다.

그림 안에서 유령처럼, 환각적인 존재인 냥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체이면서도 물질적 존재감 없이 몽롱하게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저 존재성은

욕망의 대상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방증하는 회화적 제스처로 다가온다적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독특한 체험의 전시였는데, 오는 3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다.



 


지름길인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들어섰는데, 정영신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아보니, 한정식 선생을 모시고 내가 가는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살다보면, 우연하게 통하는 일도 많다.

인사동에서 한정식선생을 배웅한 후, 유목민에 잠시 들렸다.

갈증도 풀 겸, 화장실에도 들려 잠시 쉬고 싶었다.



 


그 다음의 일정은 태국에서 귀국한 고영준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40년 지기의 사우였지만, 사업장을 태국으로 옮기고 부터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는데,

이틀 뒤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귀국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주말에 강진으로 떠나야 했으나, 그 결혼식 때문에 연기한 셈이다.

그를 만난 김에 축의금만 전해주고, 결혼식은 빠질 심산이었던 것은

축의금이래야 두 사람 밥값도 미치지 못하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약속장소인 멕도날드에 들렸더니, 고영준씨 뿐 아니라

오래된 사우인 유성준씨와 최성규, 김흥묵씨도 있었다.





40여년 전, 인사동에 있었던 꽃나라라는 흑백 암실에서 만나기 시작한 분들인데,

오랫동안 하는 일이 다르고, 사진에 대한 생각마저 달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지만,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분들이다.



 

 

그러나 우연히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당시 만난 많은 선배들이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소식도 접했다.





한 평생 누드를 찍어왔던 정운봉 선생을 비롯하여,

백로사진을 열심히 찍던 경찰서장 출신의 이봉하선생,

사진계 소식지를 만들어 사진인들에 돌렸던 정철용씨,

작년 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인사동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던

이기윤씨 등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떠나는 구나

안타깝고 허무했으나, 나 또한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쓴 웃음이 흘렀다.



 

 

고영준씨는 태국에 살지만, 폐친이라 나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글에 마음이 아렸던지, 자신의 카메라를 싸 들고 왔다.

난 이미 카메라를 구했고, 다른 카메라는 잘 사용하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인정에 콧 잔등이 찡했다.



   



다들 툇마루에 가서 된장비빔밥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는데,

술 한 잔 하자는 인사법에서 밥 한 그릇 먹자는 인사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여섯명이 소주 한 병으로 끝냈는데, 겨우 반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니, 입만 버린 셈이다.

밥값은 정영신씨가 내고 생색은 내가 내는 이 웃기는 짜장면은 또 무얼꼬?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해가 바뀔 때마다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마련하는 신년 오찬회가 인사동에서 열린다.

십년이 넘었건만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다, 매번 밥 값을 한정식선생님이 낸다는 것이 송구스럽다.






매년 1월에 치루어졌으나, 올 해는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위급한 상황이 생겨 어렵사리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년 말, 폐렴으로 입원하신 사모님께서 이틀 만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인 며느리의 응급대처로 삼성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숨을 거둔 분을 기적적으로 살려 놓았다는 것이다.

최고의 의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사람도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어, 한 숨 돌렸기에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 말이 생각난다.





지난 2일 정오무렵, 인사동 ‘수연’에서 가진 모임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생수, 이규상, 엄상빈, 김보섭, 이재준,

최경자, 정영신씨 등 아홉 분이 함께했다. 그 날 전민조씨는 집안에 응급환자가 생겨 모임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김기찬선생의 미망인이신 최경자씨는 요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바쁘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날의 화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가 많았다.
주로 정식과 생수 두 분께서 배고팠던 시절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름자로 보면 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휴지가 귀한 시절이라 신문지를 잘라 화장실에 걸어 둘 땐데, 한 번은 화장실에 갔더니 이태준선생 소설책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책도 마음대로 사 볼 수 없는 시절이라 가져가서 감명 깊게 읽었다며, 화장실습득 1호로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하셨다.






디지털카메라 기능에 대해 해박하신 김생수씨는 최경자씨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었는데,

단종된 NIKON Coolpix P310카메라를 구할 수 없냐고 여쭈어 보았다.

지난 년 말, 노숙하는 이종민씨와 술 마시다 도둑맞은 카메라인데, 기능도 뛰어 나지만 손에 익은 카메라였다.

컴펙트카메라가 없으니 사진을 못 찍을 경우가 종종 생겨 여러 번 카메라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가져가 팔 수도 없는 고물카메라이기도 했지만, 중고를 사도 몇 만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아쉬워했더니,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알아보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오만원을 내 놓으며 좀 구해주라고 부탁하는 통해, 엄상빈씨가 짐을 떠안게 된 것이다.






염치없지만, 그 카메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뒤늦게 알아보니 중고가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카메라점을 잘 아는 후배 사진가 마동욱씨 에게 한 번 알아보라고 부탁한 모양인데,

오찬 자리에도 없었던 마동욱씨 까지 카메라 구하는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마동욱씨가 십만원, 엄상빈씨가 오만원, 정영신씨가 오만원을 보태어, 25만원에 그 카메라를 구해 준 것이다.





아무튼 한정식선생의 신년오찬회 덕에 반가운 분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도 가졌지만,

한 달동안 고민하던 숙제가 해결된 고마운 자리였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 카메라로 사진이나 많이 찍어드렸으면 좋을텐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은 사진 찍을 때마다 도움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세길 작정이다,






오찬회가 끝난 후, 엄상빈, 이규상, 김보섭, 이재준씨와 함께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용문 도판화전에 들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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