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집 / 또 하나의 경계 / 눈빛출판사 / 40,000원)



엄상빈씨는 30 여 년 동안 분단을 상징하는 동해안의 철조망을 지켜보며, 분단의 한을 삭여 온 사진가다.

그 민족을 아픔을 조망한 “또 하나의 경계”전이 오는 14일부터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전시된다.

철조망을 잡은 주름진 노인 사진이나, 철조망에 걸린 죽은 새로 분단의 한을 표현한 다소 인위적인 사진들이 더러 발표되기도 했으나,

그런 사진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진가가 애 끓이며 삭여 온 세월의 무게에 감히 얼굴 내밀 수 없다.

그가 붙들고 있는 분단의 상처에 대한 끈은 ‘아바이 마을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엄상빈씨의 대표적 작업으로 꼽힌다.

철조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자 집 담장 위에 쳐놓은 폭압적인 풍경들이다.
그 밑에다 유리조각들을 박아 두었는데, 정말 흉물스러웠다.

도둑 못 들게 하는 짓을 탓할 수는 없으나 조세현 같은 도둑이 그런 철조망 있다고 못 들어가겠는가?

엄상빈씨가 보여주는 동해안에 쳐 놓는 철조망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대 뒤떨어 진 잔재물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자체가 슬픈 것이다.

처음엔 동물의 침입을 막느라 철조망을 치고, 동물을 가두어 키우느라 쓴 철조망이 이젠 사람을 막는 분단의 상징물로 남게 된 것이다.

이게 우리민족의 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엄상빈씨는 20여년 넘게 지켜 본 오래된 사우다.
떠벌리는 사진가들처럼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다.

대개 그 나이가 되면 손자 재롱에나 파묻혀 사진은 뒷전 일 텐데, 미쳐도 제대로 미친 사람이다.

알고 미치는 것과 모르고 미치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찍는 것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기 까지 그의 치밀함은 알아 주어야한다.

그것도 편하게 프린트하지 않고 암실에서 한 장 한 장 구워내는 프로 근성까지 보여 준 것이다.

오래된 이미지를 확대기에 걸어놓고 보며 당시의 회억에 빠지거나,

약물 속에서 서서히 드러내는 맛을 오래 작업한 사진가들은 대개 알 것이다.






몇 일 전 엄상빈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진인지 몰랐는데, 새로 출간된 사진집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여지 것 ‘아바이마을사람들’, ‘학교이야기’, ‘들풀 같은 사람들’, ‘창신동 이야기’처럼 사람 중심이 되는 사진은 보아 왔지만,

해안을 바라 본 서정성 있는 풍경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개 풍경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 데, 엄상빈씨의 풍경은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말하는 사진보다 묵비권으로 일관하는 사진이 더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좋아하다 넘기는 사진과 여운에 끌려 다시 돌아보는 차이다.

작품의 내용 뿐 아니라 인쇄나 편집도 나무랄 곳 없는 훌륭한 사진집이었다.
전시된 오리지널 프린트의 맛이 좋은 거야 말할 필요 없겠으나, 집중적으로 감상하기에는 사진집이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한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점에다,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는데도 용이하다.

그의 부지런함 또한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여지 것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전시 열림식을 어김없이 챙기고 다녔다.

물론 전시를 본다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려면 조용한 시간에 봐야지

열림식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 감상에 제대로 빠져들 수 없다.

그런대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사진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도 한동안 폐북을 통해 알게 된 전시에 쫓아다니며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축하주도 마셔왔으나,

폐북 중독증을 알고부터는 일을 줄이려 전시오프닝에 가급적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꼭 볼만한 전시는 조용한 시간에 보거나 사진집 구해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엄상빈씨의 한 맺힌 사진은 슬펐다.
바다를 바라보는 주름진 아낙의 깊은 눈길에 시름이 가득했다. 철조망 너머 아득한 바다에는 보이지 않는 한이 떠돌았다.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한이 되었는지, 구천을 떠도는 실향민의 넋인지 모르지만 아련히 번져 있었다.

마치 자신만 아는 진실을 지키려는 듯 침묵으로 이념의 갈등에 저항하고 있었다.

바람이나 파도 같은 자연의 소리는 애틋함과 슬픔을 노래했다.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라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박봉우시인의 ‘나비와 철조망’이란 시 구절이 사진에 너울거린다.

5월2일까지 열리는 엄상빈의 “또 하나의 경계”전은 흑백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사진전으로 꼭 한번 볼만하다.

흔하지 않은 은염 흑백사진 40여점을 비롯해, 최근 기록한 컬러사진 10여점에서는 시대변화에 따른 또 다른 이질감을 맛 볼 수 있다.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