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부터 강원, 춘천까지] 전이 추진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한다.

전시는 오는 7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회관에서 열릴 계획이다.

 

이번 기획전은 역사의 뿌리를 찾는 바이칼호 답사세미나가 진행된다.

전시 기획자와 참여 작가들이 참여하는 바이칼호 답사는 13일부터 17일까지다.

작가들에게 짐을 지우진 않지만, 일인당 120만원이나 소요되는 적잖은 경비가 따른다.

전시에 꼭 필요하다면 더한 비용도 들여야겠지만, 과연 상응한 가치가 있는지 걱정스럽다.

 

, 외국 나들이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한가하게 다닐 처지도 아니라 아내가 대신하기로 했으나,

막판에 안 가겠다고 버텨, 하는 수없이 떠밀린 것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내 악업을 바이칼 깊은 호수에 버리고 오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 무엇을 깨치고 얻을지는 숙제다.

일단 이광수교수의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란 책 한권만 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옷은 어떻게 입고 가야하는지, 개인적인 시간은 가질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지방에서 강의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니,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었다.

본지도 오래되었지만, 당분간 볼 기회마저 없을 것 같아, 늦은 시간이지만 나갔다.

 

약속한 오후10시쯤 유목민에 들렸더니 장경호씨는 보이지 않고, 화가 서길헌, 김 구씨와

임경일, 김기영씨 등 몇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뒤늦게 연락이 왔는데, 갈아탈 차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늦어 술은 언제 마실까?’ 걱정되었는데, 좀 있으니 헐레벌떡 달려오며,

없는 돈에 택시비까지 날렸다는 것이다.

 

돈 버는 일에도 저런 열성이 나올까? 싶었다.

술 마시랴! 밖에 나가 담배 피우랴! 바빴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길헌씨에게는 바이칼에 대한 정보를, 장경호씨에게는 이제하선생 작품에 대한 촌평도 들었다.

자정이 지난 데다, 주량마저 초과해 먼저 탈출해야 했다.

몇 푼 되지 않지만, 모처럼 나도 술값 한 번 냈다.

 

잘 놀게나! 바이칼 갔다 와서 만나세


사진, /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좌로부터 김승환, 박정희, 강민, 추은희, 심우성, 장소임, 채현국, 신경림, 김희연, 장경호씨, 앞엔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민선생의 생신기념 오찬회가

지난 3일 인사동 가회에서 있었다.

 

끈질긴 감기로 어렵사리 나갔더니, 인사동은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옷을 너무 두텁게 입고나와 걱정스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돌아보니, 그림 그리는 장경호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재환선생 전시 때문에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깜빡 잊어버린 일을 새겨 주었는데, 시간이 남아 함께 갔다.

 

가회오찬장에는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여럿 나와 계셨다.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 시인, 소설가 김승환,

김희연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요즘 유명세를 타는 채현국선생,

도서출판 답게장소임대표 등 아홉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본래 2월이 생신이었던 강 민선생께서 따뜻한 3월로 바꾸셨다는데,

답게출판사 장소임씨가 매년 생일 오찬회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풍성한 음식에 배 두드려가며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한 때 탄광을 운영하신 채현국선생의 말씀으로는,

그 당시 회사 경리직원이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소임씨라는 것이다.

회사에 강도가 들어 와 금고에 있는 돈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죽을힘을 다해 돈 보따리를 잡고 늘어져 기어이 뺏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감한 소녀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신 채현국선생과 신경림선생은 키가 엇비슷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어느 분이 큰지 여쭈었더니, 신경림선생께서 좀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민 영시인도 키가 작은 분이나, 그중 나아 항상 어깨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 그런데, 두 선생님을 나란히 세워 확인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회입구에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 민, 김승환, 신경림, 장경호씨만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재환선생의 전시 개막식에 가려면 시간이 남아 예당에서 한 잔 더 하실 모양이었다. 

감기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인사동 거리나 쏘다녔으면 좋으련만,

시간만 죽이다 학고제 가야 했다.

 

강 민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사진,/ 조문호












































 





지난 24일 화가 장경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안동서 신학철선생과 한 잔하고 무다헌에 넘어 왔으니 빨리 나오소~”

이미 술에 취해 목소리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어제 마신 술로 주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도 마실일도 걱정인데, 가만 두질 않았다.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인사동에 나갔더니, 일찍부터 술집이 부산했다.

 

신학철선생은 반가워하셨으나, 장경호씨는 김정대씨와 입씨름하느라 아는 척도 안 했다.

금방 한 판 할 것 같은 기세였으나,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행복한 노래쯤으로 생각하고 앉았다.

그다음엔 나한데 시비를 건다. “어찌 알고 왔어요?” 자기가 전화해놓고도 매사 이런 식이다.

술 취하면 부르는 그의 시비성 노래는 익히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좌불안석이다.

나중엔 나죽으면 형이 가마니때기라도 한 장 덮어주소라기에 가마니는 구하기 힘들고

카시미롱 이불은 덮어 줄게라고 말했다.

 

신학철선생께서 처음보는 류제홍박사를 소개했다.

모내기그림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꽤 오랜 교분 같은데, 너무 젊어 보였다.

내가 여자라면, 한 번 꼬셔보고 싶을 정도로 핸섬했다.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너무 다양하게 바쁜 사람이더라.

사회경제를 통솔한다는 뜻도 가진 ‘planner’라는 글자아래 공공공간연구소 공간력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보니 정신이 없었다.

문화학박사, 정책컨설턴트, 전통시장전략가, 도시마을계획가, 청년도시메이커, 세계대회기획사라 적혔는데,

사짜는 아닌 것 같았다. 점잖았고, 이야기도 진솔했다.

오죽하면 술 취한 장경호씨의 거친 말투가 류박사와 연결되면 곧 바로 공손해 지겠는가?

    















옆 자리에는 요즘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않는 주임마담 강고운시인도 보였다.

언제 왔는지, ‘관객모독을 연출한 기국서씨도 있었다. 그도 한 가닥 하는 주당이다.

말은 별 없지만, 거슬리면 여지없다. 한 때 서정춘시인이 그의 헤딩 한 방에 날아가는 것도 보았고,

도예가 한봉림씨를 향해 늑대처럼 튀어 올라 얼굴을 활키는 것도 봤다.


작은 거인 기국서씨가 반가웠지만, 일행이 있어 인사만 나누었다.

뒤늦게는 미술평론하는 김준기씨가 등장해, 술자리 대화가 갈리기도 했다.

장경호씨의 십팔번 뒷동산 아지랑이~”를 뒤로하며 먼저 도망쳤다.
















돌아오다 습관적으로 유목민에 들렸다. 안국역 옆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인장 전활철씨와 박혜영씨는 손님받느라 정신없고,

인사동에서 풍요로움이란 회사를 운영하는 조원희씨가 같은 일가라며 엄청 반가워했다.

김기영씨와 함께 앉았지만, 술을 더 마실 수 없었다.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와 노래하는 신현수씨도 있었고, 나오는 길에 노광래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로서 모두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인사동 술 방랑은 끝났다.

 

씰데없는 술주정 듣느라 고생했슴니더.”

 

사진,/ 조문호










































 


 



‘다리밑 집’은 인사동에서 제일 작은 대폿집입니다.
본래는 콧구멍만 구멍가게였는데, 2년 전부터 술집으로 바뀌었지요.
이름도 없이 그냥 ‘다리밑 집’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낙원상가 악기점으로 올라가는 계단아래 터를 잡았거든요.
테이블이야 2개뿐이지만, 비집고 앉으면 열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요.
감자부침이나 닭똥집 맛이 귀가 막혀, ‘통인’ 김완규씨가 단골이랍니다.

지난 15일 오후 길가다 들렸더니, 김완규씨와 건축가 김동주씨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김동주씨와는 오랜만이라 자리에 눌러 앉았습니다. 

술자리에서 관우 김완규씨의 부친 인제 김정환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업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나니, 친구 분께서 큰 일 난다며 우려 했답니다.
사실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관우는 밤새도록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는데.
부친께서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답니다.

지금은 김완규씨가 아들에게 사업의 일부를 넘겨주었는데,
아들 역시 부전자전이라 술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부친에게 배웠던 “난 아들을 믿는다‘는 말을 하긴 했으나, 걱정이랍니다.

다른 약속 때문에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대번 취해버렸습니다.
먼저 일어났으나 몸이 비틀거렸습니다. 흔들려도 기분은 좋지요.
화가 장경호씨가 기다리는 ‘유목민’으로 가며, 인사동거리를 찍습니다.
지나치다 ‘사동집’ 주인장 송점순씨를 만나 윙크도 보냈고요.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강행복, 이승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이번에 나온 이승철시집 “그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도 받았습니다.

"사랑도 먹어야겠지만, 밥도 먹어야 살지요!"


반갑기는 했으나 이미 취해 더 마실 수가 없는데다,
사진에 거부감을 보이는 어느 여인네 히스테리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문제는 지하철에서 잠들어 한없이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사진, 글 / 조문호





















페이스 북에 들어와, 세상 도는 꼴을 낱낱이 알았다.
모르는게 약이라며 등 돌리고 살았으나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게 정치이기에 정당 입당부터 작정했다.
여지 것 정치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악을 쓰고 말렸으나, 욕심만 없다면 말릴 일은 아니었다.

지난 28일, 예술가들을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리얼리즘의 복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유목민’에서 화가 장경호, 시인 조준영,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김형배씨와
목만 축이고 ‘무다헌’으로 옮겼더니 신학철선생께서 먼저 와 계셨다.
뒤 이어 박불똥, 이인철, 최석태, 박은태, 김정대, 조경연씨가 들어왔다.

신학철 선생과 함께하는 술꾼 모임을 늘 ‘신학철사단’이라 불러왔다.
술 마시는 것도 전투에 속할지 모르지만, 무언가 일을 작당하려는 속내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준영시인을 비롯한 한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정의당원이었다.
술자리에서 정치이야기는 안 하니까, 여지 것 나만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악역 있으면, 좀 맡겨 달라고 신학철선생께 부탁했다.
죽든 살든 끝장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치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하는 거야.
여지 것 잘 하고 있잖아. 그대로 사진이나 찍어..”
하긴 늙은 놈이 힘쓸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그 것 뿐인 것 같았다.

소주, 맥주, 양주 등이 오가는 술잔 속에 모두들 취하기 시작했다.
그 날 소주를 꽤 마셨으나, 왠지 술이 취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라지만, 마음은 온통 초저녁에 본 ‘리얼리즘의 복권’전에 꽂혀 있었다.
자본권력에 농락당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소식도 들려왔다.
이인철씨가 ‘민미협’ 이사장을 맡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김정대씨는 더 큰 갤러리를 만들어 본격적인 화상으로 돌입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을 확장하는 일이야 좋은 일이지만, 감투를 쓰는 것은 그렇게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단체라는 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누군가 맡아야기에, 잘 끌어가길 바라며 축하해 주었다.

음악회에 갔던 아내도 돌아왔는데, 술 시간이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일찍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결국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내와 택시 뒷자리에서 느긋하게 가는 맛도 좋았지만, 스스로를 자성하는 시간도 되었다.
사단장님 말씀처럼 감정을 다스리려면 먼저 마음에 맺힌 분노를 녹여야하기 때문이다.
열 받지 말고, 닥치는 일을 편안하게 대처하자.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술 생각이 간절하던차에, 화가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대하고 돌아 온 아들 만나러 나왔으니,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유목민’은 문이 잠겼다기에 ‘포도나무집’으로 달려갔다.
과메기안주로 술 한 잔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요즘 장경호씨는 전시가 닥쳐 그림도 그려야 하지만,
방 구하러 서울 곳곳을 살피는데, 집구하기가 만만치 않단다.
100호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만, 돈이 적기 때문이다.
의외로 경기도 지역보다 불광동이나 구파발 지역이 저렴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을 구하고 보니, 전세가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지만, 사돈 남 걱정하고 있었다.
없는 놈이 없는 놈 처지 안다더니,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이미 작심한듯해 거절치는 못했지만, 나중에 돌려 줄 생각이다.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고 편치 않은지, 계속 술만 마셨다.
뒤늦게, 식사하러 오신 ‘심우성선생도 만났다.

담배 피우러 골목에 나갔더니, 새로운 밥집 하나가 생겼더라.
상호가 “꽃, 밥에 피다”였다. 이름은 예쁘지만, 식당 이름으론 좀 그렇더라.
맛보다 멋을 더 좋아하는 젊은이를 겨냥한 듯싶었다.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겨 마시다, 인사동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불 빛 탓인지, 인사동이 낯설어 보였다.

마치 이국의 밤거리를 걷는 듯, 허전하고 외로웠다.
에디뜨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더 애절하게 들리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노동개악을 저지하고, 백남기씨 쾌유를 비는 3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열렸다.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소요문화제에는 약 팔천 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소요가 무엇인가? 사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 술렁거림이라고 적고 있다.

경찰이 물대포로 백남기씨를 사경에 빠트린 그 사건에, 소요죄를 적용한다는 데 따른 저항으로 '소요문화제'라 했다.

 

시민들은 지내들 입맛대로 갖다 붙이는 엉터리 법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두들 탬버린, 부부젤라, 막대풍선, 호르라기 등을 가져와 소란을 떨어 제켰다.

심지어는 양은그릇과 숱 가락을 가져 나와 두들기기도 했다.

잘 못된 법을 조롱한 것이다.

 

그리고 복면시위법을 비웃으며 가면을 쓰고 나온 분들도 많았다.

평화롭게 진행된 소요문화제를 사법처리하겠다는 등, 정권은 선량한 국민을 범법자로 내 모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다시 유신독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 살벌한 시국이다.

 

박석운 민중의 힘대표가 단상에 올라 부마사태 소요죄를 적용한 박정희는 심복에 살해됐고,

광주시민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한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며 분노를 터트렸다.

 

이 날의 행사에도 백기환선생과 신학철, 장경호, 하태웅씨 등 여러 명의 지인들이 끝 까지 자리를 지켰다.

비록 그 분들만이 아니지만, 왜 이 추운 날씨에 시멘트 바닥에 앉아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현실이 더 암담했다.

 

행사를 마치고, 청계로를 거쳐 백남기씨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거리행진이 시작되었다.

청계로를 막 지날 무렵, “노동악법 중단하라는 구호에 맞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

청계천을 산책하던 70대 노인이 비아냥거리듯 한 말에, 옆에 있던 할멈이 옆구리를 찌르니 말꼬리를 감추었다.

시국을 잘 못 인식한 저런 분 때문에, 박근혜가 더 기고만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국민을 이렇게 양분시켜 놓고, 놀 것인가?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집에 갈 수가 없어, 인사동 유목민에 들렸다.

시위현장에서 만났던 장경호, 하태웅씨와 술 한 잔 했다.

뒤늦게 배인석, 이승철씨가 합류했고, 채현국선생과 정선의 전상현씨를 만나기도 했다.

술 자리에서, 소모적인 시위에서 벗어나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묵시(默示)"로 가자 

백 명이고 천명이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식음을 전폐하자.

병원으로 실려 가던, 화장터로 실려 가던, 끝 장을 내자.



사진,/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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