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선생께서 인사동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서초동 자택으로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까운 분들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을 베풀었으나, 올 해는 그 모임도 갖지 못했다.

초여름에 한번 찾아뵌 후로 정영신씨를 통해 간간히 안부나 전해 들었는데,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일 뿐인데, 소심한 성격이 병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5-6년 전에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는데, 모두 생각의 병이고 마음의 병이다.

우울증에는 대마가 최고의 명약이라고 권했으나,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찾아 뵈어야 할 것 같아, 지난 19일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자택에 들린 적이 있으나, 갈 때마다 내비에 의존해 잘 몰랐는데,

그 곳이 몇 달 동안 검찰개혁하자며 주말마다 쫒아 다녔던 검창청 옆이었다.

육개월 만에 뵌 선생의 모습은 더 수척하셨고, 사모님은 오히려 좋아진 것 같았다.
외출은 물론 책도 전혀 못 보시고, 사모님 귀가 어두워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잘 때마마 수면제에 의존해야하는 처지가 지겹다고 했다.

식탁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 때가 가장 좋았던 꽃 시절이라고도 했다.

죽는 것도 어렵다며, 생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여전하셨다.

“검찰청이 선생님 댁 지척에 있는 걸 미쳐 몰랐네요”라고 말했더니, 나더러 ‘집회에 왔냐?“고 물었다.

”당연히 와야지요“라는 나의 대답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화제를 돌리셨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선생님댁 거실과 연결된 정원이 연립 주택 공용이 아니고 전용 이었다.

연립주택에 그렇게 넓은 정원이 조성된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한 쪽의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만해도 손자들이 저 곳에서 놀았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워했다.




한정식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어우러져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지만,

이젠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인다.




선생께서는 재력이나 명성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죽고 나서의 명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황혼기의 삶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은 되었건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건만, 마음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파출부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지 않아 점심 한 끼는 늘 외식을 한다고 하셨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며 생선구이 전문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잔 걸음이지만 걷는 데도 지장 없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외출이라도 가끔 하시면 저녁에 잠들기가 훨씬 쉬울 것 같건만,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으로 가까운 지인들 불러 모아 생신 잔치라도 한 번 마련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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