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말년을 멋지게 연출하신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께서 떠나셨다.
요즘 거동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생각 못했다.

어제 노광래씨로 부터 부음을 받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은 가야할 길이고, 죽음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인사동 풍류의 마지막 불길이 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인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더니, 오래 된 영정사진이 낯설어 보였다.
입구에서 만난 도예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채현국, 황명걸, 백낙청, 구중관, 이소라,

배평모, 김영복, 공윤희, 노광래, 박진관, 오춘석 씨 등 많은 문상객들이 모여 있었다.

소주를 홀짝이며, 지난날의 선생님을 추억했다.

선생께서는 서울대 나와 기자에서 장관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분이다.
선생말씀에 의하면 은퇴 전까지는 ‘국,영,수’를 충실히 한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은퇴하고 나서야 ‘예체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래서 뒤늦게 아코디온 연주를 배우고, 여 운 화백으로부터 그림도 배웠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인사동을 흘러 다니셨다.
그림 전시도 열고, 후배들 전시에서 멋진 연주를 하며 풍류를 마음껏 즐기신 것이다.
가끔 술이 취해 오버하기도 하셨지만, 난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더라.

언젠가 교통부장관 시절 있었던 얘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고속철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 ‘테제베’로부터 엄청난 로비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상도 못할 액수라 청와대로 들고 갔는데, 김영삼대통령의 대답이 재미있다.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걸 와 내 한데 묻노?”
정신이 버쩍 들어, 열차 값을 그 이상 낮추도록 하고 돌려주었으나,
솔직히 갈등은 좀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돈을 받았다면, 비참한 노후가 되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문상객들이 하나 둘 떠난 자리는 허전했다.
터키에서 교편 잡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와 ‘K옥션’에 나가는 김영복씨가 남아 있었다.
인사동 원조들만 남은 셈인데, 인사동 이야기를 하다 김영복씨가 말을 꺼냈다.

80년대 인사동을 추억할 수 있는 전시와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응답하라 인사동”이란 제목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사진들과 그림, 이야기를 한데 묶어보자는 것이다.


80년대에는 김용복씨가 ‘통문관’에 있을 때인데, 강용대와 김종구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 소리에 ‘실비집’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실비집’은 그 당시 유일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 시절 이야기들을 한 번 모아보자." 셋이서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걸 못 보고 가시는 이계익선생이 원망스러웠다.

멋들어지게 하모니카 불며, 노래 한 곡 뽑으실 텐데...

“선생님 잘 사셨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노래 부르며 편히 승천하십시오.
그 곳에는 천상병선생을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서 아코디온 연주로 멋지게 풍악 한 번 울려야지 예!“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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