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전혀 다르게 접근한 두 가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기록한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한희준의 “플라스틱2”가

인사동 ‘KOTE’ 3층과 '갤러리 라메르' 1층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둘 다 사진전이지만, 전자는 발로 뛴 다큐멘터리사진이고

후자는 머리로 만든 파인아트 사진이라는 것이다.

 

사진적으로 접근한 성남훈의 사진과는 달리 한희준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진과 회화, 설치미술을 넘나드는 혼종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진 개념이 확장되어 구분하는 자체가 고리타분한 생각이겠지만,

엄밀히 말해 한희준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미술의 영역이다.

 

어떤 접근법이 더 바람직한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볼 때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다큐사진가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는

지난 10일부터 오는 29일까지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KOTE 3층에서 열린다.

 

이 전시에는 성남훈의 대표적 사진으로 꼽히는 집시소녀 사진도 있었다.

프랑스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로 일할 당시에 촬영한 사진들로,

20여년에 걸쳐 세계의 수많은 분쟁지역과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유민들의 부유하는 삶을 기록해 왔다.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우즈베기스탄,

인도네시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페루, 발칸반도 등을 찍은 사진에서 일부를 보여준다.

난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한숨과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난민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으며 찍었다.

따뜻한 인간애에 휩싸여 더러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느낌까지 든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찍은 사진 외에도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붉은 섬”도 새로이 선보였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감춰진 4.3사건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찾아 나선 것이다.

1948년 4.3사건 후, 7년 7개월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지만,

유가족과 희생자들이 겪었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남훈의 사진은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사진이라

작품이 주는 울림이나 여운이 만든 사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한희준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가 만든 사진 아닌 이미지는 카메라 없이 만든 ‘플라스틱2’다.

7월1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1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초창기 인화방식인 검 프린트, 시아노타입 프린트에서부터

플라스틱 병에 흙과 에폭시를 혼합하는 등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화지에 인화하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헝겁, 유리, 한지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사회적 접근이라는 점에서는 다큐의 골격을 유지하나

표현방법에서는 기록사진의 객관화를 버리고 주관적 방법을 택한 것이다.

플라스틱은 잘 분해되지 않아 지구의 재앙이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지난 번 보여 준 ‘플라스틱1’에서는 세계 명소에서 나오는 생수병을 찍어,

좋은 생명수를 오염의 근원인 프라스틱 병에 담아 마시는 모순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젠 한걸음 더 나아가 플라스틱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거나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차용하였다.

 

프라스틱 물병의 뒤틀린 형상으로 인체가 허물어지는 경각심을 깨우거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아노타입의 푸른 빛깔은 마치 영혼이 떠도는 것 같다.

죽음을 상기시키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영상이 아니라 완전한 추상화다.

인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유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면에서는 높이 평가되지만,

그 대신 사진의 기록성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렇지만 방법론에 고민하며 표현 방법을 확장해 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대중에게 오염의 심각성을 인지시키는 데는 직설적인 사진에 미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성남훈의 사진에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진에 바친 세월이 성남훈씨에 미치지 못해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노력에 따라서는 한 장의 이미지로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누구처럼 시대적 유행 따라 가느라 오랜 세월 일구어 온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희준의 '플라스틱2'를 보고 나오니, 이층에서 또 다른 단체전이 열린다는 정보를 주었다.

'흑백사진 연구회'라는 동아리의 사진전인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이가 지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같이 사진이 아니라 미술로서의 접근이었다.

자칫 겉 멋에 취해 허송세월할까 걱정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예술이란 유행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라는 점이다.

지도하는 자의 지시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고,

초지일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에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밀려오는 슬픔은 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업도 돈 따라 가는 것 같았다. 예술 작업을 돈 벌려고 하는 것이던가?

제일 경계하야 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망치는 돈인데...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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