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월간사진 발행인 황성옥,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선생



85년 무렵,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월간사진’사무실에서 진행된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께 듣는다“란 좌담회 장면이다.

당시 월간사진 발행인이었던 황성옥씨와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 선생께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동선생의 지도로 사진에 입문하여 ’내셔널 지오그래픽‘편집장을 지낸 김회중(에드워드 김)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는데,

다들 현역으로 활동할 때의 모습이라 다소 낯설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9일 한정식선생과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열흘 전부터 한번 찾아뵙자는 선생의 말씀이 계셨지만,
이런 저런 날을 피하다보니, 토요일로 정해 진 것이다.

그동안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한 번 밖에 찾아뵙지 못했는데,
요즘은 출입을 일체 안 하시어, 신경 쓰였든 터라 기회다 싶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이명동선생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주문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먼저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더니,
혼자 계셔야 할 집에 여러 사람이 와 계셨다.
이명동선생의 아드님과 따님, 그리고 사위까지 있었는데,
그 날이 마침 이명동선생의 생신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듯이, 잔치 날이었다.

생신이면 음식도 준비해 왔을 터이고, 가족끼리 모인 자리라
날을 잘 못 잡은 것 같기도 했으나 어쩌라! 이미 저질러 진 일을...
곧바로 한정식선생께서 등장하셨는데,
이명동 선생께선 기분이 좋았던지,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 이야기에서부터
윤주영 선생 이야기에 이르기 까지 그침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지만,
한 선생께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했다.
재방송이지만, 재미있게 들었는데,
오랫동안 들려 줄 사람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데, 시간이 지났으나, 주문한 음식이 오지 않았다.
충무로에 있는 장어구이 집에 미리 계산해 두고
정오까지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는데, 30분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식당에 전화를 하니, 그 때까지 잊고 있었다.
빨리 보내 달라 했으나, 음식 장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음식이 준비되었지만, 한정식 선생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겠는가?
한정식선생의 독촉전화에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음식이 도착했지만, 배달꾼을 나무랄 순 없었다.






다들 시장했던 터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는데,
한정식선생께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장어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명동선생께서는 그 걸 의식하였는지, 다른 음식은 두고 장어만 열심히 드셨다.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같이 늙어가며 서로 챙기는 두 원로사진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튼, 건강 잘 관리하시어 여생을 건강하고 재밋게 사십시오.


"이명동 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경하 드리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 정오 무렵, ‘류가헌’에서 황규태 선생을 뵙기로 약속했다.
점심같이 먹자는 선생의 연락에 찾아 나섰는데, 좀 늦어버렸다.
그 곳에서 황규태선생 전시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문선희씨 '묻다'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의외의 사진을 보며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문선희씨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어나, 사진가의 문제의식이 돋보였다.
조류 인플루엔자로 살 처분된 가축의 매몰지를 찾아 다니며 찍었는데,
섞어가는 땅의 디테일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기도, 섬뜩하기도 했다.
인간의 잔혹성과 환경오염 현장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는데, 사진이 그 답을 묻고 있었다.

12월 3일까지 전시가 열리니, 시간내어 한 번 볼만한 전시다.



 


황규태선생을 찾아 2층에 올라가니,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다.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는데, 전화번호를 잘 못 알아 남의 전화에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황송하기 그지없었으나, 멋쩍은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정식 선생께도 연락되어 같이 자리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황규태 사단장의 멋진 찝에 편승할 기회가 생겼다.
내 좋아하는 음식을 아신 듯, “돈까스가 좋으냐 중국집이 좋냐”고 물었다.
두 선생님 계신데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난처했으나, 빼갈 생각에 중국집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의 가까운 중국집에 갈 줄 알았는데, 세검정의 ‘하림각’으로 가셨다.





지름길인 청와대 길로 들어섰는데, 언제나 드라이브 코스로는 멋진 길이다.
문정부 들어서 쓸데없는 검문을 폐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었으나,
아직까지 청와대 주변에 서성이는 기관총 든 경찰의 모습은 여전했다.






위협적이고 꼴 볼견 풍경이 지나 칠 때마다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정식선생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방위할 수 있지 않냐?’는 거다.
지켜보는 국민만이 아니라, 경호받는 당사자도 기분 좋은 풍경은 아니다.






하해와 같은 사단장님의 은혜로 고급 청요리집에서 오랜만에 목에 때 벗겼다.
유산슬 에다 빼갈까지 곁들인 과분한 점심을 먹었다.
커피는 ‘류가헌’에 와서 마시라는 조예인씨의 배려에 다시 돌아왔다.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냄새는 죽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탁자에 두 권의 사진집이 올려졌다.
이한구씨의 ‘군용’과 박종우씨의 ‘DMZ’로 모두 국방부에서 소장해야 할, 질 높은 사진이었다.
이한구씨의 ‘군용’사진집은 오래 전에 본 사진이지만,
이번에 독일에서 출판 된 박종우씨의 ‘DMZ'사진집은 두 선생께서도 감탄하셨다.
12월 26일부터 ‘류가헌’에서 열릴 박종우씨의 “DMZ'사진전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사단장께서 입 호강, 눈 호강 다 시켜주면서, 하사금까지 내려주셨다.
다들 겨울의 쪽방이 추워 고생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겨울보다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은 방이 작아 전기장판과 담요만 있으면 걱정 없지만,
더운 여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30만원을 주시며 오리털 침낭을 꼭 사야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 돈으로 동자동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실까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그러나 침낭은 그 날 오후 ‘나누미’에서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되어있었다.
침낭은 쪽방 사람들 보다 노숙하는 친구들이 더 절실한 물건인데 말이다.






그 날 나누미 행사장에서 침낭을 받아 깔아보니 사이즈가 내 침대와 똑 같았다.
그러나 담요 덮고 자유롭게 자는 것이 좋지, 굳이 침낭에 묶여 잘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노숙하는 친구 중에 옷이 제일 허술한 친구에게 건네주기 위해 챙겨두었다.





그러나 사단장께 받은 하사금 사용처를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오리털파카’를 사 입는 게 뜻을 받아들이는 거지만, 옷은 있는 옷만 해도 죽을 때까지 입고도 남는다.






그 돈으로 정영신씨와 장터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엉뚱한 일이 생겨버렸다.


오래전부터 고환에 통증은 있었으나 잠간 잠간이라 견뎠는데,
이젠 통증이 심하게 지속되고 붓기까지 해 병원에 가보아야 했다.
여지 것 병은 모르는 게 약이라며 모든 검진 자체를 거부해 왔는데, 걱정스럽다.
난치병이라면 진통 치료만 받을 작정이다.

아무튼 별일 없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겨울에 필요한 옷가지나 살림 챙기러 정선 갈 일이 생겼다.

동자동 쪽방이나 녹번동 방이나 짐둘 곳이 마땅찮아

정선 집을 피난처나 창고처럼 사용하는데, 겨울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오래된 윗만지산 집은 본래 고추 말리기 위해 지은 집이라 방은 넓지만 외풍이 거세다.

처마 밑을 막지 않아 겨울엔 맞바람이 몰아쳐 천장인지 천막인지 구분이 안 된다.
군불 지피면 바닥은 쩔쩔 끓지만,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에 선 기분이다.

그래서 겨울에 갈 일이 생기면 되도록 당일치기로 나서는 것이다.


20여 년 전 ‘생활성서’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계시던 김용기씨와
수녀 기자 두 분이 동강에 취재 와 하루 밤을 같이 묵은 적이 있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그 수녀 기자는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녹번동에 자동차 빌리러 간김에 정영신씨와 가볍게 한 잔 빤 것이 하루 일기의 시작이다.

하루치기로 돌아오려면 새벽에 출발하는 게 편하기도 하지만,
정영신씨와 씨잘 때 없는 이바구 지껄이며 마시는 술맛도 꽤 괜찮다.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는 할 말이 별 없으나,
십 삼년이나 같이 산 그 와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웃기고 내가 웃으며 키득거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고...






그 날은 아쉽게도 자정에 술자리를 끝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이 끊이지 않으니 잠이 올 수 없었던 거다.

죽고 나면 아무 것도 필요 없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몇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 나 보니, 그때까지 네 시밖에 되지 않았다.
잠을 포기하고 정선으로 곧 바로 출발해야 했다.

매번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타는데, 시간은 더 걸리지만,
통행료도 필요 없는데다, 연료비까지 절약된다.
더러 새벽에 출발하다보면 양평에서 만나는 물안개도 장관이다.


정선 귤암리에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정도 되었더라.

조양강은 꾀죄죄한 내 몰골을 비웃 듯,

'여기 물 끊여 놓았으니 목욕하라'며,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 계신 무덤부터 찾아가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해댔다.
다 잘 사는 세상이 되려면 부탁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진데,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자식타령으로, 원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집에 가니 찢어 진 현수막 차양이 팔랑거리며 인사하고,
급히 가느라 내버려 둔 옥수수대가 원망스러운 듯 나를 지켜 보았다.
다 거두어주고, 메모쪽지 봐가며 짐 챙기다 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버렸다.

끼니는 동자동에서 받은 빵으로 운전 중에 해결했다.






평창 쯤에 이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국 가는 길 인양 평화로웠으나, 양평에 도착하니 비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그 때부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깜빡깜빡 곡예운전 몇 번에 두 손들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잤다.
천지개벽 할 듯한 트럭 크락숀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오후2시가 넘었다.






내부순환도로에 접어 들 무렵,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날 인사동에서 ‘샘터’기자와의 인터뷰가 있는데, 인사동으로 와 줄 수 없냐는 것이다.

기자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었으면 한다는 데, 싫지만 어쩌겠나?

동자동에 간 후로 나를 드러내는 인터뷰는 대부분 사양해 왔으나, 정영신씨 일은 도와주어야 했다.

한 잡지사는 인터뷰를 계속 거절했더니, 원고료 줄 테니 사진만 좀 사용하자는 곳도 있었다.
시간 뺏는 인터뷰는 사진을 사용해도 원고료도 안 주는데, 모순투성이가 하나 둘이 아니다.





약속장소인 카페 ‘수요일’에는 '샘터' 편집장인 이종원씨와 최순호씨가 정영신씨를 취조하고 있었다.

두 분 다 면식이 있었는데, 사진가 최순호씨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 그런지, 더 낯 익어보였다.

비슷한 질문과 대답을 하도 들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는데,

마지막에 나더러 정영신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다.

대뜸 튀어 나온 말이 ‘장에서 죽어라’고 했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거리에서 이야기 좀 나누라는 포즈를 주문받았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빠진 이를 드러내 놓고 찢어지게 한 번 웃었더니, 그대로 통과되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 최순호씨가 아는 국밥집에 가자고 했다.

하루 종일 빵 한 개로 허기를 메운 터라 '얼시구나' 따라갔다.






식당으로 가다 윤병갑씨를 만났고, 주차장 앞에서는 한정식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얼마나 놀랐는지, 카메라 초점마저 흔들려 있었다.

아마, 한정식선생께 잘 못한게 있는지?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명동 선생님 뵈러 갈 작정인데, 같이 갈 수 없냐?‘고 해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렇찮아도 이명동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바깥출입을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어

한 번 찾아뵈려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 간 ‘남원집’은 헌법제판소 앞에 있었는데, 최순호씨 친구가 운영한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예전의 ‘남원집‘이 떠 올랐다.

어머님 가업을 이어 받은 이 가게는 진한 사골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끊인 국밥 맛이 일품이다.


밥 먹으며, 사진가 최순호씨의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원으로 귀농해, 깨 농사로 깨 쏟아지게 산다는데, 수요일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한단다.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남 달라 보였다.






눈오다 비오다 맑아지는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기분의 기나 긴 하루였다.

바쁜 하루였지만, 즐겁게 잘 마무리했다.  차 때문에 한 잔 밖에 못 마신 술 빼고는...



사진, 글 / 조문호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사진부문 두 번째 사진가인 한정식선생의 ‘고요’전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6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4월14일 개막되어 8월6일 막을 내리는 전시인데, 4개월에 가까운 긴 전시라 미루다보면 놓치기 십상이다.

나 역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하여 전시도 보고 취재를 했지만, 미루다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무더운 쪽방에서 멍 때리다, 우연히 눈에 띈 한정식선생의 사진집을 보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이쿠! 전시 끝난 것 아이가?”싶었는데, 아직 10여일 남아 부랴부랴 서두르게 되었다.






한정식선생하면 사진가는 물론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이라면 다 아는 사진가라,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행여 모르는 간첩이라도 있을까하여 몇 자 적는다.

한 선생은 70년대 ‘나무’에서부터 2000년대 이후의 ‘고요’ 연작에 이르기까지 오 십 여년을 사진의 추상성을 물고 늘어지신 분이다.

물론 초창기의 ‘북촌’이나 ‘흔적’등의 사실적인 기록 작업도 있으나 그건 선생이 가고자했던 명상의 세계를 향한 워밍업에 불과했다.

초창기에는 임응식선생이 주도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쏠려 다니기도 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기에, 한국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시켜야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으리라 판단된다. 그래서 뜬 구름 잡는 것 같아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던 순수사진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에 열거한 이유보다 작가의 인간적 심성이나 종교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합일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한 것이다.

이게 한국적 사진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일세기 전에 한국을 방문한 베버신부가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겠는가.






오래전부터 미국의 형식주의 작가들인 ‘폴 스트렌드’, ‘아론 스시킨드’, ‘에드워드 웨스턴, ‘마이너 화이트’로 이어지는

추상사진의 계보가  이어져왔지만, 한정식 선생의 ‘고요’연작은 철학적인 작가의 사색이 집약된 형식주의라

가장 한국적이며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한정식선생의 작품세계는 무엇보다도 한국적 색깔을 찾아내어 한정식선생 고유의 시각언어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사물이 부유하는 느낌을 일으키거나, 때로는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위의 사상을 일 깨우게도 했다.

생성이 소멸을 부르고, 소멸은 또 다시 생성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과정 속에 살아가는 자연의 엄정한 법칙을 말이다.

욕망으로 뒤 덮인 세상을 치유하려면 ‘고요’ 즉 적정 적멸로 치닫는 명상뿐일 게다.






작가가 ‘풍경’ 사진집에 적은 서문 한 자락에서 선생의 속내를 읽어 보자.

‘나는 대상을 한 번도 대상 자체의 실체로 파악해 본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나무는 대나무가 아니었고,

발은 발이 아니었고, 풍경은 풍경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물의 형상성이 아닌 묵언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또 ‘사진 산책’에서는 경주의 무덤을 두고 “스치던 바람결은 여기 묻힌 선인들의 숨결이 아닐까.

경주는 허무이자 초현실이다”고 적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1980년대부터 작업해 온 ‘나무’, ‘발’, ‘풍경론’을 비롯하여

‘고요’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작 100여점이 전시된다.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철학에 기인한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의 기틀을 다진 작품들이다.

선생께서 본 사물과 풍경들은 사진의 특성인 구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느낌만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난, 이렇게 느꼈다. “아! 이게 선(禪)의 경지로구나”

아무런 말이 없는 사물에게서 받는 깨달음은 마치 스님의 죽비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시간도 빛도 소리도 멈춘 채 오로지 고요의 세계로 안내하는 한정식선생의 사진에서 진리를 깨우치고,

이 지긋지긋한 무더위를 말끔히 날리기 바란다.






그리고 같은 날 개막된 건축가 윤승중씨의 ’문장을 그리다‘전은 제5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데,
두 전시 모두 8월6일 막을 내린다. 관람료 2,000원으로 마음의 피서를 즐겨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4월14일 정오무렵 가진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8월 6일까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내 사진은 고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말처럼 사진가 한정식 선생의 ‘고요’는 그가 추구하는 사진 작업의 지향점이자 존재의 모든 것이다.

사물의 가려진 부분을 읽어내며, 사물 안의 본질을 찾아 시(詩)를 쓰는 과정이 그가 추구하는 사진작업이다.




▲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전시실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사진가 한정식 선생



그는 사물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기다리다, 소통이 빚어내는 언어를 통해 부처를 만난다.

그는 “내 모든 마음을 비우면 사물의 본질이 명료하게 보인다.


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생경한 분야를 개척하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이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사물이 가진 미학을 추구해오며, 사물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그러다보니 완전한 무(無)의 경지에 달해, 그 안에서 부처를 만나게 된 것이다.



▲ 나무,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어느 때가 사진을 찍는 ‘결정적인 순간’이냐는 물음에는 “사물과 작가 내면이 마주치며 존재의 리듬이 들리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사진이 시간과 빛의 예술임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그에게는 선(禪)이란 또 한 가지가 더 존재한다.

빛과 사물에 더해 선이 만들어내는 생경한 ‘시각적 의미’를 들려주는 작가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 나무,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언어만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로도 표현 불가능한 시각적 체험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빛의 세계,

카메라와 사물이 빚어내는 시각적 ‘비가시체험(non-dejavue)’이라 할 일종의 육감적 체험을 뜻한다.

소위 ‘현대사진’으로의 길을 여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내목표의 하나로, ‘시각적 의미’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 발,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 -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장순강 큐레이터는 “한정식은 사진을 통한 추상이라는, 한국사진에서는 짧은 실험에 그친 영역을

40여년에 걸쳐 추구해왔고, 이는 한국사진의 다양성을 위한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주변을 제외한 사물 본래의 모습만 담아내,

마치 물이 융합하는 것처럼 무취무색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보는 이에게 묵시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적막은 생성과 소멸을 벗어나, 어떤 언어로도 이룰 수 없는 무(無)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 발,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것은 은유도 직유도 아니다. 사물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실을 벗어난 궁극의 경지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다’는 명제처럼, 그 사이에는 사진의 알몸만이 오롯이 드러나 예술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서울대 사범대국어과를 졸업한 문학도였다.

청년시절엔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힐 만큼 시인의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봤기에, 사진도 마음이 사물에 닿는 순간 시(詩)를 쓰듯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다.



▲ 강원도 홍천, 2012(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초창기 사진으로 ‘북촌’ 같은 특정 지역을 기록한 작업도 있었지만, 점점 나무와 사람의 발 등 서정적인 피사체를 대상으로 형상화 해왔다. 그 주변의 풍경과 교감하면서 사물의 본래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형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예로 나무의 결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도 하고, 발의 부분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인체를 느끼게도 한다.

그처럼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모습은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에 자유롭게 접근하기에 가능했다.



▲ 경기도 안성, 1985(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작가는 영암월출산 도갑사에서 찍은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살이 그 방으로 안내했지만, 어쩌면 부처가 그 빈방으로 인도했을 것이라 했다.


당시 기와불사를 하던 도갑사에서 기와 한 개당 천원의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머니에 만원권 지폐뿐이라 거슬러 주겠거니 하며 건네줬는데,

보살이 활짝 웃으며 “웬 시주를 이렇게 많이 주세요?” 라며 웃어넘겨, 차마 거슬러 달라는 소리를 못해 물러났다고 한다.

절 경내를 돌아 본 후 일주문을 나서다 기와 불사를 했던 보살을 다시 만난 것이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공양이라도 하시라며 안내한 곳이 그 방이었다고 한다.



▲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 1986(2017), 디지털 프린트


빈방에는 밥상으로 쓰는 탁자 하나가 그를 기다리듯 반겼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전등불 하나가 밝혀 주는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는데,

그 방으로 들어 간 순간이 바로 부처와 만나는 찰나였다.

그 방에 부처가 앉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 경기 가평, 2001(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사진도 하나의 말이라는 작가는 월출산 도갑사 빈방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사물과 만나, 사물의 계시를 기다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이라는 작가는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라고도 했다.


전시장에는 사물의 형태가 지니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한 초창기 사진이었던 ‘나무’와 ‘발’ 그리고 ‘풍경’이

차례대로 전시되어 평생 화두로 잡고 있는 ‘고요’에 의미를 더해 주었다.



▲ 충청북도 단양, 1998(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추측컨대, 작가의 전생은 시인도 사진가도 아닌 스님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러한 작가의 불심이 ‘고요’의 중요한 요체로 작용되었으리라.

말 걸어오는 생명체인 무(無)를 통해 그만의 부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한정식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 아카이브에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두 번째 사진 전시로 추진된 한국 추상 사진의 선구자 한정식선생의

전시는 오는 8월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19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보여주는 작품 99점이 전시되어 작가의 사진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2-2188-6000)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기자]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술작가 시리즈인 한정식선생의 ‘고요’전이 오는 4월14일부터 8월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에서 열린다.




한정식선생은 리얼리즘사진이 주를 이루던 1960년대부터 사진 자체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사진의 형식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예술사진의 미학적 범주를 확장시켜 왔다.

한국이 지닌 고유의 미와 동양철학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한정식선생의 반세기에 가까운 작품세계를 한국현대사진의 발전과 더불어 살펴보고

한국사진이 가지는 고유의 사진미학에 대해 탐구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마련하는 신년 오찬회가 인사동에서 열린다.
지난 20일 정오무렵, ‘수연’에서 가진 모임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생수, 전민조,
이규상, 엄상빈, 김보섭, 김남진, 이재준, 최경자, 정영신씨 등 열 한분이 함께했다.

이 모임은 보수, 진보, 중도 등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띤 분들이 모인다.
좌파의 대표주자 이규상씨는 나를 비롯해 엄상빈, 정영신 등 여럿이지만,
우파인 한정식선생이 좀 밀리는데, 다행히 이재준씨가 받쳐주어 위안을 받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도파들이 더러 계신데, 그 분들 속내가 사뭇 궁금했다.

시국이 시끄러우니, 자연스럽게 정치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나,
이규상씨의 첫 덕담이 죽였다.
“설날이 닥쳐오니, 온 동네가 떡치는 소리뿐입니다.”
정치이야기 보다는 차라리 떡치는 이야기가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나 역시 한정식선생이기에 넘어가지, 다른 자리 같으면 상종도 않는다.

그런데, 김생수 선생으로 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모인 사진가 중 유일하게 사진협회 소속이신데, 이사장 선거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다들 관심 밖의 일이었으나, 후보 등록해 당한 이평수씨나,
손대지 않고 코 푼 조건수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수씨는 ‘동우회’와 연관되어 8-90년대 자주 만났으나, 가는 길이 달라 소식이 끊겼다.
들은 바로 유산을 상속받아 잘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돈 있으면 사진이나 허벌나게 찍지, 썩어 문드러진 사협 감투는 왜 탐내는지 모르겠다.

이사장 선거 내용인즉, 이평수씨와 조건수씨가 후보로 등록해 한 판 뜨게 되었는데,
뚜껑도 열어보지 못하고 이평수씨가 패했다고 했다.
이평수씨의 부이사장 런닝메이트로 출마한 분의 회비 미납으로, 즉 자격을 상실해 목덜미가 잡힌 것이다.
이평수씨가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기를 반복하다 결국 투표일을 넘겼다고 한다.
조건수씨는 힘들게 선거를 치루지 않고 무투표 당선된 것이다.

누가되어도 사협을 개혁하여 올바른 사진단체로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닥 기대는 걸어본다.
이평수씨야 사협 집행부에서 활동한 전역으로 보아 기대할 수 없지만, 조건수씨는 처음 실세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치판도 개혁되기 마련이니, 이 기회에 마음 독하게 먹고, 사협을 바로잡아 만 여명이나 되는 회원들 눈을 뜨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협회 회원들의 아마추어적 시각에서 벗어나는 의식개혁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정식선생께서 축하전화를 하신다지만, 앞으로 한정식선생께 많은 자문을 받기 바란다.
부디 ‘사협’을 바로잡은 이사장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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