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한정식展 / HANCHUNGSHIK / 韓靜湜 / photography 

2022_0119 ▶ 2022_0303 / 일,공휴일 휴관

 

한정식_고요 I016 연천 2012_114×114cm

 

초대일시 / 2022_01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www.kpgallery.co.kr

 

 

KP Gallery에서 2022년 1월 19일부터 3월 3일까지 '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한정식 사진전을 개최한다. 한국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한정식은 '고요'의 미학을 완성한 사진가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적 사진예술'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로 선정되어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들을 소개하는 『한정식_고요』 전시를 2017년 개최하였다.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114cm

한정식은 과거 대상의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 본질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구를 "고요" 작품들을 통해 소개하였다. 이번에 새롭게 소개되는 작품들은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내면의식을 추상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사진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한정식은 그의 관념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본질을 사진적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소개하며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주제(theme)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성을 사진 위에서 지워 사진 그 자체를 제시하여야 한다." 라고 그가 지닌 '고요'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 KP 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정신미학과 고유한 문화정체성 위에서 한국사진예술의 근간이자 토대로서 의미있는 역할들을 제시하는 한정식 작가의 '고요' 작품들을 소개하고 사진예술을 통해 사진 본연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KP 갤러리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114cm

공상(空像, 空相),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 한정식 작가는 사진 자체가 진리(본질)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사진을 대할 때 엄중하고 엄격한 절차를 중시하고 사진이 담아야 할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형식과 내용이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견지했다. 「고요」가 전시되고 사진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때마다, 세계-대상-피사체의 동일성을 지향한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의미로 꽉 찬 사진 재현은 좀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감각과 지성이 교차하고 선명하게 흔들린 멈춤, 혹은 구체적인 상 속의 떨림 같은 비의(秘意)적인 자유가 흐른다. 무엇일까. 이 내밀한 이미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 '있는' 사진. 한정식 작가의 미발표작에는 그러한 것들이 (고요 속에서)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바로 공(空)이었다.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114cm

한정식 작가의 사진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이것은 공(空)이다! 이 텅 빈 이미지는, 놀랍게도 작가가 그동안 발표했던 '고요' 시리즈를 촬영한 필름 곳곳에, 사이에, 끝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세상에 전시될 선택권을 놓친(받지 못한) 사진이다. 이 사진 옆과 위와 아래…에 있던 사진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면 이 사진들은 오랜 시간 빛을 머금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그때 그곳의 빛을 기억하며, 사진의 시공 속에 고요히 머물렀다. 한정식 작가의 기발표작이 사진의 본질에 닿으려는 욕망에 충실했다면, 선택받지 못한 이 사진들은 '고요'의 의미도 모르고 다만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찍은 채 숨 쉬고 있었다는 것. 이번 전시는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공상(空像, 空相)이 드러나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명명한 '세계-내-이미지'와 '공상(空像, 空相)'은 한정식 작가의 작업 세계의 근간을 이룬 불교의 연기설에서 영향을 받은 말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에 의해 의미 지어지거나 의미가 지워지고, 존재는 세계 속의 인연(因緣)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설의 요지이다.

 

한정식_고요 F014 홍천 2008_114×114cm

다양한 존재가 다기하고 다채롭게 움직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고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즉, 학습 받은 데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드러낸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는 공(空)으로, 노자는 도(道)라고 일컬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이 '공상(空像)'이고, 모든 상(像, image)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공상(空相, co-existence)이다. 모두 세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한정식_고요 H052 하선암 2011_114×114cm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무엇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카메라의 광학적 작용과 그곳에 있었던 대상, 공간의 상호침투로 만들어낸 이미지다.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면 추상(抽象)이라 하겠지만, 단순히 상이 있고 없고(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노자가 이 이미지를 본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구상과 추상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구상(具象)은 상(象)을 갖추는(具) 것이고 추상(抽象)은 여러 부분 중에 하나를 뽑아낸(抽) 낸 상(象)이다. 구상은 추상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 추상이 구상이 될 수도 있는, 둘은 사실 한 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구체적인 상이 보이지 않거나, 구상의 반대 항에 추상을 놓지만, 이항 대립적으로 둘을 해석하려고 할 때 언어 프레임에 갇히는 형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별개일 수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둘은 서로 의지, 보충, 보완하며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말과 침묵, 양달과 응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이미지. 한정식 작가의 텅 빈 이미지는 '모든 것의 이미지'로 관객과 함께 공상(空相)하고 공생(共生)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사진이다. ■ 최연하

 

한정식_G066 화엄사 2010_114×114cm

영혼에 닿도록 '고요'한 ● '고요'한 한낮이었다. 어느 '고요'에서는 나뭇잎 하나 물에 떴다. 물 속 그림자 한 점 물고기 되어, 물 바깥 햇살 우러르며 헤엄친다. 또 다른 '고요'에서는 물이 가득 찬 하늘로 돌이 떠오른다. 그 돌은 부석사로 날아가려는 걸까? 물보다 공기보다 가벼운 돌을 본다. 물이 돌알을 낳고 있다. 난생설화는 공기 속에도 있다. 물이 사랑으로 돌을 들어 올렸고, 또 돌은 물의 영혼으로 제 마음을 비워 차츰차츰 가벼워진다. 그런 초현실을 현실로 사고 있는 사물들의 세상이 한없이 고요하다. 사물들의 영혼이 그 고요를 징검다리 삼아 이웃으로 나들이 다닌다. ● 앙리 부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외과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 했다. 한정식의 '고요' 작품을 처음 본 날, 부르통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초현실주의 정의를 다시 썼다. 많은 '고요'들은 순수사진이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 있지만 묘하게도 초현실로 가는 추상이다. 그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관심두지 않았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존재들은 그의 사진 눈빛을 받지 않게 된다. 물과 공기처럼, 자연과 일상에서 늘 함께 살아가면서도 의식하지 않았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불러내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모든 사물에 고정된 이미지를 벗겨 내려했다. 이름을 바꿔 불러주려 했다. '고요'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무기물이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어떤 감정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뭣보다 자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인간이 아닌) 사물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또 작가 자신의 마음밭이 그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조건 또는 어떤 상태가 '고요'였다. 그 고요는 오직 고요만으로 소통되고 교감되었다. 자신의 내면이 대상의 내면만큼 고요해질 때, 그는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라고 속삭이는 그때, 바로 그때, '고요'가 태어났다. ■ 박인식

 

 

Vol.20220119b | 한정식展 / HANCHUNGSHIK / 韓靜湜 / photography

수복호 사람들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2021_1222 ▶ 2021_1228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이번 『수복호 사람들』에서도 김보섭은 그 강한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가 진하게 밴 사람들의 냄새가 사진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다. 그 짠 소금 냄새는 어쩌면 이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의 냄새일지 모른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그의 영상을 무겁고 어둡게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하여튼 김보섭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눈을 반짝이는 사진가라는 것이 이번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결국 대상과 작가가 내면적으로 진하게 만난 것이다. 내면적 만남으로 대상과 작가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안으로 깊숙이 끌어 들인다. ● 김보섭의 사진이 이를 실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류의식, 이들 사진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지적 동류의식이다. 그는 처음에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를 탔고, 이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그러나 그들을 찍는 동안 이웃처럼, 친척처럼, 때로는 자기 누님처럼 느껴져 격의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그 자신이 그대로 조개잡이가 되어 버렸다. 그와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진한 소금 냄새가 거기에서 나온다. 격의가 없어야 이런 사진은 찍힌다. 몰입해야 이러한 영상은 나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삶이 뿜어내는 후끈한 열기까지가 『수복호 사람들』에서는 느껴진다. 이들 사진에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맡아진다는 것은 작가 김보섭이 뿜어내는 열정과 진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 대상과 작가가 진정으로 발가벗고 만나고서야 이러한 영상은 맺힌다. 우선 작가가 빠져야 관객도 빠지는 법이다. 이러한 것을 솜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작가 김보섭은 솜씨가 좋은 사진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은 솜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솜씨는 외형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데까지는 미치기 어렵다. 작가의 열의 없이, 진정성 없이는 대상이 자기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한정식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한식구 같은 수복호 사람들 ● 지금부터 수복호를 타고 다닌 인물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수보호의 선장이자 책임자인 최순기 님은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 그의 아내 유광복 님은 선장의 동반자이자 선원으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사무장 최병국 님은 홀로 외아들을 기르는 어머니로 선장의 의여동생이며, 아주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반장(박근숙) 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어떠한 것이든 빠르게 이해하였으나 이곳 저곳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칠득이 오반장'이라고 흉을 보던 것이 별명으로 굳어졌습니다. 차인애 님은 어린 자식들 때문에 배 떠날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별명이 '지각생'이 되었습니다. 그 밖에 순하다 해서 김순덕, 금자 엄마 김순오, 섭섭이 할머니 박선옥, 얼굴이 넓적한 넙순이 영배 엄마, 화수동의 꼬부랑 할머니, 뻐꾸기 할머니, 선장을 많이 도와주던 수열네, 작은 고모 최금순 등 여러 아주머니들이 매일 한 배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은 만석동 일대와 북성동(똥마당)과 송월동 일대, 화수동과 그 외 인천 곳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미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에서 주로 생활하였습니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 만석동(팽이부리)의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굴을 따기 위해 물때시간에 맞추어 모였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땄고,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였습니다. ● 이를 '묵세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흔적인 아주머니들의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손과 발은 한국의 어머니들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또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훈장인 셈입니다. ● 1960년대에는 선박의 입.출항 신고가 없어서 자그마한 배에 수십 명을 태우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굴을 따러 다녔습니다. 배가 헐어 물이 스며들기고 하였는데 많이 스며들면 교대로 물을 퍼내곤 하였습니다. 기계도 낡았기 때문에 고장도 자주 나곤 하였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가마니로 돛을 만들어 섬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를 지나고 많은 선박을 거쳐 지금의 수복호가 되었습니다. ■ 최영식

 

Vol.20211222a |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지난 금요일 서초동 한정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의 연락을 정영신씨가 받았는데, 찾아 뵌 지가 석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선 집에 불이 나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어 그런지 안색이 좋아지셨다. 

전에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는데,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또 하나 외형상 달라진 것은 제자 이일우씨가 사 주었다는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 날은 가까운 식당들을 두고 자동차로 이동해 ‘늘봄’이란 고급 식당으로 안내했다.

얇게 자른 생고기에 야채를 곁들어 먹는데, 처음 먹는 음식이라 입 맛에 맞지 않았다.

 

선생께서도 귀가 어둡지만 나 역시 귀가 어두운 편이라

정영신씨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선생께서 맛이 어떠냐?고 물었단다.

“촌놈이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정영신씨가 통역을 잘 못했다.

“아주 맛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 건 무슨 죄목으로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날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작년 가을에 발간한 한정식선생의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단다.

그리고 새로 나온 사진집 ‘가을에서 겨울로’도 선물하셨다.

일전에 경의선 책거리에 있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에서 얼핏 보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진이 주는 울림이 선생의 오랜 주제였던 ‘고요’보다 큰 것 같았다.

 

일 년 전 사진을 보여 줄 때만해도 스물 장으로 사진집을 만드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사진은 량이 아니라 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집을 보면 쓸데없는(마음에 들지 않는)사진이 많아 대충 보게 되는데,

엄선된 사진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사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책에 게재된 사진이라고는 열여덟 장뿐이고 글도 많지 않았다.

 

“가을이어서 쓸쓸한 게 아니라, 쓸쓸해서 가을임을 느낀다.

그리하여 내게는 봄도 가을이었다. 봄만 아니라 여름도 가을이고,

심지어 가을조차도 가을이었다.“

 

이 말이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에는 경허스님 시로 대신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 손가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짧은 글이지만 선생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가을에서 겨울로’사진집 가격은 3만원이다.

한정식 선생의 마지막사진집이며 소량 한정본이라 소장할 가치가 높다.

 

사진을 보니 아옹다옹 다투고 욕심 부리며 살지만,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법문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이 잡혔다는 정 동지의 연락을 받았다.

찾아뵌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개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더니, 정말 총알처럼 빠르다.

 

선생께서는 부엌일 돕는 분의 요리솜씨가 형편없어 하루에 한 끼는 꼭 외식을 하신다.

혼자 식사하러 가시기가 편치 않으신지 가까운 지인들에게 가끔 연락하신다.

복요리를 좋아해 그 날도 ‘초원복집’에 갔는데, 종업원 서비스가 여간 아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사진계 선배 M씨의 유작전이

인사동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 드렸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웬만하면 돌아가신 분 욕은 하지 않을 텐데, 대뜸 사기꾼이란 말씀부터 하셨다.

 

잔 재주를 잘 부려 평소 상종을 하지 않았는데,

82년 무렵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을 제작한다며 작품 두 점을 보내달라기에

사진사용에 따른 원고료를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당사자 반응에 더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을 제작하여 큰 돈을 벌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화가들도 돈 싸들고 와 작품 넣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냥 실어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원고료는 무슨 원고료냐?"는 말을 하더란다.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는데, 세 번이나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와

거절하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 된다는 말씀이셨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인 한정식선생 작품이 들어가지 않고

어찌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사진원고를 부탁하면서 필름원판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전체 인쇄 농도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는데, 문제는 필름을 다루는 사진가의 자세였다.

비슷한 사진 세 컷이 담긴 120필름 한 줄을 보내주었는데,

필요한 한 컷만 분리하기 위해 토막을 내어버렸다.

그 것도 가위로 정교하게 잘라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찢은 것이다.

나중에 필름을 돌려 받아보니, 찢어진 선이 아슬아슬하게 이미지를 스쳐갔더라.

 

그리고 책을 발간한 후 전국으로 끌고 다니며 순회전을 한 것도 차기 ‘사협’ 이사장을 노린 포석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전시가 끝났으면 사진은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충무로에 건물도 가진 재력가인데, 돈이란 결코 좋게 벌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그 분과의 인연은 끝나야 했는데, 좁은 사진판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85년 ‘사협’ 이사장에 당선되어 ‘사협’ 편집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월간사진’에서 그만두고 ‘청량리588’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땐데,

돈이 아쉬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당시에는 ‘사협’에서 나오는 회보가 사진 잡지라기보다 소식지에 가까웠다.

'사협' 총무가 소식들을 주워 모아 인쇄소로 보내 만드는 책인데,

편집장이란 직책까지 둔다기에 생각 자체가 가상한 일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거기에도 개인적인 욕심이 깔려 있었다.

매달 권두언을 쓰려니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받아들인 게 탓이었다.

한 이년 정도 일하는 동안 ‘사협’에서 벌어지는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목격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만 둘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겼다.

‘87 민주항쟁’ 개인전을 하려는데, 이사장이 못하게 제지한 것이다.

‘사협’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그런 전시를 할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귀가 막혔다.

사진하는 선배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미련 없이 사표내고 전시를 강행했는데, 그 뒤부터 그 이를 사진가로 보지 않았다.

그의 죽음도 갑작스런 비명횡사였는데, 이상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십여 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그가 갑작스러운 유고 전으로 그 때 일을 일깨웠다.

돈과 권력이란 자칫하면 죽어서도 욕 먹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 와중에도 이중 인격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인데, 다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사진, 글 / 조문호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지난 달 ‘골목 안 풍경’을 기록한 다큐사진가 김기찬 선생의 유품 일체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다시 한 번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사진과 필름, 카메라 등 십만 여점이 박물관에 소장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 편으로 가난한 후배 사진가들의 한 가닥 희망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저런 소중한 작업도 아무런 보상 없이 기증 형식으로 소장하는데,

어찌 생계를 팽개쳐가며 하던 작업에 몰두하고 싶겠는가?

 

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마지막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 그 좁은 구멍조차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돈과 거리가 먼 사진이라지만,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 빼 먹는 치사한 언론사도 많다.

개인적 유명세를 노려 언론사에 원고료 없이 주는 버릇이 고착화되어

이제는 대형 언론사마저 공짜로 얻어 쓰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작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 공영방송인 케이비에스에서 쪽방 촌을 취재하며

내가 찍어둔 빈민들의 스틸사진을 쓰고 싶다고 부탁해 왔다.

어떤 사진들이 필요한지 몰라 적합한 사진 100여장을 골라 보내며

사용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하라 했더니 그 이후로 감감소식이었다.

돈이 없다든지, 사진이 좆같거나 편집방향이 바뀌었다 던지, 연락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

얼마나 다큐멘터리사진가를 업신여겼으면 젊은 피디 까지 그러겠는가?

그런 형편이니 군소 언론사야 말해 뭐 하겠는가?

 

열흘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약속으로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새 해 문안 겸 들렸는데, 선생께서 건강 상태가 별로 호전되지 않아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계셨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선생의 마지막 사진집이 될 ‘가을에서 겨울로’의 원고를 출판사 넘겨

꽃피는 봄날이 오면 사진집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날 신년 오찬은 서초동 ‘초원 복집’에서 있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며, 김기찬선생의 유품기증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전 강단에서 하셨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다.

절대 다른 사진가를 위해 원고료 없이 그냥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처음 듣는 기증소식이라 관심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구입이던 기증이던 가타부타할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았다.

유고작가는 그렇다 치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진가마저

눈치나 살피며 그냥 주지 못해 안달하는 자가 있다는 현실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왜 나라에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적극적으로 소장하지 않을까?

이제 국민들에게 구걸할 만큼 가난한 나라는 아니잖은가?

마치 작가가 세상을 떠나 기증하기만 바라는 것 같다.

유 무명을 떠나 가치 있는 사료들은 적극 발굴하여 응분의 보상을 해야한다.

 

‘역사박물관’에서 일부 알려진 작가 위주로 수집하며 소장 전을 열지만,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어려워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팔리지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의 기록적 가치는 다르다.

이미 수많은 무명사진가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소멸되고 말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이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빈곤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시인과 사진가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뎌내지 못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문학과 현장을 누벼야 하는 다큐멘터리사진과는

경제적 비용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과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이권에만 눈이 뒤집혀 사진가들의 권익 따윈 관심도 없어 포기한지 수십 년이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사진계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사진가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조차 침묵하니 ,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면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정신 바짝 차리자.

배고픈 것은 참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고 김기찬 선생의 생전 모습. 오른쪽 아래와 왼쪽 뒷편에 아이들도 있다.

 

한정식 선생님게서 정영신씨 전시 중에 집에 한 번 들리라는 전화를 몇 차례나 하셨으나.

틈이 나지 않아 전시가 끝난 지난주에야 들릴 수 있었다.

찾아 뵌 적이 한 달이 더 되었는데, 같이 식사하기 위해 부른 줄 알았다.

 

식사도 식사지만, 정영신 전시에 가보지 못해 축의금 전해주려 부른 것 같았다.

뻔한 형편에 전시하는 것이 마음 쓰였는지, 정영신씨께 봉투를 건네 주신 것이다.

항상 걱정만 끼치는 송구함에 차마 고개 들 수 없었다.

 

그 날은 선생께서 비빔밥을 드시는 요일이지만,

복국을 사주겠다며 서초동 초원 복집으로 데려갔다.

꾀죄죄한 행색에, 전 날 술 퍼마신 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선생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했다, 살아 생 전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댁으로 돌아오니, 사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들릴 때마다 벽에 걸리고 탁자에 진열된 가족사진에 먼저 눈길이 가는데,

누군들 가족사진보다 더 애착 가는 사진이 있겠는가?

 

가족사진 틈에 징그러운 내 꼬락서니도 보였다.

오래 전 선생 생신 때 찍은 단체사진에 끼어 있었는데,

선생님 모습은 젊어 보이는데, 나는 왜 그때부터 늙어 보일까?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에 선생께서 보관하고 계신 사진 파일을 보여주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전 인사동 작업실을 오갈 때 기록한 사진이라는데,

내년 봄 쯤, 사진집으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번에도 그 사진을 본 적은 있으나,

사진이 20여장 밖에 되지 않아 사진집 만든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가을에서 겨울로란 사진집 제목까지 말씀하셨다.

하기야! 사진 내용이 중요하지 량이 무슨 소용이랴.

 

그 사진들은 이전에 발표된 '고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도시풍경이 왜 그리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치 선생께서 투병으로 사진을 더 이상 못 찍게 될 걸 예견이라도 하신 것 같았다.

 

그 사진들은 선생의 허무하고 쓸쓸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많은 사진인들에게 귀감이 될 좋은 사진집이 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선생께서 마음의 병을 다스려 다시 작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 조문호

 

 

모처럼 한정식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동안 사람 만나기를 피하셨는데, 준비한 사진 산문집이 나왔다는 것이다.

 

지난 21일, 오찬 약속으로 정영신씨와 함께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함께 투병하고 계신 사모님의 건강은 확연히 좋아졌지만,

선생님의 모습도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단지, 불면증에 잠을 이루지 못해 수면제로 지탱한다는 거다.

그건 소심한 성격에 의한 마음의 병이었다.

 

주변에서 용하다고 추천하는 병원도 다녀보셨지만, 아무 소용없다고 했다.

내가 볼 때는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라 선생께서 다스려야 할 병인 것 같았다.

 

선생님 댁에 여러 차례 와 보았지만, 언제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들이 눈길을 끌었다,

장성한 자식과 귀여운 손자들이 함께한 유복한 모습이 부러웠다.

한 평생 사진을 위해 살아왔지만, 작품사진보다 가족사진이 먼저였다.

하기야!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날은 새로 나온 사진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를 한 권 받았는데,

주옥같은 선생의 사진과 산문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투병하기 전에 인사동 작업실을 오가며 기록한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암울한 도시풍경을 찍은 사진들은 기존의 작품과는 또 다른 울림이었다.

컴펙트 카메라라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마무리 했으면 좋으련만,

이제 안 된다는 체념에 가까운 말씀에 가슴이 아팠다.

 

정영신씨도 이번에 출판한 ‘장에 가자’를 한 권 드렸는데,

까다로운 선생의 눈에 찰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오찬은 외식을 하며, 동네 산책도 빠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날은 생선구이 집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나보다 더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자동차로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갈 수 있을 텐데, 차마저 처분하셨단다.

여기저기 다니신다면 왜 잠이 오지 않겠는가?

 

부디 마음의 병을 고쳐 편안한 여생이 되도록 간절히 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정식선생의 사진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눈빛출판사’에서 나왔다.

초창기 사진으로 엮은 ‘사라지는 풍경, 사라진 풍물’이라 부제를 단 산문집에 눈이 번쩍 띄었다.

‘북촌’과 ‘흔적’에 이어 사진의 기록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집으로는 세 번째인데,

50여년 전의 도시풍경으로 구성된 사진 산문집이었다.

 

된장이나 와인처럼 세월에 의해 숙성된 사진이라

보면 볼수록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성남의 허허벌판에 들어 선 복덕방들이나 포니 승용차에 무탈하길 빌며 고사 지내는 장면 등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장면의 사진도 많았다.

칠순이 넘은 나 역시 리어카에 사진관 배경 막을 실고 다니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사진 기록성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절감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나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엮은 산문 읽는 재미도 솔솔했다.

서울대 문학도였던 선생의 글 솜씨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감칠맛 나는 산문이 사진의 품격을 더해주었다.

더구나 선생께서 투병 중에 집필한 글이라 더욱 가슴 시리다.

 

사진이나 글이나 한 치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 선생의 빈틈없는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이 산문집도 편집자 실수로 사진 한 장이 빠져 다시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들을 살펴보며 예술사진에 밀려난 기록의 한국 사진사를 다시 되돌아본다.

초창기에 활동한 원로사진가들은 대부분 기록에 초점을 맞추셨다.

임응식선생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이어 ‘세계적인 사진전 ’인간가족전‘ 유치와

사진평론 하셨던 이명동선생이 관여한 ’동아일보‘ ’동아사진콘테스트‘ 바람에

스트레이트한 사진이 날개를 달았던 때다.

 

주명덕선생의 ‘혼혈아’나 최민식선생의 ‘인간’ 등 리얼리즘 사진이 주도했지만,

사진 본연의 기록성이 예술이란 겉멋에 현혹되어 어떻게 하면 그림을 닮아갈까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작가의 주관도 없는 아름다운 풍경사진에만 매달리는 수많은 아마추어를 양산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제대로 된 사진가 없는 공룡 집단 ‘사협’의 존재가 그 대표적이다.

 

한정식선생께서도 일본에서 사진유학 한 후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리얼리즘사진과 결별하게 된다.

선생의 깨우침에 의한 ‘고요’라는 주제에 천착해 일가를 이루었으나

리얼리즘 사진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 한정식선생 뿐이겠는가? 주명덕선생도 어두운 톤의 풍경사진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일관되게 작업해 온 최민식선생의 '인간'이나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이

그런대로 우리나라 대표적 리얼리즘 사진으로 남았다.

 

물론, 예술사진에 대한 집착이 사진의 다양성에 기여한 바는 크지만,

세월이 흐르면 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진사에 주명덕선생의 풍경보다 ‘혼혈아’가 먼저 오르고,

한정식선생의 ‘고요’보다 ‘북촌’이 호출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오죽하면 사진의 기록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눈빛’ 이규상대표가 출판을 위해 보내 온

한정식선생의 사진원고를 보며 “최고의 역작”이라 감탄했겠는가?

 

아직까지 사진작업의 방향을 정해지 못했거나, 갈팡질팡하는 사진인이 계시다면

다시 한 번 현실적 기록성에 주목하기 바란다.

하기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예술로 포장해 사기를 쳐야 살아남지...

 

한정식선생의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를 강력하게 권합니다

책값은 18,000원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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