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필요한 옷가지나 살림 챙기러 정선 갈 일이 생겼다.

동자동 쪽방이나 녹번동 방이나 짐둘 곳이 마땅찮아

정선 집을 피난처나 창고처럼 사용하는데, 겨울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오래된 윗만지산 집은 본래 고추 말리기 위해 지은 집이라 방은 넓지만 외풍이 거세다.

처마 밑을 막지 않아 겨울엔 맞바람이 몰아쳐 천장인지 천막인지 구분이 안 된다.
군불 지피면 바닥은 쩔쩔 끓지만,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에 선 기분이다.

그래서 겨울에 갈 일이 생기면 되도록 당일치기로 나서는 것이다.


20여 년 전 ‘생활성서’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계시던 김용기씨와
수녀 기자 두 분이 동강에 취재 와 하루 밤을 같이 묵은 적이 있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그 수녀 기자는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녹번동에 자동차 빌리러 간김에 정영신씨와 가볍게 한 잔 빤 것이 하루 일기의 시작이다.

하루치기로 돌아오려면 새벽에 출발하는 게 편하기도 하지만,
정영신씨와 씨잘 때 없는 이바구 지껄이며 마시는 술맛도 꽤 괜찮다.


다른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는 할 말이 별 없으나,
십 삼년이나 같이 산 그 와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웃기고 내가 웃으며 키득거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고...






그 날은 아쉽게도 자정에 술자리를 끝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 잡념이 끊이지 않으니 잠이 올 수 없었던 거다.

죽고 나면 아무 것도 필요 없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몇 시간을 뒤척이다 일어 나 보니, 그때까지 네 시밖에 되지 않았다.
잠을 포기하고 정선으로 곧 바로 출발해야 했다.

매번 양평으로 가는 국도를 타는데, 시간은 더 걸리지만,
통행료도 필요 없는데다, 연료비까지 절약된다.
더러 새벽에 출발하다보면 양평에서 만나는 물안개도 장관이다.


정선 귤암리에 도착하니, 오전 여덟시 정도 되었더라.

조양강은 꾀죄죄한 내 몰골을 비웃 듯,

'여기 물 끊여 놓았으니 목욕하라'며,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 계신 무덤부터 찾아가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해댔다.
다 잘 사는 세상이 되려면 부탁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진데,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자식타령으로, 원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집에 가니 찢어 진 현수막 차양이 팔랑거리며 인사하고,
급히 가느라 내버려 둔 옥수수대가 원망스러운 듯 나를 지켜 보았다.
다 거두어주고, 메모쪽지 봐가며 짐 챙기다 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버렸다.

끼니는 동자동에서 받은 빵으로 운전 중에 해결했다.






평창 쯤에 이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국 가는 길 인양 평화로웠으나, 양평에 도착하니 비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그 때부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깜빡깜빡 곡예운전 몇 번에 두 손들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잤다.
천지개벽 할 듯한 트럭 크락숀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오후2시가 넘었다.






내부순환도로에 접어 들 무렵,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날 인사동에서 ‘샘터’기자와의 인터뷰가 있는데, 인사동으로 와 줄 수 없냐는 것이다.

기자가 사진 한 장 같이 찍었으면 한다는 데, 싫지만 어쩌겠나?

동자동에 간 후로 나를 드러내는 인터뷰는 대부분 사양해 왔으나, 정영신씨 일은 도와주어야 했다.

한 잡지사는 인터뷰를 계속 거절했더니, 원고료 줄 테니 사진만 좀 사용하자는 곳도 있었다.
시간 뺏는 인터뷰는 사진을 사용해도 원고료도 안 주는데, 모순투성이가 하나 둘이 아니다.





약속장소인 카페 ‘수요일’에는 '샘터' 편집장인 이종원씨와 최순호씨가 정영신씨를 취조하고 있었다.

두 분 다 면식이 있었는데, 사진가 최순호씨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 그런지, 더 낯 익어보였다.

비슷한 질문과 대답을 하도 들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는데,

마지막에 나더러 정영신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다.

대뜸 튀어 나온 말이 ‘장에서 죽어라’고 했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거리에서 이야기 좀 나누라는 포즈를 주문받았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빠진 이를 드러내 놓고 찢어지게 한 번 웃었더니, 그대로 통과되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 최순호씨가 아는 국밥집에 가자고 했다.

하루 종일 빵 한 개로 허기를 메운 터라 '얼시구나' 따라갔다.






식당으로 가다 윤병갑씨를 만났고, 주차장 앞에서는 한정식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얼마나 놀랐는지, 카메라 초점마저 흔들려 있었다.

아마, 한정식선생께 잘 못한게 있는지?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명동 선생님 뵈러 갈 작정인데, 같이 갈 수 없냐?‘고 해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렇찮아도 이명동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바깥출입을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어

한 번 찾아뵈려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 간 ‘남원집’은 헌법제판소 앞에 있었는데, 최순호씨 친구가 운영한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예전의 ‘남원집‘이 떠 올랐다.

어머님 가업을 이어 받은 이 가게는 진한 사골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끊인 국밥 맛이 일품이다.


밥 먹으며, 사진가 최순호씨의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원으로 귀농해, 깨 농사로 깨 쏟아지게 산다는데, 수요일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한단다.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남 달라 보였다.






눈오다 비오다 맑아지는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기분의 기나 긴 하루였다.

바쁜 하루였지만, 즐겁게 잘 마무리했다.  차 때문에 한 잔 밖에 못 마신 술 빼고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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