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20대 때 문학 동호회 활동을 했다. 우리는 하고한 날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고 내 얘기를 들어달라, 네 얘기도 들어보자며 소리소리 지르는 야만인들이었다. 지금은 나를 뺀 모두가 등단해 엄연한 소설가들이 됐는데, 다들 어떤 이야기를 구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야기’는 학자들한테도 화두다. 최근 나온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사회인문학의 길>을 보면, 동아시아건 서구건 역사학은 모두 어떤 이야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이야기는 공문서 같은 일차 사료를 놓고 일반화된 법칙을 추구하는 ‘과학적 역사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야기’가 다시 귀환한 건 1970년대를 지나면서다. 인간 개개인의 경험과 관련된 역사가 다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삶의 이야기는 낮잡아 볼 것이 아니라, 인류의 뿌리 깊은 지적 자산이다.
이야기는 공감과 소통을 낳아 더 큰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 증언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를 연구해온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한국학과 안연선 교수도 ‘이야기의 힘’을 강조한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의 구술이야말로 거짓으로 얼룩진 일본군 공문서보다 훨씬 강력한 사료가 된다고 했다. 특히 그들이 다른 나라의 전시 성폭력 생존자를 지지하는 연대활동을 높이 샀다. 타자를 그냥 두지 않고 자신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다.
소설 또한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동물농장>,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려고 했다. 그 자신 또한 현란한 문장이나 장식적 형용사에 현혹되곤 했지만,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돼 있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영국 명문 기숙학교 이튼을 졸업한 오웰은 출셋길을 버린 채 빈민가와 탄광촌에서 그들의 이야기로 글을 썼고, 파시즘 발흥기에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으로 정치적 입장을 정리했다. 그런 경험, 곰삭은 사유가 ‘고전’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오해하거나 속기 쉽다. 생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으며, 더구나 다수가 쥐꼬리만한 돈을 벌려고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는 시대 아닌가.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복잡한 사안에 대해 공부하고 숙고한 뒤 판단할 테지만, 지금은 남의 이야기를 깊이 들어줄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사회가 온힘을 다해 꼭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참사 뒤 유가족들이 전하는 이야기다. 영문도 모른 채 배 안에서 숨져간 아이들의 부모들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하고, 집회 무대에 섰다. 사고를 잊지 말아달라며 두 아버지는 40일 동안 800㎞를 걷는 도보순례 길에 올랐다. 기억은 투쟁이기 때문이다.
잊어버리고, 회피하고, 내버려두는 것은 권력에 대한 무언의 동의다. 권력자들의 이야기만 귀담아듣고, 만만한 사람들의 복잡한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 자체가 지금 이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 전개하는 ‘야망의 세월’ 앞에 어떤 특정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가 바로 ‘야만의 세월’이다. 소설이든 학술서든 어떤 책이든, 웅숭깊은 이야기는 삶의 간단치 않은 줄거리와 맥락을 누구한테서 듣고 어떻게 옮길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깊이 생각하며 살고 싶다.

한겨레 /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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