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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