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 변한 게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 탓이라지만,
사람 없는 인사동은 앙코 없는 찐빵이다 싶다.

30여년 전, 인사동을  찾을 때도 사람이 그리워 나왔고,
사람들로 인해 수많은 추억을 남기게 된 것 아니던가?

생각을 바꾸니 길거리의 관광객들이 다 아는 사람처럼 정다웠다.
어느 한 사람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알고 보니 다 같은 이웃이었다.


지난 4일, 낮술에 취해 거리를 돌며 기분 좋게 사진 찍었다.
낯선 사람을 불러 세우기도 했으나, 아는 분들도 여럿 만났다.

택시 잡을려는 뒷태에 끌려 “아주머니 사진 찍어요”했더니,
뒤돌아보는 분은 김가배시인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 뿐 아니다. 연극배우 이명희, 화가 마기철, 장경호씨에다
판화가 정원철씨와 나무화랑 김진하관장도 만났다.

그날 수많은 행인들과 눈 마주치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말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도 눈웃음치며 아는 체 했다.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난 후, 풍문여고 길로 북촌까지 걸었다.
'무명예술가들의 거리' 프로젝트 욕심에 답사 차 나선 것이다.

익숙한 골목이었지만, 일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니 더 멋졌다.
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이지만, 인사동보다 아늑하고 정겨웠다.
선재미술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까지의 거리 분위기도 좋았다.


힘 있는 자들은 꿈 꾸지 않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도 사람인데, 좋은 일을 왜 마다하겠는가?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처럼, 최선을 다해 밀어붙일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생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대충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중 좋았던 시절은 소년기였다.
물커덩한 미역국이 먹긴 싫었지만, 일단 호주머니가 두둑해 좋았다.

그리고 청년기에는 생일이 싫었다.
본디 성격이 암띠어 나를 주인공으로 이루어지는 자체가 싫었고,
사춘기의 반항심까지 더해, 더러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불만이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챙기지 않았으니 모르고 지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음력 날짜는 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10여전 지금의 아내를 맞고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어찌나 생일을 챙기는지, 귀찮을 지경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술판까지 벌여주는 그런 여자다.

그렇게 길들어 살아왔는데, 어제께 또 생일을 맞은 것이다.
올해 따라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건, 페북 때문이었다.
온 천지에 생일이 알려져 축하메시지와 전화가 빗발쳤다.

한정식선생님과 장경호씨를 만나러 점심때부터 인사동에 나갔다.
아내와 함께 한정식선생을 만나 뵙고, ‘대청마루’에서 거룩한 생일 밥을 먹었다.
돼지갈비에 소주 한 병, 딱 좋았다.
그러나 낮술에 취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술 마시지 않을 때는, 새 색시처럼 내숭 떨다,
한 잔만 들어가면 백팔십도로 바뀌는 지랄 같은 술버릇은
내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뒤늦게 ‘눈빛출판사’ 안미숙씨를 만나 요상한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술도 깰 겸 밖에 나왔다가 거리에서 장경호씨를 만났다.
둘이서 공성훈씨의 전시에도 가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술시가 좀 일렀지만, ‘유목민’으로 들어갔다.
싱싱한 고등어조림에다, 또 한 병 깠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노광래, 유진오씨를 만났으나,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해 노광래씨 차에 실려 얼른 집으로 튀었다.

아! 술이 취해 집에 들어왔으면 자빠져 잘 일이지, 왜 컴퓨터는 켰는지 모르겠다.
숱하게 올라 온 폐북의 축하메시지들 답하느라 낑낑댄 것이다.
독수리 타법으로 또닥거리며, 친근하게 답 한다는 게 너무 오버한 것이다.

이틑 날 반나절을 낑낑거리며 누웠는데, 밤늦게 쓴 댓글이 영 찜찜했다.
그 중 두 분은 폐북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젊은이들 아니던가?
마음에 걸려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과관이었다. 거시기란 말이 여기 저기 박혀 있었다.
얼른 고쳤으나 이미 본 뒤라, 때 늦은 후회였다.

“죽으면 늙어야지, 죽으면 늙어야지”를 되씹으며 반성한다.

이제 늙어감을 축하할 일도 아닌듯 싶다.
그 놈의 생일 때문에 쪽 팔렸으니, 다시 생일을 반납해야겠다.

사진: 한정식,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라져가는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한 김기찬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께서 10주기를 맞는 지난 8월 27일,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란 제목의 책을 펴내며,

중학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김기찬선생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미망인 최경자여사를 비롯하여 사진가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윤한수씨, ‘눈빛’ 편집장 안미숙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등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과 글을 쓴 필자들이 모였다.

안미숙편집장은 인사말에서 “이 책을 지궁스럽게 만들었다”며 잘 쓰지 않는 말부터 끄집어냈다.

이번에 나온 사진 에세이에 김기찬선생께서 ‘지궁스럽다’는 말을 썼는데,

그 뜻이 책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윤한수씨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데가 있다“로 찍혀 나왔다.

정말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두 내외는 김기찬선생을 지극하다 못해 끔찍히도 모셔왔다.

한정식선생께서도 그의 지극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규상씨가 “지난 번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사진집이 재판되었을 때,
고인의 무덤까지 사진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사진에세이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제본소에서 책 나오기를 안절부절 기다리던 이규상씨가, 뒤늦게 책을 안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내 놓은 책들은 금방 구워낸 붕어빵처럼 따끈따끈했다.

10주기에 맞추어 선보이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의 지극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이야 김기찬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싹터 온 인간적 정리도 한 몫 한 듯하다.

그 분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진을 위해 그만큼 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뻔히 안 팔릴 줄 알면서도 기록적 가치만 있으면 무조건 출판하는 그의 뚝심에 모두들 걱정이 대단하지만.

그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많이 사 보는 방법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이지만...

 

 

 

책에 실린 김기찬선생의 생전 모습 / 한정식선생께서 찍었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주옥같은 사진과 글들이 마치 당시의 상황과 애잔한 마음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가 한정식선생과 전민조씨는 평소에 지켜 보았던 작가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적었고,

사진가이자 건축가인 윤한수씨는 선생께서 다녔던 골목 골목을 답사하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다.

사회학교수 김호기씨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 역사학교수 이광수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사진책도서관’대표 최종규씨 등 여러 필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김기찬선생의 작가론과 골목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부산대 사회학 교수 윤일성씨의 ‘도시 빈곤에 대한 두가지 시선’

-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연구-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를 하찮게 여기는, 서양귀신 씬 사진가들은 꼭 읽어야 한다.

“최민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작가이고 김기찬은 ‘따사로운 온기’의 작가이다.”
그 논문에 쓰인 이 한마디가 양대 다큐멘터리 대가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각설하고, 이야기를 다시 추모 만찬장으로 돌린다.
추모사를 겸한 이규상씨의 인사말과 이완교선생의 추억담 등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김기찬선생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토록 골목을 사랑한 분이 어디 있었는가?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음식은 얼마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너무 황송스러웠다.

고맙게도 누가 몰래 밥값을 냈으나  계산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컨데 황규태선생께서 내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이차로 자리를 옮긴 맥주집에는 이규상, 안미숙 내외와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임종업씨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한 잔 마신김에 좀 과음했다.

뒤늦게 '한겨레신문'의 김봉규씨가 온 것으로 기억되나 카메라에 그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 취했나?
아무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기개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시세이선생의 ‘격동한국 50년’사진전에서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개막식이 끝나고 헤어지기 아쉬워, 몇몇 분들이 시세이선생 내외분을 모시고 인근 맥주 집을 찾았다.

 

자리에 함께한 분으로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전민조, 김보섭, 이기명, 이규상, 안미숙, 정영신, 김남진,

안해룡, 이상엽, 김지연, 이상봉, 김승혜, 조성호, 견석기, 남 준, 곽명우씨 등 20명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모자를 돌려 술값을 걷을 작정이었으나,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에 시세이선생께서

먼저 계산하고 일어 나셨다. 가난한 원로사진가의 주머니를 털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이후 대부분 자리를 떠났으나 김보섭, 안해룡, 김남진, 이상엽, 조성호, 견석기씨 등 여러 명이 남아 술을 더 마셨다.

 

그 때 옆자리에 앉은 안해룡씨로 부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관람객이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 사진을 찍었지만, 제목만 없다면 그냥 할머니 사진이지 아무도 위안부사진이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조선족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하기 위해 그 학교에서 배웠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의 삼 세대를 함께

교정에 세워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조선족 학교의 역사가 설명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집 제작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의 나열식 편집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내용끼리 모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후배다.

80년대 후반 ‘사진집단 사실’에서 처음 만났는데, 90년도 나의 ‘전동동588’전시 팜프렛도 그 친구가 만든 것이다.

일찍부터 사진은 물론 편집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지금은 취재에다 다큐영화까지 여러 가지 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각 자의 길을 가느라 만남의 시간이 없었지만, 가끔 만나 그의 조언을 듣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6일 아내의 맨토 한정식선생과 점심약속이 있었다.

 

한 번은 아내를 불러 사주고, 그 다음에는 나까지 사주는 그런 식으로 쭉 해 오셨는데,

매번 얻어먹어 난처했다.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돈까스를 사 주셔서 맛있게 먹었으나,

선생께서는 옆에 사람이 있든 없든 늘 아내를 애인이라고 말씀하신다.

때로는 꺼림직 한 생각도 들었으나, 별 개의치 않는다.

 

옆에 계신 분이 약 올리느라 “조용한 오피스텔에서 봄 사건 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하시지만, 난 이렇게 말한다.

 

“한샘은 간이 작아 줘도 못함니더!”

내 말에 수긍하시는지, 한 선생께서 고개를 끄떡이신다.

 

사진,글/조문호

 

 

 

 

 

‘사진예술’ 발행인 이,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일, 많은 사진가들을 만났다.
행사장인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정식, 육명심, 전민조, 최경자선생과 같이 나왔으나
이내 뿔뿔이 헤어졌다.

육명심선생만 인사동까지 함께 하셨는데, "가까운 곳에서 차 한 잔 하자"며
박대조씨의 'Where do we go now'전이 열리는 ‘나우갤러리’로 올라 가셨다.

그 곳에는 행사장에서 만났던 이순심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박하선, 박종우,
김현숙, 정면주 교수 등이 먼저 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고, 나중에는 곽명우씨도 왔다.

때 만난, 육명심선생의 강의가 발동되었다.
내조를 잘 해주시는 사모님 이야기에서부터 근대사진사까지 거침없었다.
일전에 들었던 말씀이거나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진가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강의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은 무엇보다 설득력이 필요하다며 말씀을 끝내셨다.
사진가보다 사진교육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31일과 4월1일, 이틀 동안 연이어 인사동에 나왔다.  

 

첫 날은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려 술 생각나게 하더니,
이튿날은 화창한 봄볕으로  꽃놀이를 가고 싶었다.

31일 늦은 오후, ‘화신포차’에서 장경호씨를 만났는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신학철형이 차에 받혀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졌다는데,

사고차량은 돌려 보내고 입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형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연세가 있어 쉽게 아물지 않을텐데 걱정스럽다.

 

그리고는 귀가 번쩍 떠이는 제안을 했다.

신학철형을 좌장으로 모시고, 마음 맞는 10여명이 ‘무다헌’에서 정기모임을 갖잖다.
모임 이름은 ‘노세! 노세!’가 어떠냐는 것이다.

요즘 인사동이 예전 같잖다.
거리는 관광객들로 들썩이고, 전시장은 많아도 텅텅 비어있다.
술 한 잔 마음 편히 마실 곳조차 없다.
인사동 마지막 낭만이 될지도 모를 ‘노세!’ 모임에 박수를 보냈다.

이튿날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으로 다시 나왔다.
밥 먹고 차 마시며 많은 말씀을 들었으나 기억에 남는 건, 딱 한가지였다.
혼자 사는 친구 소원이 저녁9시 뉴스를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이란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말씀을 했을까?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라아트'의 '세월호 편지전'에 들렸으나 썰렁했다.

흐르는 세월에 모두들 세월호의 아픔조차  잊었나보다.

 

길거리에서 혼자 사는 이행자 시인도 만났다.


사진,글 / 조문호

 

 

 

 

 

 

 

 

 

 

 

 

 

 

 

 

 

 

 

 

 


 

아내는 한정식선생 생신 날에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작년부터 했다.

 

지난 18일 정오 무렵,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보섭, 이규상, 정영신, 안미숙씨 등

여섯 명이 추억이 많았던 ‘한일관’에 모여  축하 자리를 가졌다.

모두들 선생님의 건강하심을 바라는 축배를 들며, 웃는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친구'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에 주명덕선생과 최재균씨가 있었다.

주명덕선생의 단골집이라 행여 뵙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뵙게 된 것이다.

만나자 마자 “전시하며 왜 연락도 안 했냐?”며 나무라셨다.

 

할 말이 없었다.

장돌뱅이 노릇하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그동안 사진가들과 교류가 뜸했다.

전화번호도 없어 가끔 만나는 몇 몇 분을 제외하고는 알리지 못했는데, 너무 송구스러웠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한 해만에 없어 진 ‘최민식사진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주명덕선생께서 말씀을 꺼내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마추어가 주는 상을 프로가 받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심을 다치게 한

일이라며 작년 수상자 이갑철씨를 나무랐다.

 

프로와 아마추어, 그 차이에 대한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아픈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한일옥

 

 

 

 

 

 

 

 

 

 

 

 

 

 

찡하다. 알듯 모를듯...

 

 

 

 

누가 더 편할까?

 

눈빛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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