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좋은 전시를 보았다.

지난 9일 ‘나무화랑’에서 유화가 장경호씨가 주동이 되어 판을 벌였더라.
원주의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정복수,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씨 등 여섯 명이 뭉쳤는데,
작가의 면면들이 모두 색깔 있는 작가라 기대한 바도 컸다.

전시장엔 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하태웅, 배성일씨도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전시장 한 가운데 서니 마치 고문실에 온 것 같았다.
전시장 구조도 그렇지만, 벽에 걸린 작품들이 하나같이
고통에 따른 상처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서문도 제목도 없이, 그냥 작품으로 말하더라.
잘 못된 정치, 사회구조를 향한 풍자며, 바로 저항이었다.
거창하게 난리법석 떠는 여느 전시와 달리 조용한 울림을 주었다.

이 말없는 항변은 15일까지 이어진다.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인사동 대로에서 30m쯤 내려와 왼쪽 건물. 4층이다.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들려보라.
(전화 02-722-7760)


조문호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 메카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통인가게’의 김완규씨, ‘아라아트’의 김명성씨, ‘아리수’의 김준영씨 등 갤러리를

운영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장경호씨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그 방법을 찾고 있다.

그 중 사진계의 한 사람으로는 단연 ‘갤러리 나우’ 이순심 관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사진을 가리키다, 10년 전 인사동에 ‘나우’라는 이름의 사진전문 갤러리 문을 열었다.

교육자 경험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 리뷰, 전시기획, 전시 카운슬링 등의 갤러리와 관련된 일도 열심이었지만,

사진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척박한 사진 시장을 타개하려 “아트 나우”의 작가 지원 및 교육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 해왔다.

그리고 해외 아트 페어 참여로 한국 작가와 사진을 알리는데 주력해 우리나라 사진시장을 형성, 확장하는데도 기여했다.

그 중 사진 대중화를 위해 벌인 ‘한 방에 한 작품 (ONE ROOM onE PHOTO)’ 캠페인은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며 대중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고, 기업체를 비롯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도

사진작품에 대한 해외의 위상 사례를 들며 사진이 대중화에 다가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오늘 시상되는 제2회 ‘수림사진문화상’의 공로상도 받게 되었다.


지난 13일 거리에서 손님 배웅하는 그녀를 만나, 차 한 잔 하자는 권유에 전시장으로 따라 들었다.

차를 마시며, 사진가들의 중구난방식 작품가 형성과 일반인들의 사진에 대한 오해를 물었더니,

팔리지도 않는 작품에 가격만 높여 놓은 게, 사진 대중화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작가가 아무리 비싸게 불러도 소용없어요. 갤러리에서 거래된 가격이 기준이지요.

그리고 사진은 한 컷으로 수없이 프린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어요.”

그래서 판화처럼 작가마다 프린트 할 수 있는 에디션 넘버가 정해져 있다며 고객을 이해시킨다는 것이다.

 

아트마켓 확장을 위해 꾸준히 판로를 개척하며 인사동 미술시장 대중화 에 이바지하는

이순심관장의 수림사진공로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 있기를 바란다.

 

사진,/ 조문호




 




 

인사동을 짝 사랑해 상사병 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변해가는 풍정에 등 돌리지만,

인사동을 못잊어 안타깝게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다.

고향처럼 정들었던 인사동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낭만의 시절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다.

제주도에 멀쩡한 집 두고, 인사동 여관방 얻어 혼자 지내시다, 이제 요양원에 갇힌 분이다.

매일 유령처럼 인사동을 떠돌며 아리랑 춤을 추셨다.


 

 

 

그 다음은 시인 강 민 선생이다.

두 시간이나 걸리지만, 인사동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시는 분이다.

몸이 불편해도, 만날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며, 인사동을 기웃거리신다

 

 

 

 

음유시인 송상욱선생도 계신다.

인사동에 콧 구멍만한 사무실 하나 얻어놓고, 매일 같이 나오신다.

그 곳에서 시 쓰며, 흘러간 노래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몇 일전 길거리에서 만나 통 사정하셨다.

"조형, 인사동에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봐. 심심해 미치겠어!"

 

 

 

 

인사동에 제일 좋은 갤러리 세워서 망한 김명성시인도 있다.

인사동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 재산을 털어 넣은 사람이다.

정말 의지의 사나이다.

인사동에서 리어커를 끌지라도 떠나지 않겠단다.

 

 

 

 

인사동에서 미술관장 지낸 화가 장경호씨도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인사동에 반기는 사람 하나 없지만, 나오고 싶어 안달이다.

술을 좋아하지만, 인사동 나와서만 마신다.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로 문전박대 당해 "다시 안 나온다"면서도 또 나온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골목 안 천정 낮은 주청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콩알처럼 박혀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기에, 나 역시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이다.

 

 예술과 풍류가 넘실대던 그 때의 인사동은 온데 간데 없고, 얄팍한 상혼만 무성한 인사동. 

천상병, 민병산, 중광을 비롯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자취하나 찾아 볼 수 없는 무정한 인사동.

옛 소문에 밀려드는 관광객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채, 실망감만 안겨주는 인사동. 


인사동 장사꾼들이 모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와

장사꾼 말만 듣는 '종로구청'이 인사동을 망친 공범자다.

 제발, 상사병 난 사람들과, 인사동 살려 낼 방안 좀 연구하라.


 

사진,글 / 조문호

 

 


 

 

 

 

 

 

 

 

 

 

 

 

 

 

 

 

 

 

 

 

세상을 하직 한지 어언10년이 넘은 김진석화백의 유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미망인 강고운시인과, 절친이었던 신학철화백, 그리고 후배 장경호화백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무예가 하태웅씨 등 가까운 몇 명이 조를 맞추어, 흐릿해져 가는 그의 혼 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을 떠난 22일은 윤주영선생의 사진전과 민미협 ‘역사의 거울전’ 개막식이 동시에 열리지만,

오래전부터 나들이 약속을 잡아둔 터라 펑크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고운씨는 인사동 가게 문까지 걸어 닫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데...

사실 김진석화백의 유작전을 위해 작품들을 촬영하려는 이유였으나,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들 끼리 콧바람 한 번 쐴 계략도 한 몫 한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만나 작품들이 보관된 충청도로 떠났다.

현장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훑어보니, 이게 장난 아니었다.
작품들도 많지만 100호나 되는 대작들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만만찮았다,
유리 낀 작품들은 신경이 쓰였으나,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학철선생의 지휘로 하태웅씨가 끌어내면, 강고운씨는 걸레로 닦고,

최석태씨가 규격과 내용을 메모해 두면 장경호씨가 정리하는 식인데, 셔터만 누르는 내가 제일 편했다.

최석태씨는 바닥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판독하느라 아예 땅바닥을 기었고,

장경호씨는 미술관장의 오랜 관록을 보여주듯 안전하게 작품들을 정리해 넣었다.

김진석화백은 80년 국전대상 수상작가로, 홍익대를 거쳐 전북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2월경에,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마음이야

그 그림들이 원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던 것이다.

고인의 유작들은  황토 길을 헤집은 개미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멘트 바닥의 기포 같은 물질적 표상들을

패턴화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러나 창고 깊숙이 들어앉은 먼지 쌓인 작품일수록, 감성이 출렁였다.

학창시절이나 젊을 때의 작품들은 마치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밀려날 것 같았다.

김진석화백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보며 한 작가의 변천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외출하게 될 그의 혼 불이 재조명되어, 많은 영감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댓시간의 작업을 끝마친 후 계곡에 가서 토종 닭을 안주로 몸보신도 했다.

때로는 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앵두나무'에서 '오동동'으로 넘어가는 메들리로 시작하여 '성냥공장'에서 '봄날'까지 모조리 불러재꼈다.

얼마나 꼬라지가 불쌍하게 보였으면 팁으로 신사임당 지폐가 두 장이나 나왔겠는가?

 

술이 객기에 부채질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해 제풀에 꺾여 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계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로 파면감이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0일 이른 시간,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술집에 마주 앉았다.

인사동 '툇마루'로 평론하는 최석태씨와 화가 김진두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차를 간다며 '백련'으로 옮겼더니 배성일씨와 헨리 윤까지 등장했다.

 

헨리 윤은 만난 지가 오래되어 무지 반가웠다. 아마 7-8년은 지난 것 같다.

한 때 인사동 '작은 뜨락'을 들락거리며 밤이슬에 젖은 적이 어저께 같은데...

펀드메니저가 '대한다인회'를 이끄더니 서양화와 사진에도 진출했었다.

이젠 시와 수필에도 등단했다니, 그의 예술에 대한 욕구는 끝이없어 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 술이 취해 깜빡 잠들었는데, 다른집으로 옮기자며 깨웠다.

삼차로 들린 '무다헌'에는 먼저 자리 잡은 주객들로 부산스러웠다.

소주에서 위스키로 격상된 것은 좋았으나, 더 마시기 싫었다.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실 형편은 아니지 않는가.

 

그 날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나 위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장경호씨의 '뒷동산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노래 소리 들어며 퇴각해야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월10일 오후의 번잡한 인사동 풍경이다.

 

더위가 한 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더웠다.

수제 옷핀을 파거나 재활용품을 줏는 할머니들의 모습들이 안스럽다.

관광상품가게를 기웃거리는 외국관광객들에게는 인사동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거리에서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M갤러리'의 '피서전'을 비롯한 여러 전시장을 돌아보았다.

인사동사거리 구석에 버틴 목공소 하나가 급변하는 상권에 밀려나지 않는 것도 참 용타 싶다.

목공소 담벼락에 묻은 삶의 손때에 더 무게가 느껴진다.

 

나와 인사동의 인연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 곳에서 많은 벗들을 만났고, 예술과 낭만을 만났다.

그러나 지금의 인사동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풍정과 인심은 물론, 그 때 그 사람들 조차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더러는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대개 삭막한 인사동 출입을 자재한다.

 

인사동이 도떼기시장이 아니라 전통예술의 메카가 아니던가.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나지만, 그 많은 전시장들은 텅텅 비어있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만의 고품격 문화를 팔수는 없을까?

 

인사동을 관할하는 지자체 관계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사동 소재 갤러리의 큐레이트와 연계해, 주 단위의 인사동 전시 안내는 물론

좋은 전시를 행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전시별로 작업 내용이나 작가 의도를  간략하게 소개해 관심있는 전시로 행인들의 발길을 유도하자. 

이제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미술관에 자주 들려, 어릴 때부터 예술과 친숙해지도록 만들어야한다.

전시작가들도 텅 빈 전시장만 지킬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옛날 영화관 광대처럼 등짐 북을 메고 돌며 전시를 알리는 퍼포먼서는 안될까?

 

그리고 인사동 문화를 통괄하려면, 전문지식이 없는 행정 공무원으로는 안 된다.

문화기획자를 영입하여 각계 문화 인사들과의 연결망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전 구청 문화과에 제안한 적도 있으나 ‘쇠귀에 경 읽기’였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놓치는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인사동 술집으로 흘러다닐 뿐이다.

인사동 터줏대감 격인 강민 시인이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의 한숨 소리만 더 높아 간다.

 

행여 반가운 인사동사람들을 만날까봐 오늘도 하릴없이 인사동 거리를 방황한다.

변해가는 인사동 거리와 오가는 사람들을 기록하지만, 늦은 밤 술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더 즐긴다.

같이 동화되려면,  카메라가 늘 막걸리에 얼룩져야 했다.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취중 분위기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나는 사진으로 인사동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기처럼 기록할 뿐이다.

아무리 디지털카메라에 의한 이미지홍수시대에 산다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는 그 사진들이 보석처럼 빛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역사 아니던가.

 

사진,글 / 조문호

 

 

 

 

 

 

 

 

 

 

 

 

 

 

 

 

 

 

 

 

 

 

 

 

 

 

 

 

평소에는 한참 기다려야 했던 병원이나 식당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피서 떠난 4일의 서울은 평양 거리인양 낮 설었다.

 

장경호씨와의 약속으로 ‘한국현대형상전’이 열리는 ‘팔레드 서울’로 갔다.

그 곳에도 관객은 있을 리 없었다. 단 한 사람 박 건씨를 만났을 뿐이다.

장경호씨는 전시 마무리가 가까워와서야 도록을 만들겠다며 작품촬영을 부탁했다.

전시 못 본 분들을 위한 배려인 듯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인사동 ‘무다헌’으로 넘어왔다.

주인만 앉은 가게에서 메뉴에도 없는 막걸리와 소주를 시켜놓고, 꼬이는 일들을 한탄했다.

술을 마시다 장경호씨가 말을 꺼냈다.

여지 것 공부하고 체득해 온 자신만의 미술론을 하나 둘 발표해야겠단다.

 

그리고 22일에는 신학철, 최석태, 강고운씨와 함께 고 김진석 화백의 생가에 들리기로 약속했다.

강고운시인의 남편이며 신학철화백 친구였던 김진석씨의 유작전을 위한 준비다.

그 핑게로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어울려 여행할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뒤늦게야 이두엽씨를 비롯한 여러 명의 손님들이 들어닥쳤다.

 

장경호씨의 한계 주량 막걸리 두 병을 넘기자 강고운씨가 바짝 긴장한다.

행여 다른 손님들에게 실수할까 걱정하기에 그만 퇴청하자며 꼬드겼다.

괜찮다고 퍼져 앉은 그를 두고 나오기가 편치 않았지만 나와야 했다.

재미없이 혼자 있어야 그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발표하려는 미술론이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면 좋겠다.

 

사진,글 / 조문호

 

 

7월 첫 날  인사동 풍경입니다.
징그럽던 메리야스는 정상을 찾은 것 같으나,

여름 비수기라 그런지 전시장들이 많이 비었습니다.
그 자리를 신바람나게 팡팡 돌릴 수 없을까요?

 

통인에서 오픈한 Mutlu Baskaya도예전에서 한 잔 하고,

'무다헌'에서 장경호, 정희성선생과 어울려 좀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신학철선생을 만났으나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취해 집에 들어가는 장경호씨의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 놈의 성질머리 좀 죽여야하는데...

뒷 손에 잡은, 그 우유팩이 안 스럽습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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