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하직 한지 어언10년이 넘은 김진석화백의 유작을 찾아 길을 떠났다.
미망인 강고운시인과, 절친이었던 신학철화백, 그리고 후배 장경호화백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무예가 하태웅씨 등 가까운 몇 명이 조를 맞추어, 흐릿해져 가는 그의 혼 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을 떠난 22일은 윤주영선생의 사진전과 민미협 ‘역사의 거울전’ 개막식이 동시에 열리지만,

오래전부터 나들이 약속을 잡아둔 터라 펑크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강고운씨는 인사동 가게 문까지 걸어 닫고 떠날 준비를 한다는데...

사실 김진석화백의 유작전을 위해 작품들을 촬영하려는 이유였으나,
패밀리를 자처하는 이들 끼리 콧바람 한 번 쐴 계략도 한 몫 한 것이다.
아침 일곱시에 만나 작품들이 보관된 충청도로 떠났다.

현장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훑어보니, 이게 장난 아니었다.
작품들도 많지만 100호나 되는 대작들을 밖으로 끌어내기가 만만찮았다,
유리 낀 작품들은 신경이 쓰였으나,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학철선생의 지휘로 하태웅씨가 끌어내면, 강고운씨는 걸레로 닦고,

최석태씨가 규격과 내용을 메모해 두면 장경호씨가 정리하는 식인데, 셔터만 누르는 내가 제일 편했다.

최석태씨는 바닥에 쓰인 깨알 같은 글씨를 판독하느라 아예 땅바닥을 기었고,

장경호씨는 미술관장의 오랜 관록을 보여주듯 안전하게 작품들을 정리해 넣었다.

김진석화백은 80년 국전대상 수상작가로, 홍익대를 거쳐 전북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2월경에,

환갑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마음이야

그 그림들이 원수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세월 창고에서 먼지만 쌓였던 것이다.

고인의 유작들은  황토 길을 헤집은 개미집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멘트 바닥의 기포 같은 물질적 표상들을

패턴화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유가 엿보였다.

그러나 창고 깊숙이 들어앉은 먼지 쌓인 작품일수록, 감성이 출렁였다.

학창시절이나 젊을 때의 작품들은 마치 물감이 캔버스 밖으로 밀려날 것 같았다.

김진석화백의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보며 한 작가의 변천 과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외출하게 될 그의 혼 불이 재조명되어, 많은 영감을 주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댓시간의 작업을 끝마친 후 계곡에 가서 토종 닭을 안주로 몸보신도 했다.

때로는 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자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았다.

'앵두나무'에서 '오동동'으로 넘어가는 메들리로 시작하여 '성냥공장'에서 '봄날'까지 모조리 불러재꼈다.

얼마나 꼬라지가 불쌍하게 보였으면 팁으로 신사임당 지폐가 두 장이나 나왔겠는가?

 

술이 객기에 부채질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과해 제풀에 꺾여 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계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로 파면감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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