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은 김준권, 박불똥씨의 전시가 동시에 열려
옛 민주투사들이 인사동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전시가 파한 후 ‘부산식당’에서 ‘영빈가든’을 거쳐
밤늦게는 ‘소담’에서 ‘무다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무다헌’에는 박불똥씨를 비롯하여 이인철, 장경호, 최석태, 김정대, 
이명지씨 등 10여명의 장정들이 마지막고지를 사수하고 있었고,
안쪽에는 신경림, 정희성, 신학철선생 등 고참들이 죽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학철사령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 안돼요”
참모총장격인 신경림선생께 삿대질로 힐책을 한 것이다.
유리한 고지만 쫓는 우유부단함에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다.

그 수행관 격인 김태서장교가 신학철사령관을 나무라자
장경호장교가 김태서를 제지했다.
결국 참모총장께서 퇴청하여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자칫했으면 12,12사태가 아니라 12,10사태가 날 뻔했다.

사진,글/ 조문호

 

 

 

 




인사동이 싸구려 기념품이나 파는 관광지로 변했지만,
밤이 되면 골목 구석구석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낭자하다.
인사동의 멋이 살아남은 곳이란 고즈넉한 골목 길 뿐이다.

지난 3일, 인사동 ‘유목민’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무세중, 무나미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상현, 유진오,
장경호, 정영신, 전인경, 전인미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김상현씨의 애끓는 노래 소리를 안주삼아 기분 좋게 마셨다.
옛 생각나는 많은 노래를 들었지만, 마음에 남는 노래가 있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에 상처 잊을 길 없네..“
바로 ‘검은 상처의 부루스’다.
사라져가는 인사동 낭만을 노래한 것 같았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0월1일은 조준영시인과 약속해 인사동가는 날이다.
‘유목민’에는 조준영씨와 그림 그리는 이청운, 장경호씨, 연극하는 이명희씨 등
반가운 분들이 모여 술판을 벌여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술맛 나게 했는지,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아마 선선한 바람에 날리는 계절 탓도 컷을 것이다.
뭔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따스한 정이 그리운게 가을이 아니던가.

조준영씨가 마련한 술상은 푸짐했다.
봄 쭈꾸미 가을낙지라지만, 가을 백숙도 괜찮았다.

기분 좋아도 옆 손님 눈치 보여 노래 한 곡 못 한 것 보니, 나도 늦게사 철들었나보다.
여배우의 수다에 “이명희 없는 술자리는 앙코 없는 찐빵”이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술 취해, 사진 찍으러 인사동 한 바퀴 돌아 오니, 이미 파장이다.
이차는 술집 대신 팥빙수 집으로 갔다.
술 깨는데 도움이 되고 맛은 있지만, 술꾼 체면이 말이 아니다.

열심히 말하는 이청운씨 말은 솔직히 삼분지 일 정도밖에 못 알아듣는다.
말이 어눌하기도 하지만 내 귀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심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청운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술이 취하면 누구에게나 말을 건다.
버스를 기다리는 아낙에게 “오케이”를 연발하기도 하고
버스에 올라서는 옆 자리의 젊은이에게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녹번동에 내려 이집 저집 술집들을 찾아다녔으나,
두 늙은이의 술 취한 행색에 모두들 손을 내 저었다.
어느 꼬치 집에 간신히 입성하여 아내를 불러냈다.

두 사람의 작별사진 한 장 찍으라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구본주예술상 시상식에서 서양화가 신학철선생을 만났다.

 

그 상찬 뒤풀이에 어울려 기분 좋게 마셨건만, 뭔가 아쉬워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것이다.

신학철선생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장경호, 시인 김정환, 송경동, ‘문학동네’ 강병선씨가 함께 갔으나

술집 문이 잠겨, 끝내고 들어간 주모 강고운 시인을 다시 불러내야만 했다.

 

인사동에서 담배 피며 술 마실 수 있는 집이 '유목민'과 '무다헌'외는 없는데다,

그 것도 숨은 듯 조용한 집이 바로 ‘무다헌’이기 때문이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김정환씨를 비롯한 나그네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빠져 나가고,

신학철선생과 장경호씨만 남아 쓰잘데 없는 이바구에 맥주를 말아먹었다.
문득 “오늘 강적에게 걸렸구나!”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미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의 바람난 처녀가 비내리는 호남선 타는 노래를 돌려 부르며 낄낄거렸으니 술 맛은 났다.

밤이 깊어가자 장경호씨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고, 주모는 설거지하느라 자리를 비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신학철선생의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띄엄띄엄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 속에서 신학철선생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보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된장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들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한 모습처럼, 소박하게 살아가는 의리의 사나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가까이 지켜보니 마음이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으로는 오랜 세월 병석에 누운 아내 걱정과 밖으로는 세월호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비롯하여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우울하다 못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동안 아내 간병하느라 그림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으나, 이젠 요양원에 입원해 좀 여유가 생겼단다.

그러나 남의 아픈 일을 그냥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세월호 집회를 비롯한 각종 투쟁현장에 쫓아다니느라 더 바쁘다.

이제 칠순을 넘긴 노장이지만, 야전사령관 같은 투사로서의 기질은 여전하다. 

 

여지껏 몸으로 부딪히는 일 외에도 ‘민예총’ 살림이나 남을 돕는 모금에도 먼저 나섰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 보다 남의 아픔에 못 견디는 태생적 천성 때문이리라.
도울 일만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그림을 그려서는 그 그림을 팔아 도움을 주는 식인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맞는 말일게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면 가정주부나 다름없다.

긴 세월 떠맡아 온 살림이긴 하지만 여인네들 빰 칠 정도로 세심하고, 음식 맛을 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단다.

그가 끓인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인사동까지 번지는듯 하다.

 

젠가 신학철선생 댁을 급습하여 된장국을 안주로 소주한 잔 하고 싶다.

 

사진,글 / 조문호

 

 

 

 

 




광복절이었던 지난 8월15일,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나갔다.

배성일씨와 약속한 ‘툇마루’에는 그의 친구 양재순씨와 함께 있었다.
신소재로 개발된 알미늄이나 강판 프라스틱을 활용한 프레임의 한국 특판권을 가지고 있다는

양재순씨가 사진에 대한 자문을 얻겠다고 불러 낸 모양이었다.

그이가 가져온 샘플을 사진전시에 활용한다면 전시가 끝난 후 보관이 용이하고, 야외전시나 이동 전시 때도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용에 따라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 있는데다 대중적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울리는 기획사진전을 열어  액자가게들을 공략하는 방법론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리고 인사동이나 정선시장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커플들을 멋지게 찍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란 말도 했다.

“이 프레임 안에 갇히면 평생 헤어질 수 없다”는 식의 퍼포먼스를 벌여 즉석에서 만들어 주면

그 홍보효과로 프렌차이즈 업소가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등의 의견을 나누며 술을 마시는데,

난데없이 신학철씨와 장경호씨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서울시청 앞으로 “세월호 특별법” 데모하러가다 막걸리생각이 나 잠시 들렸다는 것이다.

자리를 옮겨 마시다 보니 술은 좀 취했지만, ‘세월호 특별법’ 관철을 작당한다는데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운 날씨에 술마저 취해 서울시청까지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럴때는 사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면 좀 나아진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것 저 것 주변을 살피며 걷는데, 같이 가던 장경호씨가 힘 덜어 준다며 카메라를 받아 간 것이다.

갑자기 긴장감이 풀어지니 온 세상이 뽀얗게 보였다.
난생 처음 당한 일이라,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당시 시청 앞에서 강민선생님을 만날 때는 완전히 혼이 빠진 상태라 인사를 드렸는지 모르겠다.

다시 카메라를 돌려받아 사진에 몰두하니 정신이 좀 차려졌다.  술 취해 사진 찍는 버릇이 중독된 모양이었다.

인사동 술자리에서도 술이 취하면 카메라 들고 인사동거리를 한 바퀴 돌아 오면 나아지고 그랬다.

아마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벌써 죽은 목숨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날은 벗들과 작당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인디프레스 서울 개관 기념전


신학철_장경호_박불똥_구본주展

2014_0801 ▶ 2014_0820

 

 

구본주_6월_브론즈_40×50×30cm_1995
 

초대일시_2014_08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울 종로구 자하문로24길 58(효자동 40-1번지)

www.indipress.kr

 

광화문은 찬반의 논란 속에서 다시 부활하여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근에 거대한 첨단의 빌딩들이 즐비하여도 그 존재감에 전혀 필적되지 못하는 이유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외감을 온전히 품어 역사적 관조와 품격의 상징이 된 내력이 서려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광화문을 꺾어 들어가는 효자동 기슭에 인디프레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순정한 인간정신의 응집으로 탄생한 예술작품의 가치정립에 일조하는 인디프레스가 되길 기원해 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정대

 

 

구본주_칼춤_브론즈_25×15×15cm_1994

 

구본주_위험한 상상_철, 목조_45×60×30cm

 

신학철_한국근대사-관동대지진_캔버스에 유채_122×200cm_2012

 

 

Vol.20140802h | 인디프레스 서울 개관 기념展

 

 

 

 

 

 

 

 


강민선생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출간을 축하하는 모임이 지난 7월14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노마드’에서 있었다. 그동안 시인들과의 출판기념회 자리는 몇 차례 있었지만, 인사동유목민 가족들을 위해 특별히 제안했으나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불참한 분이 더러 있었다.

 

함께 하신 분은 강 민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행자, 전활철, 장경호, 조경석, 정영신, 이청운, 이승철, 조준영, 김상현, 김명성, 노광래, 공윤희, 권두현, 이명희씨가 참석하여 시집출간을 축하하며 시낭송의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이계익선생과 소설가 이단원씨를 노광래씨가 모시고 와 뜻 깊은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용태형’ 추모식이 열렸던 장례식장은 전국각지의 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밤늦도록 문상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술상을 지키는 술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새벽 무렵에는 대부분 곯아떨어지거나 사라졌는데, 신학철사단을 비롯한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 정인숙씨 등 10여명만 남아 콩팔칠팔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소주와 막걸리는 떨어졌고, 조금 남은 캔 맥주로 간신히 연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나도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아마 한 시간 쯤 지난 것 같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함께 마시던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씨는 보이지 않았고, 호상 김태서씨와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씨만 남아 장례식장을 사수하고 있었다.
신학철사단의 용맹은 진작 인사동에서 보아왔던 터지만, 술이면 술, 작품이면 작품, 논쟁이면 논쟁, 그들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일이지만 노제, 화장터, 유골을 안치한 봉원사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이탈하지 않고, 술로 자리를 지킨 그들이다.
늦게는 그들과 헤어져, 김명성씨 일행따라 봉원사 이인섭선생 댁에 술 한 잔 더 하러 갔다. 그런데 돌아오던 길목의 어느 주막에서 술 마시며 논쟁하는 신학철씨와 류연복씨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깡다구였다.

이제 민중미술 판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용태형’이 세상을 떠나, 그 역할을 대신할 인물이 절실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예전과는 다르지만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을 분이 바로 신학철선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철선생을 제2대 민중미술의 야전사령관으로 모시는 취임 축하연을 인사동에서 한번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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